소크라테스의 ‘무지의 지혜’와 ‘예언자’의 역할
소크라테스는 어떤 의미에서 철학사에 나오는 최초의 예언자라고 할 수 있다. 예언자라는 말은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예언자(豫言者)’ 즉 ‘미래의 어떤 일을 미리 보고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며, 다른 하나는 ‘예언자(預言者)’ 즉 ‘신의 말(명령)을 받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의미는 서로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 구약성경의 예언서에 나오는 대게의 예언자들은 유대민족이 올바른 길을 가지 않고 세속적으로 타락하였을 때 회개하고 올바른 길을 가지 않는다면 미래에 큰 재앙이 올 것이라고 예언하였는데, 여기에는 ‘신의 말을 받아 전달하는 전달자’의 역할과 ‘미래의 일(재앙)을 미리 알고 경고하는 사람’의 역할이 동시에 있기 때문이다. 만일 소크라테스가 예언자였다고 한다면, 전자의 의미가 강하다. 소크라테스는 델포이 사원에서 “자신이 아테네의 도시국가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 즉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신탁을 받았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법정에 서게 된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변호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여기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아테네에서 가장 현명한 이유’를 ‘자신은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당대의 현명하다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현명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변호하였다.
그렇다면 여기서 ‘무지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무지하다는 것은 무식하다는 것과는 다르다. ‘무식(無識)하다’는 것은 ‘지식이 없다’는 것이며, ‘무지(無智)하다’는 것은 지혜가 없다는 말이다. 즉 소크라테스는 당시의 현명하다는 사람들이 사실은 많은 지식을 소유하고는 있지만, 지혜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 당시에 현명하다는 사람들이란 곧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며 이들은 곧 당시에 많은 지식을 가지고 변호사 역할을 담당하였던 궤변론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궤변론자들의 문제는 그들은 일종의 절대적인 상대주의자들로서 ‘절대적으로 옳거나 그르거나 하는 진리는 없으며’ 혹은 ‘모두가 존중하여야 할 어떤 보편적인 법칙이나 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는 사실에 있다. 이러한 절대적 상대주의의 관점에서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진리인가가 문제가 아니라 남들을 설득시킬 수 있는 사변적인 기술만이 문제가 된다. 소위 말해서 말만 잘하면 되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지식을 총 동원하여 논쟁에서 상대방을 굴복시키면 자신들의 주장이 곧 진리가 된다고 생각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법정에서 송사가 이루어지면, 이들은 스스로 변호사로 자처하여 나서고, 오직 자신에게 많은 돈을 지불한 고객이 승리하도록 온갖 궤변을 늘어놓은 사람들이다. 소크라테스는 바로 이러한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궤변론자들을 향해서 ‘너 자신을 알라!’라고 외친 예언자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소크라테스는 “당신들은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당신들은 전혀 지혜롭지 않은 사람들 입니다!”라고 외친 것이다. 오직 궤변론자들만이 궤변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병백히 분명한 사실이나 상식적인 진리를 부정하게 될 때 궤변을 늘어놓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진리와 진실이 오직 말하는 기술에 달려 있는 궤변론자가 판을 치던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이러한 세상에서는 오직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진리를 소유한 사람이 되고, 권력이나 돈이 많은 사람이 항상 진리가 되는 세상일 것이다. 그래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항상 억울한 일을 당할 수밖에 없는 부조리한 세상일 것이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궤변론자들 이전에 자연철학자들 중에서 헤라클레이토스는 “사람들은 한 번 빠진 강물에 두 번 빠질 수 없다”는 말로써 ‘만물유전’사상을 설파하였다. 그리고 어떤 궤변론자는 이 진리를 근거로 “자신의 의뢰인이 3개월 전에 살인을 한 사람이라고 해도 현재에는 형벌을 가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변화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3개월 전의 그와 현재의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궤변에는 하나의 동일한 오류가 포함되어 있듯이 이러한 주장에는 하나의 오류가 포함되어 있다. 그 오류는 ‘모든 것이 변한다’는 이 명제에서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의 구별을 없애 버린 것이다. 가령 정원에 있는 장미나무는 매일 조금씩 변화를 가지겠지만, 그 장미나무가 아무리 변화해도 ‘장미나무’라는 ‘자기 정체성’ 혹은 ‘자기 동일성’은 변하지 않는다. 살인을 한 사람이 회개를 하고 의로운 이로 변화했다고 해도 그의 이름이 지칭하는 ‘그 자신’은 변하지 않는다. 궤변론자의 오류는 ‘범주 혼동의 오류’라고 할 수가 있다. 즉 궤변론자의 주장에서는 ‘변화할 수 있는 것의 범주’와 ‘변화할 수 없는 것의 범주’를 구분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변화할 수 있는 범주에 포함시켜 버리는 것이다. 후일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이를 ‘실체와 속성’ 혹은 ‘형상과 질료’라는 개념으로 두 개의 범주를 구분하였다.
철학자로서의 소크라테스의 사명은 예언자의 역할을 한다는 것에 있었다. 한 사회가 진실과 진리를 외면하고 거짓으로 치닫고 있을 때, 그 사회의 미래가 암울하다는 것은 상식적인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밝은 미래를 생각하며, 당대의 모든 현명하다는 사람들을 향해서 당신들이 ‘지혜롭지 않다’는 것을 자각하라고 말했던 것이다. 성경에서도 예언자란 ‘자신의 고향에서는 환영받지 못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당연한 말일 것이다. 누구도 자신의 고향사람이나 자신의 민족을 향해서 당신들이 오류에 빠져있고 올바른 길을 가지 않으면 화를 당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좋아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사형을 선고 받았을 때조차도, 죽음을 회피하지 않고 자신의 죽음으로서 아테네 시민들을 자각하게 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이것이 양심을 따르는 철학자의 숭고한 의무라고 생각하였다.
중세이후로 종교가 예언자의 역할을 대신하고 더 이상 소크라테스와 같이 철학자가 예언자의 역할을 한 시대는 오지 않았다. 어쩌면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 독배를 마셔야 했던 ‘토마스 모어’나 자신의 학자로서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화형을 감수 했던 ‘부루노’와 같은 사람들이 소크라테스에 비견할 만한 사람들이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이들은 모두 정치적인 책략의 희생자들이었지 소크라테스와 같은 신탁을 받은 예언자는 아니었다. 오늘날은 현대사회는 지식이 넘쳐나는 사회이다. 그런데 키르케고르는 “모든 인간은 아담이 범했던 것과 동일한 죄를 범한다”라고 말한바 있다. 무지란 곧 인간성이 가진 근원적인 속성이기에 오늘날 여전히 사회는 진실과 진리를 외면하고 무지에 빠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여전히 소크라테스와 같은 예언자적인 철학자들을 많이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더 이상 예언자가 나올 수 없는 사회란, 만일 그 사회가 이상사회가 아니라면, 참으로 불행한 사회일 것이기 때문이다.

매원의 봄기운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