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아벨성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다윗에게 반란을 일으킨 세바는 아벨성으로 피합니다.
그런 그를 군대장관 요압이 그를 쫓습니다.
요압은 세바를 제거하기위해 전략을 세우게 됩니다.
토성을 쌓아 성벽을 무너트리는 것이었습니다.
무고한 백성들을 염두에 두지 않은 방법이었습니다.
그때에 한 지혜로운 여인의 중재로 요압의 과도한 진압이 중단되고 세바의 반란도 끝납니다.
반란이 진압되면서 다윗은 왕의 지위를 회복하고 관료체제를 정비합니다.
1. 요압의 분노와 지혜로운 여인(14~22절)
1) 세바가 아벨과 벧마아가와 베림에 이르니 그를 따릅니다(14절)
“[14] 세바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 두루 다녀서 아벨과 벧마아가와 베림 온 땅에 이르니 그 무리도 다 모여 그를 따르더라”
아벨과 벧마아가 여기서 ‘``과 ’는 생략되어야만 합니다.
왕상15:20, 왕하15:29에는 ‘아벨벧마아가’로 나오며, 이것은 베마아가 부근의 ‘목장’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납달리 지파의 최북단에 있는 요새 이므로 팔레스타인 지방의 북동쪽 끝에 위치합니다.
그 무리는 ‘세바’를 따르는 ‘비그리 사람들’을 뜻합니다.
2) 요압과 그의 추종자들이 토성을 쌓습니다(15절)
“[15] 이에 그들이 벧마아가 아벨로 가서 세바를 에우고 그 성읍을 향한 지역 언덕 위에 토성을 쌓고 요압과 함께 한 모든 백성이 성벽을 쳐서 헐고자 하더니”
“그들이” 요압과 그의 추종자들을 말합니다.
요압은 세바가 있는 곳으로 가서 그 성을 포위했습니다.
해자로 번역된 히브리어 ‘헬’은 적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한 방어시설, 즉 성벽을 지키기 위해 성 바깥 둘레에 구축한 낮은 벽이나 토성을 가리킵니다.
토성을 쌓고 이것은 성을 공격하는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성을 포위한 군대는 성벽 높이, 혹은 그보다 더 높게 흙을 쌓아 그 위에서 활을 쏘아 공격하거나, 성에 다리를 놓아 성에 들어가 공격을 합니다.
3) 반역자 세바가 도피한"아벨"성에는 지혜로운 한 여인이 있어서 그 성읍 사람들을 구원하였습니다(16-21절).
(1) 대중을 구원하기 위한 담력.
그는 군인들에게 자기의 말을 들어 보라고 솔선적으로 간곡한 대화를 청하였습니다(16-17).
“[16] 그 성읍에서 지혜로운 여인 한 사람이 외쳐 이르되 들을지어다 들을지어다 청하건대 너희는 요압에게 이르기를 이리로 가까이 오라 내가 네게 말하려 하노라 한다 하라[17] 요압이 그 여인에게 가까이 가니 여인이 이르되 당신이 요압이니이까 하니 대답하되 그러하다 하니라 여인이 그에게 이르되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 하니 대답하되 내가 들으리라 하니라”
이것은 대중을 살리려는 사랑으로 불타서 담대해진 그의 지혜입니다.
요일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2) 역사적인 성을 진멸하려고 침공(侵攻)함에 대한 항거.
그는 "아벨"성이 옛적부터 "어미 같은 성"인데 무슨 이유로 이 성을 멸하려 하는지 알기를 원하였고, 또 평화로운 해결 방법을 찾지 않는 정부군의 과오를 지적하였습니다(18-19).
“[18] 여인이 말하여 이르되 옛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아벨에게 가서 물을 것이라 하고 그 일을 끝내었나이다”
아벨에 가서 물을 것이라 이것은 이스라엘의 속담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예로부터 ‘아벨’에 ‘지혜로운 자’가 많았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또한 이 말에서는 성을 함락시키기 전에 성의 거민에게 평화를 요구하는지를 물어서 그들이 응답하면 성을 치지 말라는 율법을 (신20:10~14) 연상할 수 있습니다.
즉 아벨벧마아가의 성을 치기 전에 성의 거주자들에게 평화를 원하는지 싸움을 원하는 지를 물어 보지 않은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19] 나는 이스라엘의 화평하고 충성된 자 중 하나이거늘 당신이 이스라엘 가운데 어머니 같은 성을 멸하고자 하시는도다 어찌하여 당신이 여호와의 기업을 삼키고자 하시나이까 하니”
나는 이스라엘의 화평하고 충성된 자 중 하나이거늘. 사람들이 평화를 원한다는 것을 대변하는 말입니다.
어미 같은 성 그 지방에서 중요한 성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신20:10에 계시된 말씀대로 실행하지 않았으므로 받은 책망입니다. 거기 말하기를, "네가 어떤 성읍으로 나아가서 치려 할 때에 그 성에 먼저 평화를 선언하라"고 하였습니다.
*신20:10 “네가 어떤 성읍으로 나아가서 치려 할 때에는 그 성읍에 먼저 화평을 선언하라”
(3) 요압의 대답입니다(20~21a절)
“[20] 요압이 대답하여 이르되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다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다 삼키거나 멸하거나 하려 함이 아니니[21] 그 일이 그러한 것이 아니니라 에브라임 산지 사람 비그리의 아들 그의 이름을 세바라 하는 자가 손을 들어 왕 다윗을 대적하였나니 너희가 그만 내주면 내가 이 성벽에서 떠나가리라 하니라”
(4) 불의한 한 사람을 제거함으로 온 성을 무사하게 한 지혜.
그가 그 성읍 사람들을 설득시켜 세바를 죽이도록 하였습니다(21 하반-22 상반).
“[21b] 여인이 요압에게 이르되 그의 머리를 성벽에서 당신에게 내어던지리이다 하고[22] 이에 여인이 그의 지혜를 가지고 모든 백성에게 나아가매 그들이 비그리의 아들 세바의 머리를 베어 요압에게 던진지라 이에 요압이 나팔을 불매 무리가 흩어져 성읍에서 물러나 각기 장막으로 돌아가고 요압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왕에게 나아가니라”
대중을 설득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가 말할 때에는 그 시점에는 붙잡아야 할 의(義)가 무엇인지 밝혔을 것이다.
그는 그 때에 다윗을 배반하는 일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악이라고 확신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이 확신은 그가 요압의 청구에 대하여 사전(事前)에 즉응(卽應)한 것으로 알려집니다(21절 하반).
최후에는 의(義)가 이긴다고 확신하는 자는 담대해지는 법이고,
마음이 평안해져서 마땅히 행할 일을 바로 제시하게 됩니다.
잠 14:1a "지혜로운 여인"은 집을 세운다고 하였습니다.
무리가 흩어져 장막으로 돌아가고. ‘무리’는 ‘아마사’가 유다 지파 중에서 뽑은 정병들입니다.
이들은 상비군이 아니므로 유사시에 참전하였으나 전쟁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2. 다윗의 관료들(23~26절)
“[23] 요압은 이스라엘 온 군대의 지휘관이 되고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는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의 지휘관이 되고[24] 아도람은 감역관이 되고 아힐룻의 아들 여호사밧은 사관이 되고[25] 스와는 서기관이 되고 사독과 아비아달은 제사장이 되고[26] 야일 사람 이라는 다윗의 대신이 되니라”
1) 요압은 이스라엘 온 군대이 지휘관이 되고 브나야는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의 지휘관됩니다(23절).
“[23] 요압은 이스라엘 온 군대의 지휘관이 되고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는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의 지휘관이 되고”
브나야는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의 장관이 되고.
일설에 "그렛 사람"은 블레셋 남쪽에서 온 용사들이고,
"블렛 사람"은 블레셋에서 귀화한 용사들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브나야"는 이들을 다스리는 장관이 되었습니다.
요압은 군대의 장관이 되고. ‘아마사’로 인해 군대장관의 직책을 박탈당할 뻔했던 요압은 성공적으로 세바의 반란을 진압했고, ‘아마사’가 죽었으므로 다시 군대장관이 됩니다.
브나야는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입니다(23:20, 대상27:5).
그는 솔로몬이 기혼에서 기름부음을 받을 때 그를 호위했으며(왕상1:38),
솔로몬이 왕이 되었을 때 요압 대신 군대장관이 됩니다(왕상2:35).
그랫사람과 블렛 사람. 그랫 사람은 팔레스타인 남부 블레셋 지역 주위에 거주한 족속이었고, 블렛 사람은 바로 이 웃에 거주한 족속이었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로 귀화해 다윗의 경호병이 되었습니다(8:18, 대상18:17).
2) 다윗의 관료들입니다(24~26절)
“[24] 아도람은 감역관이 되고 아힐룻의 아들 여호사밧은 사관이 되고[25] 스와는 서기관이 되고 사독과 아비아달은 제사장이 되고[26] 야일 사람 이라는 다윗의 대신이 되니라”
(1) 아도람은 감역관이 되고 아힐룻의 아들 여호사밧은 사관이 되고(24절)
“[24] 아도람은 감역관이 되고 아힐룻의 아들 여호사밧은 사관이 되고”
아도니람은 감역관이 되고.
‘감역관’이란 직책은 다윗의 통치 후반기에 새로 만들어졌습니다.
감역관이 맡은 임무는 속국으로부터 공물을 모으거나 공공사업을 위해 강제적으로 부역을 맡기는 데 있었던 듯하며, 이러한 일은 백성들의 완성을 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도니람은 르호보암의 치세 때 돌에 맞아 죽게 됩니다(왕상12:18).
(2) 스와는 서기관이 되고 사독과 아비아달은 제사장이 되고 야일 사람 이라는 다윗의 대신이 되니라(25,26절)
야일 사람 이라는 유다 산지에 있는 ‘얏딜’에 살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수15:48, 삼상30:27).
다윗의 대신 이전에는 다윗의 아들들이 이 직책을 맏았었습니다(8:18).
암론과 압살롬이 죽고 가족간의 분쟁이 일자, 다윗은 정책을 바꾸어 ‘이라’를 대신으로 삼았습니다.
"사관"은 수상(首相), 혹은 총리(總理)를 의미하고,
"서기관"은 기록하는 관리를 의미하고,
"대신"은 비서관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요압과 여인의 대조를 통해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1) 우리 자신이 면목상 그리스도인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요압은 다윗의 근대장관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전에도 다윗의 명을 듣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는 자신의 뜻만 앞세웁니다.
세바 한 명을 잡기위해 성벽 전체를 무너트리려 한 것입니다.
자신의 계획을 신뢰하고 원하는것을 곧 바로 시행하는 모습입니다.
결국 요압에게 면목상 왕은 다윗이었지만 실제 왕은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섬기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반면 지혜로운 여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을 무너트닐 수 없는 이유를 19절의 한 단오로 설명합니다.
“여호와의 기업”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함브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여의 생각과 삶의 주인은 철저히 하나님 이셨습니다.
우리 역시 요압과 같은 모습으로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내가 보기에 옳은 대로 결정하고 사는 것입니다.
원하는 대로 살고 보이는 대로 추구한다면 오늘 말씀 앞에서 돌아봐야 합니다.
혹시 내가 쌓고 있는 토성은 무엇입니까?
주님이 다스리지 않는 것은 어디 입니까?
바로 그 토성을 무너트리고 주님의 재가를 받아 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의 주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2) 또 하나는 분노를 확대 재생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바를 행한 요압의 분노는 커져서 결국 다른 사람에게 까지 전달 됩니다.
세바를 향한 분노가 아벨성 전첼를 행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 여인은 유순한 말로 분노를 멈춥니다.
분노가 아벨성을 향한 것이 아니라 세바 개인을 향한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그리고 지혜로운 방법으로 성을 구원해 내게 됩니다.
분노는 확대 재생산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화내게 하는 대상과 사건을 넘어 커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분노는 마땅히 통제 죄어야만 합니다.
잠15:1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유순한 말, 온유한 말이 바로 분노를 멈추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말 역시 분노를 일으키는 갈등언어가 아니라,
평화를 선언하는 샬롬의 언어가 되어야 만 합니다.
화를 내어야 하는 상황에서 성령의 통제를 받으십시오.
감정을 따라 말하지 말고 성령을 따라 말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아벨성에 임한 샬롬이 동일하게 가정과 삶의 현장 가운데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유다와 이스라엘의 오랜 갈등이 세바의 반란으로 불거집니다(14,15절).
이에 요압은 그들의 은신처인 성벽을 부수어 반란 세력을 진압하려 합니다.
요압의 서슬퍼런 칼날에 반란군만 아니라 아벨 성의 백성들도 서늘해집니다.
그간 보여준 요압의 잔혹한 행적으로 보면 백성의 안전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나라를 구한다는 명분 아래 무고한 백성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에게 ‘생명과 평화’보다 더 가치 있는 명분은 없습니다.
2) 한 여인이 지혜로운 중재로 요압의 무자비한 계획이 중단됩니다(16~20절).
반란을 진압하고 다윗 왕국에 평화를 가져온 것은 요압의 칼이 아니라 여인의 지혜입니다.
여인의 입술에는 화평과 충성, 여호와의 기업이 언급되며(19절),
성난 요압의 마음을 차츰 아울게 합니다.
북이스라엘의 입장을 대변하는 듯한 여인의 슬기로운 입술이 결국 사태를 진정시킵니다.
이렇듯 지혜란, 길가의 높은 곳과 성문 곁에 서서 선하고 의로운 것을 말할 줄 아는 의기(意氣) 이며, 사람의 마음을 깨우는 진리의 외침입니다.
내게도 궁창의 빛처럼 사자들을 옳은 길로 인도하고(단12:3), 악에 저항하며 의를 세우는 지혜가 있습니까?
3) 다윗과 함께 나눌 “분깃이 없다”(1절)며 열한 지파를 부추겨 반란을 주동하던 세바는 허망한 최후를 맞고, 추종하던 무리도 다 흩어집니다(21,22절).
반면 ‘여호와이 기업’(분깃)을 기억하고 소중이 여긴 여인은 아벨 성을 구원합니다.
우리도 세상문화 속에 살면서 자족하는 법을 잊은 채 자주 비교하고 불평하며, 이미 가진 것도 누리지 못하면서 없는 것만 탐하는 건 아닌지 돌아봅시다.
4) 다윗은 왕권 회복 이후 행정을 재정비하여 국가 발전을 도모합니다(23~26절).
용병 지휘관 브나야와 감독관 아도람을 두어 군대장관 요압의 ‘권력 독점’을 막고, 제사장에는 사독과 아비아달을 두어 서로 견제하여 ‘권력 부패’를 막습니다.
다윗은 권력과 힘의 균형이 한쪽으로 쏠리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려고 관료체제를 대칭적으로 구성합니다.
압살롬과 세바의 반역으로 홍역을 치룬 다윗의 지혜로눈 모습이 엿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