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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수필의 가능성과 새로운 모델 찾기
—윤석희의 “바람이어라”에 부쳐서
1. 들어가면서
수필은 작가의 삶 속에서 소재를 선택하여 그것을 해석해내는 작업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수필 작품 속에는 작가가 들어 있다. 문학의 어느 장르보다도 작가가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장르가 수필이다. 이런 까닭에 수필은 다양한 내용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고, 그 그릇의 모양 또한 각양각색이다.
아무리 각양각색이라 해도 많은 작품이 생산되다 보니, 독자의 눈에는 그게 그거로 인식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더구나 수필가와 독자의 체험 세계가 비슷하다보니 독자의 눈에 새로운 인상을 심어주기에는 여간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요즈음처럼 많은 수필가들이 활동하는 현실에서는 자신의 삶 속에서 소재를 찾더라도 일반적인 것이면 빛을 보기 어렵다. 그것은 소재에 국한한 이야기가 아니라 해석의 차별화에 더 비중을 둔다. 남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나만의 해석일 때에 독자들의 반응은 더 크다.
이런 시대적 요구에 따라 많은 수필가들이 소재 발굴 작업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그 작업이 소재에 머물러서는 아니 됨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좋은 소재가 빛을 보기 위해서는 작가의 혼이 담긴 해석이 따라야 한다. 그것이 작가의 안목이고, 작가의 존재이유이다. 특별한 소재에서는 오히려 보편적인 주제를 찾고, 일상적인 소재에서는 아주 색다른 주제를 발굴하라 하면 지나친 나만의 억설일까.
색다른 소재 찾기는 미지의 세계를 헤매게도 한다. 그래서 요즈음 기행수필이 부쩍 많이 나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도 여러 사람이 시도하다 보니, 여행에서 얻어진 소재도 색다름의 인식에서 열외 되는 처지가 되었다. 기행수필의 소재가 국내여행에서 해외여행으로 변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이제는 해외여행도 식상한 소재가 되고 말았다. 누구나 미지의 세계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 해외 나들이를 한두 차례는 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독자들의 정보 수용 수단이 용이해지면서 여행에 의존한 소재주의에 머문 글에는 시간을 할애하는 독자가 없다는 사실이 수필가들에게 또 하나의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전에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궁금증으로 여행에서 얻은 정보나 지식 정도를 알게 된 것으로도 만족하던 독자들이 이제는 그런 범주에서 빠져나와 그 작가만의 특별한 해석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기존의 기행문처럼 여정에 따른 안이한 기술은 독자에게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이제는 체험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새로운 형태의 기행수필을 독자들은 요구한다. 이러한 문제 해결의 답이 윤석희의 수필집 “바람이어라”에는 고스란히 들어 있다.
2. 기행문과 기행수필의 경계선
흔히 말할 때 기행문의 형식에 따라 적은 수필을 기행수필이라고 한다. 막연히 그렇겠지 하면서도 기행문과 기행수필의 경계선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답하기가 그리 수월하지 않다. 더러는 기행문 자체가 기행수필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으니 더욱 어려워진다. 수필의 영역 확대가 이루어지고, 그 영역의 경계가 확연해지면서 기존의 기행문을 가지고 수필의 명함을 걸기에는 무리라는 생각이다. 이제는 기행문과 기행수필의 경계를 확실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기행문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지식과 정보와 작가의 체험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기행문은 여행의 일정에 따라 순간순간 얻은 정보와 지식을 나열해가기에 장소의 이동에 따라 다른 방향의 목적을 추구하기도 한다. 장소마다 여행자가 보고 들은 것이 다를 수 있고, 느끼는 감정 또한 방향이 바뀔 수 있다. 그러한 것들을 비교적 상세히 기술해 간 것이 기행문이다. 그러기에 독자는 종종 식상한 백과사전적 자료의 열거 앞에 실망을 하게 된다. 알고자 하는 정보가 널려 있는 정보화시대에서 이런 글로 감동받을 독자는 없을 것이다. 똑같은 것을 보더라도 다른 사람과 차별화된 작가의 혼으로 해석해낸 글이 아니면 독자들은 시간을 할애하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기행수필은 다르다. 기행문처럼 백과사전적인 기술이 아니다. 하나의 주제를 설정하고 그것에서 이탈하여서는 아니 된다.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바가 많아도 하나의 수필에서는 주제를 향한 것으로만 짜여져야 한다. 독자의 단순한 미감을 충족시키기 위해 잡다하게 동원되는 소재로는 수필이라 할 수 없다. 기행문에서는 자신의 체험을 기술하지만, 기행수필은 단순한 체험의 기술이 아니라 그 소재에 대한 작가의 의미화 작업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작가가 독자에게 전달하려는 주제에 연관된 소재를 주제를 향한 처지에서 의미화하고 형상화해야 하는 것이 기행수필이다. 그러기에 기행문처럼 여행에서 얻은 지식과 정보를 모두 담으려하다가는 기행수필은 실패하고 만다.
당연히 기행문과 기행수필의 기술태도도 다르다. 기행문의 경우는 대개가 여행하면서 얻은 자료나 메모를 십분 활용하려 한다. 왜냐하면 미지의 세계에 대한 정보와 지식을 전달하려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하여,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 해도, 기행수필은 그러한 자료나 메모에 의존하지는 않는다. 작가가 느꼈던 것을 쓰기에 그의 기억 속에서 소재를 사냥하여 가슴 속에 남아 있는 감흥을 끄집어내어 적는다. 즉, 작가만의 가슴으로 느낀 독창적인 것을 어레미로 걸러내어 써야 하는 것이 수필이다.
어레미에 걸린 것들은 작가의 시각에 따라 확연히 다르다. 예리한 시각을 가진 작가는 그만큼 능력이 있는 작가다. 자신이 사냥한 소재를 해석하여 독자에게 내보임에 있어서 독창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작가 나름의 사상과 철학을 가지고 삶을 영위해 왔다는 증거이다. 이러한 것이 없이 문학적으로 성공하기는 어렵다.
앞에서도 기술했듯이 이제는 색다른 소재를 발굴하기 위해 해외여행을 한다는 것은 식상한 일이 된 듯하다. 그 동안 해외여행에서 얻은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여정에 따라 백과사전적으로 기술하던 기행문은 독자들에게 치기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이제는 아니다. 해외여행이 보편화되어, 여행에서 얻은 소재는 일상에서 얻은 소재와 별반 다름이 없게 되었다. 요즈음의 기행수필은 굳이 일정에 따라 기술해나갈 일도 아니고, 일상생활에서 얻어진 소재처럼 주제와 연관된 것만을 취택하여 작가의 삶을 녹여 해석해낸 것만을 사용하면 된다.
3. 윤석희의 “바람이어라”에 나타난 작품세계
윤석희의 “바람이어라”는 해외여행에서 얻어진 것들이다. 한 번의 여행으로 얻은 것이 아니고, 십수 년에 걸친 반복된 여행에서 얻어진 것들이다. 그러다보니 일정을 무시할 수밖에 없다. 작가에게 있어서 여행은 그의 삶 자체이기에 일상에 지나지 않는다. 윤석희는 여행 중에 만난 소재에서 자신의 삶을 풀어냄으로써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의 병을 치유하고, 그러면서 기쁨과 즐거움을 챙기는 작가이다.
아무데라도 낯선 곳으로 움직여보고 싶습니다. 대굴대굴 굴러 보고 싶습니다. 돌덩이를 헤쳐 펴 보이고 싶습니다. 가끔은 거세게 울부짖고 싶지요. 태풍이 몰아쳐야 되겠습니다. 혼자서는 단단한 벽을 부수고 나설 재간이 없답니다. 바람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비까지 몰아쳐도 마다하지 않을 겁니다. 아니 그가 나를 산산조각 내어 가루로 부수어도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그리하면 그의 숨결 좇아 가볍게 날아갈 수도 있을 테니까요. 정녕 그를 따라 먼 길을 나서렵니다. 종내 나도 바람이고 싶으니까요. -<바람이어라>에서
윤석희는 여행지에서 얻은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려는 작가가 결코 아니다. 해외 무대는 희귀한 글의 소재를 구하는 곳이 아니라, 그에게는 단순한 삶의 현장일 뿐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접하게 되는 소재처럼 그것을 해석해내고 의미를 부여한다. 그의 글마다 작가의 사상과 철학이 배어 나오는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수필집의 표제가 된 “바람이어라”에서 보면, 작가 윤석희에 있어서 바람이 부는 세상은 작가가 늘 갈망하는 꿈의 세계임을 알 수 있다. 그리움과 열정, 회한과 분노를 가득 품은 세계이기에 그는 몸부림치며 달려가는 것이다. 그가 이같이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우리의 현실이 너무도 무미하고 단조로우며 황량하고 권태롭기 때문이다. 그냥 머물러 있으면 땅 속으로 빠져들 것 같은 절망감 속에서 찾아낸 삶의 한 방편이 여행인 것이다. 그리하여 작가는 종내에는 자유로운 바람이기를 소망한다.
3. 1. 자아 드러내기
작가 윤석희에 있어서 여행은 일상이다. 외국인 여행객의 시각으로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다. 늘 보아온 것을 보듯이 대한다. 그에게서는 새로움에 대한 흥분이나 감격이 전혀 없다. 어떤 사물이나 사건을 대하든 냉정한 눈으로 자신을 성찰하고 반추해낸다. 그리하여 그 것 안에서 자신을 찾아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이는 철저한 자아실현의 몸부림이다.
그는 모래바람 속을 말 타고 달려가지만 나는 맨몸으로 굴러보고 싶다. 거추장스럽다. 옷을 벗어 던진다. 셔츠가, 바지가 바람에 날린다. 마지막 속곳까지 내어준다. 알몸이다. 맨살로 모래바닥을 뒹군다. 시원의 이브가 된다. 지평선을 향해 노을 속으로 깊숙이 뒹굴어 간다. 어떤 장애도 구속도 존재치 않는 천상의 낙원으로.……<중략>……비로소 알게 되었다. 옹색하게 융통 없이 고집이나 부리고 서있는 바위가 갑갑하다는 것을. 참고 견디며 응어리진 바위보다 바람 따라 순응하며 가볍게 사는 모래가 한결 낫다는 것을. 미미하고 하잘것없어 남의 눈에 띄지도 않지만 모래는 제 몸 전부도 날릴 수 있는 열정으로 산다는 것을. 넓은 세상으로 자유롭게 넘나드는 모래가 더 부럽다. 바람결 따라 살랑이며 춤추듯 사는 분방함이 편안해 보인다. 나도 단단한 덩어리가 아닌 새털같이 가벼운 모래로 살고 싶다. -<모래처럼>에서
작가 윤석희의 작품세계를 쉽게 알 수 있도록 해 주는 대목이다. 늘 현실이라는 카테고리에 묶여 살면서 인간은 그 울타리를 벗어나고자 하는 갈망을 추구한다. 늘 옥죄는 현실이라는 옷을 벗어던지고 알몸이 되어 모래 위를 뒹구는 작가는 그래도 대단한 용기의 소유자다. 자신의 몸에 칭칭 감겨 있는 현실의 옷가지를 벗어 던지고 알몸으로 뒹구는 모습은 어찌 보면 통쾌하기까지 하다. 내 몸에 겹겹이 감겨 있는 장애와 구속을 벗어던졌으니 당연히 천상의 낙원이다. 그리하여 작가는 갑갑한 바위이기를 거부하고, 새털같이 가벼운 모래가 되어 제 한 몸 바람에 날려 본질적 자유를 추구하는 열정으로 살기를 갈망한다.
생각해보니 우리 부부의 삶도 이와 다를 게 없다. 농촌에서 사는 것으로 남편을 크게 돕고 있다고 내세웠지만 실은 의존만 하고 있다. 의지하면서 나약하게 살았다. 그를 잡고 매달려 있는 것이다. 남편의 삶에 덤으로 얹혀살고 있다. 부는 바람은 그가 정면에 맞고 그의 등 뒤에서 피하고 있다. 모든 결정도 책임도 떠맡기고 주어진 일만 하면서 편하게 산 것이다. 가계부 한번 적어본 적이 없다. 그저 시장 볼 돈 한두 푼만 주머니에 있으면 걱정 없이 살았다. 고지서 한 장 챙기는 것까지 남편 몫이었다. 그가 섬세하고 치밀할 것도 아니다. 매사에 덤벙거리며 셈도 어두운 사람이다. 그런데도 생활의 모든 역할을 도맡아 왔다. 크게 바라지 않고 욕심 내지 않는 것만으로 그를 편하게 해 준다 여겼다. 그게 아니었다. 현실감이 전혀 없고 수동적인 자세로 따라 가고 있으니 끌고 가는 사람이 얼마나 고달팠을까. 대출금 통장뿐인 세상을 꾸려가기가 혼자서 벅차지 않았겠는가.
삶의 여로는 스스로 조종해야 함을 문득 절감한다. 자신이 지고 가야 할 짐을 남편에게 얹고 살아온 것이 안쓰럽다. 짐을 부리고 난 안락함 속에 찬바람이 스며든다. 주체가 내가 아닌 삶 속에서 느끼는 고독함이다. -<자전거 타기>에서
인간은 제 스스로 홀로서기를 하며 삶을 영위해간다. 그러나 작가 윤석희는 인도 여행에서 홀로서기를 못하는 무능한 존재임을 확인한다. 모두가 자전거를 타고 관광하는데 본인만이 남편의 자전거에 짐처럼 실려 이동하며, 지금까지의 삶이 모두 남편에 의지해서 이루어졌음을 자각한다. 자전거 타기라는 아주 소소한 소재에 작가는 지금까지의 자신의 삶을 투영한다. 이렇게 짧은 글에 자신의 생을 모두 실어내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흔히 기행수필이 벗어나기 어려운 여정에서의 일탈을 과감히 실행한 글이다. 여행에서 얻어진 글이지만, 결코 기행문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작가 윤석희는 기행문의 느슨함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삶을 직시하는 데에 게으르지 않다. 어디에 있든 자신의 존재에 대한 물음에 집요하다. 늘 사물이나 사건을 바라봄에도 자신의 존재 파악에 고민하고 있다. 자신이 무능하고 오로지 남편에 의지해 살아왔음을 알았기에 그는 무릎에 피멍이 들더라도 홀로서기를 위한 자전거 타기를 시도하게 된다. 작가 윤석희도 인간의 본질적 자유를 추구하지만, 현실의 삶에서는 자유롭지 못함을 보여준다. 그 대표적인 예가 <후회>이다.
아무 것도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워 보자고 단행했던 모험이 가시 되어 꾹꾹 가슴을 찌르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어머님이 여전히 권위와 힘의 상징으로 군림하셨다면 내 마음이 과연 이랬을까.
“어머님, 용렬함이 부끄럽습니다.”
아무리 소리쳐도 대답이 없다. 어머님의 눈물인 듯 황량한 안데스에 거센 비가 쏟아진다.
-<후회>에서
작가 윤석희가 얼마나 인간의 본질적 자유를 추구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 자유를 찾아 가정주부가 추석 명절을 눈앞에 두고 해외여행을 시도한다. 명절 준비의 대사를 앞에 두고 과감한 탈출을 시도한 것이다. 여기서의 해외여행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다. 우리의 가정 현실에 대한 반란이다. 삶의 모든 규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작가의 계략이 숨어 있다. 아무리 인간의 본질적 자유를 추구한다 해도 현실에서는 시어머님을 모시고 있는 며느리이자 가정주부이다. 집안 대사를 유예시키고 해외 나들이를 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런 구애됨이 없이 자유를 누리기 위해 떠나 왔지만, 시어머님에 대한 죄스러움은 가시가 되어 가슴을 찌른다. 그렇게 자유를 향한 여행을 하여도 자신의 현실은 전혀 늦춰짐이 없이 따라다닌다.
윤석희에 있어서 자유에 대한 갈망은 단순한 일회성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근원적인 자아실현의 행위이기에 끝없이 자행된다. 그러면서 그 때마다 자신의 존재에 고민하고 있다. 세상 어느 곳에 가든 접하게 되는 물상들 앞에서 자아의 존재를 찾아 나선다.
“우유니의 선인장”에서 그려준 선인장 꽃 한 송이. 비옥한 땅을 다 놔두고 모래만이 깔려 있는 사막에서 피워낸 꽃 한 송이. 그 꽃을 바라보며 작가는 자신의 처지를 떠올린다. 가정이라고 하는 안락한 둥지를 마다하고 이 허허로운 모래벌판을 찾아온 자신. ‘너는 뭐 하러 이 먼 곳까지 온 거야.’ 결국 선인장의 물음에서 작가가 늘 자신의 존재에 대해 무수히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세상 어디에 가 있던 자신의 존재를 알기 위해 고민하는 작가. 그러기에 작가가 시도하는 여행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다. 본질적 자유를 찾아 나선 여행이고, 자기 자신의 존재를 음미하기 위해 떠나는 고난의 여행인 것이다.
3. 2. 자아 풀어내기
어느 사람이든 자신이 처한 현실은 무거운 짐일 수밖에 없다. 그 현실의 카테고리가 묶어놓은 육신과 정신을 풀어내려면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냥 눈을 감고 참아내기에는 너무도 혹독하다. 그 규제는 더 큰 규제로 다가서고 종내에는 바윗돌처럼 무겁게 어깨를 짓누르게 된다. 이것은 반드시 풀어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무너지고 말 것이다.
자신이 처한 가정의 현실이 침낭 속 같이 갑갑하고 답답하여 박차버리고 싶을 때가 어디 한두 번이겠는가. 침낭의 지퍼를 내리면 얼굴도 내밀고 세상 밖으로 나올 수도 있겠지만, 순간 차갑게 밀어닥칠 세상바람에 포기하고 마는 것이다.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스스로 포기하고 가정이란 침낭 속의 안락함에 안주해 버리고 마는 것이 바로 가정주부이다.
이런 현실을 윤석희는 견디기 어려워한다. 그래서 그냥 주저앉기를 거부하고 도전을 시도한다. 도전의 슬기에서 얻은 결과가 여행이다.
물론 처음부터 짐이 적은 것은 아니었다. 여행을 시작한 초기에는 이것저것 많이도 지고 다녔다. 어깨가 축 늘어졌다. 무게에 짓눌려서 조금만 걸어도 맥이 빠지고 지쳐 버렸다. 너무 힘들어서 하나씩 버리기로 작정했다. 무거움을 내려놓고 창공을 나는 새가 되고자 현지인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다. 다 필요한 것 같고 없으면 견디지 못할 것 같았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받는 이들보다 덜어내는 내가 오히려 즐거웠다. 짐이 가벼워지니 몸이 한결 편해졌다. 마음 또한 넉넉해지고 풍요로워졌다. 물질에 얽매이지 않는 진정한 자유가 거기에 있었다. 삶의 근원에 가까워지고 천착하는 여유까지 생겼다. -<배낭 하나의 무게로>에서
자신에게 지워진 현실의 짐은 어찌 보면 욕심에서 생긴 것일 수도 있다. 나 아니면 아니 되고, 그 물건이 없으면 결코 살 수 없을 것 같아 오금이 저리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실은 그것이 아니라도 탈 없이 잘 돌아간다. 꼭 필요하여 배낭에 넣었지만, 여행을 하면서 그것의 무게가 힘에 겨워 하나씩 덜어내게 된다. 그래도 지장이 없음을 터득한다.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음으로써 자신의 삶이 가벼워지고 편안해진다. 비록 여행의 배낭이 화두이지만, 이것은 인간의 삶에 대한 지적이다. 욕심을 내려놓고, 남에게 베풀 때에 훨씬 행복하다. 받는 마음보다 주는 마음이 훨씬 즐거운 것이 이런 소이이다. 편안한 삶을 위해서는 늘 덜어내고, 나누어주는 삶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내줌으로써 풍요로워지고 자유로운 삶이 보장된다.
흐르는 물처럼 살라고 나도 남도 권한다. 허나 도를 닦듯 자신을 억누르고 살아야만 하나. 순탄함도 평온함도 권태로운 일상의 연속이지 않은가. 분기가 솟구칠 때 문을 여닫으면 소리가 요란하지 않던가. 그릇이라도 닦을라치면 더러 박살도 난다. 힘이 들어가 알 수 없는 에너지가 실린 까닭이다. 마성이 발동하여 강력한 힘이 솟아나기 때문이다. 화가 치밀 때도 마찬가지다. 열이 올라 얼굴은 붉어지고 상상할 수 없던 무서운 힘이 내부에선 분출한다. 이 힘과 에너지를 무한대로 받는다면 삶은 충만해지지 않을까.
구십도 수직으로 강하하는 절망을 맞아도 좋다. 바닥으로 떨어져 수렁을 헤어나지 못해도 게이지 않는다. 내 전부를 다해서 소진해 버리는 열정으로 산다면 빛나는 삶의 광휘를 거기서 맛볼 것 같다. -<이과수에서>에서
‘배낭 하나의 무게로’에서 욕심의 응어리를 풀어내는 방법은 무조건 내려놓는 것이었지만, 이번에는 좀 다르다. 조금은 거역할 줄 아는 용기를 주문하고 있다.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고 유유히 흐르던 물도 느닷없이 절벽을 만나 구십도 수직으로 강하할 때는 엄청난 힘으로 거역한다. 순탄함과 평온함과 권태로움으로 참고 인내하던 것이 한순간 분노하면 물은 아래로만 흐른다는 진리마저도 거역하고 솟구쳐 오른다. 이 때의 에너지를 받는다면 삶은 충만해질 것이라는 판단이다. 더러는 바닥으로 떨어지고 힘을 다 소진해 버린다 해도 그런 열정으로 살기를 요구한다. 작가 윤석희에 있어서 자신을 풀어내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얼마나 갔을까. 물끄러미 쳐다보던 이놈이 내 발목을 덥석 물어 버렸다. 기겁해서 들판이 들썩이도록 고함을 쳤다. 가슴이 쿵쾅거린다. 공포심으로 의식이 하얗게 바랜다. 되돌아가서 사무실에 알리고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생각이 스친다. 서로의 믿음은 무너져 버리고 두려움만 커져 갔다. 고함 소리에 놀란 녀석이 숲 속으로 뛰어 들어가 나를 보고 있다. 슬픈 눈빛이다. 호소하고 있다. 소통하려고 용기를 낸 거라고. 누렁이가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향한다. 울부짖는다. 처절한 절규다. 오싹하다. 오늘도 함께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거듭되는 기대와 절망은 외로움만 더할 뿐이란 것도. -<들개>에서
삶의 응어리는 예기치 않은 경우에 생기기도 한다. 이 쪽에서 전혀 대비하고 있지 않는데, 뒤통수를 치는 경우도 있다. 믿었던 사람이 더 악랄하게 나를 속이고 구렁에 빠뜨리는 경우도 있다. 이 때에 느껴야 하는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가슴 속 깊이 아픈 상처로 남는다. 법으로 처리하고 그만한 대가를 치르도록 하자고 마음의 칼을 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숨을 고르고 다시 생각해 보면 그의 행동이 나에 대한 사랑의 표시이고, 배려일 경우도 있다. 그 아픔과 서운함에서 자신을 풀어내려면 먼저 상대를 이해해야 한다. 그러면 그가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다. 들개가 작가를 물어버린 동작이 처절하게 소통을 원한 몸짓이었음을 알면서 그 행위를 이해하게 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사람을 향한 기대와 절망은 오직 외로움만 더할 뿐이라며 들개를 이해한다.
이와 같이 자신의 응어리 풀어내기는, 참고 인내하며 이불을 뒤집어쓰는 행위와 저항하듯 현실을 거부해버리는 이불 차버리기 행위의 적절한 조율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러한 지혜는 일생을 두고 겨우 터득하는 슬기이다. 어차피 인간은 이불 속에 얼굴을 묻고 실컷 눈물을 쏟아내고 고함을 지르면서 견뎌내기도 하지만, 더러는 세상에 대고 거역하며 소리도 지르는 존재이다. 다만 슬기로워지면서 점차 화해와 타협의 방법을 익힐 것이다.
3. 3. 자아 치유하기
작가 윤석희는 현실과의 갈등을 어떠한 방법으로 해결하고 마음에 든 병을 치유할까. 이 를 알아보는 것도 작가의 작품 세계를 알아내는 데에 긴요하다. 왜냐하면 윤석희에게 있어서 수필쓰기는 자신을 드러내고, 풀어내고, 마음의 병을 치유하고, 즐거움과 기쁨을 얻기 위한 몸부림이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에 병이 들었을 때, 그것을 치유하려는 욕망은 당연한 생존의 수단이다. 그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작가가 제시하는 방법은 어떤 것일까.
눈뜨고 살면서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 어디 한 둘이던가. 차를 타고 스치고 지나가듯 건성으로 보고 만 것이다. 욕심과 욕망으로 덧씌워진 탓도 있으리라. 구태여 눈을 씻을 일이 아니다. 모든 사물과 현상을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이제는 눈 감고 읽어내야 한다. 희미해진 시각으로 잡아내지 못한 것들의 이면과 본질까지 마음으로 감지할 일이다. 아니 보고 싶은 것만 볼 것이다. 어지러운 세상사 못 볼 것, 봐서는 안 되는 것 너무 많이 봐버린 탓으로 시력도 약해진 것이다. 눈도 이제 쉬고 싶은가 보다. -<눈 감고 보기>에서
결국 경륜의 깊이에서 나오는 완숙의 사고와 몸놀림으로 그는 자신의 병을 치유하고 있다. 노안으로 인해 침침해진 눈의 원인에 대해, 봐서는 안 될 것을 너무 많이 봐서 그렇다고 진단한다. 그러면서 굳이 눈 씻기를 거부한다. 욕심과 욕망으로 덧씌워진 눈을 방치하고 이제는 심안으로 사물의 본질을 보고자 한다. 그리하여 보고 싶은 것만 보면서 살아가고자 한다. 세상에서 얻은 병의 치유 방법은 자신의 마음에 따라 다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거대한 모레노의 빙벽도 무너져 내리지 않는가. 아픈 세월 걷어차고 기꺼이 물이 되지 않는가. 응어리진 옹이를 괴성을 내지르며 풀어내지 않는가. 빙벽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남편과 손을 잡는다.
내 안에서도 함성이 들린다. 꼬이고 뒤틀리고 어그러진 심사가 휘휘 돌아 요동치며 펴지는 소리가. 그저 다를 뿐이었다. 옳고 그름이 아니고 틀리고 맞음이 아니다. 모자람을 채우려 하지 않아도 되고 야속함을 잊으려 하지 않아도 된다. 서로 다름. 그것만 인정하면 무너질 허술한 빙벽이었다. -<빙벽 무너져 내리다>에서
남극의 빙하가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보고, 인간의 마음의 벽을 무너뜨려야 함을 말하고 있다. 아픈 세월을 걷어차고 응어리진 옹이를 풀어내는 빙벽 앞에서 남편의 손을 잡는 작가의 화해의 몸짓은 경건하다. 진즉에 헐어내야 했음을 터득한다. 남편의 손을 잡는 순간 작가는 꼬이고 뒤틀리고 어그러진 심사가 휘휘 돌아 요동치며 펴지는 함성을 듣는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아니다. 모자람을 채우려 하지 않고 야속함을 잊으려 할 것도 없다. 서로 다름만을 인정하면 마음의 벽은 무너뜨릴 수 있음을 깨닫는다.
이제 알았다. 더 이상 힘이 없음을. 다른 사람까지 책임지고 보호할 에너지는 소진되고 말았다. 우리들이 해결하지 못하는 것을 젊은이는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미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받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자식 세대에게 베풀고 주기만 한다고 여겼다. 품안에 끌어안고 토닥거리기만 했지, 그들의 역할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많은 부분을 넘겨받고 있었다. 활력으로 젊음으로 우리 세대를 이미 감당하고 있었다. -<배턴 바꾸기>에서
서서히 일선에서 밀려나는 아픔도 지우는 방법이 필요하다. 젊은이들의 차고 오름을 야속하게 여기다가도 이제는 그들에게 배턴을 넘겨줘야 할 시기가 되었음을 깨닫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식들에게 베풀기만 하고, 다른 사람들을 내가 보호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내 자신이 보호 받아야 할 위치에 와 있음을 깨닫는다. 젊은이들의 당돌한 다가섬에 황당해 했지만, 이제는 그들의 능력을 인정한다. 그들의 도움을 이미 받고 있다고 마음을 다독이고 나니 편안하기 그지없다.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병의 원인을 돌려세우는 처방전이다.
살아남기 위해 마지막 방법으로 사람의 체온이 필요했다. 물론 남편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사랑은 꿈도 아니고 열정도 아니고 더 이상 낭만도 아니었다. 처절한 삶 그 자체고 꿈틀거리는 생명체의 움직임 단지 그것뿐이다. 생명의 보다 근원적인 힘, 에너지가 절실했다. 절대적인 필요 속에 잡념이란 있을 수 없었다. 사랑의 본질과 대면한 것이다. 그것은 완전한 합일을 이루는 순수였고 생명의 원천이었다. 또한 유목민이 되어 광막한 산야를 떠돌다가 맞닥뜨린 영혼의 갈구였다. 태초에 사랑의 유형은 이렇게 하나였으리라. -<원초적 본능>에서
해외여행 중에 겪은 추위가 화두이다. 이집트의 세인트 캐틀린 마을에서 숙소가 여의치 못하여 천막 안에서 자게 되었을 때, 한 밤중에 밀어닥친 추위를 이겨내는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가지고 있는 도구를 다 동원하여 추위를 내몰아 보지만, 별 효력이 없다. 종내에는 남편과의 사랑으로 이겨낸다. 모든 숨탄것들은 자신이 처한 환경이 가장 열악할 때에 후손에 대한 열망에 쌓이게 된다고 한다. 이와 같이 원초적 본능이 지난(至難)의 역경을 이겨내는 한 방편이기도 하다. 이렇게 작가 윤석희는 육신과 정신의 병을 경륜에서 터득한 완숙한 처방법을 사용하여 자신을 치유하고 있다.
3. 4. 카타르시스의 체험
인간이 문학작품을 창작하는 이유 중에는 즐거움과 기쁨을 얻기 위한 것도 있다. 작가가 체험 속에서 느꼈던 희열을 기록으로 남김으로써 오랜 기간 존속시킬 수 있고, 소재에 의미를 부여하여 해석해냄으로써 새로운 카타르시스를 체험하게 된다. 결국 문학작품을 창작하는 것은 즐거움과 기쁨을 더욱 확대시켜 나가는 작업이다.
사방을 둘러보며 말의 힘을 몸으로 느낀다. 솟구치는 생명력. 말굽 소리가 함성이 된다. 나도 소리친다. 그가 호탕하게 웃는다. 웃음소리가 굉음이 되어 온 천지에 부딪친다. 들짐승들의 혼백이 춤을 춘다. 야생화가 지천인 들판을 거침없이 달리고 있다. 굵은 소나기가 쏟아진다. 바람도 빗줄기도 들꽃들도 그리고 그도 나도 다시 살아난다. 비로소 몽골의 향기에 흠뻑 젖었다. 응어리 진 삶의 옹이들이 확 풀려 나간다. 눈물이 혼건 하게 광야를 적신다. -<몽골의 후예>에서
작가 윤석희의 수필에는 자유에 대한 갈망과 자아실현에 대한 욕구가 글 전체에 산재되어 있다. 그만큼 작가정신이 투철한 작가이다. 모든 행동의 근저에는 이 두 항목이 내재되어 있다. 여행 중에 만나는 사건과 사물에서도 이 두 영역을 찾아나서는 것만은 게으르지 않다.
몽골에 가서 처음 말을 타 보면서도 손님에게 양순하고 사근사근한 마부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몽골족의 야성적 특징을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다. 하루의 결근 후에 보여주는 몽골의 야성적인 모습에 작가는 경탄한다.
몽골족의 기상으로 달릴 때에는 하나가 되어 솟구치는 생명력을 느끼면서 함성까지 지른다. 천지엔 비가 내리고 두 사람의 웃음이 온 산야를 흔들고, 들짐승들의 혼백이 춤을 추고 야생화가 들판을 달린다. 비로소 몽골족의 응어리 진 삶의 옹이가 풀리는 쾌감을 함께 맛보는 것이다.
하늘을 거침없이 떠다닌 탓이다. 구름인 양 바람인 양 가볍고 자유로워졌다. 온전하지 않은 작품도 더러 점재하시는 신이 오늘따라 한결 정겹게 다가온다. 손이라도 마주 잡을 것 같다. 한 시간의 열기구 비행에 방자해진 나는 감히 창조주를 폄하하는 언사도 서슴지 않았다. 조물주께서는 이 객기를 어리석은 인간의 재롱쯤으로 여기지 않을까 주제넘은 생각까지 해본다. -<벌륜 속에서>에서
터키의 카파도키아의 기암지대를 관광하고 적은 글이다. 비행기가 아닌 열기구를 타고 옛날 기독교인들이 숨어 살던 곳을 돌아본 이야기다. 우주의 별나라 같은 구멍이 뚫린 곳을 넘나들며 적은 감회이다. 즐거움이 과하여 눈앞에 펼쳐진 기묘한 광경을 조물주의 장난기라며, 방자해져 창조주를 폄하하는 무례도 거침없이 저지른다. 하늘을 떠다님으로 구름인 양 바람인 양 자유를 만끽한다. 여기서 삶의 쾌락을 맛보는 것이다.
결국 아득하게 잊었던 기억들이 찾아와 순수에 젖기도 하고 소문난 곳을 찾아다니다 오히려 내 나라 내 땅의 소중함을 상기한다. 낯선 곳 낯선 이들과의 마주침은 설렘과 경이를 낳고 기쁨의 샘도 된다. 단순하고 홀가분하고 거칠 것 없는 자유로움. 삶의 무게를 벗어버린 가벼움을 결코 잊을 수 없고 인이 박혀 헤어나지 못한다. 달리 치료법도 없다. 귀에 걸린 웃음으로 길을 열고 그저 바람처럼 구름처럼 떠도는 것이다. 이렇게 다니다 아무도 없는 사막에서 들짐승처럼 소리 없이 지고 싶다.
-<역마살>에서
다시 말하지만, 작가 윤석희에게 있어서 여행은 일상이다. 그에게 있어서 여행은 색다른 것도 아니어서 자신을 찾아나서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 여행 중에 아득히 잊었던 추억을 떠올리기도 하고, 소문난 곳을 찾아갔다가 실망하여 애국심을 느끼기도 한다. 낯선 곳, 낯선 사람과의 만남에서 설렘과 기쁨, 그리고 경이도 느낀다. 그런 중에도 가장 소중하게 느끼는 것은 거칠 것 없는 자유로움이다. 그래서 바람처럼 구름처럼 떠돌아다닌다. 그러다가 아무도 없는 사막에서 들짐승처럼 생을 마감하는 것이 소망인 것이다. 이처럼 자연과 동화되어 자유를 누리고 사는 것을 최고의 즐거움으로 갈망하고 있다.
4. 나가면서
기행문과 기행수필은 차별화되어야 한다. 이제는 여정을 나열하는 기행문으로는 독자를 매혹시킬 수 없다. 또 여행에서 보고 들은 것만으로는 독자의 끝없는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여행에서 사냥한 소재는 일상생활에서 얻은 소재와 차별화할 일이 아니다. 그러자면 자연히 여정에 따른 기술이 아니라, 여행에서 얻은 사물과 사건을 작가의 삶을 밀어 넣어 해석해 내야 한다. 그것은 하나의 주제에 철저히 집중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기행수필은 여행지에서 얻은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하나의 주제를 설정하고 사냥한 소재를 작가의 독창적인 시각으로 해석해내는 형상화의 과정이 따라야 하는 것이다.
작가 윤석희는 세계를 누비고 다니면서도 여행지의 풍물을 노래하려 들지 않는다. 수없이 접하게 되는 사건과 사물 속에서 자신의 존재와 본질을 찾아 나선 작가다. 그런데 윤석희는 여기서 여행에 대해 요긴한 지적을 하고 있다. 다시 돌아갈 제 집이 있어야 빛이 난다는 사실이다. 여행이란 현실도피가 아닌, 응어리진 마음을 풀어놓는 작업이란 것을 강조한 말이다. 그러기에 남이 병이라고 지칭해도 또 나서는 것이 여행이다. 어디까지나 여행은 몸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체득하는 과정이란 뜻이다. 그는 여행지에서 어떠한 변을 당하여도 담담히 받아들일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다. 일상 속에서 생을 마감하는 사람처럼 여행지에서 그러한 상황에 처한다 해도 전혀 개의치 않겠다는 심사다. 그만큼 작가에게 있어서 여행은 일상인 것이고 삶의 한 수단일 뿐이다.
수없이 스쳐가는 미지의 풍물 앞에서 전혀 동요하지 않는 작가일지라도 자신의 본질과 얽혀진 것에 대해서는 아주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사물을 보고 그 위에 자신을 얹어 드러내며, 또 풀어나가기도 하면서 내면의 깊은 병도 치유하고, 마침내는 기쁨과 즐거움을 얻어서 가정으로 되돌아오기에 이른다.
윤석희의 첫 수필집 “바람이어라”는 그 동안 우리가 보아온 기행수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결코 여정에 묶이는 법이 없다. 여행지에서 보고 들은 것에 대한 의미화 작업에 주력할 뿐이다. 여행에서 얻은 소재에 본질적 자유를 향한 삶의 철학과 사상을 불어 넣어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도 작가가 자유로움을 향한 끝없는 추구가 지속될 것을 기대하면서 다음 작품집을 기다려도 좋을 것이다. 영원한 자유의 작가이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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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읽었습니다. 기행문과 기행수필...
아쉽게도 바람이어라 책은 품절이네요.
초반부에 소개되는 수필 - 바람이어라, 모래처럼, 자전거 타기, 후회, 배낭하나의 무게로-는 읽지 못했습니다. 이후에 소개되는 들개, 눈감고 보기 등은 인터넷에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