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갈아엎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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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숙
기사입력 2024-08-23
[이제 갈아엎을 때다]
정소슬
늦었다 많이 늦었다
지난겨울 갈아엎지 못했던 논에 풀이 무성하다
만수산 드렁칡까지 내려와 얽혀 살자 창궐이다
논인지 풀밭인지 모를
고라니 멧돼지들의 잔치판이 된
늦었다 많이 늦었다
비룟값 농약값 못 당하는 농사라고
때려치운 모두 내 잘못이다
날씨 탓 시세 탓만 한 모두 내 잘못이다
하늘과 물꼬만 바라본 모두 내 잘못이다
늦었다 많이 늦었다
지금이라도 모두 갈아엎고 농심에 불붙일 때
그들만의 역겨운 축제판 종식시킬 때
비룟값 농약값의 탄압으로부터
하늘을 빙자한 물꼬의 횡포로부터
농심의 투박함을 앞세울 때다
거침없는 쟁기의 정의를 빌릴 때다
들불 되어 번져나갈 이 땅의 혁명을 말할 때
노-오-란 역성의 봄을
묏비나리 묏비나리 온몸으로 외칠 때
점령군 고라니 멧돼지에게 단 한 톨도 뺏기지 않고
사대 모사꾼 드렁칡에게 단 한 뼘도 내주지 않고
오롯 오로지 민중들의 노나메기 세상을 위해
묵힌 땅 언 땅 뺏긴 땅 깔린 땅 찢긴 땅
몽땅 깡그리 송두리째 갈아엎을
때, 바로 그때다
늦었다 많이 늦었다
* 묏비나리 : [순우리말] 순수한 근원 상태에서 비는 축원 행위를 말함. 故 백기완(1933~2021) 선생의 시 ‘묏비나리’로 널리 알려졌으며 '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띄우는'이란 부제가 붙어있고, 이 시에서 발췌한 가사에 곡을 붙여 1981년 '임을 위한 행진곡'이 탄생하였다.
** 노나메기 : [순우리말] 너와 내가 함께 땀 흘리며 일하고 함께 잘살자는 뜻. 장산곶매 백기완 선생의 주 사상(철학)이었으며, 그의 삶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백기완노나메기재단’이 있다.
정소슬시인은
1957년 울산 출생. 2004년 계간《주변인과 詩》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내 속에 너를 가두고(2021, 가을)』 『걸레(2018, 작가마을)』 『사타구니가 가렵다(2014, 푸른고래)』가 있음. 현재 <한국작가회의> <울산작가회의> <민족작가연합> <민족문학연구회> 등에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