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원 경(掌禮院卿) 이근수(李根秀)가 아뢰기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심상한(沈相漢)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 장례원으로 하여금 품처토록 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이에 그 상소문을 가져다 보니, ‘고(故) 부제학(副提學) 충정공(忠正公) 김시찬(金時粲)은 영조(英祖)께서 한창 정사를 빛낼 때 의리를 강조하여 밝힘으로써 거리낌 없이 모두 말하는 것을 하나의 규범으로 삼았으나 끝내 불순한 무리들에게 배척을 받아 흑도(黑島)에 두 번이나 귀양 갔었습니다. 석방되어 돌아와서는 당시의 형편에서 벼슬길에 나설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제수될 때마다 벼슬을 사양하고는 문을 닫고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당시 김귀주(金龜柱)와 김한록(金漢祿)이 흉악한 말을 만들어내어 나라의 근본을 뒤흔들었을 때에 낯빛을 바로 하고 바른 말로 간악한 행위를 끝내 물리치니, 흉악한 무리들의 기세가 꺾였습니다. 죽음에 임박해서 아들과 조카에게 경계하기를, 「나는 지금 죄에 연루되어 죽지만 너희들 중에 뒷날에 가서 조정에서 벼슬하는 자가 있게 되면 나의 오늘의 의리를 잊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고(故) 판부사(判府事) 충숙공(忠肅公) 윤숙(尹塾)은 서연(書筵)에서 강론하고 예문관에서 붓을 잡았으며 그 당시 위급한 순간에서도 직분과 지조를 다하고 충성을 다하여 피눈물까지 흘리면서 끝없이 울부짖었습니다. 애타게 간할 때에는 부들 자리에 엎드려 간한 한(漢)나라 원제(元帝) 때 사단(史丹)보다도 더 충성스러웠고, 높은 관리를 꾸짖을 때에는 칼로 처단할 것을 청한한나라 성제(成帝) 때 주운(朱雲)의 의리보다도 더 엄격하였으나 처음에는 흑도로 귀양 갔다가 다음번은 제주도(濟州道)에 귀양 갔습니다. 정유년(1777)의 은혜로운 명령이 쏟아지는 비처럼 내렸으나 계묘년(1783)에 올린 글은 눈서리처럼 삼엄하여 큰 의리를 굳게 지킴으로써 은혜로운 대우가 지난 역사에 없었습니다. 「한겨울에도 변치 않는 소나무와 같고 서슬 퍼런 칼날 위에도 올라설 만하다.」라는 말은 이미 정조(正祖)께서 직접 지은 제문(祭文) 가운데에 실려 있습니다. 이 두 신하와 같은 사람은 기강을 부지하고 의리를 드러냈으므로 순결한 충성과 뛰어난 절개는 귀신에게 물어도 의심이 없고 백대 후에 가서도 의혹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개인 사당에서 영원히 제사지내게 하는 것은 덕을 높이고 공로에 보답하는 원칙에 부합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의 이 글을 내려 보내서 널리 채택하고 재결하여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두 신하의 순결한 충성과 뛰어난 절개에 대해서는 영구히 감동시키는 은혜를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영구히 사당에서 제사지내도록 하는 은전(恩典)은 본원(本院)에서 감히 제멋대로 할 수 없으니, 상(上)께서 재결(裁決)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의정부(議政府)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이만교(李萬敎)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 장례원으로 하여금 품처토록 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그 상소문을 가져다 보니, ‘옛날에 영조께서 임금 자리에 있고 장조(莊祖)께서 정사를 대리할 때에 고 영의정(領議政) 문숙공(文肅公) 채제공(蔡濟恭)이 무인년(1758) 8월에 도승지(都承旨)로서 세자 폐위(廢位)에 관한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傳敎)를 받고는 함인정(涵仁亭)에 입시(入侍)하여 임금의 옷자락을 끌면서 받은 전교를 도로 바쳤는데, 울음소리와 눈물이 뒤섞이고 말과 기색이 격렬하니 임금은 노여움이 조금 누그러졌습니다. 임오년(1762) 5월에 그는 모친상을 당했던 까닭에 상복 바람으로 대궐문 밖에서 열흘 동안이나 울부짖었으니, 거의 죽게 되었다가 겨우 살아났습니다. 신묘년(1771)에 또 도승지로서 비밀리에 명령을 받고 금등명간편(金縢銘肝篇)을 정성 왕후(貞聖王后) 신위(神位)의 요자리 밑에 감추었다가 정조 계축년(1793)에 영의정으로서 진정의 상소를 올림으로써 금등명간편이 비로소 반포되었습니다. 영조께서 일찍이 세손(世孫)에게 이르기를, 「채제공은 나에게는 진실한 신하이고 너에게는 충성스런 신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채제공이 죽자 정조께서 그의 뇌문(誄文)을 지었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도승지는 바로 내 앞에서 비 오듯 피눈물을 흘렸다.」라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아무 해 의리의 핵심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바로 충성과 의리를 다한 데서 가장 드러난 사실입니다.
그리고 고 대사헌(大司憲) 충정공(忠正公) 이이장(李彛章)은 영조에게서 인정받은 사람으로서 장조가 정사를 대리하던 초기에 제일 먼저 강관(講官)으로 뽑혔습니다. 병자년(1756) 5월에 낙선당(樂善堂)에 불이 난 다음날 승지(承旨)로서 입시하여 임금이 깨닫도록 힘껏 아뢰었는데, 「아뢴 말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다.」는 하교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임오년에 나경언(羅景彦)이 세자를 무함(誣陷)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로서 힘껏 구핵(鉤覈)헐 것을 청함으로써 끝내 법대로 처형하였습니다. 당일에 이르러서는 도승지로서 입시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죽기를 각오하고 간한 결과 선전관(宣傳官)으로 하여금 군율(軍律)을 시행하라는 명까지 있게 하였습니다. 대궐 밖으로 물러나왔다가 급한 소식을 듣고는 다시 들어가서 어의(御醫)를 불러 청심원(淸心元)을 올리게 하고는, 「만약 이 일 때문에 죄가 된다면 내가 스스로 받겠다.」라고 하였습니다. 급기야 전지(傳旨)를 쓰라고 하자 울면서 아뢰기를, 「신의 손목을 자를지언정 신의 손으로는 차마 쓰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튿날 임금의 마음이 좀 풀려서 이르기를, 「이와 같은 때에 이와 같은 신하가 있으니, 이이장이야말로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튿날 이이장이 빈청(賓廳)을 들러 대신에게 말하기를, 「기를 쓰고 간한 것이 3가지 문제인데 세자의 위호(位號)를 즉시 회복하자는 것과 상사(喪事)를 유감없이 치르자는 것과 훌륭한 시호(諡號)를 올리자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이장이 충성과 절개를 다한 내용이 현륭원(顯隆園) 지문(誌文)에 명백히 실려 있는데, 이것이 그 대략적인 내용입니다. 이 두 신하의 순결한 충성과 곧은 절개는 응당 백 대를 내려가면서도 옮길 수 없는 공정한 의논이 있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신의 글을 유사(攸司)에게 내려 보내어 영구히 제사지내도록 의정(擬定)하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두 신하가 충성을 다하고 의리를 지킨 데 대해서는 영원토록 감동시키는 은혜를 베풀어야 하겠는데 영구히 제사지내도록 하는 은전은 본원에서 감히 제멋대로 할 수 없으니, 상께서 재결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을 내리기를,
"의정부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겠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주하(奏下)하신 경상북도(慶尙北道) 유학(幼學) 엄주호(嚴柱鎬) 등의 상언(上言)을 방금 보니, ‘신의 선조인 증 공조 판서(贈工曹判書) 충의공(忠毅公) 엄흥도(嚴興道)는 단종(端宗) 때에 충성을 다하여 끝까지 섬긴 신하입니다. 단종 대왕(端宗大王)께서 임금의 자리를 물려준 다음 해인 병자년(1456)에 영월(寧越) 청령포(淸泠浦)에 옮겨 갔을 때는 마침 늦은 봄이었습니다. 단종께서 근심에 싸여서 홀로 앉아 자규(子規) 시를 읊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사육신(死六臣)이 꿈에 나타나서 마치 살았을 때와 같이 억울한 사정을 하소하였다고 합니다. 단종께서 문득 깨어나 울면서 매우 슬퍼할 때에 엄흥도가 산마루에서 바라보고 말하기를, 「청령포(淸泠浦)에 등불이 환하고 또 무슨 울음소리가 나므로 가봐야겠다.」하고는 옷을 벗고 강을 건너 곧바로 그 앞에 가서 엎드려서 기침을 하니, 울음을 그치고 묻기를, 「너는 누구이며 깊은 밤에 무엇 때문에 왔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엄흥도가 대답하기를, 「신은 본군의 호장(戶長)인데 울음소리를 듣고 놀라서 감히 이렇게 달려왔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단종께서 탄식하여 이르기를, 「여기에 와서 묵은 지 이미 오래되었으나 와서 위로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오늘 네가 찾아왔으니 그 정성이 기특하다. 이제서야 초야(草野)에도 선인(善人)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라고 하였으며 이때부터 밤마다 찾아가서 만났습니다. 정축년(1457) 10월에 단종께서 세상을 떠나자 수령(守令)과 종자(從子)들은 두려워서 감히 염(斂)도 하지 못하였는데 엄흥도는 곧 바로 울부짖으면서 관(棺)과 이불을 자체로 마련해서 염을 해가지고 등에 지고 갔으며 선산 안의 산기슭에 자기 손으로 묻었으니, 이곳이 오늘의 장릉(莊陵)입니다. 열성조(列聖朝)에서 그의 충실한 절개를 가상히 여겨 추증(追贈)하고 정문(旌門)을 명하였으며, 창절사(彰節祠)에서 제사를 지내고 충신단(忠臣壇)에서 제사를 함께 지내게 하였습니다. 우리 황상에 이르러서도 병자년(1876)에 와서는 특별히 시호를 내리는 은전을 시행하시어 공로에 보답하는 성조(聖朝)의 융성함을 유감없이 펼치셨으나, 아직 미처 시행하지 못한 은전이 있습니다. 충성을 다하고 절개가 뛰어난 데서는 사육신과 동등하지만 사육신의 후손들은 수백 년이 지난 다음에도 성대한 은전을 입는데 신의 선조만은 아직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옛 신하의 충성과 의리의 강직함을 생각하여 속히 신의 선조에게도 영구히 제사지내게 하는 은전을 베풀어 주소서.’ 하였습니다.
영구히 제사지내도록 하는 중대한 은전은 본원에서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므로 의정부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