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성직자 묘지
한강이 시원스럽게 내려다보이는 산마루에 있는 용산 성당은 100여 년 전 삼호정 공소 신자들이 스스로 복음의 터전을 일궈 본당 설립 60여 년의 전통을 갖고 있다. 서울에서는 드물게 넓은 마당과 녹지를 갖고 있고, 특히 성당 안에 교구 성직자 묘지가 있어 용산의 신자들은 오랜 신앙의 터전에서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용산 성당 내 성직자 묘지에는 1890년 이래로 4위의 주교, 67위의 신부, 2위의 신학생, 1위의 치명자 등 모두 74위의 시신이 모셔져 있다.
특히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조선에 들어오지 못하고 만주 땅에서 병사한 브뤼기에르(Brugui´ere, 蘇, 1792~1835, 바르톨로메오) 주교의 유해가 조선교구 설립 100주년이 되던 1931년 10월 15일에 이곳으로 이장됨으로써 성직자 묘지로서의 뜻이 더 깊어지게 되었다. 8대 교구장이자 초대 서울교구장(대목구장)을 지낸 뮈텔(Mutel, 閔德孝, 1854~1933,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묘도 바로 옆에 있다.
1886년 한불 조약 체결 이후 조선대목구는 1887년 용산 함벽정(현 원효로 성심여고 자리)과 삼호정 일대의 임야를 매입하여 여주군 강천면의 오지 부엉골에 있던 예수성심신학교를 옮기고 삼호정 뒷산을 성직자 묘지로 정하였다. 1890년에는 용산의 삼호정 언덕에 공소를 설립하고, 그 인근에 교구 성직자 묘지를 조성하였다. 그러나 이곳이 성직자 묘지로 꾸며지게 된 것은 1890년 2월 21일 블랑(Blanc, 白圭三, 1884~1890, 요한) 주교가 서거하면서 왜고개에서 구운 벽돌을 가져다 담을 쌓고 경계를 만든 때부터였다. 삼호정 공소는 1942년 1월 용산 본당으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는 이 성직자 묘지가 용산 성당 구내에 위치하고 있지만, 당시의 위치는 옛 삼호정 정자 자리 옆에 1889년 9월 8일 성모 성탄 축일에 강복된 성 바오로 수녀회의 보육원이 있었고, 삼호정 안채가 공소로 사용되고 있었으며, 공소와 보육원 바로 위쪽에 성직자 묘지가 있었다. 또 이 성직자 묘지에는 보육원 쪽으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묘지가 붙어 있었는데, 여기에 있는 수녀 무덤들은 훗날 이장하여 현재는 흔적만 남아 있다.
용산 지역의 신자들은 성직자 묘지가 이곳에 조성된 때부터 이를 자신들의 조상처럼 돌보게 되었다. 공소 시절에도 공소 경당과 묘지가 바로 이웃해 있었기 때문에 묘지를 돌보는 일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성직자 묘지가 주변의 순교 성지, 신학교 등과 함께 이곳 신자들의 신심에 많은 영향을 줌으로써 단순한 자부심 이상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왔다는 점이라 하겠다. 우리 신앙 후손들이 정성 들여 가꾸어야 할 사적지다.
■ 조선 교구의 설정과 브뤼기에르 초대 교구장
유진길의 서한(1825 년 작성)과 움피에레스 신부(마카오 포교 성성 경리 부장)의 의견서가 1827 년 교황청 포교성성(布敎堂省)에 도착했다. 이를 검토한 포교
성성은 북경교구에서 조선교구를 독립시킬 것과 그 관리를 파리외방전교회에 위임하기로 결정하였다. 파리외방전교회(1663년 설립)는 당시 중국, 베트남에서 전교 활동하면서 본국인 성직자 양성에 주력하고 있었는데, 포교성성의 요청에 처음에는 재정과 선교사 부족, 입국의 어려움, 전교 역량의 분산 등을 내세워 난색을 표했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브뤼기에르 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의 변명에 대하여 조목조목 반박하면서 파리외방전교회가 조선교구 위임 요청을 승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우선 첫째, 재정 부족 문제에 대해서 포교성성의 재정 보조 약속을 상기 시키며 보조를 받는 동안 재원 확보책을 마련하면 가능하다고 보았다. 둘째, 선교사의 부족 문제는 항상 있었던 것으로 조선에 대해 널리 알리고 선교사 모집을 호소하면 가능할 것이라고했다. 셋째, 전교 역량이 분산된다는 우려에 대해서는 조선 교회야 말로 가장 선교사가 필요한 곳이고 1-2 명 정도의 지원은 전교회 전체에 큰 지장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넷째, 입국의 어려움을 말하지만 외국 선교사인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선례가 있으며 조선 교회 신자들의 도움을 받으면 가능하다고 보았다. 다섯째, 전교의 가능성 여부에 대해서는 시험삼아 선교사를 파견하여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합당하며 설령 순교한다해도 선교사나 전교회에 손해 볼 것이 없을 것이라고했다. 마지막으로 누가 나설 것인가에하는 문제에서는 브뤼기에르 신부 자신이 맡겠다고 자원했던 것이다.
전교회의 결심을 촉구하는 가운데 브뤼기에르 신부는 1829 년 6월 29일에 주교품에 서임되었고 플로 페낭 섬에서 사목활동을하게 되었다. 이 때 만난 샤스탕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감화를 받아 자신도 조선 전교에 나서기로 결심 하였다. 마침내 교황 그레고리오 16 세는 1831년 9월 9일 조선교구를 설정하고 같은 날 브뤼기에르 주교를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 하였다. 한편 북경 교구를 관리하던 피레스 남경 주교를 통해 조선 신자들이 선교사의 입국을 돕겠다고 연락해왔다는 소식을 전하자 브뤼기에르 주교는 공식 서류를 기다리지도 않은채 조선으로 출발 하였다.
포교성성에서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에 입국하기 전까지 보좌 신부 역할을 행할 중국인 신부를 파견하기로 했는데 그 결과 유방제(劉方?) 파치피코 신부가 1834년 1월 3일 조선에 입국하게 되었다. 실로 30여 년 만에 두 번째 선교사가 조선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1832 년 어느날 7월 25일 플로 페낭 섬에서 조선 교구장 임명 소식을 들은 브뤼기에르 주교는 자신의 신학생이었던 왕(王) 요셉을 데리고 싱가포르, 마닐라를 거쳐 10월 18일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바르 텔 레미 (Bruguiere, Barthe1emy 1792 ~ 1835) 주교
파리외방전교회원이며 초대 조선교구장인 브뤼기에르 주교는 한국 성은 소 (?)이다. 1792년 2월 12일 프랑스의 레사크 (Reissac) 지방에서 태어나, 카르카손 (Carcassone) 신학교에 들어가 1815년 12월 1일에 신품을 받고, 모교에서 10년간 신학과 철학을 가르쳤다. 1825년 33세의 나이로 파리외방전교회에 들어갔으며, 이듬해 태국으로 건너 가, 그 곳 신학교에서 교편을 잡던 중 1829년 5월에 보좌 주교로 선정되었다. 바로 이때에 자발적으로 창설된 조선 교회로부터 성직자 파견을 요청받은 로마 교황청은, 파리외방전교회와 논의하는 가운데, 제 254대 교황으로 즉위한 그레고리오(Gregorius) 16세 가 1831년 9월 9일에 두 가지 교서(敎?)를 통해, 조선 교회를 북경 교구로부터 분리하여 새로이 독립된 대목구(代牧區)를 창설하는 한편, 초대 감목으로, 조선 전교를 자청한 브뤼기에르 주교를 임명 하였다. 이로써 조선 교회는 창설 46년 만에 북경 교구에서 독립되어 고유한 조직을 갖춘 교구로 발전하게되었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교황청의 이러한 결정을 알게 된것은 1832년 어느날 7월 25일 이후의 일이 었는데, 그는 1831년에 이미 조선 입국을 위한 장도에 올라 마카오에 와 있었다. 1832년 어느날 10월 21일 교황청의 사령장을 받은 그는 더욱 마음이 급해져 조속한 조선 입국을 위해 중국으로 들어가 갖은 고난과 질병을 극복하면서 중국 대륙을 횡단하여 서만자 (西?子)까지 다다랐다.
그리하여 10월 19일에는 오늘의 열하성(?河省)의 뻬리쿠라는 교우촌에 도착하였으나 20일에 갑자기 뇌일혈을 일으켜, 그리운 조선 땅을 눈앞에 바라보며 선종하였다. 그 때 주교의 나이 43세였다. 조선을 향하여 페낭을 떠난 지 4년간, 오로지 복음을 전하겠다는 희망만으로, 온갖 고난을 극복한 불요불굴의 굳은 신념의 소유자였던 브뤼기에르 주교는 학문과 덕행이 높은 이상적인 성직자였다. 그의 개척한 길을 따라 곧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 등이 조선 입국에 성공함으로써 조선 교회는 드디어 모든 조직을 갖춘 완전 독립된 교회로 성장할 수가 있었다.
서만자에서 때를 기다리던 모방 신부는 그가 선종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 달려가 11월 21일 장례를 치러 그곳에 묻었으나, 1931년 파리외방전교회의 조선 전교 100주년을 맞아 그 유해를 서울로 모시고 와 10월 15일 용산에 있는 성직자 묘지에 안장하니, 승천한지 94년 만에 평생에 그리던 조선 땅에서 잠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