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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씨앗에서 키워낸 감동의 포에트리
박현솔(시인)
시는 대체로 짧은 착상과 이미지, 찰나의 사유 같은 것들에서 비롯된다. 그렇게 발아된 시는 삶에서 육화된 것들로 시작되기도 하지만 타자들을 관찰하거나 어떤 사건을 통해서 시인의 감성이 자극을 받아서 써지기도 한다. 어느 순간 찾아온 시의 씨앗을 무의식 속에 품은 시인은 그것을 숙성시키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시의 씨앗이 마음에 들어온 순간 시인은 그것을 메모장에 기록하거나 마음속으로 굴리면서 다른 이미지를 더하기도 하고, 플롯을 덧입히거나, 주제를 키우고, 구성을 새롭게 하며, 비유적 요소들로 줄기를 뻗고 잎을 내어 시의 형태를 갖춰간다. 때로는 자신의 시가 한끝이 부족하다고 판단이 되면 잠시 묵혀두었다가 다시 수정을 가하는데 이러한 이유로 시의 완성은 몇 달 혹은 몇 년이 지난 후에야 가능해지기도 한다. 그때까지 시인은 해당 시에 대한 사유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 그렇게 한 편의 시는 우여곡절을 거쳐서 독자에게 찾아갈 준비를 마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 쓰기는 쉬울 수도 있지만 때로는 어려운 작업의 과정을 여러 번 거쳐야 하는 장르라고 할 수가 있다.
한 편의 시가 시인의 내면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건 시인의 외부로부터 온 것이건 간에 시가 독자에게 전달될 때에는 감동이 함께 전해져야 한다. 시적 감동은 진실된 감정의 울림에서 전달되기도 하고, 발견의 미학적 측면으로부터 올 때도 있으며, 기법의 완벽함에서 올 수도 있다. 그러므로 시가 시인의 내부에서 오든 혹은 외부에서 오든 반드시 뒤따라야 하는 것이 감동적 요소라고 할 수가 있다. 이러한 의미들을 갖추고 시적 감동이 다분하다고 여겨지는 다섯 편의 시를 골라서 찬찬히 음미해보기로 한다.
해변에서 거센 바람을 맞으며 떠올렸다
온갖 난파한 것들을
1849년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이민자들을 싣고 오던 배가 난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사고가 난 해변으로 발길을 돌렸다
새로운 대륙에 닿기 직전
더 새롭고 알 수 없는 세계로 떠나버린 그들은
삶 속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난파된 것들을 토해내는 해변에서
소로가 목격한 것은
죽은 자들에 대한 애도가 아니라
익사한 시체들과 잔해물에 대한 신속한 처리과정이었다
사람들은 여느 때처럼 해변을 산책했고
쓸 만한 잔해물과 해초를 모아 부지런히 수레에 실어 날랐다
폭풍에 절벽이 계속 침식되어
위태로워진 등대는 내륙 안쪽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몇십 년 지나지 않아 더 안쪽으로 옮겨져야 했다
등대 전체가 줄줄 샌다. 모든 게 열악한 상태다.
등대지기의 일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등대의 상태와 지나가는 배의 숫자,
그날 그날의 날씨,
이따금 난파나 사고를 알리는 기록도 있었다
어느 날의 일지 속에는
날개가 접힌 채 잘 마른 나비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
1883년의 나비라니,
끝도 없는 파랑이 두려워 여기로 숨어든 것일까
등대지기가 잡아서 넣어둔 것일까
나비의 두려움도 등대지기의 고독도 만져질 듯한데
까마득한 시간의 해변으로 문득 떠내려온 나비 한 마리
난파된 영혼 하나 숨을 고른다
자리를 두 번이나 옮긴 등대 울타리 위에서
- 나희덕, 「1883년의 나비라니」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미국의 시인이자 수필가이고 생태주의자다. 그는 하버드대를 졸업하였음에도 물질과 명예를 좇기보다 근대화를 비판하고 물질적 삶의 양식을 거부하였다. 나아가서 노예제도와 멕시코 전쟁에 항의하기 위해서 월든의 숲에 오두막을 짓고 홀로 살았다. 그 무엇보다도 내면의 풍요와 검소한 삶을 지향하면서 자연 친화적인 삶을 중시하였다.
그동안 여성성과 생태주의를 지향해온 나희덕 시인이 핸리 데이비드 소로에 주목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평소에 대지의 생명성과 생태주의를 시적 지향으로 자주 표방했던 것과 데이비드 소로의 생태주의적 사고가 어딘지 모르게 닮아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 그의 삶에 대해 호기심을 가졌을 수도 있다.
또한 나희덕 시인이 데이비드 소로에 대해서 시를 쓰기로 마음먹은 것은 기존의 사고체계를 뒤엎는 그의 혁명적 삶의 여정이 마음 깊이 자극을 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삶 속에서 수시로 닥쳐오는 어려움과 난관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극복해나가는 데이비드 소로의 결단과 의지가 위로를 주면서 그것이 시의 씨앗으로 심겨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여기에서 난파되어 “알 수 없는 세계로 떠나버린 사람들”과 “절벽이 계속 침식되어 위태로워진 등대”와 “날개가 접힌 채 잘 마른 나비”는 한계에 내몰린 존재들이고 죽음에 한층 가까워진 존재들이다. 이렇게 화자가 까마득한 시간의 해변에서 현재의 시간 속으로 떠내려온 나비 한 마리를 상상하는 순간에 오래전 난파된 영혼들과 그때의 시간을 치열하게 살아낸 존재들이 환기되면서 잔잔한 감동을 일으키고 있다.
겨울 새벽 회화나무는
수백만 번의 망설임을 끝내고
창문 안쪽 불빛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눈인지 비인지 진눈깨비인지 말해줘, 회화나무의 회화야
짙은 그늘을 거느린 활자마다
눈꽃 송이가 맺혀 있다
고통은 눈 녹듯 사라지지 않는다
누가 대신 호랑이 꿈을 꿔주진 않는다
아침 창문을 뚫고 망막을 뚫고
빛치료를 해주는 태양에게
약병을 들고있는 여래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올 한 해 우리는 각자의 고통으로 더 멀어지겠군요”
다른 사람을 위해 호랑이 꿈을 꿔주지 않은 사람은
나쁜 사람, 나는 나쁜 사람
이틀 연달아 호랑이 꿈을 꾼 사람이 있는
새해 첫날에 모두가 버릇처럼 행운을 빌고 또 빌 때
결혼을 앞둔 젊은 하청 노동자가 이만 이천 볼트의 고압 전류에
녹아버렸다, 십 미터 상공 전봇대에 혼자 올라가 작업을 하던
그의 머리카락이 나무 꼭대기처럼 치솟아 불타오르고 있었다
실금 단위로 그물에 걸려 한없이 헝클어지는 마음
아픈 부처가 산등성이에 누워있는 꿈을 꿨다
무수한 엽맥 모양의 손바닥을
부처의 번뇌를 강물 들여다보듯 구경했다
식물들이 왜 말이 없어지는지 알겠다
- 권현형, 「눈인지 진눈깨비인지 말해줘, 회화나무야」
이 시는 모두가 희망을 얘기하는 신년에 누군가는 절망적인 상황에 놓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젊은 하청 업체 노동자가 비극적인 사건을 겪은 것은 우리 사회의 부조리한 노동구조 때문임을 고발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개인의 비극이 아닌 공동체의 문제로 보아야 할 사안임을 암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비극적인 사건과 노동구조의 모순이라는 지점이 이 시의 씨앗이 되고 있다.
또한 화자가 꿈을 꾸는 행위를 통해서 미래를 점치고 있는데 이러한 예지몽은 회화나무를 통해서 주제를 전달하는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예로부터 공을 세운 학자나 관리에게 회화나무를 상으로 내리기도 했고, 마을에 회화나무를 심으면 국가와 민족을 위해 큰일을 할 인물이 태어난다는 속설이 있기도 하였다.
하지만 “아픈 부처가 산등성이에 누워있는 꿈”은 근심과 걱정을 끼칠 일이 생길 것을 의미한다. 즉 회화나무가 보고 있는 것이 “눈인지 비인지 진눈깨비인지” 알 수 없는 현재의 상황이 그리 희망적이지 않음에 따라 화자의 불안한 심리가 은연중에 드러나고 있다.
현대인이라면 “고통은 눈 녹듯 사라지지 않”고 “누가 대신 호랑이 꿈을 꿔주진 않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 타자의 불행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깊이 사유함으로써 자신의 무력함을 자책하는 화자의 모습에서 인간적인 감동이 배어 나오고 있다.
4월은 온통 바람, 당신에게 바람의 편지를 보냅니다. 옛사람들은 방을 들이거나 움막을 지을 때에도 기記를 썼습니다. 글 잘하는 벗에게 비를 맞고 총총히 달려가 집의 내력을 구했던 것입니다. 당신에게 기記를 부탁드립니다. 이 편지가 당신에게 닿을 즈음, 저는 제이월당第二月堂이라는 한 칸 반짜리 누각을 제 마음의 물가에 드리울 것입니다. 이월二月에서 삼월三月로 가는 길은 있는지, 동지冬至에서 이월二月은 얼마나 먼 길인지, 사월四月의 황홀함에 대해서도 써주시기를 바랍니다. 도대체 이 완강함과 대책 없음이 어디에서 오는지도 꾸짖어 주시기 바랍니다. 한 사람이 가야 할 하나의 길도 알고 싶습니다. 온통 길이라 쓰고 나니 머리가 하얗게 물들어갑니다. 목이 움츠러드니 석양 아래 서는 일이 고질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가야 할 하나의 길, 누추한 누각마저 부수어야 하는지 간절히 배움을 청합니다. 갖추지 못합니다.
- 우대식, 「탁(託), 제이월당기(第二月堂記)」
편지의 형식으로 되어 있는 이 시는 화자가 마음속의 누각을 지으려는 계획하에 상대의 의견을 묻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원래 기(記)의 문장은 산문으로 쓰여지는데, 상대의 감정이나 주제와 관계가 있는 것을 토론식으로 엮는 것이다. “한 칸 반짜리 누각”인 “제이월당(第二月堂)”을 화자의 마음속 물가에 세우는 것이 어떤지, 이월에서 사월에 이르는 시간에 대해서도 묻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시간을 넘어서 한 사람이 가야 할 길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 한다. 하지만 상대에게 정중하게 의견을 물으면서 “이 편지가 당신에게 닿을 즈음”에는 이미 누각을 자신의 “마음의 물가에 드리울 것”이라는 부분에서 아이러니가 발생하고 있다.
그렇다면 시인에게 시의 씨앗이 깃든 것은 어느 지점인지 궁금해진다. 겨울과 봄의 경계를 지나면서 화자의 마음에도 변화가 생기고 멋진 누각을 지어서 풍류를 즐겨보고 싶은 욕망이 생긴 듯하다. 그러면서 동시에 풍류를 경계해야 한다는 자각이 드는 순간에 이 시의 씨앗이 심겨진 것은 아닐까. 그리고 계절에서 더욱 확장되어 “한 사람이 가야 할 하나의 길”에 이르는 지점에서 발견의 미학이 드러나면서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내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렇게 마음속 누각을 지을지 말지에 대해서 정중히 묻고 희망을 느낀 것과는 달리 누각을 언제든지 부술 수 있다는 결단에서 반전이 불러일으키는 감동이 있다.
아버지와 단둘이 마주 앉아 밥을 먹게 되었다
이런 어색한 일은 될수록 피해왔었다
아버지가 밥을 차려 주었고
나는 꼼짝 않고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그런 아버지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단둘이 마주 앉아 밥을 먹는 일 같은 건
될수록 피하고 싶은 어색한 일
이었다. 가급적이면 떠들썩하고, 정신없이 바쁘고…그렇게 얼떨결에
지나가 버렸으면 하는 일
아버지는 늙은
얼굴만 빼고는 몸이 모두
낡은 기계로 되어 있었다. 삐걱거리고 균형
을 잘 잡지 못했다. 무척
오랫동안 그 불편한 기계로
험한
일들을 해왔었나 보다. 당연히
구식의 기계로는 밥을 맛있게 차릴 수 없었다. 당연히
아버지 혼자서 밥을 찬찬이, 맛있게 차려본 적이 없기도 할테고…
아버지가 차린 맛없는 밥을 우린
말없이 먹었다. 원래
아버지와는 할 말이 별로 없다. 오죽하면
이번이 아버지를 볼 수 없게 된 뒤, 한참이 지난 후에
처음으로 아버지와 단둘이 출연한 꿈일까 말이다. 매우 드문
그 순간을 아버지와 난 무척 아쉬워하고 있었다. 서로 말은 안 했지만
알 수 있었다.
난 쑥스럽지만
기계 몸으로 삐걱대며 일어서는 아버지를 처음으로 부축했고
쑥스럽지만
좀 더 자주 아버지와 이렇게 단둘이 천천히 밥이라도 만들어 먹을 걸 그랬다고
말했고 쑥스럽
지만…
꿈이 끝나기 직전에 입을 겨우 열어서
아버지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난 아버지가 수줍어하고 있고
기뻐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 지금이 몇 시인지 알 수 없는 어둠 속에서
한참 동안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 황강록, 「처음으로」
이 시는 화자의 돌아가신 아버지가 꿈에 찾아오면서 시작된다. 꿈은 화자의 경험과 관계가 있고 평소에 간절히 원하던 것을 이루어지게 한다. 화자는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에도 “단둘이” 뭔가를 함께 한 적이 없었는데 꿈에서 식사를 하고 몸을 부축해주고 애정을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화자가 무의식 속에서 간절히 바라던 일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아버지와의 소통을 “될수록 피하고 싶은 어색한 일”이라거나 “떠들썩하고, 정신없이 바쁘게” “얼떨결에 지나가 버렸으면” 하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꿈에서 아버지와의 소통은 시간이 흐를수록 어색함이 아쉬움으로 바뀌게 된다. 그렇게 어느 날 꿈에서 돌아가신 아버지와 소통하게 된 것이 이 시의 씨앗이 심겨진 순간이 된다.
자신의 삶에서 육화된 것이 시의 씨앗이 되는 경우 다른 어떤 시적 방법보다 울림이 크게 다가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 관계를 회복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지만 꿈에서나마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전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꿈에서 깨어 현실에서 느껴지는 아버지의 부재와 짧은 만남이었지만 혈육의 정을 진하게 느끼고 있는 화자의 모습에서 가슴 먹먹해지는 감동이 전해지고 있다.
부석작에서 콩대가 콩닥거리며 이 방을 데웠을 거라 생각하면 재와 연기가 새벽이 올 때까지 방을 돌고 있다고 생각하면 콩 속에 맺힌 영혼이 텅 빈 몸을 기웃거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나는 데워진다 빈 깍지 같이 살다 간 영혼들이 빈 깍지 같은 나를 오래 데우다가 긴 굴뚝으로 천천히 새어 나가고 또 나처럼 서툰 이가 있어 바닥을 떠돌며 마지막 온기로 나를 받든다고 생각하면 한 말을 반복하다가 말을 잃어버린 누군가 구들장 아래 있다고 생각하면
바닥에 얼굴을 묻는다 몇백 년 전 먼 혈육이 식은 심장을 타닥거리며 나에게 무슨 말인가 데우고 있다고 생각하면
- 지연, 「콩대를 태운 밤」
개인의 무의식은 순간적으로 의식에 남긴 했으나 억압과 망각으로 인해 의식에서 벗어난 기억과 생각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집단 무의식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심리 패턴으로 세계를 경험하고 그것에 반응하는 소질이나 경향성을 갖게 된다. 이러한 집단 무의식은 꿈과 예술, 신화 등에서 주로 반영되며 예술가와 시인에게 영감을 주고 창의성을 발현하게 한다.
여기에서 “콩 속에 맺힌 영혼”은 “빈 깍지 같이 살다 간 영혼들”로서 방을 데우고 화자를 데워주는데 그들의 “온기”가 “나를 받든다고” 생각하면서 어떤 인연으로든 연결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특히 아궁이에서 콩대가 탈 때 나는 소리는 그 영혼이 화자에게 말을 거는 것 같은 상상을 하게 만드는데 이때 시의 씨앗이 깃들고 있다.
또한 “몇백 년 전 먼 혈육이” “나에게 무슨 말인가” 하려는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에서 알지 못하는 존재를 먼 옛날의 혈육으로 인도하는 집단 무의식이 매우 인상적이다. 이러한 집단 무의식이 이끄는 영감과 창의성을 통해서 화자가 시간을 초월하여 다른 존재와 소통할 수 있다는 것에서 어떤 연대감과 따스한 감동을 느끼게 된다.
이렇게 다섯 편의 시를 감상하면서 시인의 마음속에 시의 씨앗이 심겨지는 순간들을 짐작해 보았다. 모든 시는 불완전에서 완전체로 가는 어느 지점에 머물게 된다. 그것을 완성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시를 읽는 독자를 매료시킬 수 있는 힘이 감동이라고 할 때 위의 다섯 편의 시들은 각각의 관점에서 감동의 포인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진실된 감정의 울림에서 오는 것이든, 발견의 미학에서 오는 것이든, 기법과 비유의 조화에서 오는 것이든 나름의 감동적 포인트를 장착했을 때 시는 독자에게 사랑을 받게 된다. 어떤 것에서 감동하게 되면 그 순간을 잊지 못하듯이 감동적인 시는 오랜 시간을 견딘 후에라도 반드시 세상에서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박현솔
제주 성산 출생. 아주대 대학원 졸업(국문학 박사).
1999년 《한라일보》 신춘문예와 2001년 《현대시》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달의 영토, 해바라기 신화, 번개와 벼락의 춤을 보았다와
시론집 한국 현대시의 극적 특성, 초월적 세계인식의 전망과 이데아가 있음.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수혜(2005, 2008).
현재, 계간 문학과 사람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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