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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 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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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리말 Ⅱ. 논의를 촉진할 수 있는 이론들 Ⅲ. 자연과 천기의 개념 Ⅳ. 가곡 자연관과 천기론의 전개양상 Ⅴ. 맺는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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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리말
본 연구는 조선후기 가곡의 자연관에 대한 특징을 조선시대 가곡을 애호하였던 문인, 가객들이 전개한 천기론(天機論)를 중심으로 살피고자 한다. 가곡은 조선전기부터 시작하여 긴 세월에 걸쳐 지식인층의 성악으로 발전해 오다가 가곡원류와 금옥총부가 편찬된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24곡 남창가곡 한바탕이 완성되어 오늘날의 가곡으로 정립된다.
가곡 한바탕에는 한국 전래의 자연관이 음악형식 속에 녹아들어 격조 높은 예술세계를 펼쳐 보인다. 가곡은 줄풍류 형태의 세악(細樂) 반주에 맞추어 부르는 성악곡으로 한국음악의 백미(白眉) 편으로 평가받아 왔다. 가곡은 조선후기 음악 가운데서도 가장 큰 대곡의 틀을 갖추고 있고, 미적 완결성이 빼어난 음악임에도 불구하고 그 미학적 측면이 체계화되지 않아서 아직 한 눈에 잘 포착되지 않는 것도 현실이다.
17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조선후기는 정치 사회적 변화를 겪음으로 인해서 한국음악사에 있어서도 새로운 변모를 맞이하는 시대이다. 현행 가곡과 직접적인 연계가 있는 17세기의 가곡은 삭대엽이다. 삭대엽은 17세기 후반에 삭대엽 1.2.3.4로 변주되었는데 삭대엽1은 현행가곡 중 초수대엽, 삭대엽2는 두거, 삭대엽3은 삼수대엽, 삭대엽4는 이수대엽으로 밝혀진 바 있다. 18세기에 이르면, 남창가곡은 대여음과 중여음을 갖춘 5장 형식의 노래로 정립되지만 여전히 오늘날과 같은 24곡을 갖춘 가곡 한바탕은 완비되지 않았다. 18세기말경 삭대엽에서 농,낙,편이 파생되어 현행 남창가곡 한바탕의 직전 단계로까지 진화된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가곡은 우조평조와 우조계면조 두 개의 선법으로 정착되고, 현행 남창가곡 24곡의 형식과 틀이 가곡원류와 금옥총부가 편찬되면서 완결이 된다.
이렇게 조선초 이래 가곡은 선비들에 의해 생성 발전되고 향유되어 온 성악장르이지만, 오늘날과 같은 다원화된 현대사회에서는 애석하게도 외래 음악들에 가려서 쉽게 접하기 어려운 생경한 음악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여전히 가곡은 전통적인 음악장르로서의 전통성을 그대로 간직한 채, 과거 음악을 재현하거나 작곡을 시도하는 새로운 흐름도 느리게나마 진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면 조선의 선비들에 의해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변천하고 발전되어 온 가곡 한바탕의 경이로운 지적 추구의 결산은 무엇일까? 또 가곡이 21세기에 이르러 다원화된 음악 환경으로 바뀐 지 한 세기도 되지 않은 시간에 이토록 낯선 음악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러한 질문에서 출발한 본 연구는 미학개념으로서의 자연과 천기가 가곡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 지를 살펴보는 것이 연구의 목적이다.
자연(自然)이라는 말은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에 처음 보이며,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서 언급된다. 여기서 자연의 의미는 만물에 인위적인 작용을 더함이 없이 모든 것이 저절로 되어 가도록 버려두거나 돕는다는 말이다. 또 천기의 개념도 중국 노장사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바 그 최초의 출전인 장자(莊子)에 의하면, ‘천기는 비밀스러운 자연의 생명기작이며 이것이 인간에게 내재화 되는 영성(靈性)과 영능(靈能)’이라고 하겠다.
천기론이 조선후기 가곡의 자연관 형성에 영향을 준 바가 크나 전문음악가들이 그것을 기록한 경우는 매우 드물고 문인들이 시론(詩論)으로 논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 이유는 글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문인들이 음악가들에 비해 문장으로 더 잘 서술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아직까지 가곡의 자연관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없었다. 또 천기론이 가곡의 자연관 형성에 어떻게 상호작용하여 그 미학적 상위개념으로 자리 잡게 되었는지도 밝혀진 바 없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제기하고 논술을 진행하려고 한다.
1. 자연(自然)과 천기(天機)의 개념은 무엇인가?
2. 성현, 서경덕, 정래교, 김천택, 이정섭, 홍대용으로 이어지는 가곡 자연관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3. 천기라는 예술창작의 작동기재(作動機材)와 관련지어 볼 때 조선시대 가곡 자연관의 특징은 무엇인가?
4. 천기론이 가곡 자연관 형성에 어떻게 작용하여, 가곡미학의 종지(宗旨)로 구축되었는가?
Ⅱ. 논의를 촉진할 수 있는 이론들
1985년 장사훈은 ‘가곡과 인생’이라는 글에서 남창가곡 한바탕의 연행과정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비유로써 자상히 서술하고 있다.
(上略)주안상이 벌어지기 전에 풍류가 빠질 리 없고, 이어 가곡이 시작되나 좌정한 선비들의 체모는 아직도 근엄하기만 하다. 이것이 우조 초삭대엽에서 계면조 소용이까지의 과정이다. 이윽고 순배가 돌아감에 따라 점잖은 농담이 오가고, 차츰 너털웃음이 터지기 시작한다. 그것은 언롱 이하, 곧 농과 낙의 노래가 대변하여 주고 있다. 술이 거나해지면, 너나 할 것 없이 체모를 가누지 못하고, 해학과 외설로 크게 웃고, 딱딱한 처신을 잠시나마 잊어본다. 편(編) 이하의 노래에서는 나를 잊고 잠시 자유 분위기를 만끽한다. 그러나 이와 같이 흐트러진 자세로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는 없다.
기우뚱하게 이지러진 갓을 바로 잡고, 옷깃을 다시 여미고, 큰 기침을 하며 자세를 가다듬어야 한다. 이것이 가곡의 대미를 장식하는 태평가이다. 서창인 초삭대엽으로 시작하여 계면소용이까지는 원래의 자세를 유지하다가 농ㆍ낙ㆍ편으로 내려가면서 질탕하게 놀고, 태평가에서 다시 본래의 자세로 돌아가는데 태평가는 이삭대엽의 변화곡이므로, 다시 처음의 이삭대엽으로 돌아가는 셈이다. 이와 같이 가곡의 구성은 옛 선비들의 생태를 그대로 나타낸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위의 글은 가곡 한바탕이 연행되는 긴 시간 동안 풍류방에서 일어나는 풍경들을 기승전결로 그리고 있다. 가곡의 서창은 느린 초수대엽 ‘동창이’(1분40정간)로 출발하며, 배로 느린 이수대엽(1분20정간), 중거, 평거, 두거로 이어지면서 정관(靜觀)적이라 할 매우 느린 선율로서 서두를 장식한다. 이어 삼수대엽, 소용이, 반엽으로 넘어가면서 멋을 내고 질주한다. 이어 계면조 초수대엽을 거쳐서 농, 낙, 편으로 넘어가면서 창법도 흥에 겹지만 파격적인 가사가 해학을 자아낸다. 특히 마지막 태평가(1분45정간)에 이르러서는 헛기침을 한번 하고서 흐트러진 자세를 여미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모습에서 선비들의 삶과 품격을 엿보게 된다. 가곡은 본디 한번 시작하면 한두 곡을 부르고 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큰 규모의 음악을 펼쳐 보인다.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정좌(靜坐)를 하고 궁리거경(窮理居敬)하거나, 독서를 하고 시를 짓고 읊음(誦)으로써 바른 성정을 기르는 것을 삶의 지향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조선 선비들의 삶의 방식과 가곡은 결코 별개의 것이 아니다. 선비들의 일상을 지배했던 유가의 예법과 자연의 질서가 그들의 음악 속에 여실히 녹아 들어가 있음을 암시 받는다.
서한범은 ‘전통 가악에 나타난 한국인의 미의식’에서 가곡의 풍도형용(風度形容)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
현금신증가령이나 청구영언, 가곡원류 등의 문헌에 나타난 노래의 풍도형용에 의하면, 만대엽, 중대엽, 삭대엽 등의 대엽조들은 대체로 춘풍, 훈풍, 긴 소매, 푸른 버들가지 등의 표현이었다. 그것은 곡조의 흐름을 자연물의 형용으로 비유하여 자연스런 곡선미와 부드럽고 풍만함을 표현하였다. 즉 인위적이고 인공적인 미가 아닌 자연의 질서와 자연의 조화를 미의 대상으로 인식하여 그러한 인식을 그들의 노래 속에 승화시켜 왔다고 생각한다. (중략) 가곡에 나타난 여러 요소들의 질서들은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는 순박한 정신의 표현이며 아울러 그러한 질서들은 번잡을 초월한 선비들의 내면적인 생태를 그려 왔던 것으로 본다.
위의 글에서 보듯 가지풍도형용(歌之風度形容)은 특정 곡목을 노래 부를 때 가객은 어떤 기분과 감정의 상태여야 하는가를 함축적인 짧은 한문 글귀로 제시한다. 가지풍도형용은 개별곡목의 노래 분위기를 암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곡목의 곡상(曲想)에 알맞은 노랫말을 선택하는 기준이 된다. 그래서 가곡은 ‘곡상본위’(曲想本爲)의 음악이요, 시조는 ‘시상본위’(詩想本爲)의 음악인 것이다. 매우 회화적이기 조차 한 가곡의 풍도형용에서, 언어문자로는 그 뜻을 다 표현할 수 없다는 언불진의(言不盡意)적 사고를 읽게 되는 것이다.
서한범은 가곡은 인위적이고 인공적인 미가 아닌 자연의 질서와 조화를 미의 대상으로 받아들이고 이것을 선비들의 노래 속에 승화시켜 왔다고 말한다. 가곡에 나타난 여러 요소들은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는 순박한 정신의 표현이며 아울러 그러한 질서들은 번잡을 초월한 선비들의 내면적인 생태를 그려 왔던 것으로 본다고 평하였다. 그러나 가곡 한바탕의 악곡 구성과 자연관에 대한 상기론자들의 해명은 여전히 에세이류에 머물고 있다.
1988년 국립국악원에서 있었던 최수옥·김정자의 「금하 하규일선생 51주기 기념 여창가곡발표회」 프로그램에 수록된 조재선의 ‘여창가곡의 아름다움’이라는 글에서 우리는 가곡 한바탕의 구성과 자연관에 대한 명쾌한 지적을 읽게 된다.
(上略) 가곡의 특징은 우선 그 점잖은 格을 갖춘 形式美에 높은 예술성을 두게 된다. 줄풍류 형태의 관현악 반주와 함께 어우러져 펼치는 男女唱歌曲은 가히 한국성악곡의 白眉편인 동시에 인류의 손을 거쳐 만들어진 걸작품 중에 한자리를 차지함에 손색이 없다. 가곡의 한바탕 구성은 始와 終을 각각 2번 설정하여 二重構造를 실현한다. 이러한 특징이 한국인의 美的心性을 드러내어 주는 좋은 보기이다. 初數大葉(첫치)과 太平歌를 처음과 끝에 안배하여 가곡 한바탕을 어우른다. 그러나 初數大葉 뒤에 오는 배로 느린 二數大葉에서부터 中擧, 平擧, 頭擧, 三數大葉을 거쳐 弄, 樂, 編으로 점점 빠르게 이어지는 속도 변화는 자연관에 근거한 동양 전래의 시간성을 音樂形式으로 형상화시켜 ‘틀 속의 틀’을 마련한다. 이러한 ‘틀 속의 틀’에서 우리는 또 한번의 始와 終을 잠정 경험하게 된다. 初數大葉의 始와 太平歌의 終이 外形의 틀이라면, 二數大葉에서 시작하여 弄, 樂, 編으로 이어지는 끝은 內形의 틀로서 실질적으로 즐기며 슬퍼하는 모든 희로애락을 포함한 인생 그 자체이다. 현실을 꿈으로 바꾸는 세계로서 예술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며 또한 至高한 예술의 本領이기도 하다. (中略) 男唱二數大葉이 선율의 뼈대를 마련하였다면, 女唱二數大葉은 이 뼈대 위에 아깃자깃한 굴곡을 더하여 선율의 세련미을 한층 돋보이게 한다.
이 글은 여창가곡 발표회의 곡목해설용으로 씌어 진 짧은 글임에도 불구하고, 그간 학계의 가곡 연구자들이 세밀히 다루지 못한 새로운 미학적 관점을 담고 있다. 이 글 가운데 ‘가곡 한바탕의 구성은 시와 종을 각각 2번 설정하여 이중구조를 실현한다. 이러한 특징이 한국인의 미적심성을 드러내어 주는 좋은 보기이며, 내외형의 틀의 짜임과 변화는 자연관에 근거한 동양 전래의 시간성을 음악형식으로 형상화시켰다’는 지적은 가곡 예술성의 위상을 한껏 높은 곳으로 끌어 올리고 있다. 이 평문이 기존의 판에 박힌 가곡해설과는 차원이 다른 점은 한국음악에 자연관과 시간성이라는 철학적 명제를 도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곡은 개별적인 악곡의 존재를 내세우기 보다는 한바탕이라는 긴 시간의 순환구조 속에서 긴장과 이완의 큰 사이클을 창출한다. 가곡은 일년 내내 겨울이 지속되는 극지(極地)이거나, 반대로 일년 내내 여름인 열대의 나라에서는 탄생하기 어려운 음악문화이다. 사계절의 변화를 반복 경험함으로서 자연순환의 시간법칙이 가곡의 순서매김에 반영되어 한국음악의 독창성을 보여준다. 가곡 한바탕의 시간적 흐름은 서양처럼 경질의 것이 아니며 생명처럼 순환하는 동태적 시간관을 담는다. 남창가곡 24개의 악곡들은 서로 역학적(易學的) 관계망을 유지하는 여러 형태의 속도의 변화를 조합, 반복시키면서 통일성을 만들어 내고 있다. 가곡의 악곡 구성은 시간적 변화를 순환주기로 하는데 窮-變-通-久의 순차적 변화를 핵으로 한다.
위의 글은 가곡은 일 년 내내 겨울이 지속되는 극지(極地)이거나, 반대로 일 년 내내 여름인 열대의 나라에서는 탄생하기 어려운 음악문화라고 말한다. 사계절의 변화를 반복 경험함으로서 자연순환의 시간법칙이 가곡의 순서매김에 반영되어 한국음악의 독창성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남창가곡 24곡목 한바탕의 구성은 자연의 변화를 본뜨며, 窮-變-通-久가 그 핵심이 됨을 밝히고, 남창가곡의 악곡구성은 주역의 시간관을 본 떠서 담았음을 서술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논의 내용을 요약정리하면, 가곡 한바탕의 아름다움은 사시(四時)가 변화하는 자연순환의 시간법칙을 견고한 음악형식 위에다 음(音)으로써 자유로이 펼쳐 보이는 데 있다. 가곡 한바탕은 개별적인 악곡의 모자이크적인 구성이 아니라 그 나름대로 유기적인 통일성을 만들어 내는 미학적 상위개념 하에 그 관계의 망(網)이 짜여졌다. 안민영(安玟英)의 금옥총부(1880) 서문에서 ‘하늘을 본뜨고, 해를 그려서 머무르게 하는 정성을 담는다’라는 글귀가 대변하듯이 가곡 한바탕의 선율적 흐름은 자연의 시간변화를 본뜨고 실현하는 것을 근간으로 삼아 한국음악의 독창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다음에 개진하게 될 조선시대 자연과 천기의 개념은 조선후기에 정립되는 가곡미학의 중심 개념으로 발전하게 된다. 잠재적으로 천기론이 가곡 미학이론의 상위개념으로 자리잡게 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그 유관자료들을 제시하고 검토해 보고자 한다.
Ⅲ. 자연과 천기의 개념
1. 자연
자연이라는 말은 노자의 도덕경에 처음 나오는 용어이다. 도덕경의 자연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자연과는 그 개념이 분명히 다르다. 오늘날 자연을 Nature로 번역한 이 용어의 쓰임은 천지와 만물을 가리키는 것에 더 가깝다. Nature의 만물에는 인간을 비롯해서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물건은 포함되지 않는다. 우리가 Nature를 두고 인간과 자연을 분리해서 생각하게 된 것은 서양사상이 들어오고 난 뒤의 현상이다. 그러나 도덕경에 나오는 만물에는 인간도 포함됨으로써 현대적인 의미의 Nature와는 또 다르다.
동양에서는 전통적으로 만물이라는 개념에 인간과 자연의 모든 생명체를 다 포함시킨다. 자연과 인간을 분리하지 않고 인간이 자연의 일부임으로 인간의 길과 자연의 길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자연의 섭리를 거슬리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도덕경에서 우리는 한국 전래의 자연관에 대한 시발점을 엿보게 된다.
자연이라는 용어는 도덕경에 모두 다섯 차례 나온다. 첫 번째는 제17장에서 ‘공이 이루어지고 일이 이루어져도 백성들은 모두 내가 스스로 그러한 것이라고 말한다’(功成事遂, 百姓皆謂我自然); 제23장에 ‘말이 적은 것이 본래 그러한 것이다’(希言自然); 제25장에 ‘도는 저절로 그러한 것을 본받는다’(道法自然); 제51장에 ‘도가 높고 덕이 귀한 것은 명하지 않아도 언제나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道之尊, 德之貴, 夫莫之命而常自然); 제64장에 ‘그래서 성인은 욕심내지 않고, 얻기가 어려운 물건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배우지 않는 것을 배워서, 뭇 사람들의 지나친 잘못을 되돌려 주고, 만물이 스스로 그러하도록 돕되 감히 작위하지 않는다’(是以聖人欲不欲, 不貴難得之貨, 學不學, 復衆人之所過, 以輔萬物之自然, 而不敢爲)라고 자연을 말하고 있다.
즉 만물에 인위적인 작용을 더하지 않고 모든 것이 저절로 되어 가도록 버려두거나 돕는 것이다. 도움도 소극적인 도움이며 적극적인 도움은 인위적인 것이 된다. 이렇게 도덕경의 자연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자연이라는 용어와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이 자연은 스스로의 원리를 갖고 생성하고 변화할 뿐이고 그것을 주재하는 초월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연은 스스로 생명력을 가진 존재로 확장되며 천기와는 동일선상에서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진다.
2.천기
조선후기의 시와 노래는 상호 긴밀한 관련 하에서 그 미적 기반을 공유한다. 천기론(天機論)은 문학 측에서 보면 조선시대 한시와 시조시의 시론(詩論)으로 전개되었던 엄연한 시론이었고, 그 연구의 축적이 풍부한 편이다. 그러나 천기론을 음악의 측면에서 보면 가곡의 노래이론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대용(洪大容)을 제외하고는 그 원론의 전개가 매우 소략하고 단편적이다. 그 이유는 가곡의 연주에 치중한 음악가들이 그 음악적 속내는 깊이 체험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논리적으로 서술하는 능력은 문인들에 비해 매우 약했기 때문이다.
현대에 접어들어 천기론이라는 용어는 장원철의 논문에서 조선후기에 활달히 전개된 새로운 경향의 시론으로 밝혀진 후 한시(漢詩)와 국문시가(國文詩歌) 연구자들의 관심 문제로 대두되어 왔다. 본 논문이 도출하고자 하는 가곡의 자연관에 접근하기 위하여 필자는 한국시가문학 연구자들의 천기론에 관한 선행연구의 도움을 받았음을 밝혀 둔다.
천기라는 술어와 그 개념의 기본 틀은 중국의 노장사상(老莊思想)에 뿌리를 둔 것이다. 천기라는 용어의 최초 출전이 장자인데 모두 세 곳에서 이 용어가 나온다. 먼저 대종사편에서 ‘욕심이 많은 사람은 그 타고난 천기가 얕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천기의 의미는 천연기신(天然機神) 즉 타고난 천진(天眞)한 마음이라는 의미로 새겨진다. 천운편에서는 ‘대저 성인은 사물의 정(情)에 통하고 천명(天命)을 따르며, 천기를 움직이지 않아도 오관은 각기 자기의 일을 하는 것이니, 이것을 바로 천락(天樂)이라고 하고, 말이 없지만 마음은 즐거운 것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천기는 자연의 중추기관 또는 근본정신이다. 또 추수편에서 ‘지금 나는 나의 천기를 움직이면서도 그 까닭은 알지 못하네’와 ‘대저 천기의 움직이는 바를 어떻게 바꿀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여 천기를 각각 천연(天然)의 상태이며 천지의 조화로 갈음하여 보았다.
그러므로 천기의 개념은 ‘비밀스러운 자연의 생명기작이며 이것이 인간에게 내재화 되는 영성과 영능’이라고 할 수 있다. 천(天)은 자연을 가리키면서 동시에 ‘비밀스러움’이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비밀스러움’은 사람의 인식능력으로서는 그 ‘기작의 소이연(所以然)을 잘 알지 못함’을 가리킨다. 따라서 노장철학의 무위(無爲)관념에 의해 천기는 작위(作爲)가 없는 순수한 상태로 규정할 수 있겠다. 그래서 장자에서의 천(天)의 의미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일차원적 천이 아니며, 자연과 도(道)의 함축어로서의 천인 것이다. 천기의 의미도 장자에서 천진(天眞), 천뢰(天籟)와 복합적으로 개념이 형성됨에 따라 ‘천지의 기밀’이면서 ‘조화의 작용’으로 풀이할 수 있다.
대한화사전의 ‘천기’ 조항에는 그 뜻을 ‘하늘의 기밀’ ‘조화의 기밀’ ‘마음, 소질, 능력’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렇듯 천기를 문자 그대로 ‘하늘의 비밀이며, 조화의 신비’라고 규정한다고 해도 그 의미상의 부족함은 없다 할 것이다. 만약 부가적 설명이 필요하다면, 천기란, 만물이 자연적으로 갖고 태어나는 천성(天性), 자유롭고 순수한 마음과 몸, 또는 그것의 조화라고 하면 좀 더 장자(莊子)적 사유방식에 맞는 풀이가 될 수도 있겠다. 그러므로 천기는 인간만이 소유하거나 소수의 사람들만이 갖는 천기여서는 안 되고, 천지만물과 만물의 일부인 인간 누구나 가지고 있는 천기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천기에는 우열도 없고 선악(善惡)도 없으며, 아름다움과 추함도 배제된 채 오로지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존재가치만 남게 된다.
이처럼 시가 천기로부터 나왔다고 보는 것은 그 시의 원천이 인간의 인위적인 힘이 닿지 않는 하늘의 오묘한 조화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인식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것을 천부적으로 부여받은 사람에게 내재된 순수본질로서의 천진(天眞)이 또한 천기인 것이다. 천기는 인간이 하늘에서 부여받아 갖게 된 본질로써 세상의 온갖 괴로움에 담백한 사람만이 능히 얻을 수 있으며, 남을 이기려는 마음이 있으면 천기는 사라진다고 보았다.
이 천기라는 용어가 일찍이 조선전기부터 성리학의 체계로 흡인되어 정착된 용어라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중국 송대(宋代)의 정자(程子)와 주자(朱子)는 ‘노장학의 말일지라도 취할 점이 있다면 취해야 한다’는 입장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조선전기부터 유학자들에게 천기라는 용어가 자연스럽게 수용되어 ‘천리(天理)가 드러나는 오묘한 곳’이라는 의미상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이 부분은 본론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Ⅳ. 가곡의 자연관과 천기론의 전개양상
천기론은 조선후기 미학적 사유의 한 중심축으로서 가곡의 자연관과 정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가곡과 연관된 천기론의 전개양상은 넓게는 음악, 좁게는 가곡으로만 한정시킨다. 본장은 가곡에 대한 미적사유(美的思惟)의 종지(宗旨)로 포착되는 조선후기 천기개념의 글만을 간추려서 검토하고자 한다.
1. 성현과 서경덕
조선전기 성현(成俔, 1439-1504)과 서경덕(徐敬德, 1489-1546)이 남긴 시문에서 천기에 대한 개념을 살펴보자. 먼저 성현은 음률(音律)에도 밝아 장악원제조(掌樂院提調)를 겸하고 유자광(柳子光) 등과 함께 조선전기의 음악이론과 실기, 무용, 복식 등을 집대성한 악학궤범을 편찬하는데 기여하였다. 또 그는 거문고를 잘 연주하여 거문고 기보법인 합자보를 만들었으며, 성종의 명으로 고려가요 쌍화점(雙花店), 이상곡(履霜曲), 북전(北殿) 등을 고쳐서 다시 썼다.
음악의 이론과 실기에 능통한 그는 용재총화에서 천기를 ‘천지조화의 심오한 비밀의 뜻’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대상을 묘사하는데 있어서 천기를 얻은 사람이 아니면 정밀할 수가 없는데 한 물건에 정밀할 수는 있어도 많은 것에 다 정밀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것’이라고 하였다. 시문을 품평하는데 있어서도 ‘강희맹(姜希孟, 晉山)은 시문이 단정하고 우아해서 천기가 무르익어 많은 선비들 가운데서 제일 뛰어나다’고 논평하면서, ‘천기는 자연을 매개로 하는데 문인, 화가들에게 발현되는 창조의 근간’이라 언급한 바 있다. 다만 성현이 언급하고 있는 천기 개념은 단평일 뿐 체계적인 논리를 갖추지 못한 점이 아쉽다.
서경덕(1489-1546)은 특별히 음악사상을 따로 논한 원론적인 글을 남기지는 않았으나, 그의 음악사상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단서는 몇 편의 시와 무현금명(無絃琴名)에서 발견된다. 그는 앞 시대에 누구도 말하지 않았던 기일원론(氣一元論)의 학설을 주창한 철학자이다. 자연에서 완전무결한 득도의 경지를 이루었다고 자부했던 그는 시 「천기」에서 그 철학적 사유가 구체화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이 시 가운데 ‘혼돈의 시원을 거꾸로 올라가 보건대, 음양오행을 누가 드러냈을까’(遡觀混沌始 二五誰發揮)라고 자문한다.
「유물」(有物)이라는 시문에서는 ‘오고 가는 것은 본래 스스로 시작도 없이 오는 것이니, 그대에게 묻노니 당신은 애초에 어디로부터 왔는가’라고 했다. ‘혼돈’, ‘천기’, ‘허공생백’(虛空生白) 등 노장철학의 용어를 「유물」에서 보게 된다.
그의 시 ‘무제’(無題)에서는 ‘나를 잊고, 사물을 사물 그대로 보는 경지에 이른다’(到得忘吾能物物)고 하였다. 이는 곧 장자의 수행법인 ‘심재좌망’(心齋坐忘)’, ‘심신일체’(心身一體)의 경지에서 모든 더러움을 씻고, 온갖 것을 잊어버려 나와 자연이 하나가 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필자는 서경덕의 이러한 자연관에서 17세기 이후에 활달히 전개될 가곡의 천기론적 싹이 트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는 수행의 실천과 직접적인 탐구를 통하여 진리를 알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진리는 누군가 알려주는 것이 아니며 스스로 찾아야 된다는 주장이다.
서경덕의 철학은 만물의 근원과 운동변화를 기(氣)로써 설명하고, 그 기를 능동적이고 불멸하는 실체로 본 데 특징이 있다. 격물(格物)을 중시했던 그의 학문방법은 독창적인 기철학의 체계를 세우는 바탕이 되었다. 그는 세계의 시원을 허(虛) 또는 태허(太虛)라고 보았으며, 이를 선천설(先天說)로 설명했다. ‘태허는 말끔하여 형체가 없는데 이를 선천’(先天)이라고 하여 ‘그 크기는 끝이 없고 과거에 시초가 없었으며, 앞으로도 한끝을 모른다. 말끔하게 허하고 고요한 것이 기의 시원’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관점으로 서경덕의 무현금명을 살펴보고자 한다. 금명(琴名)은 거문고나 가야금에 새겨 넣은 운문형식의 글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가장 선호했던 악기가 거문고와 가야금인데 금명의 내용은 스스로를 경계(警戒)하고 수양하기 위한 내용을 적었다. 아울러 거문고의 내력과 전말에 관한 사실도 기록한 뒤, 그것을 잘 보존하기 위해 거문고에 각자(刻字)해 넣었다. 그러므로 자신의 수양을 목적으로 하는 경구(警句)가 새겨진 거문고를 곁에 세워두고 늘 연주하며 반성하는 경책으로 삼았다.
거문고에 줄이 없음은 체(體)만 있고 용(用)은 없는 것.
진실로 용을 없앤 것이 아니라, 고요 속에 움직임을 함축시킨 것일세.
소리를 들음은 소리가 없는 것을 듣는 것만 같지 못하고,
유형(有形)으로 음악을 함은 무형(無形)으로 하는 것만 같지 못하네.
무형으로 음악을 해야 이에 그 자유로움을 얻을 수 있고,
소리가 없는 것을 들어야만 이에 그 묘(妙)를 얻을 수 있네.
외적은 것은 유(有)에서 얻지만 내적인 것은 무(無)에서 터득하는 법.
그 가운데 취(趣)를 얻으니 어찌 현 위의 공부에만 달린 일이겠는가?
줄을 쓰지 않고 줄의 줄을 써서,
음률 밖의 궁상(宮商)으로 나는 천연(天然)의 소리를 듣네.
음으로써 연주하지 않고 음의 음으로 연주하며,
귀로써 듣지 않고 마음으로써 듣나니.
저 사람 종자기는 어찌하여 나의 거문고를 귀로만 들으려 하는가?
위의 글은 음악 연주는 인간의 의식적 지적활동에 의해 표현되는 재현예술인데, 이 재현의 과정에서 연주자의 자연에 대한 태도와 관념이 작용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연주활동의 근본적 동기는 그의 정신적 성향에서 폭넓게 영향을 받는다고 언급을 하고, 음악을 귀로만 듣지 말고 마음으로써 들어야 그 묘를 얻을 수 있다고 경계(警戒)한다.
그러면 줄이 없는 거문고(無絃琴)에게 울려나오는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내가 거문고를 연주한다는 집착이나, 또 잘 연주해야겠다고 하는 욕심이 없이 연주하는 것이다. 줄 없는 거문고에서 소리가 날 리 없으므로 음악을 심(心)으로서 듣는다는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서경덕의 음악은 용(用)을 용으로 나타내지 않고 체(體)로써 용을 포괄하고, 동(動)을 동으로 나타내지 않고 고요를 고요로써 포괄하고, 유(有)를 유로 나타내지 않고 무(無)로써 유를 포괄하는 음악이다. 곧 용이나 정이나 유는 모든 사람이 쉽사리 듣고 즐길 수 있는 음악이지만, ‘줄 없는 거문고’, ‘고요 속의 움직임’, ‘무형의 음악’, ‘천연(天然)의 소리’, ‘마음으로 소리를 들음’, ‘음률 밖의 궁상’ 등은 모두 쉽사리 들리지도 않고 즐기는 사람도 적은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음악은 정적(靜寂)을 그 바탕으로 천기가 담긴 소리를 듣는 것이니, 음악은 궁극적으로는 고요(靜) 혹은 침묵을 배경으로 한다는 해석에 다가가게 한다.
서경덕이 무현금명에서 추구하는 바의 악(樂)은 마음의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다. 이 깨달음은 현 위의 기교로서는 감히 근접할 수 없는 궁극적 경지의 음악세계인 것이다. 여기서 악은 음악을 비롯한 인간들이 향유하는 문화예술 전반을 포괄하는 것이 된다. 연주기예에 치중한 공부 방법으로는 깨달음도 음악의 본체도 드러낼 수 없으니, 고요와 침묵의 가치를 깊이 인식한 무형의 음악을 해야만이 그 자유로움(徼)을 얻을 수 있다는 현대적 해석이 가능하다 할 것이다.
조선전기의 천기 관념은 이러한 유학자들이 흡인한 노장철학적 자연관에 어느 정도 뿌리를 둔 것으로 보인다. 노장철학적 자연관이 유교의 나라인 조선의 선비와 풍류객들에게 무현금의 미학으로 잠복하여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김천택, 이정섭, 홍대용에 이르면, 조선후기라는 시대 상황들에 대한 공감, 문화의 축적이라는 관점에서 ‘규율의 통제와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라는 가곡의 자연관으로 전개됨을 볼 수 있다.
2. 김천택과 이정섭
조선후기 가곡계에 나타난 두드러진 변화를 하나만 꼽으라고 하면, 전문 가객집단인 가단(歌壇)의 등장이다. 그 전까지의 가곡은 중인이나 사대부들의 취미로 불려졌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아마추어의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그러나 시대적 추세의 변화로 조선후기에 이르면 가곡은 중인계층에서부터 왕족에 이르기까지 그 향수층의 폭이 넓어지고 가곡을 전문적으로 부르는 가객집단이 등장하게 된다.
조선후기 가객들은 주로 조선사회의 하급관리 출신이거나 중인 출신의 전문직종에 있는 실무 담당자들이 그 향수층이다. 그런 류에 속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김천택(金天澤, 1680년대 말-?)이다. 숙종 때 직업이 포교였던 김천택은 가곡을 잘 부르는데다 시조도 잘 짓는 풍류객이었다. 김천택의 업적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업은 가곡집 청구영언을 편찬한 것으로 가곡에 관한한 자기대로의 분명한 관점을 가졌고, 청구영언 서문, 발문, 시조시인을 논한 글 등에서 그의 음악사상이 잘 드러나 있다.
가곡은 원래 그 출발이 사대부 양반들의 문인 취향이 담긴 음악이다. 조선후기에 이르러서 가곡의 곡목수가 확대되어 오늘날과 같은 남창 24곡, 여창 15곡의 방대한 한바탕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인, 서리, 기생, 위항천류들이 가곡의 주인으로 등장하는 주목할 만한 음악사적 변화가 이루어진다. 바로 김천택은 이러한 움직임을 주도한 인물이었고 그에게는 가곡의 창과 노랫말인 시조시의 창작이 다른 어떤 활동보다도 중요한 것이었다. 그가 설사 사대부의 한문시를 어느 수준 이해하고 짓는다 하여도 그 수준이 사대부에게 미칠 수는 없는 것이었으니, 그가 누구보다 잘 할 수 있는 것은 우리말로 시조시를 짓고 가곡을 노래하는 것이었다. 그는 가곡에 관한한 그 어느 양반에 못지않은 능력을 갖고 있다고 자부했다. 김천택이 무식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실제로 자신이 부르는 가곡의 가치에 대해서 음악적인 이론을 논리정연하게 펼칠만한 서술 능력을 지닌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런 김천택이 하루는 사대부 양반인 저촌(樗村) 이정섭(李廷燮, 1688-1744)을 찾아가서 가곡집 청구영언을 보여주면서 ‘이 가운데 위항시정(委巷市井)의 음란한 말과 외설스러운 노래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혹시 잘못된 것은 아닌지’ 물었다. 이정섭은 청구영언에 마악노초(磨嶽老樵)로 기록된 인물이며, 이 질문에 대한 이정섭의 명쾌한 답변이 청구영언 후발(後發)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설명으로 김천택을 지지한다.
공자께서 시경을 편찬하시면서, 정풍(鄭風)과 위풍(衛風)을 버리지 않으신 것은 선과 악을 갖추어 권장하고 경계하는 뜻을 두신 까닭이다. 시가 어찌 주남(周南)의 ‘관저’뿐이며, 노래가 어찌 반드시 순임금 조정의 갱재(賡載)뿐이리오. 성정에서 떠나지만 않으면 그런대로 괜찮을 것이다. 시는 시경 이후에 날로 옛날과 멀어져서 한나라와 위나라 이후의 시 배우는 자는 한갓 용사(用事)와 철사(綴辭)에 재빠른 것을 박식하다 하고, 경치와 물색 꾸며내는 것을 공교롭다 했으며, 심지어 성병(聲病)을 따지고 자구를 다듬는 법이 나타나자 성정(性情)은 숨어버리게 되었다. 우리나라에 내려와서는 그 폐단이 더욱 심하여 오직 노래 한 길만이 풍인(風人)의 남긴 뜻에 차차 가까워져 정을 이끌어 인연을 펴내니, 이어(俚語)로 읊조리고 노래하는 사이에 유연히 사람을 감동시킨다. 민간의 노래 소리에 이르면 곡조는 비록 아름답고 세련되지 못하나 무릇 그 기뻐 즐기며 원망하고 탄식하고, 미쳐 날뛰며 거칠게 구는 모습과 태도는 각각 자연의 진기(眞機)에서 나온 것이다.
이정섭은 먼저 공자가 시경을 편찬할 때 민간의 노래 중 감정이 넘치는 노래도 빼지 않았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시경의 풍아(風雅)가 쇠퇴한 후에는 시가 자구를 연마하는 방법을 만들어내는 데 이르러서 마침내 성정(性情)이 숨어 버렸다고 했다. 이런 풍조는 조선의 한시에서 더 심해졌다는 폐단을 지적하고, 옛날 중국의 노래와 당시 조선의 가곡이 대등하다는 가곡 예찬론을 펼친다. 그는 사대부의 강호풍류에 접근하는 노래도 존중하는 한편, 민간의 사설시조가 노랫말의 주류를 이루는 가곡도 옹호한다. 또 자연의 진기(眞機)를 그대로 드러내는 조선의 가곡이야말로 진정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라고 김천택의 처사를 지지한다.
그는 ‘민간의 노래 소리에 이르면 곡조는 비록 아름답고 세련되지 못하나 무릇 그 기뻐 즐기며 원망하고 탄식하고, 미쳐 날뛰며 거칠게 구는 모습과 태도는 각각 자연의 진기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파격의 답을 한 것이다. 진기란 천기와 같은 말로서 인위적인 수식이나 조작이 가해지지 않은 자연 상태의 본래적 순수성을 지닌 마음상태이다. 이는 시와 노래가 인위적인 힘이 작용하지 않는 하늘의 오묘한 조화로부터 저절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인식이다. 그것을 천부적으로 부여받은 사람에게 내재된 마음의 발로가 천진이며 천기인 것이다. 남을 이기려는 순수하지 않은 마음이 발동하면 천기가 사라진다. ‘천기가 스스로 조화의 공을 움직여 가는 데서 얻어진 시와 노래가 공교롭다 할 수 있지만 이런 시가 세상에 그다지 많지 않다’라고 한 김득신의 말처럼 천기가 실제로 형상화한 것은 아주 드물다.
이처럼 김천택을 위시한 당시 가객들은 자신들의 가단(歌壇)에서 즐겨 부르는 노래 가운데 농, 낙, 편의 악곡도 이러한 천기가 내재된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노래의 효용성에 가치를 둔 교화보다는 성정과 천기를 강조하는 논리를 이정섭에게 질의하고 공적인 동의를 구한 것이라고 보겠다. 이정섭의 답변 또한 참된 노래라는 것은 바로 꾸미지 않은 인간의 성정에서 우러나온 것이면 그 필요충분조건이 된다고 말한다.
한위(漢魏) 이래로 노래가 형식에 맞춘 표현에 치우침으로써 순수한 성정에서 멀어졌으므로 가곡, 시조, 민요를 비롯한 당대의 조선 노래들을 긍정하고, 가곡이 중국음악과 한시에 못하지 않다고 역설한 것이다. 김천택과 이정섭은 기존의 사대부들과는 다른 입장에서 가곡의 문제를 인식했고, 자기의 주체적인 음악관으로 가곡을 편집함으로써 홍대용, 김수장, 박효관, 안민영으로 이어지는 가곡사의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된다.
이처럼 조선후기 가곡사는 필연적으로 천기론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으면서 음악양식이 정립 되어가며 마침내 한바탕이 이루어진다. 천기론의 논자들은 대부분 문인들이거나 전문가객들이었다. 이를테면 김천택과 김성기, 정래교, 이정섭 그리고 홍대용과 유춘오악회(留春塢樂會)의 교유를 예로 들 수 있겠다. 그래서 조선후기의 자연관과 천기론을 연관하여 살펴보는 일은 이 시기의 일반적인 예술계의 흐름을 인식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천기는 표면상 그 일차자료가 시론 형태에 집중해 있다고 해서 시론에 국한된 성격으로만 이해할 수는 없다. 조선후기 예술사조의 흐름에서 천기는 여타의 일반예술이론과도 일정하게 이론적으로 연계하여 있는 것이다. 다만 가론이 시론에 비하여 자료가 소략할 뿐, 천기와 관련한 서론(書論)과 화론(畵論)으로 그 이론이 개진된 글들이 다수 포착되기 때문이다.
3. 홍대용
조선후기 영조 무렵에 활동한 인물인 실학자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은 담헌서(湛軒書)에 수록되어 있는 「대동풍요서」(大東風謠序)의 작자이다. 이 글은 홍대용이 직접 채록하여 편찬한 가집 대동풍요에 대한 서문인데 가집이 전해지지 않아서 그 내용과 출간연대는 알 수가 없다. 수록 작품은 가곡의 노랫말인 풍요(風謠)가 천여 수이고, 별곡(別曲)이 수십 수로 청구영언(육당본, 998편)이나 다른 가곡집에 비해 그 규모가 방대하다.
홍대용이 가곡을 직접 불렀다는 증거는 없으나 「대동풍요서」의 내용으로 보아 가곡에 대한 남다른 취미와 음악적 능력이 있었으리라 추정된다. 그가 직접 가집을 편찬하고 다른 사람의 국문시가집에 제(題)를 써 주기도 해서 시가에 대한 관심이 컸다고 생각된다.
홍대용은 일찍이 나이 16세 때부터 거문고를 알기 시작해서 오랫동안 배워서 그 묘리를 터득하였다. 그는 전문적인 연주가가 아니었지만 거문고, 양금, 가야금뿐만 아니라 파이프 오르간을 연주할 수 있었으며, 연주법을 전파할 정도로 악기에 대한 이해와 음률에 정통해 있었다. 그는 연주실기뿐만 아니라 실학에 기반을 둔 비평가이며 중국여행길에서 보여 준 다방면의 음악에 대한 소양으로 봐서도 음악에 대한 식견이 상당히 높았음을 알 수 있다.
풍요라는 명칭은 홍대용이 모았다는 천여 편에 달하는 노래의 총칭이다. 풍은 시경의 국풍(國風)에서 기인하며 노래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와 관련이 있는 용어는 풍소(風騷), 풍아(風雅)가 있다. 조선후기에 와서는 풍아라는 용어가 가곡집에도 사용되어 해동가요(일석본)의 표제에는 해동풍아라고도 되어 있음을 본다. 이런 근거로 보아 홍대용의 대동풍요는 가곡집이며 「대동풍요서」는 글의 분량은 적지만 내용은 노래에 대한 원론을 적고 있다. 「대동풍요서」는 노래의 정의를 이렇게 내리면서 시작된다.
노래는 감정을 말로 하는 것이다. 감정은 말에서 움직이고, 말이 글로 쓰여 진 것을 노래라고 한다. 교졸(巧拙)을 다 내버리고, 선악(善惡)도 잊으며,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천기(天機)에서 나오는 것이 좋은 노래이다.
이 글은 잘된 노래, 좋은 노래에 대한 정의이다. 홍대용이 첫 명제로 내세운 ‘노래는 정(情)을 말한 것’이라는 것은 노래와 시는 정이라는 동일한 발출구(發出口)를 갖고 있으므로 노래 또한 시처럼 정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정래교(鄭來僑)가 노래는 반드시 시를 사용하는데 노랫말을 문자로 쓰면 시가 되고, 시를 반주에 맞추어서 선율화하면 노래가 되니, 노래와 시는 그야말로 한 가지 이치라고 시와 노래를 동격에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시와 노래의 근원은 함께 정에서 출발한다는 점이다. 시는 문자로서 나타낸 것이고, 노래는 선율로 감정을 드러낸 것이라는 표현상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것은 당대의 노래와 시의 구도에서 노래의 가치를 시의 그것보다 더 높은데 두고자 한 시도로 풀이할 수 있다. 또 시와 노래는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므로 일도(一道)인 것이다. 홍대용이 천기를 내세워서 본문의 초두에서 노래를 정의한 이 내용은 다른 음악문헌에서는 찾기 어려운 중요한 명제이다.
노래란, 노래하는 이의 마음(情)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인데 마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려면 일상적으로 통용되는 자기 말과 자기의 글을 바탕으로 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의미의 전달도 분명하고 마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자연스러운 노래가 된다. 여기서 천기는 우리 민족의 노래를 정의하는 중심 개념의 용어로 사용된다고 생각된다. 홍대용이 말하는 천기는, 하늘이 내린 바 ‘있는 그대로’(自然), 인위와 가식이 없는 자연스러운 상태(天眞), 세상일에 얽매이지 않는 시비를 잊은 상태(眞機)와 같은 의미이다. 그러므로 노래의 기준이나 모범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自然) 표현한다는 뜻에서 천기와 자연은 불가분의 관계에 놓인다.
위의 글에서 좋은 노래의 첫째 조건은 교졸을 버린(捨巧拙) 상태이다. 교(巧)는 극히 아름답고 기교가 뛰어난 것이며, 졸(拙)은 아주 못나고 서투른 것을 말한다. 그러면 기교가 극히 뛰어나기 위해서는 수없이 깎고, 다듬고, 꾸미는, 음악적 작위가 개입되어야 하겠는데 이것이야말로 버려야할 교라는 것이다. 노래하는 이가 잘 부르겠다는 의도와 애씀이 없으며, 못나고 서투름에 대한 부끄럼조차 버릴 때 비로소 천기가 함축된 노래가 된다는 말이다.
두 번째 조건이 선악을 잊는 것(忘善惡)이다. 노래를 평가하는데 있어서 노랫말의 내용이 윤리적인 쟁점이 되고 있음을 전제로 한다. 이것은 노래가 도덕평가의 하위수단이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의 반영이다. 유가악론이 집대성되었다고 할 예기 「악기」에 의하면, ‘음과 악에는 인간의 여러 다양한 감정적인 내용인 칠정(七情)과 인륜 도덕적인 내용이 내재해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유가악론에서 음과 악의 기능은 사람들의 도덕의식을 순화시키고 고양하는데 있는 것이다. 음과 악으로써 일반 대중을 정치, 사회, 도덕적으로 교화함으로써 인위적인 가치 질서체계를 확립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래가 예(禮)를 실현하는 내용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정서적으로 교화하여 이상사회를 구현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홍대용은 이러한 유가 악론의 원론적인 사유의 세계를 이미 벗어나 있었고, 세상 사람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유가적 음악관을 비판적으로 인식하였다고 생각된다.
앞시대까지 시와 노래가 선(善)을 권하고 악(惡)을 징계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면, 홍대용은 악과 함께 선조차 잊어야 (忘善惡)한다고 말한다. 구체적으로 악이니 선이니 따지는 자체가 의미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 앞에서 좋은 음악이니 착한 음악이니 하는 유가의 악론은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홍대용은 노래를 교졸과 선악의 판단기준에 따라 평가하는 유학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그 대안으로 자연스러움에 의지하여 천기를 드러내는 것이 좋은 노래라는 미학을 제시한다.
세 번째 조건은 노래는 자연스러움에 의지하여 천기가 유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자연이라는 용어가 천기와 함께 사용됨으로 해서 미학적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자연은 ‘대상으로서의 자연과 행위주체로서의 자연스러움’이라는 의미를 포괄한다. 노래는 말 그대로 자연스럽게 저절로 흥이 일어나는 대로 불러야 한다는 내용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여기서도 자연을 인위(人爲)의 대응어로 사용하면서 천기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해서 노래를 정의하였다. 즉 홍대용은 이상적인 노래는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성정(性情) 그 자체를 천기로써 곧바로 발출하는 가(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노자의 도덕경에서 말하는 자연은, 만물에 인위적인 작용을 더하지 않고 모든 것이 ‘저절로 되어 가도록 내버려두거나 돕는 것’을 말한다. 즉 인위가 없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자연을 ‘있는 그대로’ 혹은 ‘저절로’라고 해석하는 것이 현대적 해석에서 발생하는 오류를 최소화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즉 노래와 연관하여 말자면, 노래는 마음에 있는 그대로, 저절로 나오는 대로 불러야 성정이 바르게 표현된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노래는 인간의 감정을 말로 길게 끌어 선율로 표현한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위에서 인용한 대로 노래는 자연스러운 인간의 성정이 담기게 된다.
‘노래는 자연을 따른다’라고 하는 것은, 노래하는 사람이 인위적인 기교나 수식을 잊은 채 천진한 마음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때의 천진한 마음의 상태는 천기가 유동하는 무경계(無境界)에 머물게 된다. 천기는 그야말로 인위를 가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이다. 즉 교졸을 버리고 선악을 잊어야 자연을 따르고 천기가 발(發)할 수 있는 것이다. 곧 노래에는 교졸, 선악, 자연, 천기의 네 단계가 있다. 교졸에서 천기로 가까이 갈수록 격조 높은 노래가 된다. 그렇다면 단연코 교졸한 노래를 부끄러워 할 줄 알고 먼저 그것을 버려야 한다. 그 다음에는 선한 내용의 가사를 담아야만 한다는 노력도 잊어야 한다. 그런 뒤에 부르는 노래야말로 가식이 없는 자연과 천기 속에서 저절로 풀어져 나오게 된다.
시경(詩經)의 국풍은 여항의 가요에서 많이 나왔으며, 때로는 함영(涵泳)의 화(化)에 갇히기도 하고, 또한 풍자의 뜻도 있다. 비록 강구요(康衢謠)의 진선진미(盡善盡美)함에는 양보하지 않을 수 없지만 모두 당시의 바른 성정(性情)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그 시를 진열하고 태사가 그것을 채집하여 관현(管絃)에 올리고 연악(宴樂)에 썼다. 상․숙(庠․塾)에서 거문고 타고 글을 외우는 선비들과 밭 가는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고 감발하여 날마다 선한 데로 옮겨가면서도 스스로 알지 못했으니 이것은 시의 교화가 아래로부터 위에까지 통하였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홍대용이 생각하는 노래는 자연스움이 가장 우선시 된다. 우리 노래를 긍정하기 위하여, 그는 시경의 국풍과 강구요를 인용하였다. 백성들의 민요를 채집한 국풍과 강구요에는 민초들의 사랑타령뿐만 아니라 그들의 고단한 삶이 적나라하게 담겨져 있다. 그러나 이 모두가 인간의 꾸미지 않은 바른 성정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내세운다. 그는 민간에서 저절로 생성되어 널리 부르는 노래보다 더 자연스러운 감흥을 주는 음악은 없다고 강조한다. 국풍보다 민초들의 음악인 강구요가 더 꾸밈없이 천진이 잘 드러나 있으므로 그런 노래가 좋은 노래라는 가론을 전개한다.
좋은 노래는 성정의 발로가 인위적이고 작위적이 아니라 저절로 발생하는 노래이며 노래를 부름에 있어서도 애쓰는 마음이 없어야한다는 논리이다. 아울러 가장 높은 경지의 노래는 천기의 순수한 발로에서 저절로 빚어진다. 이는 선악의 목적성을 의식하지 않은 채 천기의 순수한 발로가 실현된 노래이며, 이런 노래야말로 삶을 윤택하게 한다는 전망을 가졌던 것이다.
주나라 이후로 화(華)와 이(夷)가 섞여지고, 방언이 날마다 변하고 풍속이 점점 박해지고 인위가 날로 더욱 불어났다. 방언이 변하니 시와 노래의 체가 달라졌고 인위가 불어나니 정(情)과 문(文)이 서로 호응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므로 성률(聲律)의 공교함과 격운(格韻)의 높은 데에 이르러서는 뜻을 실은 것은 비록 빽빽했지만 자연스러움을 잃었고, 이치는 비록 바르긴 하지만 더욱 천기(天機)를 잃었으니 이것을 가지고 풍아(風雅)의 뒤를 이어 나라를 다스리려 한다면 어찌 아득한 일이 아니겠는가?
홍대용에 의하면, 주나라 이래로 시와 노래의 위기가 오고 그로 말미암아 풍속이 경박해진 것은 인위적인 요소의 개입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시와 노래가 분열되어 체(體)가 달라진 것은, 노래가 천기와 자연의 발로가 아닌 인위성이 넘쳐난 까닭이다. 결국, 시와 노래에는 바른 성정이 담겨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삶을 담고 있는 조선 노래를 중국 노래보다 낮추어보는 것을 훈계하고, 기실 우리노래가 중국 노래에 못지않다는 문화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한다. 자연과 천기는 어떤 인위적인 요소나 규범도 부정하는 흥(興)의 출발이며, 자기 삶의 진실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흥이야말로 가곡미학의 최상위에 자리한다. 그러므로 홍대용의 「대동풍요서」는 앞 시대 문인들의 논지를 좀 더 정교한 논리로 종합하고 발전시킨 중요한 성과라고 하겠다.
공자의 시경이 당대의 노래를 수집하고 기록했듯이, 홍대용 또한 공자와 같은 눈높이에서 조선의 당대 정서를 가곡에 담아서 자연스럽게 노래해야함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아울러 그의 천기 자연관은 오늘날 한국의 음악현실에서 우리음악의 본령(本領)을 세우는 악론(樂論)으로 새로이 인식하는 계기가 된다.
Ⅴ. 맺음말
본 연구의 목적은 천기론를 중심으로 조선후기 가곡의 자연관에 대한 특징을 밝히는 것이었다. 가곡의 자연관이라는 주제는 음악미학의 한 분야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엄밀히 말해서 유가나 노장철학의 단일코드만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가곡이 겉으로는 유교적 이념에 충실했던 조선의 문인음악이지만 그 사상적 내포는 노장철학적 스펙트럼을 지니고 있음을 파악하였다.
가곡의 아름다움이 동양의 자연관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말을 가곡연구자들이 많이 하지만, 막상 자연관을 주제로 본격적인 연구를 시도한 논문은 찾을 수가 없었다. 가곡 한바탕에는 한국 전래의 자연관이 음악형식 속에 녹아들어 격조 높은 예술세계를 펼쳐 보인다는 견해에는 대체로 동의를 하는 것 같다. 그러나 가곡은 조선후기 음악 가운데서도 가장 큰 대곡의 형식을 갖추고 있고 그 미적 완결성이 빼어난 음악임에도 불구하고, 미학적 측면이 체계화되지 않아서 한 눈에 잘 포착되지 않는 것도 현실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이유가 있다. 첫째는 가곡의 자연관을 이해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조선시대의 음악, 문학, 유학(儒學), 노장(老莊)철학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둘째는 조선시대 문인들이 시론(詩論)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가곡의 천기론을 단평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가곡의 천기론에 관한 원론(原論)이 턱없이 부족하다보니 문인들이 전개한 소략한 글에 의지하여 살펴 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기론이 조선시대 가곡미학의 상위개념으로 자리 잡게 되었음은 매우 아이러니한 학문적 결과라 아니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성현을 비롯하여 서경덕, 김천택, 정래교, 이정섭, 홍대용으로 이어지는 가곡의 천기론적 자연관은 인간을 자연으로 포섭하고자 하는데 그 공통점이 있음이 밝혀졌다. 이러한 논지를 담은 조선후기 실학자 담헌 홍대용의 「대동풍요서」는 앞 시대 문인들의 주장을 좀 더 정교한 논리로 종합하고 발전시킨 중요한 성과라고 하겠다. 홍대용이 말하는 이상적인 노래는, 교묘하고 요란하게 꾸며서 사람들이 좋아하게 부르고자 하는 마음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저 꾸밈없이 천(天)으로부터 부여받은 그대로를 걸림 없이 자연스러운 상태로 직출(直出)해내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노래가 저절로 우러나오는 천기가 유동하는 상태가 된다는 논리이다.
또 조선후기 가곡의 자연관은 천기라는 예술창작의 작동기재(作動機材)를 중추로 하여 가곡을 자연으로 포섭하고자 하는데 있다고 보았다. 여기에서 말하는 자연이란, ‘저절로’ 또는 ‘스스로 그러하다’라는 의미의 자연을 말하는 것이며, 서양의 nature의 개념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가곡의 자연관은 인간정신의 자유로움이 천기에 업혀서 저절로 우러나오게 되는 노래를 최상의 경지로 보았다. 이러한 경지는 노래를 잘 불러야겠다는 일말의 의지조차도 망실된 상태이다. 이것은 한국인의 주축적인 미학사유와 문화 생리가 자연스러움, 혹은 저절로 발화하는 예술창작행위를 매우 중시하고 있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따라서 조선후기의 가곡은 겉으로는 유가 예악사상의 질서관(秩序觀)을 실현하는 문인음악으로 포착되지만, 그 추구하는 바는 노장철학의 천기론적 자연관이 그 중심에 있음이 밝혀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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