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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모든 것과 절대적으로 다른 나
들뢰즈의 철학적 관심사는 자신의 주요 초기저작 《차이와 반복》(Différence et répétition, 1968)의 제목에서 나타나듯이 ‘차이(différence)’와 반복의 개념이다. 그는 이 두 개념을 다루는 것이 결코 공상적 창작이 아니며, 철학을 비롯해서 문학, 정치 등 당시 새롭게 공유되고 있는 조짐을 집약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모든 조짐을 한마디로 ‘반헤겔주의’로 집약할 수 있다고 단언한다.
그가 생각하기에 헤겔주의야말로 겉으로는 차이의 논리를 긍정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확장한 듯 보이지만 알고 보면 지극히 세련된 형태로 위장된 동일성의 논리에 불과한 것이었다. 헤겔의 변증법은 동일성의 논리가 발전하여 정점에 다다른 고전주의의 또 다른 얼굴인 셈이다. 헤겔의 변증법에서는 동일자와 부정적인 것, 혹은 동일성과 모순이 최고의 권위를 지닌다. 하지만 들뢰즈는 이제 동일성과 모순의 자리를 차이와 반복이 대신한다고 본다.
동일성 혹은 동일성의 논리에 대한 반감은 들뢰즈의 전유물이 아니다. 들뢰즈가 재차 언급하듯이 그것은 자연스러운 시대적 흐름과도 같은 것이며, 당시의 많은 사상가들도 동일성의 논리에 대한 거부감을 노골적으로 표시하였다. 여타 사상가들과 다른 들뢰즈의 특이성은 이러한 동일성의 논리를 ‘재현(représentation)’의 논리로 규정한다는 점에 있다.
여기서 재현이란 미리 주어진 개념(표상)에 맞추어 사고하거나 대상을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가령 눈앞에 표면이 붉은 구형의 단맛을 지닌 어떤 과일이 있다고 치자. 우리는 이를 ‘사과’라고 말할 것이다. 이때 사과는 우리가 만든 표상으로서의 언어이자 개념이다. 어떤 사물을 파악하거나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언어 혹은 개념의 사용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문제는 개념이 사물을 대체하게 되고 오히려 우리가 만든 개념에 사물을 포섭시킴으로써 세상을 오로지 개념의 틀에 가두게 될 때 발생한다.
어떤 사물을 사과라고 부를 경우 그것은 사과 이외의 어떤 것이 아니다. 타원형이든 단맛이 적든 붉은색이 부족하든 그것은 사과이다. 사과라는 표상에 완전히 부합하지 않아도 사과는 분명 사과다. 다만 이는 품질이 떨어지는 사과일 뿐이다. 만약 고전주의 화가라면 이런 사과는 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가장 사과다운 사과, 즉 우리의 표상에 가장 부합하는 사과를 그릴 것이다. 이렇게 표상을 미리 정해놓고 보자면 그러한 표상에 부합해야만 좋은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돌연변이, 기형, 우발적인 것이 된다. 어떤 사물 자체가 가지는 고유한 가치나 차별성은 무시될 수밖에 없다.
세상은 표상 혹은 개념의 재현 정도에 따라 그 가치가 결정된다. 이러한 ‘재현의 논리’에서 학생은 학생이라는 개념에 부응할 경우 참된 개체로 간주되며, 여성은 여성이라는 개념에 부응할 경우 참된 개체로 간주된다. 이때 학생이든 여성이든 하나의 개별적 존재로서 지니는 고유한 차별성은 중요하지 않게 된다. 말하자면 표상적 사고는 세상에 제각기 다른 모든 사물들을 자신이 만든 표상에 따라 분류하고 동일하게 적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재현의 논리로는 개체의 진정한 차별성, 즉 차이가 무시된다.
들뢰즈가 헤겔주의를 공공연하게 적으로 간주하는 것은 헤겔의 변증법이 가장 세련된 재현의 논리라는 사실 때문이다. 헤겔의 변증법은 겉으로는 차이의 논리를 표방하지만 속으로는 동일성과 재현의 논리를 지닌다. 변증법은 어떤 한 개체의 정체성(identity, 헤겔에게 이는 동일성의 의미를 지님)을 규명하기 위해서 차이의 전략을 사용한다. 변증법의 논리는 이러하다. 한 개체가 지닌 특이성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그것만이 지닌 자신의 정체성을 해명해야 할 것이다. 이때 자신만이 지닌 정체성을 해명하려면 그 개체만을 탐구해서는 안 된다.
하나의 개체가 지닌 특이성은 오로지 다른 개체와의 차이를 통해서만 발견할 수 있다. 가령 소금은 짠맛을 내지 않는 다른 사물과의 차이, 흰색이 아닌 사물과의 차이, 안정된 결정체를 이루는 고체가 아닌 사물과의 차이 등의 비교를 통해서 그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변증법에서는 이를 ‘부정(否定)’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어떤 개체를 규정하기 위해서는 그 자신이 아닌 것과 자신을 비교해야 하며, 자신이 아닌 것에 대한 부정을 통해서만 스스로를 규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자신의 일부를 이루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자신과 무관하다고 여긴 것, 가령 단맛의 설탕, 검은 숯, 불안정한 증기 등은 이제 자신의 특이성을 규명하기 위한 조건이나 계기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변증법의 논리에 따르면 이렇게 무관하게 보이는 다른 것들이 사실은 자신과 ‘대립(Gegensatz)’을 이루는 것들로 간주된다. 대립이란 서로 무관한 것이 아닌 긴장관계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과 폴란드는 서로 무관한 국가이지만 한국과 일본은 대립관계를 이루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변증법의 궁극적 목적은 한국과 폴란드가 서로 무관한 국가처럼 보이지만 실은 서로 대립관계를 이룬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러한 대립의 관계란 사실상 차이의 논리라기보다는 동일성의 논리를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한 인간을 남성으로 규정할 경우 그는 여성이 아니라는 점에서 남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남성이라는 규정은 여성이라는 대립되는 규정 없이는 결코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남성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남성이 아닌 것, 즉 여성이 존재해야 하므로 남성의 존립성은 자신의 타자에 의존한다.
이것이 바로 모순인 것이다. 들뢰즈가 여기서 주목하는 사실은 이 모순의 관계에 동일성의 지평이 놓여 있다는 점이다. 남성과 여성은 오로지 성이라는 지평에서만 모순적 관계를 지닌다. N극과 S극의 모순도 자기(磁氣)라는 동일한 지평을 전제하며, +극과 -극의 모순은 전기라는 동일한 지평을 전제한다. 헤겔은 이를 모순의 ‘근거(Grund, 영어로는 ground로 토대나 지평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라고 보며, 궁극적으로 모순은 근거라는 동일한 지평으로 해소되는 과정에 불과하다. 여성과 남성의 모순은 인간이라는 동일한 지평으로 해소되어야 하는 것이 그 한 예이다. 결국 변증법이 실행하는 모순과 차이의 메커니즘은 동일성의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사이비 차이의 논리를 극복하기 위해서 들뢰즈는 차이를 ‘개념적 차이(différence conceptuelle)’와 ‘차이 자체(différence elle-même)’로 구분한다. 개념적 차이란 변증법적 구분의 논리에서와 같이 개념적 종차(種差)에 의해서 하나의 개체를 다른 개체와 구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 언급한 소금의 사례는 개념적 차이의 한 사례가 될 것이다. 여기서 또 하나의 흥미로운 사실은 차이란 개념에 의해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가령 소금이라는 개념은 지금 여기 있는 이 소금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그런데 같은 소금이라도 모든 소금은 그 맛이나 염도, 빛깔이 다를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종차적 구별에 근거한 개념으로부터 얻어질 수 없다. 어떤 개체이든 다른 모든 것과 절대적으로 다른 자신만의 차이를 지닌다. 한 개체로서의 ‘나’라는 인간은 다른 누구와 어떤 점에서 종차적으로 구분되어 다른 것이 아니라, 그냥 절대적으로 다른 존재이다. 그러한 절대적 차이는 동일한 지평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아닌 어떤 존재와도 절대적으로 다른 존재이다. 이러한 절대적 다름이 차이 자체인 것이다.
들뢰즈는 이러한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분화(différenciation)’와 ‘미분화(différentiation, 微分化)’를 구분한다. 분화란 종차적 구분 혹은 개념적 구별을 뜻하는 반면, 미분화는 수학에서의 미분의 개념과 상관이 있다. 수학에서 미분은 어느 한순간의 속도를 계산하거나 혹은 곡선의 기울기를 구하는 장치이다. 움직이는 물체의 한 점 혹은 순간의 속도를 구한다는 것은 종차적 구분에 의해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한순간의 속도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속도란 이동한 거리와 시간의 관계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런데 한순간이란 정지된 한 점으로 나타나며, 정지된 한 점은 이동이 없으므로 시간의 경과는 없다. 따라서 미분이란 한 점으로부터 가장 근사치에 있는 점, 즉 가장 0의 거리에 가까운 점을 상정한다. 곡선의 기울기도 마찬가지이다. 기울기란 두 점을 연결하여 만들어지는 것이지만, 곡선의 기울기는 한 점에서의 기울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역시 0에 가까운 무한소를 가정한다.
그런데 이러한 무한소란 사실상 종차적으로나 개념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가령 속도란 다른 속도와 종차적으로 구분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10미터는 5미터의 두 배라는 개념적 구분이 가능하지만, 섭씨 10도나 5도는 객관화할 수 있는 구분이 아니다. 섭씨 10도와 5도의 차이는 오로지 ‘강도(intensité)’에 의해서만 구분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강도의 차이는 개념적으로나 종차적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들뢰즈에게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강도’에 의한 차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다른 모든 것과 절대적으로 다른 나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2015. 08. 25., 박영욱)
차이는 반복의 결과
다시 바로크 이야기로 돌아가자. 바로크 음악가들은 고전주의 음악가와 달리 연주할 때마다 자신의 방식대로 새롭게 연주한다. 항상 다르게 연주한다는 것은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뜻이며, 이때 차이란 분화가 아닌 미분화를 의미한다. 모든 연주의 차이를 악보나 개념으로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차이는 오로지 ‘감각될 수밖에 없는 것(ce qui peut être que senti)’이다. 이러한 강도의 차이는 그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랜 반복의 결과로서 만들어진다.
한 연주자의 독특한 음색과 연주는 악보가 아닌 감각을 통해서만 지각할 수 있는데, 이러한 특이한 음색을 가능하게 한 것은 반복이다. 흔히 사람들은 반복을 동일성의 메커니즘으로 이해한다. 해가 매일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처럼, 같은 것의 회귀를 반복이라고 본다. 하지만 들뢰즈는 이를 ‘일반성(généralité)’의 논리이자 개념적 동일성의 논리라고 본다. 그의 창의성은 반복을 일반성의 논리가 아닌 오히려 차이를 생산하는 기제로 본다는 점에 있다.
예를 들면, 동일한 악보를 연주하는 연주자는 결코 같은 연주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매번 반복함으로써 항상 다른 경지에 이른다. 처음에는 어떤 강도도 느낄 수 없던 연주가 점차 강도로 느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처음 먹어보는 음식에서는 사실상 그 음식의 고유한 맛을 느낄 수 없다. 먹으면 먹을수록 그 맛의 고유한 차이를 새롭게 발견해나가는 것이다. 반복이란 강도의 지각을 통한 차이를 발견해나가는 과정이다. 따라서 차이는 반복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들뢰즈에게 차이란 이렇듯 반복에 의해서 얻어지는 강도의 차이다.
반복의 과정에서 그때마다 일어나는 것을 들뢰즈는 ‘사건(événement)’이라고 부른다. 사건이란 나름대로 고유한 차이와 강도를 지닌 것이다. 그래서 고전음악 연주가 아니라 바로크 음악 연주에서 사건이 발생한다. 고전음악은 모든 연주가 오로지 이미 작곡자가 만든 각본(표상)에 들어맞는 동일한 ‘사례’가 되기만을 바란다. 이러한 일반성의 한 사례로 반복은 들뢰즈가 말하는 반복과 거리가 멀다. 바로크 음악은 모든 연주가 각각 고유한 연주가 되는 것을 허용하고 장려한다. 따라서 바로크 음악의 연주는 매번 상이한 사건인 셈이다.
음악에서 사건은 박절(mesure)와 리듬(rythme)의 구분에서도 나타난다. 들뢰즈에게 박절(박자)이란 마디를 구분하기 위해서 만들어놓은 거시적인 구조로서 분화의 논리와 관련이 있다. 이에 반해서 리듬이란 박절과 전혀 다른 특성을 지닌다. 리듬은 강도를 나타낸다. 획일적으로 개념화할 수 있는 박절과 달리 리듬은 심장을 동요하게 하여 몸으로 반응하게 만든다. 리듬은 반복되는 상황에 따라서 정황적(情況的)으로 만들어지고 강도로 느껴지는 감각적인 것이다. 리듬은 종차의 차이가 아닌 미분적 차이를 지닌다. 그것은 속도나 곡선의 기울기와 같은 것이다.
화성이라는 거대한 형식과 구조에만 치중하였던 고전음악에서 리듬은 실질적으로 무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전음악에서는 박자와 템포 혹은 화성과 화음 같은 거시적이고도 개념적인 종차의 체계만 강조되었다. 리듬은 화성, 박자, 조성 등의 거시적 구조가 아닌 음색이나 세기, 강도와 같은 음 자체의 미시적인 차원에서 발생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차이는 반복의 결과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2015. 08. 25., 박영욱)
첫댓글 http://m.artnstudy.com/n_lecture/LecDetail.asp?Lessonidx=jwLee19
이정우 차이와 반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