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재~상류암터(박)~청이당~구롱길~청이당(하산)~영랑대(박)~상류암터~새재

▼ <도솔산인>선생님이 공단에 협조공문까지 보냈고 여러사람이 동행하는 취재산행이라 비예보에도 강행하기로 했다.
규완형님과 원지에서 추어탕 한그릇하고 새재마을에서 <조용헌>박사님과 산행할 관리공단 직원들을 만나 상류암터로 향한다.

▼ 그간 <도솔산인>선생님과 선인들의 유산록을 쫓아 박여랑 길을 시작으로 상류암지와 김종직 길을 따라 구롱,일강길을 함께 답사하였다.
도솔선생님은 대둔산의 석각이 인연이 되어 조선일보에 칼럼리스트인 <조용헌>박사를 알게 되었고
전격적으로 이번 영랑대 산행을 추진하게 되었다.

▼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보니 쟁쟁한 분들이 많다.
전)치밭목대피소 민병태소장님도 보이고
완폭대,오두인각자를 발견한 조봉근씨와는 두번째 만남이고
관리공단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도 인문산행이 좋아 경상대 대학원을 다니는 정혜종씨는 초면이다.
그는 한문의 대가인 최석기교수님 문하에서 차세대 <인문산행>의 유망주로 자리 매김할 유능한 인재라고 도솔선생님이 귀띔해주신다.
마지막으로 지리산이 너무좋아 광광자(狂狂子)로 통하는 <소혼>님은 박산행의 대가이며 젤트를 최초로 고안한 분이라고 한다.

▼ 오늘도 선두엔 <조규완>형님이다. 해박한 지식과 다양한 경험으로 길을 찾는데 남다른 능력이 있으며 마암산막이 있던 행랑굴까지 말을 올렸다는 구전과 도솔선생님이 보내주신 유두류록을 읽고 548년을 잠자던 구롱길을 단번에 뚫었다.

▼ 독바위 양지골 입구에서 한번쉬고

▼ 일제 강점기에 수탈을 목적으로 철모삼거리까지 산판도로가 났었고 이후 묵은 도로를
빨치산 토벌을 위해 군사도로로 복원되었다가 현재는 비법정 탐방로로 묶여있다.
간혹 GMC 트럭용 Cam Shift가 나와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하지만 길을 복원할때 수리하면서 버린 것으로 보여진다

▼ 독바위양지 일원엔 삶에 흔적이 곳곳에 산재되어있다.
인근 주민들은 난리가 나면 여기로 피신을 했다고 한다.
이름에서 알수있듯 따뜻한 남향이며 입구에서 보면 "ㄱ"자 형대의 계곡의 안쪽에 자리잡고 있어서 몸을 숨기기엔 적당한 곳이다.
지난 겨울에도 반달곰들의 놀이터로 사용되는지 여기저기 흔적이 많이 있었다.
철모 삼거리 인근에서 또다른 마을터 입구로 연결된 길을 찾아 숲속으로 오른다

▼ 20분 남짓 된비알을 치고 오르면 상류암지 아래 삼거리에 도착한다.

▼ 궃은 날씨에 일치감치 상류암지에 박터를 구축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로 밤은 깊어간다

▼ 이틀 연짱 비 예보였는데, 다행이 아침에 날이 개인다

▼ 동쪽대에 올라서면 정면으로 웅석봉이 눈에 들어온다.

▼ 날도 개였으니 뒷쪽 대(臺)에 올라 역사속으로 <인문산행>을 떠난다

▼ <도> 지난밤에 잘주무셨나요?
<용> 잠을 잘 못잤습니다ㅠㅠ
<도> ....
<용> 꿈에, 문을 열고 나가니 끝없는 계단만 보이는 절벽위에서 자고 있더라구요
<도> ....
<용> 내가 감당하기엔 기가 너무 센거 같습니다.
강호동양학자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데 난 세상 모르고 잘만 잤는데^^

▼
<용> 저앞에 보이는 산이 뭡니까?
<도> 웅석봉인데 옛 명칭은 계명산(鷄明山)입니다.
<용> 사명대사가 닭울음소리에 깨닮음을 얻었다고 하니 이곳이 기도터로는 좋은것 같습니다.
<도> ....
<용> 기도를 통해 심신이 긴장되었다가 릴렉스될때 많이 깨우친답니다

▼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박지로 내려선다. 절 입구에 가로 놓인 배바위가 너무 좋다고 한다.
나쁜 기운은 막아주고 좋은 기운은 가둔다는 원리가 아닐까?

▼ 주변을 정리하고 기념사진을 남긴다.
아직은 가칭인 "지리산국립공원 역사문화조사단"이지만 그간 도솔산인 선생님께서 유람록 답사 산행에서 얻은 결과를 보면 지금이라도 체계적으로 조사가 필요해 보인다.

▼ 청이당으로 이어진 허릿길에서 곰이 비를 피해 잠을 잔 흔적을 발견했다.
조봉근씨는 화개분소에 있어서인지 곰의 생태에 대해서도 잘알고 있었다.

▼ 청이당 가는길은 급경사 된비알을 정신없이 오르는 내내 구름이 오락가락 하지만 날은 점점 맑아진다.

▼ 청이당 부근은 행정구역 경계가 여느 지점과는 달리 계곡을 가로지른다.
이는 조선중기에도 청이당이 함양군의 관할이며 함양군수였던 김종직과 박여랑이 그 경계지점인 이곳을 돌아보았다는 추측을 해본다.

▼ <천례탕> 하늘에 제사를 지낼려면 이런 바위가 있어야 한다고....

▼ 아직도 청이당 주변으로 얇고 가볍운 산청백토로 만든 옹기와 도자기 파편이 보인다.

▼ 조박사님 등산화 밑창이 입을 벌리기 시작했다. 보기에는 멀정해도 오랜동안 방치하면 중창에 기름끼가 빠져 밑창이 빠지는걸 몇번 본적이있다
다행히 나와 사이즈가 같아 조박사님과 일행들은 구롱길을 역(逆)으로 답사를 갔다.

▼ 한참후에 얼굴이 상기 되어 돌아왔다. 여덞 모랭이 직전 석문에서 방장문(方丈文) 석각을 발견했고 한다. 답사 산행을 하면서 몇번 지나갔지만 보질못했는데 조봉근님은 심안으로 한번에 찾아냈다

(이후 사진은 도솔산인 선생님이 보내준 사진입니다)
<도솔산인>님은 각자의 상태와 장(丈)오른쪽 윗쪽에 점이 있는 이체자로 보아 100년 남짓 된것으로 추정하셨다.
하지만 그이전부터 사용하던 길에 각인한 것임에 틀림이 없고 그동안 답사한 구롱길이 각자의 발견으로 확실하게 되었다.


왼쪽부터 김일권(소혼),조규완(경상대교수),민병태(전,치밭목대피소 소장),조용헌(조선일보 칼럼니스트),조봉근(화개분소),정혜종(가야산국립공원)


▼ 여덟 모랭이에 쉼터바위

▼ 이정표 나무


▼ 다시 청이당 계석에 모여 석각에 대해서 논의를 하고 일행들은 영랑대로 출발하고
내일 일정 때문에 홀로 새재마을로 하산한다.

▼ 다음날 영랑대에서 바라본 분위기1(이후 도솔선생님 사진)

▼ 다음날 영랑대에서 바라본 분위기2

▼ 다음날 영랑대에서 바라본 분위기3

▼ 다음날 영랑대에서 바라본 분위기4

▼ 다음날 영랑대에서 바라본 분위기5

▼ 마암산막



▼ 다시 돌아온 상류암지

▼ 캠프라인에 수릴 맡겼는데 가능할진 의문이다

그간 <도솔산인> 선생님께서 유산기를 읽고 답사 산행을 해오면서 밝혀낸 자료를 보면 지금이라도 심도 깊은 학술조사가 필요해 보인다.
여러사람이 모이면 많은 아이디어가 나오고 보는 시야 또한 다양해진다.
벌써부터 보존이냐 개발을 논하는것 보단 옛것을 체계적으로 고증해 나가는게 더 우선시 되었으면 좋겠다
도솔산인님 참고산행
조용헌의 영지 순례
첫댓글 안그래도 도솔산인님
8모릉에서 각자을 발견했다고 보여주시던데 ㅡ
뜻있는분들과 함께하는 모습들이 부럽네요 ~^-^~
기회되면 한번씩 가봐야지요
그때 칠성씨한테 물어보고 ㅡㅎ
석각을 지나면서도 알아보지 못했는데
조봉근씨가 발견했습니다
비가오고나니 숨어있던 각자가 도드라져 보이더군요
https://youtu.be/vFbXecivMW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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