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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장에 기록된 여인들(3)
하나님을 사랑한 룻
20151122마태복음 1장에 기록된 여인 룻(3).hwp
2015년 11월 22일 / 대예배 / 마태복음 1:1-17
설교 전에 하나님을 사랑하여 모든 것을 포기했던 썬다 싱에 대한 글을 봅니다.
■ 썬다 싱은 1889년 9월 3일, 인도의 북부 펀잡주 람풀이라는 작은 동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 지방의 아주 부유한 지주로서 가정생활은 매우 단란하고 평화로 왔다. 썬다 싱은 여러 아들 중 막내 아들로 부모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으면서 자랐고, 특히 어머니의 사랑과 종교적인 감화를 크게 받아 후일에 위대한 성자가 되는데 아주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종교적인 인물로서 아주 고상하고 순결하고 사랑받을 만한 행실이 많은 사람이었다. 또 종교적인 인물과 교제하기를 좋아해서 그 집에는 항상 덕망이 높은 스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여름철이 되면 여기저기 명산 큰 절을 순례하기도 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자라난 썬다 싱은 자연히 종교적인 성향이 많이 발달될 수밖에 없었다. 후일 썬다 싱은 어머니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저에게 믿음을 갖게 하신 것은 예수님이시고, 저를 사두(종교가) 되게 하신 것은 어머니입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신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어머니 품속이었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그의 사랑과 존경은 이토록 깊은 것이었다.
절망과 방황 / 썬다가 열네 살 되던 해, 그의 인생에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그토록 사랑하고 존경하던 어머니와 손위 형이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이 일은 어린 썬다의 마음에 너무나도 큰 충격과 슬픔을 던져주었고, 삶에 대한 회의와 절망을 느끼게 했다. 고독과 불안으로 병들어버린 그의 마음은 이제 신에 대한 믿음 없이는 살 수가 없게 되었다. 그는 날마다 비탄에 젖어 기도했다. “신이시여! 당신없이 나는 한 순간도 살지를 못하나이다. 내가 당신을 연모하고 갈급하오니, 오직 당신 안에서만 내 영이 쉴 수가 있나이다. 질식할 것 같은 이 불안을 거두어 주시고, 내게 평안을 주옵소서.” 그는 여러 종교를 기웃거리며 갖가지 방법으로 평안을 갈구하였지만 마음의 괴로움과 방황은 깊어만 갔다.
한편, 썬다는 교육을 받아야 했으므로 동네에 있는 장로교 소학교에 입학을 했다. 그런데 그 학교가 기독교 학교니 만큼 자연히 썬다의 힌두교적 수행 태도는 교사와 학생들의 주목을 받게 되고, 놀림의 대상이 되었다. 교사들은 썬다에게 기독교 교육을 더욱 강요하였다. 그는 점점 교사들과 학교를 미워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성경과 예수님에 대해서도 증오하기 시작했다. 그의 성격이 갑자기 돌변하여 갔다. 성경과목을 싫어하여 교사가 성경을 읽으라고 해도 책잃기를 거절하며 말썽을 일으켰고, 어떤 때는 그 시간에 불참하기도 했으며, 또 어떤 때는 고의적으로 당혹한 질문들을 하여 교사를 괴롭히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학생이 되어갔다. 그의 행실이 날이 갈수록 나빠지는 것을 보다 못한 아버지는 결국 썬다의 원대로 3마일이나 멀리 떨어진 공립 소학교로 그를 전학시켰다. 그랬더니 그는 이제 아예 발 벗고 나서서 기독교를 박해하는 자가 되었다. 그는 제 또래의 악동들을 모아 장터에서 전도하고 있는 전도자들에게 돌을 던지게 하고, 전도집회 장소마다 쫓아다니면서 오물과 쓰레기를 집어 던져 집회 분위기를 풍지박산 내었다. 아무도 이 소년이 어머니 손을 잡고 매주 착실하게 사원을 다니던 그 썬다라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어느 날은 교장 선생님께 찾아가 성경을 한 권 사고 싶다고 제의를 해서 얼마 후 성경을 얻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가져다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갈가리 찢어 케로신 기름으로 흔적도 없이 불태워 버렸다. 그의 기독교에 대한 반항심은 날이 갈수록 높아만 갔다.
그런 반면 그는 자기 종교로 마음에 만족을 얻으려고 요가의 달인(達人)을 찾아가서 묻기도 하고, 명상도 해보는 등 갖은 애를 써 보았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때인가는 번민하다 못해서 자기가 찢은 성경 가운데 혹시 무슨 도움을 받을 만한 게 없을까 하고 펴보니 “무릇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는 말씀을 보게 되었다. 그는 기뻐하며 ‘아! 이것이 바로 내가 찾는 참 평안이 아닌가’하고 한순간 몹시 감격했다. 또 한 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보고 두 번째 감동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썬다는 예수님을 믿겠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자살 결심 / 참된 진리를 찾지 못한 썬다 싱의 마음은 더욱 분열과 충돌과 번민으로 들끓었다. 그는 갑자기 모든 것을 단념해 버리고 자살하기로 결심했다. “내가 구하는 평화를 얻지 못하면 차라리 자살을 해서 저 세상에 가서 구하겠다” 그는 생사의 기로에 서서 단호하고 비장한 마음으로 신에게 매달리며 절박하게 간구했다. “이 천지간에 신이 있거든 소원을 이루어 주소서. 저에게 바른 길, 참 도를 가르쳐 주소서. 만약 당신께서 나타나 저를 붙들어 주지 않으시면 저는 아침 첫 특급 열차가 지날 때 레일 위에 저의 목을 깔고 자살할 것입니다. 그러하오니 신이시여, 참으로 당신이 계신다면 제게 나타나셔서 이 암흑의 공포를 거두어 주시고, 저를 구원하여 주옵소서.”
그리스도의 현현(顯現) / 1904년 12월 18일, 자정 무렵이 되자 그는 밖으로 나와 찬물로 온 몸을 깨끗이 씻었다. 그리고는 단정히 앉아 생의 마지막 기도를 드렸다. 이제 얼마 후면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썬다는 등에 땀을 흘리면서 최후의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그런데 새벽 4시 30분쯤 갑자기 방안 가득히 강렬한 빛이 비취었다. 썬다는 불이 났는가 하다가 곧 신이 응답해 주신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계속 기도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인가! 그 찬란한 광채 속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영광과 사랑이 넘치는 거룩한 예수 그리스도, 며칠 전까지만 해도 모욕을 가했던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가! 그는 거의 정신을 잃을 뻔했다. 그 때 그 빛 속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썬다야, 너는 왜 나를 핍박하느냐? 나는 너와 전 인류를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나의 생명을 버렸단다.”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쓰러지듯 예수님 앞에 꿇어 엎드렸다. 그리고 이때까지 얻지 못했던 놀랄 만한 평안을 얻었다. 참으로 오랫동안 갈망했던 행복을 얻게 된 것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리이심을 깨달았다. 썬다가 일어났을 때 예수님의 거룩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썬다 싱의 마음에는 평안과 기쁨이 가득 찼고, 그 후로 언제까지나 남아있게 되었다.
썬다는 잠을 자고 계시던 아버지께 달려갔다. 놀라는 아버지께 예수님을 뵈었다고 하니 아버지는 그가 잠꼬대 하는 줄 알고 “가서 자라. 엊그제 성경을 불태우지 않았니? 그리고 벌써 기독신자가 되었다고 그러느냐?”고 하였다. 그러자 썬다는 똑바로 서서 두 손을 내려다 보며, “이 손이 악을 저질렀습니다. 이제 죽기까지 그 죄를 씻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아버지께 결연한 각오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부터 저는 생명이 다할 때까지 온전히 예수님의 것입니다.”
박 해 / 1904년 12월 18일 새벽의 그리스도 발현 사건은 썬다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그는 자신의 전 생애를 그리스도께 바치기로 한 것이다. 썬다는 그날로부터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님을 증거하기 시작했고, 곧 그의 기이한 개종소식은 람푸르 일대에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시크족의 전통을 목숨처럼 중요하게 여기는 아버지는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는 썬다의 이러한 행동을 가만히 두고만 볼 수 없었다. 그렇게도 다정스럽던 아버지와 가족들이 매질을 하고 침을 뱉으며 돌아섰다. 그러나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10:37-38)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모든 슬픔을 이겨 나갔다. 썬다에게는 아버지 못지않게 조카를 대단히 사랑하던 숙부님이 계셨다. 한 번은 조카의 마음을 고쳐볼까 하고 썬다를 데리고 지하실로 들어가더니 많은 돈과 값진 금은보석이 가득 들어있는 금고를 열어 보였다. 그리고는 자기 머리의 두건을 벗어 그의 발아래 놓고 아주 겸손한 말로 “네가 만약 그 외국 종교를 버리고 우리와 같이 있게 된다면 이 모든 것이 다 네 것이 될 것이다”하고 설득하였다. 썬다는 이때 숙부님의 이토록 겸손한 청을 거절하기가 너무나도 어려워 괴로움과 슬픔의 눈물을 한없이 흘렸다. 그러나 또다시 썬다의 눈에는 영광과 자비가 가득찬 예수님의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그는 숙부님께 담대히 말했다. “숙부님, 죄송합니다. 비록 이 세상의 모든 부귀를 다 준다 할지라도 내 마음 속에 가진 이 평안과 바꿀 수 없습니다. 내 몸이 불사름을 당할지라도 나의 사랑하는 주님을 배반할 수 없습니다.”
썬다 일가는 학교측과 람푸르 선교측에 항의를 해서 교장을 다른 학교로 전임시켰고, 선교회측의 뉴톤 목사를 법정에까지 서게 하였으며 미션 학교는 문을 닫고 몇 안 되는 교인들은 박해를 견디다 못해 로푸르라는 곳으로 집단이주를 해야만 했다. 견디다 못한 썬다는 학교가 문을 닫을 때, 그도 고향을 떠나 루디아나시에 있는 장로교 계통의 고등학교로 갔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그곳 학생들은 이름만 신자였지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보고 적이 실망하고 얼마 후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썬다는 계속해서 설복하고 박해하는 가족 친척들에게 자신의 각오를 보이기 위해 시크족의 경전도 버리고, 태어나면서부터 한 번도 잘라보지 않았던 두발도 밀어버렸다. 모든 사람들 특히 그 형들은 몹시 격분하여 입으로 말할 수 없는 욕설과 학대를 했다. 밥도 같은 상에서 먹지 못하게 하면서 음식물을 개처럼 던져주었고, 가축과 같이 생활하게 했다. 그러나 썬다는 그렇게 마음 아픈 일을 많이 당하고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려는 결심은 변치 않았다.
집에서 쫓겨남 / 아무리 박해를 해도 변치 않는 썬다 싱의 마음을 알게 된 아버지는 마침내 최후 선언을 하였다. “가문의 이름으로 말하거니와, 우리는 너를 영원히 버리고자 한다. 이제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니 다시는 돌아오지 말아라. 지금 입은 그대로 가거라.” 그렇게도 사랑하던 막내 아들을 아버지는 이처럼 단호하게 버렸다. 십자가를 각오했지만 썬다 싱의 가슴은 터질 둣 아팠다. 집에서 쫓겨난 그 날 밤은 몹시 추웠다. 그가 가진 것이라곤 신약 성경 한 권 밖에 없었는데, 썬다는 그것을 꼭 쥐고 로푸르쪽을 향하여 하염없이 걷다가 숲 속의 큰 나무 밑에서 밤을 새웠다.
날이 밝자 그는 자신 때문에 쫓겨난 기독교인들이 살고 있는 로프르를 향하여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몇 발자국 못가서 갑자기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에 배를 움켜 쥐고 기진맥진하여 겨우 로푸르에 닿았고, 우팔 목사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거의 기다시피 하여 문지방을 넘었다. 목사에게 안기자 그는 피를 토하기 시작했고, 의사가 올 때까지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그를 진찰한 의사는 그가 독약이 든 음식을 먹었다는 것과 너무 늦어 살릴 가망이 없다고 말했다.
집을 떠날 때 점심밥이라고 준 그 밥덩어리 속에 독약을 넣었던 것이다. 가족들은 썬다가 살아남아서 부끄러움을 나타내면서 기독 신자로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여 없애버리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썬다에게는 강한 확신이 떠올랐다. ‘주님께서 나를 무의미하게 죽게 하려고 암흑 중에서 구원하여 한없는 그 축복을 주실 리는 없다. 나는 더 살며 주님의 증인이 될 사명이 있다.’ 이렇게 생각한 썬다는 심한 고통 속에서도 있는 힘을 다해서 주님께 기도하였다. 다음 날 궁금해서 와 본 의사는 그늘에서 성경을 읽고 있는 썬다를 보자 벼락을 맞은 듯이 놀랐다. 이 일로 충격을 받은 의사는 후에 기독교 신자가 되어 버마에서 주님을 위한 전도 활동을 열심히 하였다.
● 룻기의 작은 책은 보통으로 사사기 다음에 오는 것으로 해설하는 간단한 절로 구성된 책입니다. 그러나 총 85절로 고대 베들레헴에 살았던 이스라엘 사람의 가정이 비참하게 파멸되는 내용입니다.
룻 1:1 / 사사들이 활동하던 때에 그 땅에 기근이 든 적이 있었다. 그러자 유다 베들레헴에 살던 어떤 남자가 모압 지방에 가서 더부살이하려고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길을 떠났다.
무서운 흉년으로 인하여 자기의 고향 땅을 떠나 스스로 살길을 구하여 나선 것입니다. 그러나 모압의 나그네 땅에서 저희 가정은 더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남편과 아들들 모두를 빼앗긴 어머니와 남편들이 없는 청상과부(靑孀寡婦)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시어머니인 나오미의 입장은 최악의 경우로 더 이상 모압에 남아 있지 못할 입장이었습니다. 그 무렵 여호와께서 당신 백성을 돌보시어 유다 땅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나오미는 모압에서 이 소문을 듣고 두 며느리와 함께 그곳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하였습니다(룻 1:6).
유다 땅으로 돌아가려고 살던 곳을 떠나 길을 가다가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얘들아, 너희는 이제 친정으로 돌아들 가거라. 너희가 죽은 내 두 아들과 나한테 그토록 잘해 주었으니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잘 보살펴 주시기를 빈다. 9) 또 그분께서 너희를 돌보셔서 새 남편을 만나 보금자리를 꾸미기 바란다.” 그러고 나서 두 며느리에게 입 맞추어 작별인사를 하자 두 며느리는 울음을 터뜨리며 “싫어요, 어머니! 저희는 어머님을 모시고 갈래요. 어머님하고 어머님 겨레의 품으로 가겠어요.”라고 합니다. 그러자 나오미는 마음 아파하면서도 냉철하게 말합니다. “얘들아, 돌아들 가거라. 너희가 어쩌자고 나하고 같이 가려고 하느냐. 내가 너희 남편 될 자식들이라도 낳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얘들아, 너희는 새롭게 시작해야해. 나는 이렇게 늙어 재혼할 수도 없는 몸 아니냐. 만일 내게 어떤 희망이 남아 있어서 오늘 밤이라도 남편을 맞아들여 자식을 낳는다고 하자. 그렇다고 해서 너희가 그 아이들이 자랄 때까지 기다릴 수야 없지 않겠니? 그걸 바라고 재혼도 하지 않고 무작정 기다릴 수야 없는 일 아니냐. 얘들아, 그건 정말 안 될 말이다. 나야 어차피 여호와께 얻어맞은 신세라고는 하지만 너희들 때문에 내 마음은 말할 수 없이 아프단다.” 그들은 다시 소리 높여 울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오르바는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어 작별인사를 하였습니다. 마음의 큰 짐을 더는 것 같았지만 섭섭한 마음도 순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시어머니 곁에 붙어 떠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나오미가 다시 타일렀습니다. “얘야, 네 동서는 자기 겨레와 자기 신에게로 돌아가지 않았니? 그러니 너도 네 동서를 따라 돌아가거라.” 그러자 룻이 말하였습니다. “저에게 어머님을 떠나 혼자 돌아가라고 너무 그러지 마세요. 어머님 가시는 곳에 저도 가겠어요. 어머님 머무시는 곳에 저도 머물겠어요. 어머님 겨레는 제 겨레가 아닌가요? 어머님이 섬기시는 하나님은 제 하나님이 아닌가요? 어머님이 눈 감으시는 곳에서 저도 눈을 감겠어요. 어머님 곁에 묻히겠어요. 저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어머님 곁을 떠나지 않겠어요. 만일 제가 어머님 곁을 떠나게 된다면 여호와께서 어떤 천벌을 내리신다 해도 달게 받겠어요.” 이에 시어머니는 이를 만류치 못하였습니다. 룻은 모든 것을 포기하였으니 정든 고향 산천과 친정집과 미래의 행복한 삶의 희망조차도 포기하고서 시어머니 나오미를 사랑하여 끝까지 수절하고 섬기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오미의 하나님과 그 나오미의 백성과 함께 살겠다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룻의 말에 마음은 아팠지만 한편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나오미는 베들레헴에 도착합니다. 그러나 아무런 돕는 자도 아무런 위로자도 없는 고향 땅입니다. 며느리 룻만이 자기를 보살필 뿐입니다. 하루는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어머님, 밭에 나가고 싶어요. 혹시 저를 잘 봐주시는 분이라도 만나면 그분 뒤를 따라다니며 이삭이라도 주워 올까 해요.” 그러자 나오미가 며느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룻이 밭에 나가 곡식 거두는 일꾼들을 뒤따라가며 이삭을 줍는데 그 밭은 공교롭게도 엘리멜렉의 일가붙이인 보아스의 밭이었습니다. 보아스는 남편 엘리멜렉의 일가붙이로 재산이 많은 마을 유지였습니다.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 와서 곡식 거두는 일꾼들에게 “저 젊은 여인은 누구인가?”묻자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모압 여인이라고 하더군요. 곡식 거두는 일꾼들을 뒤따라가며 곡식단 사이에서 이삭이라도 줍게 해달라고 어찌나 애원을 해대는지. 아침부터 와서 농막에서 잠깐 쉰 것 빼고는 지금까지 저렇게 계속 일하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말을 건넵니다. “모압댁, 내 말 좀 들어 봐요.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아요. 여기서 다른 데로 가지 말고 우리 집 아낙네들을 따라 같이 다니시오. 일꾼들이 일하는 이 밭을 한번 보구려. 저 일꾼들 뒤만 좇아다니시오. 저 젊은 일꾼들에게는 모압댁에게 치근덕거리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두었소. 목이 마르거든 일꾼들이 항아리에 길어다 놓은 물이 있으니 목을 축이도록 하시오.” 그러자 룻이 땅에 엎드려 절하며 말했습니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저에게 잘 대해 주시나요. 이방 여자인 저에게 이토록 마음을 써주시다니!” 보아스가 룻에게 말하였습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에 모압댁이 시어머님을 어떻게 모셨는지 내가 다 들어서 알고 있소. 또 어떻게 해서 고향과 부모님 품을 떠나 낯선 백성이 사는 이 땅으로 오게 되었다는 말도 내가 자세히 들어서 알고 있소. 여호와께서 모압댁이 지금까지 살아온 모습을 보시고 그대로 갚아 주시길 바라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안식처를 찾아 그 품안에 들어온 모압댁에게 넉넉하게 갚아 주시길 바라오.” 끼니때가 되자 보아스가 룻에게 말하였습니다. “모압댁, 이리로 좀 와서 떡을 떼어 이 시큼한 장에 찍어 들어 봐요.” 룻은 곡식 거두는 일꾼들 곁에 앉았습니다. 그들이 볶은 곡식을 주어 룻은 배불리 먹고도 남았습니다. 룻이 이삭을 주우러 일어나자 보아스가 일꾼들에게 일러두었습니다. “저 여인이 곡식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더라도 싫은 소리 하지 말게. 오히려 단에서 조금씩 이삭을 뽑아버리게. 그러면 저 여인이 이삭을 많이 주울 수 있겠지. 절대로 저 여인을 꾸짖지들 말게.”
룻은 밭에서 저녁때까지 이삭을 주웠습니다. 주운 이삭을 떨어 보니 보리가 한 말이나 되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마을로 돌아와 시어머니에게 보여드렸습니다. 그리고 배불리 먹고 남겨 온 것도 시어머니에게 드렸습니다. 시어머니가 물었습니다. “얘야, 오늘 어디서 이삭을 주웠느냐? 어디서 일했어? 너에게 이토록 잘해 주신 분이 있다니, 여호와께 복 받았으면 좋겠다.” 룻이 어느 집 밭에서 일하였는지를 시어머니에게 말하였습니다. “오늘 제가 이삭을 주운 밭의 주인이 보아스라고 하더군요.” 그러자 나오미가 며느리에게 “여호와께서 그분께 복을 듬뿍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 그분이 돌아가신 남편과 자식들에게 그렇게 잘해 주시더니 이제는 이 세상에 남아있는 우리들에게도 이토록 잘해 주시는구나. 그분은 우리 집안과 가까운 분이라 우리를 떠맡아 주셔야 할 사람 가운데 한 분이야.” 하고 말하였습니다. 모압 여인 룻이 “또 그분이 자기 집 곡식 거두기가 다 끝날 때까지 자기 집 일꾼들과 꼭 같이 다니라고도 하시더군요.” 하고 말하자 나오미가 며느리 룻에게 “그래, 얘야, 다른 밭에 가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지 말고 그 집 아낙네들과 꼭 붙어 다녔으면 좋겠다.” 하고 일렀습니다. 그래서 룻은 보리와 밀 거두기가 끝날 때까지 보아스 집안의 아낙네들을 따라다니면서 이삭을 주우며 시어머니와 함께 살았습니다. 룻의 순수한 신앙에서 나오는 시어머니를 향한 사랑은 그 어느 누구의 효성보다도 맑고 깨끗하며 헌신적인 것이었습니다.
■ 옛날 어느 마을에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단 둘이 사는 젊은 부부가 있었답니다. 그 부부는 평생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게 소원이었습니다. 어느 날 남편이 장에 갔다가 희한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어느 집에서 아버지를 돈 천 냥에 판다는 겁니다. 방까지 붙어 있었습니다. 그 남편이 집으로 돌아와서 아내에게 그 이야기를 해 줍니다. 아내는 어이없어 하더니 잠시 후 말을 꺼냅니다. “여보, 우리가 그 아버지를 사서 모십시다.” 하지만 그들은 단돈 열 냥도 없는 가난뱅이였습니다. 그래서 고민하다 빚을 얻기로 작정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천 냥 빚을 얻은 부부는 물어물어 그 집을 찾아갑니다. 집안에서 점잖은 노인이 나옵니다. 아버지를 판다고 해서 왔다고 말하니까 노인이 묻습니다. “그래, 아무 쓸데없는 늙은이를 사서 뭐하려고?” 부부는 담담히 말합니다. “우리는 조실부모하고 외롭게 살고 있습니다. 부모님 모시고 사는 게 소원입니다. 가난하지만 정성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그랬더니 그 노인이 무릎을 탁 치면서 말합니다. “이제야 소원을 풀었네. 이제야 진짜 자식을 얻었어.” 그러면서 사연을 이야기합니다. “내가 바로 팔려갈 아버지라네. 나는 자식이 없어. 내 늘그막에 산에 갔다가 산삼 세 뿌리를 발견해서 큰 돈을 벌었지. 그 돈으로 양아들을 얻어 함께 살고 싶었어.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돈을 탐내는 사람들이 몰려올 게 아냐? 그래서 헛소문을 낸 거야. 이제 바라던 자식을 얻었으니 소원을 풀었네.” 이렇게 해서 그 부부는 노인을 모시고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정말 문자 그대로 ‘옛날이야기’입니다. 옛날에 왜 이런 이야기가 있었겠습니까? 옛날에도 효도하는 게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더 심해졌지만 충효를 몹시 강조하던 그 시대에도 효도하는 게 결코 쉽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주면서 일깨우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크지만,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기는 좀처럼 어렵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런 본성을 잘 아시고, 부모를 공경하는 것을 강조하고 또 강조하십니다. 마치 보너스를 주듯이 특별한 축복을 약속하면서 장려하셨습니다. 부모 공경은 십계명 중 제5계명인데, 다른 계명과 달리 ‘축복의 약속’이 붙어 있습니다. 부모 공경은 당연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강조하시고 장려하시느라 축복의 약속을 덧붙여주신 겁니다. 사도 바울도 구약 성경을 그대로 인용하며 강조하고 있습니다.
신 5:16 /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령하신 대로 네 아버지와 네 어머니를 공경하라. 네가 그대로 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가 오래 살고 좋은 일을 많이 볼 것이다.
엡 6:1-3 / 자녀들은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자녀를 감독할 권리를 부모에게 주셨으므로 자녀들은 마땅히 부모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2)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이 십계명 중에서 약속이 붙어 있는 첫째 계명입니다. 3) 그 약속이란 ‘네 부모를 공경하면 너는 복을 받고 오래 살리라’는 것입니다.
▶ 룻의 신앙과 결단 :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 룻이 시어머니에게 그런 사랑을 실천할 수 있었던 것은 질실한 신앙의 소유자였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결단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아니 신앙인 모두에게 하나님께서는 매번 신앙의 결단을 요구하십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결단을 요구하셨습니다.
마 7:13-14 / 하늘나라는 좁은 문으로만 들어갈 수 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넓고 그 문도 커서 쉬운 길을 택한 많은 사람이 다 그리로 들어간다. 14) 그러나 생명으로 들어가는 길은 좁고 그 문도 작아서 그리로 찾아드는 사람이 별로 없다.(눅 13:24 / 하늘로 들어가는 문은 좁으니 그리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들어가려고 애를 써도 들어가지 못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룻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넓고 평탄한 길 보다는 좁고 어려운 길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룻은 이방여인으로 성경에 기록되어서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해져 은혜를 끼치고 있습니다.
룻이 시어머니와 함께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어느 누구도 그들을 따뜻하게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기다린 것은 곡식이 아닌 남들이 추수하다 남은 낟알들뿐이었습니다. 그러한 환경에서도 룻은 자신이 선택한 그 길에 대해서 성실한 자세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신앙 안에 사는 우리는 좁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입니다. 교회 일을 하다보면 종종 어려운 일들이 많습니다. 잘했다고 칭찬받는 일보다는 잘못했다고 비판 받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좁은 길을 얼마나 성실하게 걸어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명한 집안의 유명한 사람들만 선택해서 사용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룻을 보더라도 이방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룻은 마태복음 1장의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되었습니다. 룻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여인이 되었던 것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좁은 길을 성실하게 걸어갔기 때문입니다.
살몬의 아내가 된 기생 라합이 자기네 나라와 민족을 떠나 이스라엘의 하나님 편에 서서 정탐꾼을 보호해 주었듯이 룻은 소망이 없는 늙은 시어머니를 공궤하여 복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참된 신앙은 깨끗한 믿음과 헌신적인 행함이 겸비하여야 한다는 것을 다시 기억하게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하나 깨닫게 됩니다. 나오미가 룻에게 효도를 강조하거나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헤어지면서도 신앙을 권유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룻이 진실한 신앙인이니까 친정으로 돌아가라 재혼하여 편히 살라고 해도 오히려 정색을 하며 소망이 없는 늙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나선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의 입장에서 자녀들에게 효도 받기를 원하십니까? 자녀들에게 대우받고 존경받는 게 솔직히 인지상정(人之常情 - 사람이 보통 가질 수 있는 마음) 아닙니까?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것입니까? 자녀들에게 요구하고 호통 친다고 되나요? 아니죠. 다만 우리가 신앙을 바로 가르치고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면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 생기면 스스로 깨달아 효도를 하게 될 것입니다.
엡 6:4 / 부모들에게도 한마디 당부하겠습니다. 자녀들을 너무 꾸짖지 마십시오. 또 잔소리를 늘어놓아 반항심을 일으키거나 분노를 품게 하지 마십시오. 그보다는 주님의 사랑이 담긴 훈계와 조언과 충고로 키우십시오.
▶ 룻이 받은 축복 : 메시야 족보에 오른 여인 /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에 온 룻의 삶은 세상적으로는 그 어떤 소망도 없는 100% 고단함 그 자체였습니다. 그 시대에는 여자가 어디 취직할 데도 없었습니다. 드러내놓고 활동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고대 이스라엘에 나름대로 복지제도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율법으로 정해놓으신 것인데, 밭에서 추수할 때 이삭을 남겨둡니다. 그러면 가난한 사람들이 와서 주워갑니다. 룻도 보리밭에 나가 이삭을 주웠습니다. 일꾼들 잔심부름을 해주면서 주어오는 보리로 어머니를 봉양합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밭의 주인이 누구였습니까? 보아스인데 그는 나오미 가정의 친척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요 축복이었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에는 ‘고엘’(Goel)이라는 독특한 제도가 있었습니다. ‘기업을 무를 자’(룻4:14)가 바로 ‘고엘’입니다. ‘고엘’은 ‘구원하다’ ‘친족의 일을 떠맡다’라는 뜻의 동사의 명사형으로 ‘친족 구원자’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일종의 사회보장제도였는데, 어떤 사람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 가까운 친족으로 하여금 도움을 주도록 규정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재산을 다 잃고 먹을 게 없으면 도와줘야 합니다. 빚도 갚아주고, 종살이에서 풀어줘야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계대결혼도 해줘야 합니다.
나오미는 보아스가 가까운 친척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면서 룻에게 청혼하도록 코치합니다. 평소에 밭에서 일하던 룻을 눈여겨보았던 보아스는 흔쾌히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보아스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한 명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고엘의 의무(혹은 권리)를 포기해야 보아스 차례가 됩니다. 그래서 보아스는 그 사람을 찾아갔고 그가 포기함으로 많은 증인들의 축복 속에서 룻과 결혼하게 됩니다.
룻 4:9-12 / 그러자 보아스가 마을 웃어른들과 거기에 모여 있는 마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의 소유였던 모든 것을 내가 나오미에게서 산 일에 대해 오늘 이 자리에 모여 계신 여러분들께서 증인이 되셨습니다. 10) 또한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나의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이제 아이를 낳아 고인의 소유지에 그의 이름이 길이 이어지도록 하겠고 그의 이름이 고인의 동기들과 마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이 일에 대해서 여러분들께서는 증인이십니다.” 11) 성문 위 마을회관에 모여 있는 마을 사람들과 웃어른들이 대답하였다. “우리가 증인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대 집안으로 들어가는 여인을 이스라엘 집안을 일으켜 세운 두 여인 라헬과 레아 같게 하시기를 빕니다. 또 여호와께서 그대를 에브랏에서 유력한 인물이 되게 하시고 베들레헴에서 이름을 날릴 수 있도록 해주시기를 빕니다. 12) 또 여호와께서 이 젊은 여인을 통하여 그대에게 대를 물려받을 아이를 주시어 그대 집안이 다말과 유다 사이에서 낳은 베레스의 집안처럼 될 수 있게 해주시길 빕니다.”
그리고 그 동안 전 남편인 말론에게서 무슨 원인인지는 모르나 자식을 얻지 못했던 룻이 보아스와 재혼하니 하나님께서 자식을 낳을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룻 4:13 / 이렇게 하여 보아스가 룻을 아내로 맞아들여 그 여인과 잠자리를 같이하였다. 여호와께서 그 여인의 몸에 새 생명을 허락하셔서 그가 아들을 낳았다.
그 족보가 4:18절~22절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마태복음 1장에 다시 나옵니다.
룻 4:18-22 / 베레스의 족보는 다음과 같다.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았고 19)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20)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21)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22)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다.
마 1:5-6 /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 이새는 다윗왕을 낳았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세상에 오실 때 이 가문을 통해 오셨습니다.
마 1:1 /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다음과 같다.
본래 이스라엘의 족보에는 여자가 올라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메시야 족보에는 몇 명의 여인들의 이름만 올려 있습니다. 그 여인들은 믿음의 여인들이요 하나님 앞에 큰 영광을 돌리고 축복을 받은 여인들입니다. 그 중에 모압 여인이요 결혼했던 적이 있는 룻의 이름이 당당히 올라가 있습니다. 룻은 다윗 왕의 증조할머니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보아스의 부모가 되는 살몬과 기생 라합으로부터 많은 사랑과 신앙을 본받게 됩니다. 즉 룻의 신앙에 살몬과 라합 그리고 보아스의 신앙이 어울러져서 아주 귀한 신앙인이 됩니다. 그리고 보아스와 룻의 결정체가 오벳과 이새와 다윗이 된 것입니다.
룻은 하나님을 따르기 위해, 시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베들레헴 유지의 아내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육신적으로 유복한 삶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더 나아가 영적으로 메시야의 조상이 되는 영광을 안게 된 겁니다. 우리가 장차 천국에 들어가면 룻의 영광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룻의 이야기를 통해 살펴본 대로 부모 공경은 신앙의 시금석이기도 합니다. 인륜의 근본이며 축복의 비결입니다. 부모 공경은 하나님 공경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이 진실한 것이라면, 성숙한 것이라면 당연히 부모 공경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부모님을 존경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육신적으로나 심리적으로 평안하게 해드려야 합니다. 내리 사랑이지만 자식들에게 하는 것에 비해 부모님께 하는 게 얼마나 소홀합니까? 만일 자식에게 하는 것의 1/10만 해도 효자ㆍ효부가 될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부모님이 예수 믿고 천국에 가실 수 있도록 도와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싫어하신다고 방치하는 것은 효도가 아닙니다. 가장 큰 불효입니다. 우리가 정말 천국과 지옥의 실존을 믿으면서도 부모님에게 신앙을 강권하지 않는 것은 결국 나만 천국에 가고 부모님의 영혼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말이 됩니다. 다행히 신앙이 좋은 부모님이라면 더욱 공경하고 귀히 여기시되, 혹시 신앙이 없는 부모님이 계신다면 예수님께 꼭 인도하시기 바랍니다. 부모님은 오래 기다려주시지 않습니다.
■ ○○ 교회 집사님 가정의 이야기입니다. 시어머님이 노환으로 오래 누워계셨습니다. 그동안도 복음을 전했지만 아무래도 구원의 확신이 분명하지 않은 것 같아 마음에 부담이 되었나 봅니다. 하루는 목사님에게 심방을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들어가자마자 마주친 어르신의 표정은 아주 완고한 모습이었습니다. 어떻게 접근할까 궁리하는데 겨우 인사만 받으신 그분이 눈을 감아버리더니 이내 잠이 든 겁니다. 난감했습니다. 하루 종일 스케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우리끼리 예배드리고 가자니, 혹시 다음번에 다시 심방오기 전에 혹시라도 세상을 떠나시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고민하다 복도로 나가 전화로 일을 보면서 기다렸습니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 깨어나셨다는 말을 듣고 들어가 예배를 드리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때 성령께서 역사하셨습니다. 그 어르신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결신기도까지 따라 하는 겁니다. 그러더니 얼굴이 환해지시는 겁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그 집사님은 시어머니 뺨에다 뽀뽀를 하면서 “아이고, 우리 어머니 예쁘셔라!” 하며 좋아하셨습니다. 젊은 날에 힘들게 했던 시어머니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된 며느리 집사. 예수 믿고 나서 그 시어머니를 진심으로 사랑하며 섬기는 모습을 보면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며칠 후 시어머님이 천국에 가신 것입니다. 얼마나 아슬아슬했는지! 그 집사님은 최고의 효도를 한 것입니다. 우리도 부모님에게 이런 효도를 해야 됩니다. 쉽지 않지만 눈물로 기도하면서, 우리를 위해 평생 고생하신 부모님을 천국으로 꼭 인도하시기 바랍니다.
▶ 최후의 승리를 얻기까지 십자가를 붙잡고 승리하시는 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1. 갈보리산 위에 십자가 섰으니 주가 고난을 당한 표라 험한 십자가를 내가 사랑함은 주가 보혈을 흘림이라 <후렴>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2. 멸시 천대 받은 주의 십자가에 나의 마음이 끌리도다 귀한 어린양이 세상 죄를 지고 험한 십자가 지셨도다
3. 험한 십자가에 주가 흘린 피를 믿는 맘으로 바라보니 나를 용서하고 내 죄 사하시려 주가 흘리신 보혈이라
4. 주님 예비하신 나의 본향 집에 나를 부르실 그 날에는 영광 중에 계신 우리 주와 함께 내가 죽도록 충성하리
잠 24:16 / 올바로 사는 이들은 수도 없이 넘어진다 할지라도 또다시 일어서고야 말 것이다(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히브리서 11장에도 나오지만 수많은 믿음의 선진(先進)들이 수많은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킴으로 축복으로 끝나듯이 우리도 고난 속에서 헤매지 말고 믿음을 지키십시다.
약 5:10-11 / 고난 가운데서도 인내로 이겨 낸 주님의 예언자들을 본받으십시오. 11) 그들은 심한 고난을 당하면서도 끝내 주께 진실했으므로 지금 하늘나라에서 행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욥은 슬픔을 이기며 끝까지 주님을 믿은 사람의 모범입니다. 욥이 겪어 낸 일을 보고 우리는 주님의 계획이 축복으로 끝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께서는 한없는 은총과 자비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결론입니다.
룻과 나오미는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먹을 양식을 주시고, 다시 가정을 이루게 하시고, 자녀도 허락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이 그들에게 베푸신 은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다 알지 못했습니다. 다 알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 차원이 다릅니다. 그 크기가 다릅니다. 그래서 정말 놀랍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는 그들이 생각하고 인지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거대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저 생계를 유지시켜주고, 엘리멜렉의 가계를 지속시켜주고, 가련한 과부들을 구해주는 정도의 은혜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이들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이 사실을 몰랐지만, 하나님은 이들을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 다윗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이 이방여자의 이름으로 성경을 기록케 하셨습니다. 모압 여인, 룻을 영원토록 읽힐 말씀의 주인공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메시아의 족보에 오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룻기에 기록된 여러 사건들을 이끌어 가시면서 인류 구원의 큰 그림을 그리고 계셨고 그 위대한 일에 이들을 사용하셨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가늠할 수 없는, 높고도 깊은 은혜를 주신 겁니다. 룻이 천국에서 자기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보며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내가 무엇이기에, 내가 한 것이 무엇이라고 이렇게 이해할 수 없는 큰 영광을 누리게 하시는 걸까?”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차원이 높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위대한 것인지, 이 땅에서는 결코 다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은혜를 받았는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사용해서 어떤 드라마를 만들고 계시는지, 우리를 어떤 위대한 일에 엮여 놓으실지 우리는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를 통해 어떤 일을 이루실지 모르는 겁니다.
■ 에드워드 킴벨이라는 주일학교 교사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자기 반의 아이들이 예수님의 은혜를 확실히 알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토요일마다 아이들 한 사람씩 찾아가면서 그 은혜를 전하고, 구원을 점검했습니다. 그러던 중 학교를 포기하고 삼촌의 구둣방에서 일하는 가련한 아이를 찾아갔습니다. 그 아이에게 복음을 전했고, 구둣방 작업실에서 그 아이는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후에 그 아이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위대한 전도자가 됩니다. 그 아이가 D. L 무디입니다. 이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에드워드 킴벨이라는 한 주일학교 교사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 은혜에 감동해서 뭔가를 했던 한 사람을 통해서 이 위대한 드라마가 시작된 것입니다.
역전승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금번 야구 국가대항전 프리미어 12 준결승에서 3:0으로 일본에게 뒤지고 있던 한국이 9회 초에 대거 4점을 뽑아 역전승에 성공했습니다. 다 지고 있던 게임, 포기할 수밖에 없던 그 게임이 완전히 뒤집어지는 사건! 그래서 승리의 축복으로 이어지는 그 승리가 9회 역전승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이런 역전승의 역사가 일어난다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의외로 빨리 낙심을 합니다. 빨리 포기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역전승에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끝까지 지켜보고 끝까지 남아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축복 속에 내 자신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란 말을 신앙생활에서 적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많은 사람들이 끝까지 기다리지를 못합니다. 빨리 포기를 합니다. 낙심을 합니다. 좌절을 합니다. 주저 않습니다. 결국에는 그 뒤에 나타나는 엄청난 역사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끝날 때까지는 절대로 포기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상황들을 역전시켜 나가십니다. 바울의 고백 겸 간증인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말씀을 우리의 신앙생활에 꼭 대입시키십시다.
성경에 쭉 성공한 인물들, 하나님의 축복을 누렸던 인물들을 가만히 보시면 모두 역전승에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요셉, 욥, 에스더와 모르드게 등등...
그중에 다니엘이 있습니다. 파사 신하들이 다니엘을 사자굴속에 집어넣으려고 온갖 계략을 다 꾸몄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계략을 따라서 실제적으로 이 다니엘을 사자굴속에 집어넣었습니다. 그 날 밤에 그들에게 자축연이 벌어졌습니다. ‘눈에 가시처럼 생각했던 저 다니엘을 사자굴속에 집어넣었다! 이제 다니엘은 사자 밥이 되었다!’ 그래서 그들이 승리에 취한 나머지 잔치를 베풀고, 파티를 열고, 그래가지고 술을 주거니 받거니 했을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떤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사자굴속에 던져져서 죽을 줄로만 알았던 다니엘은 살아납니다. 반대로 사자굴속에 집어넣었던 그 사람들이 사자굴 속에 던져 졌는데, 그들 몸이 사자굴 바닥에 닿기도 전에 사자들이 그들에게 달려들어 뼈까지 씹어 삼켜 버렸습니다.
그뿐 아니라 다리오왕이 제국 내에 살고 있는 모든 백성들에게 조서를 내렸습니다. “나 다리오가 그대들에게 명을 내리노라. 내가 다스리는 제국안에 살고 있는 모든 백성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니엘이 섬기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섬겨라. 그분은 살아 계시는 하나님, 영원히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니 그분의 나라는 결코 망하지 않으리라. 그분의 권세는 결코 꺾이지 않으리라. 그분은 사람을 건지시는 분, 사람을 구해 내시는 분, 하늘에서든 땅에서든 이적을 베푸시는 분, 놀라운 일을 일으키시는 분, 바로 그분께서 다니엘을 구해 내셨다. 사자굴에서 아무 흠도 없이 건져내셨다.'(단 6:25-28) 다니엘은 다리오왕 이 다스리던 시대와 바사 왕 고레스가 다스리던 시대에도 많은 존경을 받으며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