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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찾아오시는 예수님(1)
2018년 9월 16일 / 대예배 / 요한계시록 3:14-22
본문은 참 유명한 말씀으로 신앙인들이 지침으로 삼아야 할 메시지이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계시록에서 소아시아에 흩어져 있는 일곱 개 교회 지도자들에게 메시지 보내셨다. 로마제국은 당시 행정구역상 그 지역을 ‘아시아 도’라고 불렸는데, 소아시아는 ‘아시아 도’ 안에서도 1/3 정도 밖에 안 되는 작은 반도였기에 소아시아라는 말이 생겼다. 그 좁은 지역에 일곱 개의 교회가 집중해 있었다.
그런데 일곱 개 교회들은 모두 장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님은 그 일곱 개 교회에 각각 편지를 보내면서 칭찬도 하시고 책망도 하셨다. 그런데 유독 라오디게아 교회만은 칭찬이 없이 책망만 나온다. 그 책망의 내용이 신앙이 ‘미지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책망하시기를 ‘네가 뜨겁든지 차든지 하라’고 하셨다. ‘아니면 내 입에서 토해 버리겠다’고 하시며 경고까지 하셨다.
● 계 3:14 / 라오디게아 교회의 지도자에게 이렇게 편지를 써보내라. ‘너는 확고히 서 계시고 신실하신 분, 지금도 있고 과거에도 있었고 앞으로 있을 만물의 참된 증인이시며 하나님의 창조의 근원이 되시는 분의 말씀이다.’
왜 예수님은 2-3장에 걸려 일곱 교회에 대하여 잘못에 대한 지적과 충고 그리고 더불어 많은 교훈을 해 주셨다. 특이한 것은 각 교회의 지도자(2:1, 8, 12, 18, 3:1, 7, 14)에게 말씀하셨다.
이는 교회 지도자로 하여금 진리 안에 서서 가르치도록 강력하게 권면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기 때문이다(마 15:12-14). 가르치는 자가 영적 맹인이면 배우고 따르는 자도 영적 맹인이 된다. 제대로 배우려는 사람은 영적 맹인에게 배우고 따르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문제는 영적 맹인으로 있으면서 자신이 영적 소경인 것도 모르는 자신은 다 본다고 말을 하기 때문이다. 육적 맹인보다는 영적 맹인이 더 위험하고 불행한 것이다.
육적 맹인은 자신이 맹인인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자신이 길을 가다가 돌에 부딪히거나 사람에게 부딪히거나 교통사고나 위험한 사태를 만날 것을 대비하여 지팡이나 안내견을 앞세우기도 하고, 가족의 손을 잡고 다니며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며 맹인을 사는 법을 익히며 적응한다.
비록 육적인 맹인일지라도 예수님을 믿으면 영적으로 밝은 빛 가운데로 살아갈 수 있는 은혜와 복을 누린다. 우리가 잘 아는 헬렌 겔러는 삼중고를 겪으면서도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되었는데, 5개 국어를 한다. 한국에 김수림 씨는 귀가 들리지 않지만 4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말할 수 있는 ‘한국의 헬렌 켈러’라고 한다. 이들 모두는 나름대로의 열정적인 교육과 더불어 자신의 끊임없는 노력이 있었다. 1939년 독실한 기독교 목사 집안에서 태어나 37세에 중도실명하였던 안요한 목사는 장애를 극복하고 1978년 새빛맹인선교회를 창립하여 맹인을 위한 활동에 일생을 헌신하고 있다.
이렇게 창조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는 육적인 맹인들을 세워 나름대로의 일도 하시는데, 왜 모든 것이 정상적인 그것도 크리스천이란 분들은 오히려 어둠의 앞잡이가 되고 있는지 말이다.
▶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가 조심할 것들이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을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율법을 가르치고 있다고 인정은 하셨지만,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지키되 그들의 행실은 본받지 말라고 하셨다(마 23:3). 더구나 많은 지도자들이 말뿐이고 실행은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들은 자기들도 할 수 없는 어려운 요구를 남들에게 강요하지만 자기들은 그것을 지키려고 하지 않는다. 아니 지키려 할지라도 잘 지키지 못하는 일개의 죄인일 뿐이다(마 23:4). 그 어느 지도자가 예수님처럼 모든 면에 본을 보이며, 선한 일만 하고, 자기가 말한 대로 모든 것을 지킬 수 있다는 말인가? 흠과 티가 많을 뿐 아니라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누가복음 18:13에 나오는 세관원 세리처럼 “멀리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볼 생각도 못하고 슬픔에 잠겨 가슴을 치며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라고 눈물로 기도를 드리는 죄인일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너희의 랍비이시고 우리 모두는 신앙 안에서 형제이며 또 이 세상에서 영적으로 ‘아버지’라고 부르심을 받을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 또 남들을 가르치고 이끌어 줄 수 있는 지도자는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 모셔야 한다.
‘여인이 나은 자 중에 세례 요한이 가장 큰 자’라고 하셨듯이, 이 땅에 있는 믿는 이들의 지도자는 일개의 목자요, 일꾼일 뿐이다. 양도 자기의 양이 아니요, 일거리조차 자기의 것이 아니라 단지 품꾼일 뿐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그 분의 말씀대로 살아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을 뿐이다. 단지 우리는 주님 안에서 형제요 자매이다.
▶ 이러한 모습에 통한의 눈물로 회개를 이끌어 낸 목사님이 있었다.
2007년 7월 8일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 평양대부흥 100주년을 기념하며 진보와 보수를 넘어 한국교회가 한자리에 모인 ‘2007 한국교회 대부흥 100주년 기념대회’ 설교자로 나선 지금은 고인이 된 옥한흠 사랑의교회 원로목사는 울먹이며 참회의 기도를 드릴 것을 호소하였다.
옥한흠 목사의 호소 / … 제가 두려워하는 것이 또 있습니다. 일곱별을 손에 쥐신 예수님께서 행위가 죽은 교회의 책임을 지도자에게 묻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사데교회 사자에게 편지하라’ 사자는 교회의 지도자요 목회자를 가리킵니다. 저는 왜 주님께서 목회자에게 책임을 물으시는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수십 년 목회를 하면서 목사의 입장에 서면 이름은 요란하지만 행위가 죽은 교회를 만드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다는 것을 저는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는지 궁금하십니까? 이렇게 하면 됩니다. 목사가 설교를 하거나 말씀을 가르치면서 복음을 조금씩 변질시키면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복음이 얼마나 변질되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둔감해지면 됩니다. 그러면 교회는 이름은 살아도 행위는 죽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복음이란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이 복음에는 진리의 양면성이 들어 있습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그 믿음의 진가는 순종하는 행위로 검증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이 구원의 절대적인 요소라고 한다면 행위는 구원의 필연적인 요소가 됩니다.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았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행위는 따로 놓고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실을 가리켜서 좋은 나무와 좋은 열매로 비유하셨습니다. 따라서 목회자는 믿음과 순종을 똑같이 가르쳐야 합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로마서를 설교하였다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야고보서도 진지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청중은 원래 귀에 듣기 좋은 말씀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하면 모두가 ‘아멘’ 합니다. 믿음만 있으면 하늘의 복과 땅의 복을 받는다고 하면 ‘할렐루야’ 하고 열광합니다. 그러나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거짓 믿음이요 구원도 확신할 수 없다고 하면 얼굴이 금방 굳어져 버립니다.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죄를 지적하거나 책망하면 예배 분위기가 금방 싸늘해져버립니다. 듣기가 싫고 몹시 거북스럽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교회에서 사역할 때 저는 비슷한 반응을 가끔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청중의 반응에 예민해지면서 저도 모르게 그들이 좋아하는 말씀을 일부러 골라서 설교하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을 보았습니다. 대신 죄라던지, 회개라던지, 순종이라던지, 거룩이라던지 하는 듣기 피곤한 말씀은 할 수 있으면 피하거나, 꼭 말을 해야 한다면 부드럽게 달래듯이 말하고 싶어하는 유혹에 끌려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의 이런 모습은 예수님이 절대 바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도 절대 원하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러한 일이 강단에서 일어나고 있었고, 그 결과 저도 모르는 사이에 복음을 조금씩 변질시켜가는 설교자가 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교회가 커지면 커질수록 말씀대로 순종하는 행위에는 관심이 없고, 믿음만 가지고 떠드는 값싼 은혜에 안주하는 무리들이 늘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 사도행전 20장 20절을 보면 바울은 유익한 말씀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 없이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를 비롯하여 한국교회의 많은 지도자들은 바울처럼 무엇이든지 거리낌 없이 전하는 용기를 잃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단 것은 먹이고 쓴 것은 가능하면 먹이지 않으려는 나쁜 설교자가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설교자는 청중에게 인기가 있어서 사람을 많이 끌어 모으는 데는 성공할지 모르나 행위가 죽은 교회를 만드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 지도자 여러분! 복음을 변질시켰다는 주님의 질책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우리 중에 몇 명이나 됩니까? 입만 살았고 행위가 죽은 교회를 만든 책임은 너에게 있다고 질책하신다면 나는 아니라고 발을 뺄 수 있는 목회자가 몇이나 됩니까? 평양 대부흥의 진정한 기념은 복음을 변질시킨 죄를 놓고 가슴을 치는 목회자들의 회개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이것이 한국교회를 향한 주님의 간절한 소원이라고 생각합니다. …
● 계 3:15-16 / 나는 너를 잘 알고 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다. 나는 네가 차든지 덥든지 어느 한쪽이면 좋겠다. 그러나 너는 미지근하기만 하기 때문에 나는 너를 내 입에서 토해 내겠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에베소 동쪽으로 160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맞은 편 서쪽으로는 10km지점에 히에라볼리라는 온천 도시가 있다. 그리고 남쪽으로 약 14km지점에 골로새가 위치해 있다. 라오디게아 지역은 교통 중심지였고, 양을 많이 사육하기 때문에 모직을 수출하는 무역도시였고, 브루기아 가루라는 안약재료가 나와 안약이 생산되었다. 본문에서 안약을 사서 바르라는 말은 그곳이 좋은 안약 생산지였기에 하신 말씀이다. 또 그곳에 그 옛날인데도 의과대학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14km 떨어진 골로새에서 찬물을 수로로 받아 마셨고, 10km 떨어진 히에라볼리에서 온천수를 수로로 끌어다 사용했다. 그런데 그 찬물이 14km의 수로를 통하여 오는 동안 미지근하여 지고, 온천수가 10km를 오는 동안 미지근하여 져서 당시 사람들은 마시다 토해 버리기도 했다.
그런데 묘한 것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그 물과 같이 생활이 풍족하니까 신앙이 뜨겁지도 차지도 않고 미지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 믿음이 뜨겁든지 차든지 하라, 아니면 미지근한 물을 마시면 뱉어버리고 싶듯이 너를 내 입에서 내치리라.’고 책망하셨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사랑이 뜨겁듯이 열정적인 신앙이었다. 하나님의 영이 내 속에서 역사하시는데 그냥 앉아만 있을 수 있겠는가? ‘성령의 역사’를 ‘demonstration spirit이라고 한다. 그 말은 성령이 내 안에서 데모(영감으로 강권하신다)를 하신다는 뜻이다.
신앙인은 그 마음에 뜨거운 성령의 임재를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신앙인이 열정을 잃게 되면 다 잃게 된다. 이 세상도 마찬가지다. 열정이 없으면 사랑도 잃게 되고 직장에서 자리도 잃게 되고 친구도 잃게 되고 사업에서도 실패하게 된다. 더구나 신앙인은 열정을 잃으면 예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토하여 내 버리겠다’고 경고하셨다. 신앙의 열정을 회복할 때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우리와 함께 하신다.
예수님께서 그렇게도 원하셨던 것이 무엇인가? “나는 세상에 불을 던지러 왔다. 나는 불이 이미 붙어 있기를 얼마나 원했는지 모른다.”(눅 12:49 / [불을 던지러 왔다; 마 10:34-36])
▶ 여기에서 조심할 것이 있다. 천로역정에 첫 부분에 나오듯이 천성을 향해 가는 길에 첫 번째로 걸림돌이 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가족의 만류다. 이는 가까운 곳에 있는 식구들이 신앙으로 이끌어주지 못하고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족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먼저 신앙생활을 철저히 하여 저들에게 본이 되는 신앙생활을 하여 가족전체를 하나님 앞으로 이끄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눅 12:51-53 /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 아느냐? 아니다. 도리어 분열을 일으키려고 왔다. 52) 이제부터 한집안 식구 중에서 셋이 나를 사랑하면 둘은 반대할 것이고 그 반대의 경우도 생길 것이다. 53) 아버지가 나를 따르겠다고 하면 아들이 반대할 것이고, 아들이 나를 따르겠다고 하면 아버지가 반대하고 나설 것이다.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믿음 때문에 서로 반목할 것이고,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서로 싸울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먼저 유의깊게 살펴야 한다. 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너는 어서 고향을 떠나거라. 한데 어울려 사는 네 친척과 네 집안사람들을 떠나 내가 가르쳐 줄 땅으로 가거라.’고 하셨을까?(창 12:1) 이는 온전히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여 하나님의 넘치는 복을 받게 하는 모범 케이스로 만드시기 위해였다. “나는 네 후손이 엄청나게 불어나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또한 네게 복을 내려 이름을 날리게 하리라. 너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을 전해 주는 사람이 될 것이다.”
▶ 창세기 11장에 오는 말씀은 뜨뜻미지근한 이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아브라함의 고향은 갈대아 우르이다. 이곳은 수메르인의 난나신을 숭배하는 중심지이기도 하다. 아브라함은 우상의 땅에서 태어나서 자라났다. 나므롯이 주도해서 세운 바벨탑의 원형인 지구라트가 있는 곳이다. 지구라트의 맨 꼭대기에는 난나신에게 봉헌하는 신전이 위치하고 있다. 갈대아 우르는 초승달모양의 지형을 가지고 있고 비옥한 땅이다. 그들은 씬(Sin)이라고 하는 초승달의 여신을 숭배하는데 전쟁과 성애(性愛)의 신이라고 한다. 훗날 마호메트가 창시한 이슬람교도 초승달문양을 숭배한다. 초승달은 이슬람에서 성스러운 상징이다. 마호메트가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의 히라동굴에서 알라의 첫 계시를 받은 밤하늘에는 초승달이 떠 있었다. 이 때문에 대부분 이슬람 사원의 첨탑에는 초승달이 걸려있다. 이슬람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하지만 갈대아 우르의 난나신을 부활시킨 종교일 뿐이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강 저쪽(갈대아 우르)에 거주하며 다른 신즉 우상을 섬겼다고 했다(수 24:2). 데라는 셈의 후손으로 여호와 신앙을 유산으로 이어받은 족속이다. 그러나 바벨탑 이후 점점 흐려져가는 신앙으로 급기야는 믿음을 이어가야 할 후손이 우상숭배도 모자라서 우상장사까지 했다. 우상장사로 돈을 많이 버는 등 먹고사는 일에 빠져 여호와 신앙을 거의 잃어버려 믿음의 끈이 너덜너덜해졌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다.
데라(תּרח 테라흐)는 그 어원이 분명히 않지만 delay 또는 station이라는 뜻이 있다. 광야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거쳐 가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데라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데라는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지만 마음깊이 숨어있는 여호와 신앙의 희미한 잔상(殘像)을 버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늘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우상장사를 빨리 청산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겨야 돼! 그렇지만 지금은 아직 아냐! 좀더 돈을 벌고 먹고살 걱정이 없으면 그 때 이 지긋지긋한 우상의 땅을 떠날거야." 그의 영혼 깊은 곳에서 부르는 믿음의 소리를 애써 외면하며 차일피일(此日彼日) 미루며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럴 때 미지근하게 신앙생활을 하던 데라는 우상의 땅을 떠날 수밖에 없는 사건이 터지고야 말았다. 그의 아들 하란이 죽은 것이었다. 롯이라는 손자를 하나 남겨두고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것이 데라에게 큰 환란이었다. 그 때서야 데라는 깨닫는다. "내가 벌써 갈대아 우르를 떠났어야 하는데 내가 잘못이야!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순종하지 않아서 이런 변을 당한거야! 이제는 여호와 하나님께 가야지." 하면서 갈대아 우르를 떠났다.
창 11:31 / 데라는 자기 아들인 아브람과 이미 죽은 하란의 아들인 손자 롯, 그리고 며느리인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모두 데리고 바벨론에 있는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였다. 데라 일행은 하란에 다다라 거기서 자리잡고 살았다.
데라는 전부터 하나님께로부터 우상의 땅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을 것이다. 그것이 실제 하나님의 음성이었는지 아니면 영감이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분명히 어떤 형태로든지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세속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하여 욕심과 육체의 안일함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음성을 여러 방법으로 듣게 된다. 죄 가운데 살지라도 양심의 소리는 들려온다. 돈과 명예 세상이 부귀영화를 좇다 보면 누구나 영혼의 공허함을 절실히 깨닫는다. 그래서 정말 참되고 진실한 삶이 없을까하고 찾기 마련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현재 자신의 삶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떠나지 못한다. 왜냐하면 육신의 정과 욕망을 끊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치 마약을 하는 사람이 지금 마약으로 자신이 망해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약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예기치 못한 환란과 불행은 하나님의 부르심이나 양심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이다. 육체적으로는 불행이지만 영적으로는 새로운 기회가 되는 것이다.
▶ 데라의 불행은 두 가지 의미로 볼 수 있다. ➊ 하나님의 음성을 순종하기를 delay(지체)하고 차일피일 미루는 자들에게는 환난이 찾아온다. 하나님은 환란을 통해 그를 죄악의 자리에서 이끌어내시고자 하는 것이다. ➋ 데라는 환란을 당하자 비로소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나오게 되는 경우이다. 어째든 환란은 인간에게 불행이 아니라 다행인 것이다. 왜냐하면 파멸의 자리 영영 복구되어질 수 없는 멸망의 자리에서 벗어나 복된 자리로 올 수 있게 만드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데라는 충격을 받아 갈대아 우르를 떠나지만 가나안까지 가지 못하고 중간 지역인 하란에 머물게 된다. 데라의 또 하나의 뜻은 station이다. 간이역(簡易驛)이라고 할까? 거쳐 지나가지만 반드시 떠나야 하는 곳 결코 계속 머물러서는 안 되는 곳이 간이역일 뿐이다. 데라는 갈대아 우르에서 아들을 잃고, 그 상처를 안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가나안으로 가려고 했지만 아직도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 중간지점인 하란에 머물렀지만, 하란도 역시 달신의 숭배지일 뿐이다.
데라 자신도 하란에서 잠시 머물다가 가나안으로 가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하란에서 인생을 마치고 만다. 데라에게 신앙의 목적지가 가나안이라면 신앙의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죽은 것이다. 끊어야 할 것을 끊지 못하고,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하고, 떼어야 할 것을 떼어내지 못하면 결국 종착역까지 가지 못하고 간이역에서 끝나는 인생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있는가? 세상과 하나님의 중간지역인 간이역에서 머무르고 있는가? 간이역에서 빨리 벗어나라! 그것이 데라가 우리와 세상을 향해 외치는 소리일 것이다. 지체하는 자에게 환란이 올 것이며 간이역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는 영원한 집에 다다르지 못할 것이다.
작은 결론
사람의 모든 생각과 마음, 행위를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의 신앙에 대해 ‘차지도 않고 더웁지도 않은 미지근한 신앙’이라고 책망하셨다. 차가운 물에다가 열을 가하면 더워진다. 열을 가하던 것을 멈추면 차츰 미지근해지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차가워진다.
불을 성령을 의미한다고 할 때, ‘차다’는 것은 그 마음에 성령의 역사가 없거나, 아예 구원과는 상관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교회에 다녀도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하여 참믿음이 무엇인지? 구원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기에 아예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이런 상태가 차가운 신앙이다.
또 다른 경우는 성령을 받고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이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으므로 다시금 세상으로 빠져들어 결국 성령이 소멸된 상태를 말한다. 이렇게 아예 구원과는 멀게 된 사람을 ‘차다’고 말씀한 것이다.
그러면 ‘덥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뜨거운 신앙이란 성령을 받은 사람이, 날마다 영적인 새 힘을 공급받으며 믿음이 자라나는 상태를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리므로 날마다 육은 죽고, 영은 자라나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헌신하며 열심을 낸다.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덥다’고 말씀한 뜨거운 신앙이다(막 12:30).
차가운 신앙과 뜨거운 신앙은 믿음의 분량이 크고 작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초신자라고 해서 차가운 신앙이 아니다. 자신의 믿음의 분량 안에서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기도하고, 금식도 하며,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뜨거운 신앙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신앙생활을 한지 오랜 세월이 지나도 변화되려고 하지 않거나,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잘못된 길로 나가는 사람은 차가운 신앙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차가운 신앙이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점차 미지근해지다가, 결국 차가운 신앙이 되고 만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
그러면 미지근한 신앙은 어떤 것일까? 미지근한 신앙은 ‘성령을 받아 하나님이 계심을 알고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알면서도 뜨거워지지 않고 정체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런 미지근한 신앙으로는 자신이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며 교회는 다니지만 실제로는 성령의 교통함이 없으므로 성령의 음성과 인도하심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을 들어도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함으로 은혜를 못 받는다.
차가운 신앙 즉 죽은 신앙이 되면 지옥에 간다는 것을 알기에 교회에 출석은 하지만, 하나님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거나 더 많은 것을 드리려고 하지도 않으며 뜨거워지려고도 하지 않는다.
또한 마음의 할례를 받지 않았으니 거룩한 삶을 살려는 마음도 없거니와 삶 자체도 변화가 없다. 겉으로 보이는 충성은 열심히 한다 해도 마음의 할례를 하지 않으니 가인이 드렸던 제사처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렇게 미지근한 상태에 계속 머물러 있는 사람은 결국은 차가운 신앙이 될 수밖에 없다. 미지근한 물을 오래 놔두면 계속 미지근한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차갑게 식어버리는 이치와 같다. 그래서 미지근한 신앙도 오래 지속되면 결국 구원과는 상관없이 영원한 사망의 길로 가기에 예수님께서는 이를 가리켜 ‘내 입에서 토하여 내친다’고 하신 것이다.
그렇다고 차가운 신앙이 되라는 뜻은 아니다. 차가운 신앙 상태는 징계를 받았을 때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이 쉽지 않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기보다는 두려움과 낙심이 앞서기 때문이다. 설령 회개하고 돌이킨다 해도 재앙을 당하고 나서야 회개한다면 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용서를 받는다 해도 한번 깨진 하나님과의 신뢰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만이라도 미지근한 신앙이나 차가운 신앙이 되지 말고 날마다 더욱 뜨겁게 하나님께 헌신하여 하나님과 아름다운 신뢰관계를 이루어 예수님의 품에 안기실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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