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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2)
2011년 10월 23일 / 누가복음 10:25-37
1. 사마리아의 역사적 배경으로 인한 파급
예수께서는 갈릴리를 떠나 초막절을 지키려 예루살렘으로 가시면서, 중도에 사마리아 지방에서 사역하시고, 예루살렘에서 초막절을 지키시며 복음사역을 하셨다(요 7:11-8:59). 본문은 초막절 직후에 예수님께서 베다니로 내려가시는 도중, 그 위험한 강도 나오는 길에서 율법사(율법학자)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참된 이웃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교훈하신 내용이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눅 10:30)까지는 약 27km이며, 고도의 차이는 약 1,000m에 달했다. 따라서 이 같은 급경사가 진 험준한 길이었다. 여리고에는 제사장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여기서 ‘어떤 사람’은 유대인이었을 것이다. ‘불쌍히 여겨’(눅 10:33)라는 연민의 정을 깊이 느끼는 것을 가리킨다. 유대인은 사마리아인을 이웃으로 생각지 않는데도, 이 사마리아인은 불행을 당한 유대인에게 이웃사랑을 베푼 것에 예수님의 역설적인 교훈이 담겨 있다. ‘자비를 베푼 자’(눅 10:37)는 사마리아 사람을 가리킨다. 율법사는 바리새파였고, 제사장들로 구성된 사두개파보다 더 의로운 것으로 자처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교훈에서 이 율법사는 자기들이 부정, 불의한 인간들로 간주하는 사마리아인을 이웃사랑의 표본으로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마리아인(눅 10:33)은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포로로 잡혀간 이후(B.C. 722년) 사마리아 지방에 잔류하고 있던 이스라엘인과 이주해 온 이방인과의 혼합 결혼으로 태어난 혼혈족이다. 또한 그들은 종교적으로도 혼합종교를 갖고 있었다. 또한 바빌론, 앗수르 강대국가의 포로가 되어서 민족적으로 그 나라에 끌려가서 살다가 고향산천에 되돌아오고 했는데, 이방에 가서 있을 때 이방인과 결혼하여 피가 순수하지 못하고 섞였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이방인이라든지 아버지가 이방인이라든지 한 편이 유대인이 아니게 태어나서 유대사회에 들어오려고 하니까는 유대사회에서 받아주지 않았다. 순수하지 않은 더러운 피를 가진 사람들은 개 취급을 하고 안 받아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길목에 집을 짓고 살았다. 그러므로 사마리아인은 유대인이면서도 유대인이 아니고, 유대인이 아니면서도 유대인인 그런 사람을 말하는 것이 되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통상 사마리아인들을 개로 취급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당시 유대인들이 멸시하던 사마리아인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웃’이라는 개념을 제한적으로 정의하는 것을(유대인들은 동료 유대인만을 이웃이라고 생각했다) 철폐하셨다.
눅 10:25 / 하루는 율법학자가 예수를 떠보려고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율법학자는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인 ‘영생’문제를 갖고 예수님을 찾아왔다. 질문에 질문으로 답을 하는 것이 예수님의 교육 방법이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눅 10:26). 율법학자는 율법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구절을 뽑아 답을 하였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눅 10:27) 정답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영생’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이유는 무엇일까요? 문제는 성서를 읽되 ‘어떻게’ 읽는가에 달려 있었다.
성서를 읽는 방법 ❶ 눈으로 읽는 것인데, 글을 깨친 사람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방법이다. ❷ 마음으로 읽는 것인데, 성령의 조명을 받아 본문의 뜻을 깨닫는 단계이다. 말씀이 주는 감동과 감격으로 마음이 뜨거워진다. ❸ 몸으로 읽는 방법인데, 깨달은 말씀을 몸으로 실천하는 단계이다. 이 마지막 단계까지 이르러야 비로소 성서를 제대로, 온전히 읽었다고 할 수 있다.
율법학자는 제1단계까지는 이르렀는데, 제1단계를 넘어 제2단계는 이르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눅 10:28)라고 하신 것이다. 여기에서 율법학자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떠보려고) 하지 않고 영생에 대하여 궁금해서 물었다면 예수님의 답인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Do it, and you will live)라는 마지막 관문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는데, 안타깝게도 1단계에서 2단계로 넘어가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오직 성경을 눈으로 읽는 것에서 만족하고 있는 안타까운 상태로 이런 사람에게는 마태복음 7:21이 답일 뿐이다.
마 7:21 / 종교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이라 해서 다 믿음이 깊은 사람은 아니다. 그들이 내게 `주님'이라 부른다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율법학자는 알기도 많이 알고, 가르치기도 많이 했을 것인데 아직 2단계인 마음에 성령의 조명을 받아 본문의 뜻을 깨닫지도 못하여 3단계인 행함의 단계에 이르러 영생의 감격을 누린다는 것은 해당도 안 되었다. 그래서 율법학자는 반문을 하였다. 내 생각이지만 이 율법학자도 나중에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가진다.
눅 10:29 / 그러자 율법학자는 짐짓 자기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누가 내 이웃입니까' 하고 다시 물었다.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그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예’(눅 10:30-35)를 말씀하시게 되었다.
‘이웃 사랑’이 율법의 가르침인 만큼 사랑의 대상인 이웃을 정확하게 파악해서 이웃을 사랑함으로, 율법을 실천함으로 영생의 감격을 얻어야 한다.
예수님의 ‘강도 만난 사람을 구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던 사건(historical fact)도 아니고 전해오는 소문도 아니라 순전히 예수께서 ‘지어낸 이야기’(fiction)고 말을 하지만 나는 이 사건은 ‘얼마 전 실제로 있었던 fact로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 소문이었다’라고 단정하고 싶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불필요하게 제사장을 비롯하여 남들을 함부로 판단하지는 않으셨다. 만일 이야기를 꾸며서 하신다면 스스로 많은 어려움을 자처하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16장에서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 대한 이야기도 꾸며낸 것이 아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영계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을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모두 네 명이다. 즉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상태에 처한 예루살렘 사람, 그런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간’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준’ 사마리아인이다.
강도 만난 희생자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에서 앞서 언급한 영생을 얻는 방법, 즉 말씀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교훈을 얻게 된다. 즉 ‘보고 지나간’ 제사장과 레위인은 말씀을 ‘눈으로’ 읽는 단계에 머물렀지만, 사마리아인은 3단계인 ‘보고(눈으로) 불쌍히 여겨(마음으로) 가까이 가서 상처를 치료해주고, 주막으로 옮겨(몸으로) 돌봄’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을 살려냈다. 과연 누가 ‘영생’의 관문을 통과하였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눈으로 본 사람이 아니라 마음으로 깨닫고 몸으로 행한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영생의 감격을 누렸을 것이다.
이런 내용의 이야기를 들려주신 후 예수님은 질문자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지셨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율법학자의 질문은 “누가 내 이웃인가?”(who is my neighbor)이었는데, 예수님의 답이 담긴 질문은 “누가 이웃이 되었는가?”(who was a neighbor unto the man)였다. 여기서 두 종류의 ‘이웃사랑’을 확인할 수 있다. 율법학자의 입장은 ‘이웃이니까 사랑하기’이고, 예수님의 입장은 ‘사랑하니까 이웃되기’이다.
▶ 유대인의 동족사랑은 유명하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마 5:43). 율법 전통에 충실하여 이웃과 원수를 분명하게 구분하고, 이웃이라 판명되면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지만, 교리와 신조가 다르고 관습과 문화가 다르면 냉정하게 대한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야기 속에 등장한 사마리아인은 자신과 어떤 공통점이나 이해관계도 없는 유대인을 구해 주었다.
그 후 두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웃이 되었을 것은 분명하다. 처음엔 남남보다 더 못한 주인과 종의 관계보다 못한 의인과 죄인의 관계였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생명의 은인으로서 이웃이 아닌 형제가 되었을 것이다. 예수님이 원하신 것은 이런 사랑이다. 뭔가 통하는 이웃이니까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통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사랑해서 이웃으로 만드는 사랑이다.
이런 사랑을 기대하며 예수님이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었는가?’라고 질문했을 때 율법학자는 ‘사마리아인이요’라고 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유대인으로서 자부심도 강했던 그로서는 죽어가는 자기 동족의 생명을(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아닌) 사마리아인이 구해주었다는 이야기의 결론에 동의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자존심이 강했던 그로서는 ‘사마리아인이 유대인을 구해주었다’라고 할 수 없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이웃지간이 될 수 없었다. 역사적이고 정치적이며 종교적인 배경에서 갈등과 분쟁, 불신과 증오로 점철된 악연지간이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마을에 들어가 그곳 우물가에 나온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했을 때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라고 반응했던 것처럼,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상종조차 하지 않는’(요 4:9) 단절 관계였다. 그러니 율법학자로서 사마리아인이 자기 시간과 물질을 희생하면서까지 죽어가는 유대인을 구원했다는 점을 인정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2. 어떤 과정을 거쳐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었는가?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은 것은 율법학자뿐 아니라 곁에서 듣고 있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유인즉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기 직전, 바로 갈릴리에서 출발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던 중 사마리아 마을에서 ‘불쾌한’ 경험을 한 때문이었다(눅 9:51-56). 지리적으로 유대와 갈릴리 사이에 사마리아가 위치하고 있어 유대인들은 갈릴리와 유대를 오고 갈 때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문제로 고심하였다. 자존심이 강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땅을 밟는 것조차 수치로 여겨 요단강 동편으로 돌아서 다녔고 일반인들도 밤중에, 혹은 소문내지 않고 몰래 사마리아를 지나갔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편법을 쓰지 않고 전령(herald)을 앞서 보내 ‘예루살렘으로 가신다’라고 선전을 했다. 예상한 대로 예수님 일행이 사마리아 마을 입구에 도착했을 때 사마리아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거절을 하였다. 구체적인 내용은 밝혀지지 않지만 분노한 제자들이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할까요?”(눅 9:54)라고 하였다. 제자들이 분노한 것을 보면 큰 수모를 당하였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그러기에 그냥 거부한 것이 아니라 모욕까지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처럼 분노하는 제자들을 오히려 꾸짖으시고 다른 마을로 해서 돌아가셨다.
이처럼 얼마 전에 사마리아 마을에서 당한 ‘불쾌한’ 경험으로 사마리아인에 대한 분노와 증오심이 채 가시지 않은 시점에 예수님이 ‘이웃사랑’에 대한 비유에서 강도 만난 유대인을 구원한 주인공으로 사마리아인을 칭찬하셨다. 곁에서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제자들이 과연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은 이웃이 되었다’는 예수님의 결론에 선뜻 동의하였을까? 아마도 제자들은 속으로 ‘그런 일은 어쩌다 있었던 일에 불과합니다. 방금 사마리아 마을에서 당하시고도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라고 하였을 것이다. 제자들이 이 정도였으니 다른 사람은 말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현실이었다. 예수님도 현실에서 사마리아와 유대가 결코 이웃지간이 될 수 없는 것을 잘 알고 계셨다. 본문의 경우처럼 한두 사람의 경우가 모두에게 적응되는 것은 아니기에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꿈과 비전을 담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하였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래, 너희 생각대로 지금 현실에서 사마리아와 유대는 이웃이 될 수 없음을 나도 안다. 그러나 언젠가(sometimes) 사마리아와 유대가 이웃지간이 되는 날이 와야 하고 또한 올 것이다.’라고 하셨을 것이다.
아무튼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사마리아인’ 앞에 붙여졌던 형용사가 바뀐 것은 사실이다. 이 말씀을 들려주실 당시만 해도 유대인들에게 ‘사마리아인’하면 ‘믿을 수 없는’(unbelievable), ‘말이 통하지 않는’(uncommunicative), ‘불쾌한’(uncomfortable), 한마디로 ‘나쁜’(bad)이란 수식어가 붙었다. 그런데 예수님 이야기 후 2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신자, 불신자 가리지 않고 ‘사마리아인’하면 자연스럽게 ‘선한 사마리아인’(good Samaritan)이라고 부르고 있다. 할렐루야!
3. 사마리아 선교는 계속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문 머리말에 있는 말씀을 과제로 삼아 기도에 힘쓰자.
마 6:9-10 /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높임을 받으시며 10)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소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한 걸음 나아가 예수님께서 유대 관습과 전통의 포로였던 율법학자와 제자들에게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들려주신 얼마 후, 역시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던 어느 날이었다(눅 17:11-19). 멀리서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외치는 나병환자 10명이 “제사장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이라.”는 예수님 말씀에 따라 제사장에게 가던 중 깨끗함을 받은 기적을 체험하였다. 그런데 그 10명 중에 오직 한 명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께 돌아와서 예수님 발아래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이에 예수님은 흥분하신 어조로 주변에 둘러선 제자들을 향해 말씀하셨다. “보라, 10명이 모두 깨끗함을 받지 않았느냐? 이 사마리아 사람 외에 다른 9명, 갈릴리 사람, 유대 사람들은 다 어디 갔느냐? 구원받을 수 없는 족속이라며 너희가 그토록 저주하고 미워하였던 이 사마리아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내게 왔도다.” 그리고 그 사마리아 사람에게 다른 9명이 받지 못했던 축복의 말씀인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는 영적 구원의 은총을 주셨다. 그 사마리아인은 ‘영생’의 사람이 되어 자기 마을에 돌아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면서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살아갔을 것이다. 예수님의 꿈과 비전이 이루어진 것이다.
▶ 이처럼 사마리아인에 대한 ‘긍정적’ 서술은 유독 누가복음에 집중되어 있다. 누가복음 저자가 저술한 사도행전도 마찬가지이다. 우선, 승천하시기 직전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입니까?”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그리스도는 “그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하시면서 장차 이루어질 전도사역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18).
예루살렘을 원점으로 하여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까지 복음의 확산이 이루어진다는 말씀이다. 아마 제자들 가운데 유대 전통에 자부심이 충만하여 사마리아에 대한 불신과 증오심을 가진 자가 있었더라면 예수 님께서 복음이 전파될 지역으로 ‘사마리아’를 언급하실 때 속으로 ‘거긴 빼지요, 아니면 건너뛰지요.’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제외하거나 외면하지 않으셨다. 세상 모든 민족 모든 나라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에서 사마리아는 결코 생략해서는 안 될 사역의 관문이었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이런 구도에 따라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진 성령강림과 교회 설립 역사(행 1-7장)로 시작하여 유대와 사마리아에 전파된 복음(행 8-12장), 그리고 안디옥을 거점으로 하여 이루어진 바울의 땅끝(이방인 지역) 선교로(행 13-28장) 이어졌다. 특히 사도행전 8장 4-25절에 기록된 사마리아 전도와 그 결과는 그때까지 예루살렘과 유대 중심으로 사역하던 사도들의 선교의식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그 결과 사도들은 다메섹과 가이사랴 같은 ‘이방인의 사도’로 세움을 받은 바울이 소아시아를 거쳐 로마까지 복음을 전했다. 사마리아를 통하지 않고는 땅끝으로 나갈 수 없었다. ‘사마리아 선교’의 중요성이 여기 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이 사마리아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마리아인이 자비를 베푼 것처럼 그리스도인도 자비를 베풀며 사는 것을 의미한다. 사마리아인의 선한 행위는 영생 얻는 자들의 모델이며, 그의 맨 앞에는 예수님이 서 계신다. 사마리아인은 자기들을 경멸하는 유대인의 생명을 살리는 데 시간과 물질, 생명을 아까워하지 않고 쏟아 바쳤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내가 곧 선한 사마리아인이다. 나는 죄인들의 친구로 강도 만나 피를 쏟고 죽어가는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살리기 위하여 왔다.’라고 선포하신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모형으로 우리에게 ‘너희도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라고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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