툭툭이 기사를 보내고 아스완 시내는 도보로 구경하기로 했다. 주변 지도를 보니 1km 남짓한 거리에 아스완 박물관이 있어 걸어서 갔다. 시내 주변이 황톳빛이라 원시의 모습을 간직한 것처럼 보이지만 환경은 그렇지 못하다.황사에 차량의 매연, 말똥, 생활 쓰레기 등 도시미관이 깔끔하지 못해 그 옛날 이집트의 왕성한 문화라는 이름값을 못하는 것 같다. 재미있는 것은 승용차, 툭툭이, 오토바이, 소달구지, 말, 낙타가 한 공간에 공존하고 있다. 말은 관광객들의 이동수단으로 활용하는데 눈 옆에다 부착물을 설치하여 곁눈질을 못하게 했다. 곁눈질하면 차선을 벗어날까봐? 하는 인간의 상업적 욕심으로 굴레를 씌운 것이다. 말 본래의 성질대로 살지 못하고 순순히 인간의 통제에 따르도록 설계한 것이다. 말조련사 백락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백락은 “어떤 말이든 보내면 명마로 만들 자신이 있다”고 장담했다. 그의 수법은 잔인했다. 적자생존의 논리다. 말의 털을 지지고 발굽을 깎아내고 편자를 박는다. 이 과정에서 10마리 중 2~3마리가 죽는다. 훈련시킬 때는 채찍을 휘두르고 굶기기도 하는데, 이 과정에서 10마리 중 5~6마리가 또 죽는다. 오직 잘 달리는 말 한 마리를 위해서 대다수의 말이 죽어야 한다. 그런데도 명조련사라고 칭찬하니 인간의 잔인함의 끝이 어딘지 알 수 없다. 말이 서리나 눈을 밟고 온 몸으로 추위를 막으며 풀 뜯고 물마시며 발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속성대로 살게 할 수는 없을까?
아스완 박물관에 들어섰다. 아스완과 누비아지역에서 발굴된 고대 이집트 누비아인들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입구에는 통일왕이자 정복왕인 람세스2세의 석상이 있다. 그의 위용을 과시하려는 듯하다. 이와는 대조로 전사들의 조각상은 마치 인형처럼 조그마하게 설치되어 있다. 영향력이라는 것을 저렇게 표현하는구나!
눈에 뛰는 것은 쇠똥구리 석상이다. 쇠똥구리를 왜 귀하게 여길까? 쇠똥구리는 이집트 신화의 신인 케프리를 의미하며 태양의 신 ‘라’를 달리 이르는 말이다. 쇠똥구리가 둥근 걸 굴리고 있기 때문에 마치 태양을 움직이는 것 같다 하여 고대 이집트 신화에서는 신성한 벌레로 추앙받았다. 케프리가 관장하는 분야는 '창조, 태양, 부활'이며, 윤회전생을 반복하는 신이자 영원불멸을 상징하는 신으로 여겼다.
쇠똥구리는 똥을 동그랗게 만들어 집으로 가져가 그걸 먹고 산다. 인간의 기준으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미물처럼 보이지만 여의주의 구슬을 부러워하지 않고 자기만의 가치를 가지고 살아간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것은 어떤 위치가 아니라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며 사는가가 중요하다.
소형 오벨리스크를 지나 누비아 인들의 생활상을 볼 수 있는 공간이다. 지구촌 곳곳의 모습은 같은가? 하는 생각을 해봤다. 무리가 많으면 부자로 만들어 주고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내용을 보니까 공자의 제자 염구가 스승에게 질문했던 내용그대로 판박이 답변이다. 선생님 백성들이 많으면 먼저 무엇을 할까요? “부유하게 해주라” 다음은 요 “교육을 시켜라”라고 언급한 바 있다. 시대로 치면 공자보다 앞선 시대니까 어쩜 그쪽이 원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집트와 중국이 당시 교류한 흔적은 없으니 교육관이 같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래서 인가 우리는 삶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배우고 익혀서 날마다 지식을 쌓아가는 위학일익爲學日益을 추구해 왔다. 과연 배우고 지식을 축적하는 것이 만사일까?
배움이라 함은 나날이 더하는 것이고 도라 함은 날마다 덜어내는 것이다. 덜어내고 또 덜어내면 무위에 이르게 된다. 무위란 하지 못하는 것(불위)이 없다. 천하를 얻으려 한다면 아무 일도 없어야 한다. 일이 있으면 그것 때문에 천하를 얻을 수 없다.
爲學日益, 爲道日損.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無爲而無不爲.
取天下常以無事, 及其有事, 不足以取天下
위학일익 위도일손 손지우손 이지어무위 무위이무불위
취천하상이무사 급기유사 부족이취천하 <도덕경48>
지식과 정보가 머리에 꽉 찰 정도로 채우는 것은 기본이고 경쟁의 관문을 통과해야 사람 구실하는 세상이 되었다. 과연 그 단계에 진입하면 마음의 평화가 있을까? 한 순간은 안정을 찾고 평화로울 수 있다. 하지만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는 지식의 머리를 비워야 한다고 도가사상가들은 주장한다. 이른바 위도일손爲道日損을 해야 한다고 하는데 생활인으로서는 난해한 문제다.
기원전 5세기 무렵, 철기시대가 도래하면서 사람들에게 변화를 요구했다. 이때 지식인들은 문명이 과연 삶을 진일보하기 위한 필연적인 과정이며 최선의 선택인가 고민하며 대책을 내놓았다. 유학자들은 도덕이라는 굴레를 씌워 사회를 진화해야 한다고 보았지만 권력자들은 그 틈을 노려 거대한 탐욕을 추구하고 위선적인 행동을 일삼았다. 이 때 노자와 장자가 도덕의 굴레를 씌운 사람들의 주장이 적절한가 고민했다. “무엇은 하고 무엇은 하지마라”는 요구가 정당하고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는 것일까? 얻은 결론은 머릿속에 들어있는 것을 하루에 하나씩만 덜어내자. 자신을 돌아보면서 머리를 비우고 근본으로 돌아가고 본성대로 사는 세상이 마음 편한 세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머리를 채우는 배움(學)을 더하지 말고, 마음을 비우고 덜어내는 도(道)를 추구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돌고 돌아 제자리로 돌아오더라. 인위를 가해서 뭔가 만들고 제거하는 과정에서 무지한 민초들은 농락당할 수 있다. 무엇을 해라 하지 마라가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면 저절로 자리를 찾아간다 뿔이 큰 야크를 물가로 끌고 가 여기가 먹거리 천국이고 너의 삶터다. 물을 마셔라 했는데 먹지 않더라. 가만히 두었더니 제발로 먹거리 좋은 곳으로 찾아가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