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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명소재지/출토지연대크기서체 및 재질주제분류찬자 / 서자 / 각자판독자
자료명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 (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碑)
소재지/출토지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 산10-1번지 보림사
연대 884년(신라 헌강왕 10)
크기 높이 3.46m
서체 및 재질 구양순체 해서 / 왕희지체 행서
화강암
주제분류 통일신라|문화> 문화재> 금석문> 碑文|비문
찬자 / 서자 / 각자 김영(金穎) / 김원(金薳)·김언경(金彦卿) / 현창(賢暢)
판독자 박광연
판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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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감판독문
[01] 新羅國武州迦智山寶林寺謚普照禪師靈塔碑銘并序
[02] ⎵⎵⎵⎵⎵⎵⎵⎵⎵⎵⎵⎵⎵⎵⎵朝請郞守㝎邊府司馬賜緋魚袋臣金穎奉⎵⎵⎵敎撰⎵⎵儒林郞守武州昆湄縣令金薳奉⎵⎵⎵敎書
[03] 聞夫禪境玄寂正覺希夷難測難知如空如海故龍樹師子之尊者喩芭蕉於西天弘忍惠能之祖師譚醍醐於震旦盖掃因果之跡離色相之鄕登大牛之車入𠕀象之
[04] 域是以智光遠照惠澤遐流灑法雨於昏衢布慈雲於覺路見空者一息而越彼邪山有爲則永劫而滯于黑業矧乎末法之世像敎紛紜罕契眞宗互註 001持偏見如擘水求
[05] 月若搓繩繫風徒有勞於六情豈可得其至理其於衆生爲舍那舍那爲衆生衆生不知在舍那法界之中縱撗註 002造業舍那註 003亦不知衆生在苞含之內湛然常寂豈非迷耶
[06] 知此迷者大不迷矣知其迷者惟⎵⎵⎵⎵⎵我禪師乎或謂此說爲濩落之言吁道經云上士聞道崇而奉之中士聞道如存若亡下士聞道撫掌而㗛註 004不㗛註 005不足以爲
[07] 道也此之謂矣⎵⎵⎵⎵⎵⎵禪師諱體澄宗姓金熊津人也家承令望門襲仁風是以慶自天鍾註 006德從嶽降孝義旌表於鄕里禮樂冠盖於軒裳者也禪師託體之年尊
[08] 夫人夢日輪駕空垂註 007光貫腹因之驚寤註 008便註 009覺有懷及逾朞月不之誕生尊夫人追尋瑞夢誓禱良因膳徹腵脩飮斷註 010醪註 011醴胎訓淨戒註 012騭註 013事福田由是克解分蓐之憂允叶弄
[09] 璋之慶禪師貌雄岳註 014立氣潤河靈輪齒自然金髮註 015特異閭里聲歎親戚註 016咸驚從註 017襁褓之年宛有出塵之趣登齠齔之歲永懐捨俗之緣二親知其富貴難留財色莫繫許其
[10] 出家遊學筞杖尋師投花山勸法師座下聽経爲業摳衣請益夙夜精勤觸目無遺厯耳必記常以陶冶麤鄙藻練僧儀積仁順而煩惱註 018蠲除習虛靜而神通妙用超然出
[11] 衆卓尒不羣後以大和丁未歲至加良陜註 019山普願寺受具戒一入註 020壇場七宵行道俄有異雉忽尒馴飛ナ註 021稽古者曰昔向陳倉用顯霸王之道今來寶地將興法主之徵者
[12] 焉初道儀大師者受心印於西堂後歸我國說其禪理時人雅註 022尙経敎與習觀存神之法未臻其無爲任運之宗以爲虛誕不之崇重有若達摩不遇梁武也由是知時未
[13] 集隱於山林付法於廉居禪師居雪山億聖寺傳祖心闢師敎我禪師往而事焉淨修一心求出三界以命非命以軀非軀禪師察志氣非偶素槩殊常付玄珠授法印至
[14] 開成二年丁巳與同學貞註 023育虗會註 024等路出滄波西入華夏參善知識厯三五州知其法界嗜欲共同性相無異乃曰我祖師所說無以爲加何勞遠適止足意興五年春二
[15] 月隨平盧使歸舊國化故鄕於是檀越傾心釋敎継踵百川之𨊸註 025鼇壑羣嶺之宗鷲山未足爲喩也遂次武州黃壑註 026蘭若時大中十三禩龍集于註 027析註 028木之津
[16] 憲安大王即位之後年也
[17] 大王聆註 029風註 030仰道勞于夢魂願闢禪扉請入亰轂夏六月⎵⎵⎵敎遣長沙縣副守金彦卿賷茶藥迎之師以𠁅雲巖之安𠔥屬結戒之月託淨名之病陳六祖註 031之辭註 032冬十月
[18] 敎又遣道俗使靈巖郡僧正連訓法師奉宸馮瑄等⎵⎵⎵宣諭⎵⎵⎵綸旨請移居迦智山寺遂飛金錫遷入山門其山則元表大德之舊居也表德以法力施于註 033有政
[19] 是以𠃵元二年特⎵⎵⎵敎植長生標柱至今存焉
[20] 宣帝十四年仲春副守金彦卿夙陳註 034弟子之禮甞爲入室之賔減淸俸出私財市鐵二千五百斤鑄盧舍那佛一軀以莊禪師所居梵宇⎵⎵⎵敎下望水里南等宅共註 035出
[21] 金一百六十分租二千斛助充裝餝註 036功德寺隷宣敎省咸通辛巳歲以十方施資廣其禪宇慶畢功日禪師莅焉虹之與蜺貫徹堂內分輝耀室渥彩燭人此乃堅牢告祥
[22] 娑迦表瑞也廣明元年三月九日告諸依止曰吾今生報業盡就木兆註 037成汝等當善護持無至隳怠至孟夏中註 038旬二日雷電一註 039山自酉至戍十三日子夜上方註 040地震及天曉
[23] 右脇卧終亨註 041齡七十有七僧臘五十二於是弟子𦮥註 042惠淸奐等八百餘人義深考妣情感𠃵坤追慕攀號聲動溪谷以其月十四日葬於註 043王山松臺壘塔安厝嗚呼禪師名
[24] 留於此魂魄何之生離五濁超十八空樂寂滅而不歸遺法林而永秀豈唯註 044濟生靈於沙界實註 045亦裨
[25] 聖化於三韓禮云別子爲祖康成注云子若始來在此國者後世以爲祖是以達摩爲唐第一祖我國則以儀大師爲第一祖居禪師爲第二祖我師第三祖矣中註 046和三年
[26] 春三月十五日門人義車等纂集註 047行狀遠詣⎵⎵⎵王居請建碑銘用光佛道
[27] 聖上慕眞空註 048之理憫嚴師之心⎵⎵⎵敎所司㝎諡曰普照塔號彰聖寺額寶林褒其禪宗禮也翌日又詔微臣修撰碑讚垂裕後人臣兢惶承⎵⎵⎵⎵⎵命直筆爲詞
[28] 但以註 049供奉⎵⎵⎵宸衷敢避文林嗤哂詞曰
[29] 禪心不㝎兮至理歸空如活瑠璃兮在有無中神莫通照兮鬼其敢衝守無不足兮施之無窮刧盡恒註 050沙兮妙用靡終其一寥廓舍那苞育萬物蠢蠢衆生違舍那律二旣同
[30] 體復註 051誰是佛迷之又迷道乃斯畢其二大哉禪師生乎海域克鍊菩提精修惠德觀空離空見色非色强稱爲印難名所得其三有爲世界無數因緣境來神動風起波翻須調
[31] 意註 052馬勤伏心猿以斯爲寶施于後賢其四乘波若舟涉愛河水彼岸旣登唯佛是擬牛車已到火宅任燬法相雖存哲人其萎其五叢林無主山門若空錫放衆虎鉢遣羣龍唯
[32] 餘香火追想音容刊此貞石紀法將雄其六
[33] ⎵⎵⎵⎵⎵⎵⎵⎵⎵⎵⎵⎵⎵⎵⎵⎵⎵中和四年歲次甲辰季秋九月戊午朔旬有九日丙子建
[34] ⎵⎵⎵⎵⎵⎵⎵⎵⎵⎵⎵⎵⎵⎵⎵⎵⎵從頭第七行禪字已下弟子前兵部侍郞入朝使殿中大監賜紫金魚袋金彦卿書註 053⎵興輪寺僧釋賢暢刻字
표점문
新羅國 武州 迦智山 寶林寺 謚普照禪師靈塔碑銘 并序
朝請郞 守定邊府司馬 賜緋魚袋 臣金穎 奉敎撰
儒林郞 守武州昆湄縣令 金薳 奉敎書
聞夫, 禪境玄寂, 正覺希夷, 難測難知, 如空如海. 故龍樹師子之尊者, 喩芭蕉於西天, 弘忍惠能之祖師, 譚醍醐於震旦. 盖掃因果之跡, 離色相之鄕, 登大牛之車, 入罔象之域. 是以智光遠照, 惠澤遐流, 灑法雨於昏衢, 布慈雲於覺路. 見空者, 一息而越彼邪山, 有爲則, 永劫而滯于黑業. 矧乎末法之世, 像敎紛紜, 罕契眞宗, 互持偏見. 如擘水求月, 若搓繩繫風. 徒有勞於六情, 豈可得其至理. 其於衆生爲舍那, 舍那爲衆生. 衆生不知在舍那法界之中, 縱撗造業, 舍那亦不知衆生在苞含之內, 湛然常寂, 豈非迷耶. 知此迷者, 大不迷矣, 知其迷者, 惟我禪師乎. 或謂此說爲濩落之言, 吁道經云, 上士聞道, 崇而奉之, 中士聞道, 如存若亡, 下士聞道, 撫掌而㗛, 不㗛, 不足以爲道也. 此之謂矣.
禪師, 諱體澄, 宗姓金, 熊津人也. 家承令望, 門襲仁風. 是以慶自天鍾, 德從嶽降. 孝義旌表於鄕里, 禮樂冠盖於軒裳者也. 禪師託體之年, 尊夫人夢, 日輪駕空, 垂光貫腹. 因之驚寤, 便覺有懷. 及逾朞月, 不之誕生, 尊夫人追尋瑞夢, 誓禱良因. 膳徹腵脩, 飮斷醪醴. 胎訓淨戒, 騭事福田. 由是, 克解分蓐之憂, 允叶弄璋之慶.
禪師貌雄岳立, 氣潤河靈. 輪齒自然, 金髮特異, 閭里聲歎, 親戚咸驚. 從襁褓之年, 宛有出塵之趣, 登齠齔之歲, 永懷捨俗之緣. 二親知其富貴難留, 財色莫繫, 許其出家遊學. 策杖尋師, 投花山勸法師座下, 聽經爲業. 摳衣請益, 夙夜精勤, 觸目無遺, 歷耳必記. 常以陶冶麤鄙, 藻練僧儀. 積仁順而煩惱蠲除, 習虛靜而神通妙用. 超然出衆, 卓尒不羣.
後以大和丁未歲, 至加良陜山普願寺, 受具戒. 一入壇場, 七宵行道, 俄有異雉, 忽尒馴飛. ナ稽古者曰, 昔向陳倉, 用顯霸王之道, 今來寶地, 將興法主之徵者焉. 初道儀大師者, 受心印于西堂, 後歸我國, 說其禪理. 時人雅尙經敎與習觀存神之法, 未臻其無爲任運之宗, 以爲虛誕, 不之崇重. 有若達摩, 不遇梁武也. 由是知時未集, 隱於山林. 付法於廉居禪師, 居雪山億聖寺, 傳祖心, 闢師敎. 我禪師往而事焉, 淨修一心, 求出三界, 以命非命, 以軀非軀. 禪師察志氣非偶, 素槩殊常, 付玄珠, 授法印.
至開成二年丁巳, 與同學貞育虛會等, 路出滄波, 西入華夏. 參善知識, 歷三五州, 知其法界, 嗜欲共同, 性相無異. 乃曰, 我祖師所說, 無以爲加, 何勞遠適, 止足意興.
五年春二月, 隨平盧使, 歸舊國, 化故鄕. 於是檀越傾心, 釋敎繼踵. 百川之𨊸鼇壑, 羣嶺之宗鷲山, 未足爲喩也. 遂次武州黃壑蘭若, 時大中十三禩, 龍集于析木之津, 憲安大王即位之後年也. 大王聆風仰道, 勞于夢魂, 願闢禪扉, 請入京轂. 夏六月, 敎遣長沙縣副守金彦卿, 賷茶藥迎之. 師以處雲巖之安, 𠔥屬結戒之月. 託淨名之病, 陳六祖之辭.
冬十月, 敎又遣道俗使靈巖郡僧正連訓法師, 奉宸馮瑄等, 宣諭綸旨, 請移居迦智山寺. 遂飛金錫, 遷入山門, 其山則元表大德之舊居也. 表德以法力施于有政, 是以乾元二年, 特敎植長生標柱, 至今存焉.
宣帝十四年仲春, 副守金彦卿, 夙陳弟子之禮, 嘗爲入室之賓. 減淸俸, 出私財, 市鐵二千五百斤, 鑄盧舍那佛一軀, 以莊禪師所居梵宇. 敎下望水里南等宅, 共出金一百六十分, 租二千斛, 助充裝餝功德, 寺隷宣敎省. 咸通辛巳歲, 以十方施資, 廣其禪宇. 慶畢功日, 禪師莅焉, 虹之與蜺, 貫徹堂內, 分輝耀室, 渥彩燭人. 此乃堅牢告祥, 娑迦表瑞也.
廣明元年三月九日, 告諸依止曰, 吾今生報業盡, 就木兆成. 汝等當善護持, 無至隳怠. 至孟夏中旬二日, 雷電一山, 自酉至戍. 十三日子夜, 上方地震, 及天曉, 右脇臥終. 亨齡七十有七, 僧臘五十二. 於是, 弟子英惠淸奐等八百餘人, 義深考妣, 情感乾坤, 追慕攀號, 聲動溪谷. 以其月十四日, 葬於王山松臺, 壘塔安厝.
嗚呼, 禪師名留於此, 魂魄何之. 生離五濁, 超十八空, 樂寂滅而不歸, 遺法林而永秀. 豈唯濟生靈於沙界, 實亦裨聖化於三韓. 禮云, 別子爲祖. 康成注云, 子若始來在此國者, 後世以爲祖. 是以達摩爲唐第一祖, 我國則以儀大師爲第一祖. 居禪師爲第二祖, 我師第三祖矣.
中和三年春三月十五日, 門人義車等, 纂集行狀, 遠詣王居, 請建碑銘, 用光佛道. 聖上慕眞空之理, 憫嚴師之心, 敎所司定. 諡曰普照, 塔號彰聖, 寺額寶林, 褒其禪宗禮也. 翌日, 又詔微臣, 修撰碑讚, 垂裕後人. 臣兢惶承命, 直筆爲詞. 但以供奉宸衷, 敢避文林嗤哂.
詞曰
禪心不定兮 至理歸空
如活瑠璃兮 在有無中
神莫通照兮 鬼其敢衝
守無不足兮 施之無窮
刧盡恒沙兮 妙用靡終其一
寥廓舍那 苞育萬物
蠢蠢衆生 違舍那律
二旣同體 復誰是佛
迷之又迷 道乃斯畢其二
大哉禪師 生乎海域
克鍊菩提 精修惠德
觀空離空 見色非色
强稱爲印 難名所得其三
有爲世界 無數因緣
境來神動 風起波翻
須調意馬 勤伏心猿
以斯爲寶 施于後賢其四
乘波若舟 涉愛河水
彼岸旣登 唯佛是擬
牛車已到 火宅任燬
法相雖存 哲人其萎其五
叢林無主 山門若空
錫放衆虎 鉢遣羣龍
唯餘香火 追想音容
刊此貞石 紀法將雄其六
中和四年 歲次甲辰 季秋九月戊午朔 旬有九日丙子 建
從頭第七行禪字已下 弟子前兵部侍郞 入朝使 殿中大監 賜紫金魚袋 金彦卿書
興輪寺僧 釋賢暢刻字
註 001
互 : (劉喜海, 96쪽)
註 002
撗 : 横(金煐泰, 188쪽)
註 003
那 : (劉喜海, 96쪽). 이하 동일.
註 004
㗛 : 笑(金南允, 50쪽; 許興植, 199쪽; 金煐泰, 189쪽; 『朝鮮金石總覽 上』(이하 『總覽』), 61쪽)
註 005
㗛 : 笑(金南允, 50쪽; 許興植, 199쪽; 金煐泰, 189쪽; 『總覽』, 61쪽)
註 006
鍾 : 鐘(金南允, 50쪽)
註 007
垂 : 乘(許興植, 199쪽)
註 008
寤 : (劉喜海, 96쪽), 吾(許興植, 199쪽)
註 009
便 : 遂(許興植, 199쪽)
註 010
斷 : 𣂾(劉喜海. 97쪽)
註 011
醪 : (劉喜海, 97쪽; 東國大博物館)
註 012
戒 : 𢦶(劉喜海, 97쪽). 이하 동일.
註 013
騭 : 隲(金煐泰, 189쪽)
註 014
岳 : 嶽(許興植, 199쪽)
註 015
髮 : (劉喜海, 97쪽)
註 016
戚 : 戚戚(許興植, 199쪽)
註 017
從 : 已從(金煐泰, 189쪽)
註 018
惱 : (劉喜海, 98쪽; 金南允, 50쪽)
註 019
陜 : 峽(東國大博物館; 金煐泰, 190쪽; 곽승훈, 47쪽)
註 020
入 : 人(東國大博物館)
註 021
ナ : 有(許興植, 199쪽)
註 022
雅 : 惟(金煐泰, 190쪽)
註 023
貞 : 眞(許興植, 200쪽)
註 024
會 : 懷(『總覽』, 62쪽; 金煐泰, 190쪽)
註 025
𨊸 : 朝(『總覽』, 62쪽; 金南允, 52쪽; 許興植, 200쪽; 東國大博物館; 金煐泰, 190쪽)
註 026
壑 : (劉喜海, 99쪽)
註 027
于 : 於(許興植, 200쪽)
註 028
析 : 㭊(劉喜海, 99쪽; 東國大博物館; 金煐泰, 191쪽)
註 029
聆 : 耹(東國大博物館; 金煐泰. 191쪽)
註 030
風 : 龍(許興植, 200쪽)
註 031
祖 : 𥘵(劉喜海, 100쪽)
註 032
辭 : 辤(劉喜海, 100쪽)
註 033
于 : 於(許興植, 200쪽)
註 034
陳 : 棟(許興植, 200쪽)
註 035
共 : 共(許興植, 200쪽)
註 036
餝 : 飾(許興植, 200쪽)
註 037
兆 : 乖(許興植, 201쪽)
註 038
中 : 仲(金南允, 54쪽; 許興植, 201쪽; 金煐泰, 192쪽; 『總覽』, 63쪽)
註 039
一 : ▨(『總覽』, 63쪽)
註 040
方 : 房(金南允, 54쪽; 許興植, 201쪽; 金煐泰, 192쪽; 『總覽』, 63쪽)
註 041
亨 : 享(金煐泰, 192쪽)
註 042
𦮥 : 英의 이체자이다.
註 043
於 : 于(劉喜海, 101쪽)
註 044
唯 : 惟(劉喜海, 101쪽)
註 045
實 : 寔(劉喜海, 102쪽)
註 046
中 : ▨(『總覽』, 63쪽)
註 047
集 : 輯(金南允, 54쪽; 許興植, 201쪽; 『總覽』, 64쪽)
註 048
空 : 宗(許興植, 201쪽; 金煐泰, 193쪽; 『總覽』, 64쪽)
註 049
以 : 下(許興植, 201쪽)
註 050
恒 : 恆(金煐泰, 193쪽)
註 051
復 : 澓(劉喜海, 103쪽)
註 052
意 : 義(金南允, 55쪽)
註 053
書 : ▨(『總覽』, 64쪽)
註 001互 :
(劉喜海, 96쪽)註 002撗 : 横(金煐泰, 188쪽)註 003那 :
(劉喜海, 96쪽). 이하 동일.註 004㗛 : 笑(金南允, 50쪽; 許興植, 199쪽; 金煐泰, 189쪽; 『朝鮮金石總覽 上』(이하 『總覽』), 61쪽)註 005㗛 : 笑(金南允, 50쪽; 許興植, 199쪽; 金煐泰, 189쪽; 『總覽』, 61쪽)註 006鍾 : 鐘(金南允, 50쪽)註 007垂 : 乘(許興植, 199쪽)註 008寤 :
(劉喜海, 96쪽), 吾(許興植, 199쪽)註 009便 : 遂(許興植, 199쪽)註 010斷 : 𣂾(劉喜海. 97쪽)註 011醪 :
(劉喜海, 97쪽; 東國大博物館)註 012戒 : 𢦶(劉喜海, 97쪽). 이하 동일.註 013騭 : 隲(金煐泰, 189쪽)註 014岳 : 嶽(許興植, 199쪽)註 015髮 :
(劉喜海, 97쪽)註 016戚 : 戚戚(許興植, 199쪽)註 017從 : 已從(金煐泰, 189쪽)註 018惱 :
(劉喜海, 98쪽; 金南允, 50쪽)註 019陜 : 峽(東國大博物館; 金煐泰, 190쪽; 곽승훈, 47쪽)註 020入 : 人(東國大博物館)註 021ナ : 有(許興植, 199쪽)註 022雅 : 惟(金煐泰, 190쪽)註 023貞 : 眞(許興植, 200쪽)註 024會 : 懷(『總覽』, 62쪽; 金煐泰, 190쪽)註 025𨊸 : 朝(『總覽』, 62쪽; 金南允, 52쪽; 許興植, 200쪽; 東國大博物館; 金煐泰, 190쪽)註 026壑 :
(劉喜海, 99쪽)註 027于 : 於(許興植, 200쪽)註 028析 : 㭊(劉喜海, 99쪽; 東國大博物館; 金煐泰, 191쪽)註 029聆 : 耹(東國大博物館; 金煐泰. 191쪽)註 030風 : 龍(許興植, 200쪽)註 031祖 : 𥘵(劉喜海, 100쪽)註 032辭 : 辤(劉喜海, 100쪽)註 033于 : 於(許興植, 200쪽)註 034陳 : 棟(許興植, 200쪽)註 035共 : 共(許興植, 200쪽)註 036餝 : 飾(許興植, 200쪽)註 037兆 : 乖(許興植, 201쪽)註 038中 : 仲(金南允, 54쪽; 許興植, 201쪽; 金煐泰, 192쪽; 『總覽』, 63쪽)註 039一 : ▨(『總覽』, 63쪽)註 040方 : 房(金南允, 54쪽; 許興植, 201쪽; 金煐泰, 192쪽; 『總覽』, 63쪽)註 041亨 : 享(金煐泰, 192쪽)註 042𦮥 : 英의 이체자이다.註 043於 : 于(劉喜海, 101쪽)註 044唯 : 惟(劉喜海, 101쪽)註 045實 : 寔(劉喜海, 102쪽)註 046中 : ▨(『總覽』, 63쪽)註 047集 : 輯(金南允, 54쪽; 許興植, 201쪽; 『總覽』, 64쪽)註 048空 : 宗(許興植, 201쪽; 金煐泰, 193쪽; 『總覽』, 64쪽)註 049以 : 下(許興植, 201쪽)註 050恒 : 恆(金煐泰, 193쪽)註 051復 : 澓(劉喜海, 103쪽)註 052意 : 義(金南允, 55쪽)註 053書 : ▨(『總覽』, 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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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국(新羅國) 무주(武州) 가지산(迦智山) 보림사(寶林寺) 시보조선사영탑비명(謚普照禪師靈塔碑銘)병서(并序)
조청랑(朝請郞) 수(守) 정변부(定邊府) 사마(司馬) 비어대(緋魚袋)를 하사받은 신 김영(金潁)이 교서를 받들어 찬하다
유림랑(儒林郞) 수(守) 무주(武州) 곤미현령(昆湄縣令)인 김원(金遠)이 교서를 받들어 쓰다
듣건대, 선(禪)의 경계는 현묘하고 고요하며 바른 깨달음은 드물고 온화하여 측량하기 어렵고 알기 어려우니 공(空)과 같고 바다와 같다. 그러므로 용수(龍樹), 사자(師子) 같은 존자는 서천(西天)에서 파초(芭蕉)에 비유하였고, 홍인(弘忍), 혜능(惠能) 같은 조사는 진단(震旦)에서 제호(醍醐)라 이야기되었다. 대개 인과(因果)의 자취를 쓸어 색상(色相)의 마을을 떠났고 큰 소 수레[大牛車]를 올라타 상(象)이 없는 지역에 들어갔다. 그러므로 지혜의 빛이 멀리 비추고, 은혜의 못이 멀리 흘러 어두운 거리에 불법의 비를 뿌리고, 깨달음의 길에 자비의 구름을 덮는다. 공(空)을 깨달은 자는 한번 숨 쉴 때 저 악한 산[邪山]을 넘고, 유위(有爲)의 존재는 영원한 겁 동안 흑업(黑業)에 막혀 있다. 하물며 말법(末法)의 시대에 상교(像敎)가 어지러워 진종(眞宗)에 드물게 계합하고 편견(偏見)에 서로 의지하니, 물을 쳐서 달을 찾는 것과 같고, 노끈을 잘라 바람을 매다는 것과 같다. 헛되이 육정(六情)에 수고로움이 있을 뿐이니, 어찌 그 지극한 이치를 얻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중생에게는 노사나불(盧舍那佛)이 되고, 노사나불에게는 중생이 된다. 중생은 노사나불이 법계(法界) 가운데 있음을 알지 못하여 종횡으로 업을 짓고, 노사나불 또한 중생이 포함(苞含) 안에 있음을 알지 못하여 잔잔하게 항상 고요하니 어찌 미혹되지 않겠는가. 이 미혹함을 아는 자는 크게 미혹하지 않을 텐데, 이 미혹함을 아는 자는 오직 우리 선사(禪師)뿐이로다. 어떤 이는 이 이야기가 쓸모없는 말이라 하지만, 『도경(道經)』에서 말하기를, “상사(上士)가 도를 들으면 높이 받들고, 중사(中士)가 도를 들으면 있는 듯 없는 듯하고, 하사(下士)가 도를 들으면 손뼉치며 비웃는데, 〈그들이〉 비웃지 않으면 도라 여기기에 부족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을 말함이다.
선사의 이름은 체징(體澄)이고, 종성(宗姓)은 김(金)이고, 웅진(熊津) 사람이다. 가문이 훌륭한 명망을 계승하였고, 집안이 어진 풍습을 이었다. 그러므로 경사가 하늘로부터 부여되었고, 덕이 산으로부터 내려왔다. 효와 의리가 시골 마을에 드러났고, 예악(禮樂)이 고위 관료 가운데 으뜸이었다. 선사가 몸을 맡긴 해에 어머니께서 꿈을 꾸셨는데, 둥근 해가 하늘에 멍에를 매어 빛을 드리워 배를 꿰뚫었다. 그 때문에 놀라 〈잠에서〉 깨어서는 문득 임신하였음을 깨달았다. 1년이 넘도록 태어나지 않자 어머니가 상서로웠던 꿈을 되돌아보면서 좋은 인연〈이 있기를〉 기도하였다. 〈어머니는〉 반찬에서 포육[腵脩]을 물렸고, 음료에서 단술[醪醴]을 끊었다. 청정한 계율로 태아를 가르치고, 복전(福田)을 섬겼다. 이로 말미암아 해산의 근심을 잘 해결하고, 아들을 낳는 경사를 맛봤다.
선사는 용모가 산이 서 있는 것처럼 웅대하였고, 기세가 하천의 정령을 온순하게 하였다. 윤치(輪齒)가 태어날 때부터 있었고 금발(金髮)이 특히 달라서 마을에서 감탄하였고 친척들이 모두 놀랐다. 강보에 쌓여 있던 때부터 뚜렷하게 속세를 떠날 뜻이 있었고, 이를 갈 나이가 되었을 때는 영원히 세속의 인연을 버릴 마음을 품었다. 부모님은 그를 부귀로 묶어두기 어렵고, 재물과 여색으로 얽매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서 출가하여 배우러 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막대를 짚고 스승을 찾아다니다가 화산(花山) 권법사(勸法師) 문하에 의탁하여 불경 듣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 예를 갖추어 더 가르쳐 줄 것을 청하여 새벽부터 밤까지 부지런히 정진하여 눈에 닿은 것은 남김이 없었고 귀에 스쳐간 것은 반드시 기억하였다. 항상 거칠고 비루한 〈성정을〉 갈고 닦고, 승려의 법도를 익혔는데, 어질고 순한 〈성정을〉 쌓아 번뇌가 깨끗하게 제거되고, 허정(虛靜)을 익혀 신통함이 오묘하게 작용하였다. 뛰어나 중생 가운데 출중하였고 탁월하여 짝할 무리가 없었다.
그 뒤 대화(大和) 정미년에 가랑협산(加良陜山) 보원사(普願寺)에 이르러 구족계를 받았다. 하루는 계단(戒壇)에 들어가 7일 밤낮으로 행도(行道)하였는데, 갑자기 기이한 꿩이 나타나 홀연히 날아들었다. 좌우에서 옛일을 헤아리는[稽古] 자가 말하였다. “〈기이한 꿩이〉 옛날에는 진창(陳倉)에서 패왕(霸王)의 도를 드러냈고, 오늘날에는 보배로운 땅에서 장차 법주(法主)의 징험을 일으키려 한다.” 일찍이 도의(道儀)대사가 서당(西堂)에게 심인(心印)을 받았고 뒤에 우리나라로 돌아와 선의 이치를 설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경전·교학과 관법을 익혀 정신을 보존하는[習觀存神] 가르침을 숭앙하였으며, 아직 무위임운(無爲任運)의 종지에는 이르지 않아 허탄하게 여기고 존숭하거나 중히 여기지 않았다. 마치 달마(達磨) 같은 이가 양무제(梁武帝)를 만나지 못한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때가 아직 모이지 않았음을 알고, 산림에 숨어서 염거(廉居) 선사에게 법을 부촉하였다. 〈염거는〉 설산(雪山) 억성사(億聖寺)에 머물면서 조사의 마음을 전하고 스승의 가르침을 열었다. 우리 선사께서 〈억성사에〉 가서 〈염거를〉 섬기면서 일심(一心)을 청정히 닦아 삼계(三界)에서 벗어나기를 구하여 목숨을 목숨이라 여기지 아니하고 몸을 몸이라 여기지 않았다. 〈염거〉선사께서 〈체징의〉 뜻과 기운이 짝할 사람이 없고 소양과 기개가 보통사람과 다름을 살피고서 현주(玄珠)를 부촉하고 법인(法印)을 전수하였다.
개성(開成) 2년(837) 정사(丁巳)에 이르러 동학인 정육(貞育), 허회(虛會) 등과 함께 길을 나서 바다를 건너 서쪽으로 화하(華夏:중국)에 들어갔다. 〈체징은〉 선지식(善知識)을 참방하고 15주(州)를 지나면서, 불법의 세계[法界]가 좋아하는 것과 하고자 하는 것이 공통되고, 성(性)과 상(相)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말하기를, “우리 조사께서 말씀하신 바에 더할 것이 없는데 어찌 수고로이 멀리 가겠는가. 단지 흥취[意興]만으로 충분하도다.”라고 하였다.
개성 5년(840) 봄 2월에 평로사(平盧使)를 따라 본국으로 돌아와서 고향을 교화하였다. 그리하여 단월(檀越)이 마음을 기울여서 부처의 가르침이 계속 이어졌다. 온갖 시내가 오학(鼇壑)에서 시작하고, 여러 골짜기가 영취산[鷲山]을 으뜸으로 한다는 것으로는 비유하기에 충분하지 못하였다. 마침내 무주(武州) 황학난야(黃壑蘭若)에 머물렀는데, 때가 대중(大中) 13년(859) 용(龍)이 석목(析木)의 나루에 모인 헌안대왕(憲安大王)이 즉위한 다음해였다. 〈헌안〉대왕이 소문을 듣고 〈선사의〉 도를 앙모(仰慕)하여 꿈에서도 노력해서 선문을 열고자 하여 왕경에 들어올 것을 청하였다. 여름 6월에 장사현(長沙縣) 부수(副守) 김언경(金彦卿)을 보내어 차와 약을 가져가 맞이하게 하였다. 선사는 구름과 바위의 편안함에 처하였고 아울러 결계(結戒)의 달에 속하였기에 유마거사[淨名]의 병에 의탁하여 육조(六祖)의 말씀을 펼쳤다.
겨울 10월 〈대왕께서〉 교서를 내려 또 도속사(道俗使)인 영암군(靈巖郡) 승정(僧正) 연훈(連訓) 법사와 봉신(奉宸) 풍선(馮瑄) 등을 보내어 윤지(綸旨)를 선포하게 하였는데, 가지산사(迦智山寺)로 옮겨 거처할 것을 청하였다. 〈선사가〉 마침내 지팡이를 날려 산문을 옮겨 들어갔으니, 그 산은 바로 원표(元表) 대덕이 옛날에 머물던 곳이다. 원표는 법력으로 덕을 행하고, 정사에 베풀었다. 그리하여 건원(乾元) 2년(759)에 특별히 장생표주(長生標柱)를 세우게 하였고, 지금까지 여기에 남아 있다.
선제(宣帝) 14년(859) 2월에 부수(副守) 김언경이 삼가 제자의 예를 행하여 일찍이 문하의 빈객이 되었다. 녹봉[淸俸]을 덜고 사재(私財)를 내어 철 2,500근을 시주하여 노사나불(盧舍那佛) 1구를 주조하여 선사가 머물던 사찰[梵宇]을 장엄하였다. 〈대왕이〉 교서를 내려 망수택(望水宅), 이남택(里南宅)에서도 금 160푼과 조(租) 2,000곡(斛)을 함께 내어 장엄 공덕(功德)을 보충하게 하고, 사찰은 선교성(宣敎省)에 예속시키게 하였다. 함통(咸通) 신사년(861)에 시방에서 보시한 물자로 선우(禪宇)를 넓혔다. 공사를 마친 것을 축하하는 날에 선사께서 여기에 오시자, 무지개가 법당 안을 꿰뚫고 들어와 갈라져 방을 빛내고 환하게 사람들을 빛나게 하였다. 이것은 바로 견뇌지신[堅牢]이 상서를 알리고, 사가라용왕[娑迦]이 상서를 드러낸 것이다.
광명(廣明) 원년(880) 3월 9일에 〈선사가〉 여러 의지사(依止師)에게 고하였다. “나는 금생(今生)에 과보(果報)로 받은 업이 다하여 관에 들어갈 조짐이 이루어졌도다. 너희들은 마땅히 잘 지키고, 게으름에 빠지지 말지어다.” 초여름[孟夏] 12일에 이르러 온 산에 번개와 천둥이 쳤는데, 유시(酉時)부터 술시(戌時)까지 그랬다. 13일 자시(子時) 밤에는 상방(上方)에서 땅이 흔들리더니, 날이 밝아오자 오른쪽 옆구리를 아래로 향해 누워 임종하셨다. 향년 77세, 승랍 52세였다. 그리하여 제자 영혜(英惠), 청환(淸奐) 등 8백여 명은 의리가 돌아가신 부모님처럼 깊었고, 마음이 하늘과 땅을 감동시켰다. 추모하고 통곡하는 소리가 계곡에 진동하였다. 그달 14일에 왕산(王山) 송대(松臺)에서 장사지내고, 탑을 쌓아 안치하였다.
아! 선사의 이름은 이곳에 남았는데, 혼백은 어디로 갔는가? 생명은 오탁(五濁)을 떠나고 18공(空)을 초월하였으며 적멸(寂滅)을 즐겨 돌아가지 않고 법림(法林)에 남아 영원히 뛰어나니 어찌 오직 사계(沙界)에서 생령(生靈)을 구제했을 뿐이겠는가? 실로 또한 삼한(三韓)에서 성인의 교화를 도왔도다. 『예기』에서 “별자(別子)가 시조가 된다.”라고 하였고, 강성(康成)이 주석하기를, “그대가 만약 처음으로 와서 이 나라에 있는 자라면 후세에 조(祖)로 여길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달마가 당(唐)의 제1조가 되고, 우리나라에서는 도의대사가 제1조가 되고, 염거선사가 제2조가 되고, 우리 선사가 제3조이다.
중화(中和) 3년(883) 봄 3월 15일에 문인 의거(義車) 등이 행장을 모아서, 멀리 왕이 계신 곳으로 나아가 비명(碑銘)을 세워 불도(佛道)를 빛나게 할 것을 청하였다. 성상(聖上)께서 진공(眞空)의 이치를 사모하고 엄사(嚴師)의 마음을 가엾게 여겨 교서를 내려 담당 관리에게 정하게 하였다. 시호를 보조(普照)라 하고, 탑호를 창성(彰聖)이라 하고, 절의 현판을 보림(寶林)이라 하였으니, 선종을 포상한 예이다. 다음날 또 미천한 신에게 조서를 내려 비찬(碑讚)을 지어 후세 사람에게 업적을 남기게 하였다. 신이 놀랍고 두려워 왕명을 받들어 사실대로 써서 사(詞)를 지었다. 임금의 마음을 삼가 받들었을 뿐이나, 문단[文林]의 냉소를 감히 피할 수 있겠는가.
사(詞)는 다음과 같다.
선(禪)의 마음은 고정되지 않아서 지극한 이치가 공(空)으로 돌아가고
살아 있음은 유리(瑠璃)와도 같아서 유(有)·무(無)·중도(中道)에 있다네
신(神)이 두루 비추지 못하거늘 귀(鬼)가 어찌 감히 부딪히겠는가
지키는 데 부족함이 없고 베푸는 데 다함이 없어
겁이 항하사[恒沙]를 다하도록 묘용(妙用)이 마치지 않는다 첫째
깊이 있는 노사나불은 만물을 기르고
어리석은 중생은 노사나불의 율(律)을 어긴다
부처와 중생이 이미 한 몸인데 다시 누가 부처인가
미혹하고 또 미혹하구나! 도(道)가 여기서 다하였다 둘째
위대하도다, 선사여. 해역(海域)에서 태어나
힘써 깨달음을 단련하고 열심히 은혜의 덕을 닦아
공을 관찰하되 공을 떠나고 색을 보되 색이 아니니
억지로 이름 붙여 ‘인(印)’이라 하지만 깨달은 바를 명명하기 어렵도다 셋째
유위(有爲) 세계의 무수한 인연들
대상이 오면 정신이 움직이고 바람이 일면 파도가 출렁인다
모름지기 의식의 말을 조련하고 부지런히 마음의 원숭이를 굴복시켜
이것을 보배로 삼아 후세의 어진 이들에게 베풀도다 넷째
반야(波若)의 배를 타고 애욕의 강물을 건너
피안(彼岸)에 이미 올랐으니 부처님만이 아신다
소수레가 이미 도착하였고 불타는 집이 허물어졌다
법상(法相)은 비록 남았지만 철인(哲人)은 병들었다네 다섯째
총림(叢林)에 주인 없으니 산문(山門)이 텅 빈 듯하네
지팡이로 호랑이들 내쫓고 발우로 용들 내보냈다
다만 남은 향불로 〈선사의〉 음성과 용모를 떠올리며 생각하도다
이 반듯한 돌에 새기나니 기록한 법이 장차 웅대해질 것이다 여섯째
중화 4년(884) 세차 갑진(甲辰) 가을 9월 무오삭(戊午朔) 19일 병자(丙子)에 세우다
시작부터 7행 선(禪)자 이하는 제자인 전(前) 병부시랑(兵部侍郞) 입조사(入朝使) 전중대감(殿中大監)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은 김언경이 썼고, 흥륜사승(興輪寺僧) 석(釋) 현창(賢暢)이 글씨를 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