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는 27대 519년 지속하였는데 그 중 숙종 45년, 영조 51년 합하면 96년이나 됩니다, 아버지 숙종과 아들 영조는 조선시대의 약 1/5에 해당될 만큼 장기간 나라를 통치하며 조선후기 르네상스의 기틀을 세웠는데, 이 기간은 또한 경희궁이 궁궐로서의 전성기와 맞물리는 시기이기도 하지요.
경희궁의 위상이 강화된 것은 숙종 때부터였습니다. 숙종은 경희궁에서 태어나고 또 경희궁에서 승하하였습니다. 숙종은 3대 독자로 태어났습니다. 할아버지 효종은 여섯 딸부자이자 딸바보로 알려져 있고, 아버지 현종은 조선왕조 통틀어 드물게 후궁도 없이 엄처시하로 평생을 살았습니다.
적장자 자손이 귀한 조선에서 3대 독자일 뿐만 아니라 왕권에 도전할 방계 왕자도 없었기 때문에 비록 14살로 즉위하였지만 숙종이 왕실과 조정 신하들에 대하는 태도에는 카리스마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숙종은 환국으로 붕당을 교체할 때마다 궁궐을 바꾸어 이어(移御)하곤 했는데, 그 중요한 축으로 경희궁을 이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영조는 아버지 숙종과는 그 입장이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무수리 출신의 어머니를 두고 일찌감치 왕권과는 거리가 멀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론 세력의 지원에 힘입어 어렵게 왕위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왕으로서의 정통성 결여라는 치명적 약점은, 영조로 하여금 인조로부터 이어져오는 왕위계승의 당위성을 설명해주는 서암(瑞巖) 옆에 전각을 짓고, 당시 49세였던 자신의 어진을 봉안하여 자신과 인조와의 연계성을 확립하며, 경희궁을 광해군 폐정의 상징에서 인조의 성지로 부각시켰던 것입니다.
영조는 재위 기간 내내 궁궐 밖 행차를 많이 하였습니다. 또한 자신과 관련한 선대왕들의 사적지들을 발굴하여 별궁으로 삼고, 다양한 기념의식을 거행하며 글을 남기기도 합니다. 별궁에로의 행차는 격쟁(擊錚)과 같은 통치행위와도 연관되며 영·정조 시대 특유의 백성들과의 직접소통의 장(場)을 열기도 하였습니다.
영조는 재위 기간의 1/3이 넘는 기간인 19년 동안 경희궁에 임어하며, 명실공히 경희궁을 창덕궁과 나란히 거론할 수 있는 궁으로 그 위상을 높였지요. 이러한 배경에는 사친(私親) 숙빈 최씨의 사당인 육상궁(청와대 옆 칠궁 내 소재)이 경희궁과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점 또한 간과해서는 아니 될 것 같습니다.
昌德金烏光 慶熙玉兎明 (창덕금오광 경희옥토명) : 영조 어제어필(御製御筆)
창덕궁에는 금까마귀가 빛나고, 경희궁에는 옥토끼가 밝도다
영조는 1776년 83세의 나이로 경희궁 집경당에서 승하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