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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2024년 10월 20일 / 마 25:14-30
열 처녀의 비유는 하나님의 약속된 종말의 천국을 깨어서 기다리는 성도의 자세를 이야기하고 있다면, 달란트의 비유는 천국을 기다리는 사람으로서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다.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14-18) 어떤 주인이 타국으로 갈 때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그들의 재능대로 맡긴다. 자신의 소유를 맡기는 데는 주인의 분명한 목적이 있다. 그것은 맡은 바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라는 것이다. 반드시 이윤을 남기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맡은 바 주어진 책임을 주인을 위하여 성실히 충성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맡겨진바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세워가는 것이다. 이때 주인이 종들의 재능에 따라 책임의 양을 정해주었다. 여기에서 책임의 많고 적음이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책임의 양에 대하여 불평불만을 해서는 안 된다.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19-30) 주인이 자신의 소유를 맡긴 것에 대하여서는 반드시 돌아와 결산을 한다. 맡은 바 사명에 책임을 물으신다는 것이다. 맡겨진바 책임을 잘 감당해 낸 종들에게는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하시고 더 많은 것을 맡기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것이라 하셨다. 반면에 맡은 바 사명에 책임을 다하지 못한 자에게는 맡겨졌던 것도 빼앗기고 주인의 즐거움 저편에 있는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라고 하셨다. 책임을 감당하는 자와 감당하지 못한 자가 나눠지는 이유가 있다. 우리의 삶에는 감당해야 할 몫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도 다가올 종말에 천국을 준비함에 있어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과 책임을 잘 감당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알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맡겨주신 책임과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한다. 그러므로 적은 일에 충성하였다는 칭찬과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복을 누리는 성도가 되어야겠다.
우리의 구원이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우리의 어떤 공로를 주장할 수 없는 전적인 은혜이다. 은혜로 받은 선물인 믿음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은 당연하다. 은혜와 사랑을 입은 자로 하나님이 맡겨 주신 일에 대해 진심으로 성실을 다해야 하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도록 행하는 삶이어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의 기대에 걸맞는 삶으로 살아내기를 기도한다.
그리스의 명언에 ‘기하학에는 지름길이 없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에게도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가야 한다, 시간을 뛰어넘어 잘 되는 법이 없다, 시간이 알차게 지나가야 내공이 쌓이는 법이다’라는 말도 있다. ‘1만 시간의 법칙’이 있듯이 한 분야에서 정상에 서려고 하면 1만 시간의 노력이 따라야 한다.
보석을 가공하는 영화가 있었다. 보통 돌에 영롱한 보랏빛의 루비가 박혀 있는 돌인데 우리 눈에는 그 돌이 보석의 원석인지, 단순한 돌인지 모른다. 원석이라고 하는데 차돌 같다. 그러나 보석 전문가가 보는 눈이 달랐다. 원석에서 보석이 될 부분을 잘라내고, 도려내더니, 보석을 갈고 닦는데, 처음에는 별 것도 아닌 것 같다. 과연 보석이 될까? 차돌로 남겠는가?
빌 하이벨스의 목사님의 책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책에서 포기하는 순간들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달리기 하는 선수가 ‘그만! 이제는 못가. 한 발자국도 더 못가.’ 하는 것은 육체적 포기의 순간이다. 마감 시간에 회사사장이 들어와 또 업무를 맡긴다. 열이 받쳐 오른다. ‘됐어. 이젠 더 이상 못 참아. 당장 사표 써서 책상에 던져버릴 거야!’ 이것은 직장 포기의 순간이다.
인격을 지키려 분투노력하는데 세상은 까딱하지 않고 사람들은 놀려댄다. ‘나만 애쓸 까닭이 어디 있어? 남들처럼 일반적인 도덕 수준에 맞추어 살아야지 뭐.’ 이것은 도덕적인 포기의 순간이다. 신앙인도 포기의 순간이 있다. 하나님께서 옳은 데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은 알지만, 실패를 겪고 모멸을 받으면 ‘하나님! 더는 못갑니다. 제 분수에 넘는 것을 요구하시는군요. 마음대로 하세요.’ 이것은 영적 포기의 순간이다.
그렇게 어려운 순간에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처절한 고통을 겪으실 때에 사탄의 소리도 들렸을 것이다. ‘포기해, 그만 둬. 인간들, 하찮은 죄인이잖아, 심판받게 버려두라, 이런 고통당할 필요가 없잖아!’ 못이 손을 뚫고 지나가고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는 순간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을 때에 예수님은 포기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그 고통스러운 순간을 넘기시고 우리의 구원을 주셨다. 그리고 온 인류에게 새로운 비전을 보여 주셨다. 인내와 비전은 하나님의 위대한 선물이다. 때때로 만나는 어려운 일들 속에서 예수님을 생각하며 인내와 비전을 품으시기를 소원한다.
찬송가 323장의 제목은 ‘부름 받아 나선 이 몸’이다. 신학교에 입학하여 감동적으로 많이 불렀고, 결단하면서 외친 찬송은 바로 ‘부름 받아 나선 이 몸’이라는 찬송가였다.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 ….’ 두 손을 불끈 쥐고 소리 높여 부르던 찬송이었다. 이 찬송을 지은 이호운 목사님은 ‘저도 주님을 위하여 몸 바치기를 원합니다. 평안과 영광과 칭찬을 원하지 않사오며, 주님이 지고가신 십자가를 원합니다. 옛 성도들이 졌던 십자가를 저도 지고 가려고 합니다. 오로지 저도 주님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려고 합니다. 주님을 위하여 일하고 주님을 위하여 죽으려고 합니다.’라고 고백하였던 목회자였다.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 사명자들이 다시 불러야 하는 찬송이요, 오로지 주님 앞에 헌신만을 다짐하는 고백이 되어야겠다. 우리 모든 사람은 사명자들이다. 목사와 신학생만이 사명자라고 하는 말은 정말 맞지 않는 말이다. 거듭난 성도라면 모두가 다 사명자들이다.
■ 김동길 교수의 에세이, ‘내가 부르다가 죽을 노래여’라는 책을 보면 ‘죽음 직전에’라는 글이 있다. ‘어느 여대생이 겪은 죽음’라고 시작한다. 그 글의 요지와 사건을 요약해보면, 서울의 어느 유명한 대학에서 독일어를 전공하며 자기 성취욕에 만족하며 사는 여대생이 있었다. 그녀가 대학 3학년 때에 배에 만져지는 종양을 검사하였다. 의사들은 환자가 알아들 수 없는 말로 소견을 나누는데, 독일어로 암일 것이라고 주고 받았다. 의사들은 자기들이 나누는 말을 환자가 알아듣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알아듣고, 여학생은 부모님에게 유서와 비슷한 글을 남기고 수술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여대생은 수술을 받기 전에 병원을 나와 명동거리를 활보하는데, 입원하기 전과 다르게 눈에 보이는 모든 세상은 아름다웠고, 생기가 넘쳤다. 하나님께서 1년만 더 살게 하시면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이웃을 섬기며, 받들고, 사랑한다는 말만을 하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녀는 암이 아닌 일반 종양이었고, 건강을 되찾으면서 새로운 각오로 인생을 보람 있게 살게 되었다고 한다. 죽음을 경험해보아야 인생을 신실하게 살고 최선을 다하고, 정성스럽게 살게 된다.
본문을 통해 ‘하나님은 남긴 것을 계산하십니다’라는 제목으로 본문의 말씀을 새로운 각도에서 보려고 한다.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에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기고 가게 되었다. 여러 종들이 있었으니, 그동안 그들의 열심과 능력을 고려하면서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5달란트, 한 사람에게는 2달란트, 한 사람에게는 1달란트를 주고 떠나갔다.
본문의 말씀을 잘 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달란트의 비유로 들려주셨는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 19절로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라는 말씀이다. ‘오랜 후’라고 하니, 몇 년은 족히 지나갔을 것이다. 종들을 불러놓고 회계하였다. 결산하고 헤아려보았다. 재산이 늘었는지, 줄었는지, 그대로 있는지 셈을 헤아려 보았다.
이 이야기는 나에게 주어질 현실이요, 불원간에 내 앞에 펼쳐질 일이다.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이 결산하는 날이 올 것이다. 나를 지으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서서 나의 살아온 일들, 나에게 주어진 시간과 물질 그리고 건강을 어떻게 사용하였는지 보고하고 평가받아야 한다.
그 날, 마지막 날에 풍성한 결산보고를 하기 위해서는 나 스스로 중간 평가를 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자주 나를 평가해보고, 다시 도전해야 하고, 이윤을 남겨야 하고, 주어진 남은 시간과 물질 건강을 잘 사용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나는 하나님의 뜻에 잘 부응하면서 살았는지, 아니면 나 중심으로, 내 욕심만 이루기 위하여 나를 낭비하면서 살았는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이 아시고, 내가 나를 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 앞에서 지금 책망 받는다는 심정으로 나를 바로 세우고, 나 중심에서 중심이 이동이 되어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위치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보완하고 개선하는 것은 기업에서나 하는 것이 아니라, 공자처럼 하루에 3번, 매달마다, 매해마다 나를 점검하고, 나를 보완하고 개선해야 한다. 중간평가라는 것은 아주 좋은 방법이다. 그래서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그동안 잘 살았으면, 더 잘 살아가기를 위하여 힘쓰면 된다. 그래야 남은 삶을 제대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본문에서 주인은 종들에게 당신의 소유를 맡기셨다. 14절 말씀에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라고 하셨다. 우리는 주인의 소유를 맡은 사람이지, 나의 소유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나의 소유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그것이 여러분이 맡은 것이지, 결코 여러분의 것이 아니다. 내가 성도로서 거듭났다면 더욱 그리해야 한다. 그러므로 앞으로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지금부터라도 청지기 정신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각각 종들의 재능대로 달란트를 맡겨주셨다. 우리에게도 재능이 있다. 재능이 없는 사람이 없다. 나름대로의 재능이나 은사도 주셨다. 그러므로 항상 내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내가 임시로 맡아 관리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가시기를 소원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대로 잘 관리할 수 있다. 남은 인생 멋지게 투자하며 장사를 잘 하여 많은 이윤을 남기게 될 것이다.
■ 한 소년의 학교성적은 항상 꼴찌였다. 그는 예술학교를 세 번 지원했으나 모두 낙방했다. 이유는 ‘교육 불능’ 아버지는 아들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오며 통탄했다. ‘왜 하필 우리 집에 이런 바보가 태어났을까’ 이 소년이 바로 세계 최고의 조각가 로댕이다.
다른 소년이 있었다. 그는 다섯 살 때 겨우 입을 열었다. 글을 읽지 못해 ‘멍청한 아이’로 불렸다. 산수는 항상 낙제점. 담임선생으로부터 ‘환상에 사로잡힌 저능아’라는 평가를 받고 퇴학당했다. 이 아이의 이름은 세계적인 석학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박사이다.
또 한 소년이 있다. 그는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왜 둘이 되느냐’며 따졌다. 어떤 날은 새끼를 낳겠다며 온종일 오리 알을 품었다. 담임선생은 그를 ‘혼란스런 문제아’로 지목했습니다. 그리고 13살 때 퇴학처분을 받았다. 이 소년이 바로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이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무엇을 얼마나 맡겨 주셨는지 아시는지?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 주신 것의 종류와 분량을 잘 알아야 그래야 하나님의 기대를 알 수 있다.
지혜로운 종은 미련한 종과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미련한 종은 가서 땅을 파고 주인의 돈을 땅에 묻어 감추어 놓았다. 왜 감추었을까? ‘두려워하여 ….’(25) ‘주인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알았으므로 ….’라고 하였다. 이 모든 것은 핑개였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게을러서였다.
이런 이유도 조금은 있었을 것이다. ‘내가 가서 장사하여 이를 남긴들 얼마나 되겠으며, 그것이 주인에게 얼마나 보탬이 되겠느냐?’, ‘내가 한들 얼마나 할 수 있겠느냐?’라는 생각과 더불어 만들 수 있는 이유 아니면 사단이 들려주는 다양한 이유에 머물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수고가 아무 의미도 없고 아무 가치도 없으며 하나님께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 어떤 대 사업가가 자식이 없어서 양자를 맞으려고 했는데 가까운 친구가 한 청년을 소개하면서 훌륭한 양자감이라고 했다. 그 사업가는 우선 청년을 사원으로 채용하고 얼마 동안 관찰을 하기로 했다. 하루는 청년을 불러 1만 달러를 내놓으며 ‘이걸 자네 마음대로 쓰게.’라고 했다. 청년은 얼떨떨했지만 마음속으로 ‘아하! 이건 나를 테스트하는 것이구나.’ 생각하며 그 돈을 받았다. 그 후 얼마 동안 사업가는 청년을 만나지 않았다. 1년쯤 지난 뒤 사업가는 불쑥 청년에게 물었다. ‘그때 자네에게 준 돈을 어떻게 썼나?’ 청년은 이제야 때가 왔구나 하고 기뻐하며 곧 집으로 달려가 1만 달러뭉치를 가지고 왔다. ‘사장님, 한 푼도 쓰지 않았습니다. 여기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자 사업가는 그 청년을 양자로 맞을 것을 포기하며 소개한 친구에게 말했다. ‘돈은 쓰기 위한 것이 아닌가? 사업상 친구를 사귀기 위해서 교제비로써도 좋을 것이고, 어떤 투자를 해서 사업 공부도 할 수 있었을 텐데 돈을 손에 쥐고도 가만히 있는 그런 사람에게 나의 큰 사업을 맡길 수 없네.’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숨겨진 달란트를 찾아내어 개발하고 투자하는 것이다. 반면 칭찬받은 종, 5달란트와 2달란트를 받은 종들을 보면 믿음을 가지고 최선을 다했다. 얼마를 남겼느냐 하는 것보다 충성심이 있었고, 충성심에 대한 열매가 이윤으로 모아졌다고 할 수 있다.
충성된 종은 어떤 종인가? 그러한 종의 특징은 무엇일까?
충성된 종은 그것으로 ‘바로 가서’ 장사를 했다. 가지가지 이유를 대며 아직 여유가 많이 있으니까, 좀 놀다가 천천히 하자고 미루었다면 그 역시 충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충성된 종은 작은 일, 닥치는 일, 명령하시는 일, 해야 할 일로 결정하면 이에 최선을 다하여 충성했다. 주어진 일이 어떤 일이든 최선을 다했다.
큰 일이면 충성을 다 한다. 그러나 작게 여기고 시시하게 여기고 소홀히 하는 사람이 많다. 맡은 사람이 사장이나 유명인 같이 큰 사람이면 정성을 다해 섬기려고 한다. 그러나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작은 사람이면 대충 대하는 이가 많다.
■ 1947년 미국의 시카고 근교의 위스컨신 주에 있는 천체연구소에서 근무하고 있었던 과학자, 천체물리학자 닥터 첸드리스카 박사는 시카고대학에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박사님! 겨울방학 동안에 저희 대학에 와서 고급물리학에 관한 특별강의를 좀 해주시겠습니까?’ 그는 쾌히 승낙을 했다. 몇 주후에 다시 대학에서 전화가 왔다. ‘박사님! 아무래도 강의를 cancel해야만 하겠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클래스가 너무 작아서요. 두 명밖에 등록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첸드리스카 박사는 이런 대답을 했다. ‘클래스가 작은 것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제가 강의를 하죠.’ 그래서 그 겨울동안, 시카고의 겨울은 유난히 추었다. 눈보라, 차가운 사나운 바람을 헤치고 시카고에서 두 시간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그는 일주일에 이틀동안 한 번도 빠짐이 없이 그는 계속적으로 이 겨울동안 강의를 두 학생을 상대로 했다. 그로부터 꼭 십년이 흘러갔다. 이 첸드리스카 박사에게 강의를 받았던 두 사람이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한 사람은 첸넝 양 박사라는 분이고 그리고 또 한 분은 충도 리라는 중국계의 미국 과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수상의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 ‘결정적으로 우리가 이 상을 수상하게 된 데는 우리 두 사람을 앞에 놓고 강의했던 첸드리스카 박사님의 강의 때문이었습니다.’
동양계 두 사람을 앞에 놓고 열정을 다한 첸드리스카 박사의 강의가 노벨상으로 열매가 맺혀진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 주신 단 한 사람이라도 최선을 다하여 복음을 전하고 사랑을 쏟아 붓는다면 반드시 좋은 열매를 보게 될 것이다.
이렇게 충성된 종에게 하나님은 세 가지 축복을 주셨다.
❶ 주인 되신 하나님의 칭찬을 받았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불러주셨다. 하나님께 칭찬을 듣는 것보다 더 신나고 행복한 일이 어디 또 있을까? 자주 부르며 은혜받는 복음성가가 있다. 김석균 작사, 작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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❷ 더 얻게 되었다. 주인은 그가 충성하여 남긴 이를 빼앗지 않으시고 오히려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라고 하셨다. 많은 것으로 맡겨 주시는 것은 특별한 은혜이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절대 신뢰한다는 말씀이다. 다섯 달란트가 작은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크고 많은 것을 안심하고 맡겨주겠다는 말씀이다.
❸ 예수님의 즐거움에 초대하신다. 충성된 종들이 주인의 칭찬 뿐 아니라 즐거운 잔치에 초대받는 영광을 얻게 된 것이다. 주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셨는데, 그런 즐겁고 영광스런 자리에 당당한 내빈으로 참석하게 되면 얼마나 신나고 즐거운 일인지 상상해 보시라.
그처럼 우리가 충성된 청지기가 되면 하나님의 칭찬뿐만 아니라 더 많은 것을 받으며 주님의 즐거운 잔치에 참여하는 기회를 얻는 것이다.
악하고 게으른 종, 무익한 종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한 달란트 받은 종도 주인으로부터 달란트를 받은 즉시 행동에 옮겼다. 차이가 있다면 그는 이윤과 열매를 남기기 위함이 아니라 있는 땅을 파고 묻어 감추어 놓았다.
나에게 주신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두고 있지는 않은지? 이 종을 책망하는 단어를 살펴보자. 26절 ‘악하고 게으른 종아’, 30절 ‘이 무익한 종’ 이라고 했다.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게으르다는 말은 인정은 하겠으나 악하다는 말은 좀 심하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든다. 본전 잘라먹는 사람도 많은데, 가지고 도망가지 않았는데 왜 주인은 그를 악하다고 했을까? 주인의 의도대로 하지 않고 제 맘대로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1달란트 받은 종처럼, 주인을 폭군으로 만들지 말아야 한다.
■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는 아름다운 일화를 많이 남겼다. 어느 해 정월 초하룻날, 아침 일찍 박사 곁에서 자고 일어난 제자가 잠자리를 정돈하고 세배를 올렸다. 장기려 박사는 따뜻한 미소를 머금고 덕담을 해주었다. ‘금년엔 날 좀 닮아라.’ 스승의 큰 사랑에 어리광을 부리던 제자가 재롱삼아 말을 받았다. ‘선생님 닮아 살면 바보 되라고요?’ 그러자 장기려 박사는 껄껄껄 웃으며 다음과 같이 토를 달았다. ‘그렇지! 바보 소리 들으면 성공한 거야. 바보로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 줄 아냐?’ 혹여 세상 사람들은 늘 불쌍한 환자들에게 무료진료를 해주던 장기려 박사를 ‘저 사람 바보가 아냐?’ 하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장기려 박사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바보로 살기’로 작정했던 사람이었다. 우리도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예수님을 따라 바보로 살기로 작정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바보가 되자.’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고 하시는 칭찬과 축복의 말씀을 들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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