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어린 시절에는 집집마다 액자 속에 사진을 걸어두는 것이 자랑거리요 집안 분위기를 한층 돋보이게 하는 집안 단장이 되었다. 특히 신식 교육을 받은 자녀들이 있는 집은 종류도 다양하거니와 액자 모양과 색상도 화려 했다. 사진의 종류는 회갑기념 사진, 자녀결혼 사진 그리고 영정 사진이 많았다. 명절이나 부모님 생일 등에 식구들이 모이면 어김없이 사진을 쳐다보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한다. 누구는 올해는 무슨 일로 못 오게 되었으며 누구는 군에 가 있어서 못 오고 누구는 형편이 좋지 않아서 고향도 못 온다며 차츰 음성이 변해지던 어머니는 끝내 ‘ 너거 아부지는 이 좋은 세상 한번 제대로 살아 보지도 못하고 그리도 바삐 부른 듯이 가버렸는지 . . .“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이 흐르면 화제가 다른 곳으로 옮겨 간다
어머니가 손주들 밥을 해준다고 대구로 내려오면서 고향집은 빈집이 되었다. 시골집뿐만 아니라 집을 비워두면 얼마 되지 않아 집이 허물어지고 폐가의 모습이 되어 흉물스럽게 변하는 것을 종종 본다. 시골 흙 벽돌로 지은 집은 비바람이 휘몰아치면 습기를 머금어 금방 허물어지고 만다. 가끔 가는 고향 마을은 나이 들어 썩은 이빨 늘어나듯 폐가가 늘어나더니 빠져 버린 할머니 이빨처럼 온전한 집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러다간 마을 전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된다.
백 여호가 넘던 마을은 골목마다 아이들로 넘쳐 났다 우리 동기생들만 하여도 스무명 정도가 되었으니 마을은 언제나 개짓는 소리, 닭우는 소리, 소 울음 소리, 아이들 떠드는 소리로 활력이 차고 넘쳤으며 언제나 시끌벅적 했다. 그렇게 북적대며 소란스럽던 동네가 적막강산으로 변했다. 멀리서 농기계 기계음 소리만 이따금씩 들려와 마을이 있음을 알려줄 뿐이다.
어느 해 가을인가 사라호 태풍 이래로 가장 강한 태풍이라며 강풍과 폭우를 동반한 ’매미‘가 한반도를 덮쳤다. 태풍 ’매미‘는 우리에게 자연의 위력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었고 자연 재해에 대한 경각심이 높여지는 계기가 되었다. 문제는 그 ’매미‘가 우리 집안의 소중한 기록을 몽땅 앗아가 버렸다. 우리 집을 관리하며, 마당에 흙을 돋우어 채전밭으로 사용하며, 비닐하우스를 지어 농기계 창고로 사용하던 뒷집 아저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빨리 내려와 보라는 다급한 목소의 전화였다. 어머니와 함께 직장은 연가 처리를 하고 바람의 속도로 내려갔다. 내려가면서도 가슴이 조마조마 했다. 내 유년 시절의 추억이 태풍에 휩쓸려갔다는 조바심도 있었지만 어머니가 받을 충격이 걱정이었다.
집앞에 들어서는 순간 처참한 모습에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이 일을 어찌 한단 말인가? 노후 되어 깨어진 기왓장 사이로 빗물이 스며들어 기둥이 약한 흙집의 특성상 흙 벽돌이 빗물에 젓으변서 지붕이 내려 앉고 말았다. 집에 사람이 있었다면 정말 호미로도 막을 일이었으나 관리 부재로 가래로도 막을 수 없는 사태가 되었다.
무너진 훍더미 속에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이리저리 뒤지는 가운데 시간이 흘렀다. 상복으로 지어둔 삼베 옷가지며 손때 묻은 살림살이 몇 점를 건져 내던 어머니의 눈빛이 절망감으로 변하였다. ”한평생 일궈 놓은 집이 무너져 내린 것 때문일까? 자녀들 키우던 생각을 하며 만감이 교차된 때문일까?“ 라는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어머니의 한숨이 무너져 내린 집 때문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 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찾지 못하였기 때문 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고 어머니 보선 발은 진흙투성이가 되어 흙 장화처럼 변했다. 이제 결단의 순간이 되었다 조금만 더 찾아보자던 어머니 목소리가 힘을 잃어가고 있었고 굴삭기 굉음이 요란하게 들려왔다. 굴삭기 바가지로 불편한 어머니 마음을 달래어 보려고 진흙더미 속을 이쪽저쪽 찾아보나 이미 곤죽처럼 변한 흙더미 속에서 물건을 찾는 일은 무의미한 것이 되었다.
내 기억 속에 아버지 사진은 노란색으로 탈색이 된 6.25 참전 용사인 아버지가 전우들과 함께 찍은 유일한 사진이었다. 크기도 아주 작았다. 아버지는 참전 용사로서 공로를 인정받아 훈장을 받았다. 훈장은 동으로 만들어졌으며 오색 천 조각에 매달려 있었다. 아버지가 남긴 사진이 없어서 전우들과 찍은 사진을 가지고 영정 사진을 만들었다. 정말 아버지 일생에 한 장 밖에 없는 사진이었다. 이 사진은 어렵게 남겨진 사진이기도 했지만 생사를 넘나든 고통과 애간장 끓는 기다림이 담겨진 사진이었다.
그 액자를 찾았던 것이다. 한만은 인생이 흙더미로 변한 모습이 더 이상 처절할 수 없이 처참하게 느껴졌다,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굴삭기 기사에게 이곳저곳을 힘없이 가리키며, 어머니 마음을 달래는 방법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고향을 마을을 지나는데 ’초등학교 100년사 자료수집에 동참해 주세요‘라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일제 강점기 초등학교를 다녔으니 교육청을 통해서 어머니의 사진을 찾아보기로 했다. 행정 복지센터와 병무청을 통해 아버지 사진을 찾아보리라 마음 먹어 본다. 그리고 사진을 찾는 다면 모든 기술을 다해 복원하여, 모양 좋게 액자를 만들어 어머니 아버지 묘소에 가져가 불효자의 마음을 전하며 넋 놓고 울어보고 싶다.
첫댓글 수고 하셨습니다.
한비수필학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