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 우리는 스토리텔링에 매료되는가
-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 -
권대근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스토리텔링 한 편이 태어날 때, 세상이 바뀌고, 스토리텔링 북 한 권이 태어날 때, 다른 세상이 온다.
Ⅰ. 로그인
지동설의 시대를 지나 천동설의 시대가 왔지만, 현대는 ‘설동설’의 시대다. 인간이 살아가는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도는 것(지동설),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도는 것(천동설)이 아니라 세상은 '이야기를 중심으로 돈다‘는 것이다. 사람의 뇌는 단순한 메시지보다 이야기를 잘 기억한다. 인지심리학자인 로저 생크와 로버트 애빌슨은 이야기가 지식축적의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주장하는데 사람은 중요한 사실을 이야기의 형태로 저장하기 때문이다. 우리 뇌의 측두엽에는 이름이나 얼굴을 저장하는 영역과는 구별되게 이야기를 저장하는 영역이 있다. ’이야기 기억‘은 용량도 엄청나서 긴 이야기를 들어도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세 가지가 있다. 언어, 리듬, 그리고 색깔이다. 이 세 가지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동역학이 언어다. 언어가 이야기라는 형식의 옷을 입으면, 그 힘은 더 강력해진다. 이야기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이성적 논리가 아니라 감성적 이야기다. 뛰어난 이야기는 정서적 일체감을 일으키고, 사람 사이의 관계도 변화시킨다. 심리학자 로버트 스턴버그는 ‘사랑은 이야기’다 라며 인간관계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제시했다. 사이가 좋은 관계는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많이 만들고, 늘 이야기가 끊이질 않는다. 달포반도 동료 문인들과 책을 통해서 서로 소통하고 이야기를 많이 나눌 수 있다면 사랑이 가득한 감동반이 되지 않을까. 재미난 책, 감동적인 책을 읽어주던 사람은 신뢰받고 존경받고, 사랑받을 수밖에 없다. (참고/안산동화 읽는 어른 지해연)
Ⅱ. 클릭
1. 스토리텔링의 개념
우리는 상대방과 대화할 때 말하고자 하는 것을 재미있게 생동감있게 표현하며 설득력 있게 말해야 한다. 이런 기법을 스토리텔링기법이다. 스토리텔링의 기초적인 개념은 Story + Tell + ing 가 결합한 단어로 상대방에게 알리고자 하는 이야기를 재미있고 생동감있게 설득하여 전달하는 이야기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스토리텔링기법은 스토리/담화/이야기 담화로 변해가는 단계를 포괄하는 것이다.
스토리텔링기법은 광고에서 이야기를 색다른 형식으로 담고 변화시키는데 사용된다. 스토리텔링기법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려면 타당한 목적과 교훈이 존재해야 한다. 여러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대화의 분위기를 활발히 하거나 재미를 제공하지만 잘못하면 의미없는 대화로 변질될 수 있어서 말을 할 때에는 목적이 분명하고, 교훈이 담긴 이야기를 하여 듣는 이가 알고 느끼하여 설득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스토리텔링기법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정확하고 뚜렷한 목표가 이야기에 담겨야 하고 듣는 이에게 교훈을 주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다.
2. 스토리텔링 활용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해라
작은 깨달음을 이용한 사례를 이야기해라
리얼하게 이야기해라
3. 스토리텔링의 사례
::실제로 증명된 경험+사례를 바탕으로 이야기한 에비앙
프랑스혁명이 일어난 1789년 눈 덮이 알프스의 작은 마을 에비앙에 신장결석을 앓고 있던 한 후작이 요양을 하고 있었다. 어느날 마을의 한 주민이 이곳에서 나오는 지하수가 몸에 좋으니 한번 마셔보라고 권하였다. 주민의 말을 듣고 에비앙 마을의 지하수를 꾸준히 마신 후 병이 깨끗이 나았다.
그때부터 에비앙 마을의 지하수를 연구하였고, 에비앙의 지하수가 알프스 산맥의 눈과 비가 약 15년에 걸쳐 내려오면서 정화 되었다는 사실과 에비앙 지하수에는 미네랄 성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물을 팔게 된 한 주민은 단순한 물의 개념이 아닌 '약'의 개념으로 상품화시켰다. 1879년 마침내 에비앙 생수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공식 판매 허가를 받아 상품으로 판매된 세계최초의 물로 기록되었다.
:: 모나코 왕비 이름을 딴 에르미스 hermes의 켈리백
모나코 왕비 그레이스켈리가 임신했을 때 자신의 볼록한 배를 에르메스가방으로 감추었는데 이 사진이 미국의 잡지 '라이프'에 실렸고 에르메스는 그 가방에 그녀의 이름을 딴 켈리백이라는 이름을 내걸었다.(촐처/W스피치)
:: 멋진 연출로 이화학당 학생이 되다
하란사는 교육을 향한 열정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결혼 이듬해인 1894년 하란사는 이화학당을 찾아간다. 공부를 하고 싶다는 하란사를 마주한 미국 선교사 출신 룰루 프라이 학당장은 그러나 입학을 불허한다. 금혼 학칙에 따라 미혼이어야 하는데 하란사는 기혼인데다 딸(하원옥)까지 있던 터였다. 하란사는 이때 하인이 들고 있던 등불을 입으로 불어 끄며 “우리가 캄캄하기를 이 등불 꺼진 것과 같습니다. 어머니들이 무언가 배우고 알아야 자식을 가르칠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호소, 마침내 학당 학생이 된다.
4. 스토리텔링의 스토리의 매력
■ 호모 폴리티쿠스(정치적 인간), 호모 이코노미쿠스(경제적 인간), 호모 파베르(도구적 인간) 등 인간의 본성을 규정하려는 수많은 명칭들이 있지만, 나는 호모 로퀜스(언어적 인간)라는 명칭에 가장 마음이 끌린다. 자신들이 만들어낸 언어로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는 동물, 인간. 우리는 오늘도 영화, 드라마, 소설이 만들어내는 끊임없는 이야기의 네트워크 속에서 저마다의 이야기를 소비하며 살아가고 있다.
■ ‘이야기 좋아하면 가난해진다’는 어른들의 핀잔을 심심찮게 들으면서도 나는 이야기가 너무 좋았다. 서정주 시인은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바람’이라고 했고, 수필가 강숙력은 ‘나를 키운 것의 8할이 실수’라고 했지만, 나를 키운 8할은 아마 이야기의 힘일 것이다. 70년대는 초중고에 고전읽기반이 있었고, 각 각교마다 우수한 학생들을 뽑아 고전읽기반을 방과 후 운영했다.
가난해서 책을 살 수 없었던 초등학교와 중학교 다닐 때 고전읽기반을 통해 많은 고전을 접할 수 있었다. 동화책이나 위인전은 물론 어른들이 읽는 소설까지 어린 시절 나는 눈에 보이는 모든 이야기들에 매혹되었다. 인간이 죽어서도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이야기뿐인 것 같았다.
■ 특히 ‘옛날 옛적에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에’로 시작되는 전래동화가 그토록 좋았던 이유는 따뜻한 방바닥에서 할머니 무릎을 베고 옛이야기를 듣는 듯한 ‘친밀감’이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마당에 멍석이나 평상을 펴놓고 이웃집 아저씨의 귀신 이야기를 들으면서 공포에 떨면서도 신기해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야기책만 있으면 나는 금방 외로움을 잊었다.
지금 여기 말고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생각에, 책 한 권만 펼치면 완전히 다른 세계로 빠져들 수 있다는 생각에, 매번 가슴이 떨리곤 했다. 그렇게 ‘이야기’는 오늘의 고통을 잊게 만드는 ‘망각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야기 책 속으로 마음의 여행을 다녀오고 나면 오늘의 삶을 다시 바라볼 용기가 샘솟곤 했다.
■ 영화로도 만들어졌던 다니엘 월러스의 소설 <빅 피쉬>는 ‘이야기의 힘’과 ‘이야기의 장애물’을 동시에 그려낸다. 신문기자인 윌리엄의 아버지 에드워드는 평생 전국 방방곳곳을 누비는 세일즈맨이었지만 사람들에게는 타고난 이야기꾼으로 알려져 있다. 이야기 속에서 아버지는 거인을 무찌르고, 아름다운 인어와 사랑에 빠지고, 홍수를 잠재우고, 전쟁터에 나가 수많은 사람들을 구한 모든 이의 영웅이다.
사람들은 볼 때마다 흥미로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 아버지의 현란한 화술에 매혹되지만, 정작 기자정신이 투철한 아들은 아버지의 허황된 이야기에서 ‘허구’를 완전히 제거한 ‘객관적 사실’만을 알고 싶어 한다. 아들의 눈에 비친 아버지는 허풍선이일 뿐이고, 아버지의 이야기는 ‘아름다운 거짓말’의 왕국처럼 느껴진 것이다. 이야기의 장애물은 바로 상상력에 대한 ‘불신’이었던 것이다.
▽허구 ->상상력
▽샤무엘 코울리지, 불신의 자발적 해소
■ 아버지의 지병이 악화되자 아들은 아버지의 진실을 알아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아버지가 만났던 사람들과 아버지가 떠났던 장소들로 시간 여행을 떠난다. 알고 보니 ‘이야기꾼’으로서의 아버지는 모험과 사랑이 가득한 영웅적 삶을 살았지만, ‘세일즈맨’으로서의 아버지는 온갖 산전수전으로 점철된 험난한 삶을 살았다. 만약 아버지의 고생담을 ‘사실대로’ 듣기만 했다면 기나긴 신세한탄에 불과했을 것이며, 아들은 아버지의 삶을 실패로 가득한 고통스런 이야기로 기억하지 않을까. 그렇다. 이야기는 바로 ‘기억’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바로 우리의 삶이 타인에게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인사유명 호사유피
■ 아버지의 삶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한 아들은 각박한 세일즈맨의 삶을 살면서도 놀이와 축제의 신 디오니소스의 영혼을 잃지 않은 아버지를 오히려 존경하게 된다. 아버지의 진정한 유산은 단지 집 한 채가 아니라 삶을 견디는 유머와 상상력이라는,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영혼의 유산이었다. 아들은 아버지의 ‘거짓말 같은 이야기’가 없었다면 아버지의 삶이 얼마나 팍팍했을까를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단지 ‘객관적 사실’만을 찾아 헤매는 기자정신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던 아들은 비로소 아버지가 홀로 견뎌야 했던 숱한 고독과 방황의 날들을 이해하게 된다. 그 아름다운 이야기의 퍼레이드가 없었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시시했을까. “아버진 자신의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해서 당신 자신이 곧 이야기 그 자체가 되셨죠. 그래서 이야기들은 아버지 덕에 생명을 얻게 됐고 그렇게 아버진 이야기 속에서 영원히 살게 되신 거죠.”
■ ‘이야기-사실=거짓(허풍)’이라 믿었던 아들이 ‘이야기-사실=상상력’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아버지의 ‘허풍’이 아버지를 의심하는 계기였다면 이제 아버지의 ‘상상력’은 아버지의 영혼이 지닌 고유한 무늬로 거듭난다. 이 세상 어느 아버지와도 바꿀 수 없는 내 아버지의 상상력, 그리고 아들을 사랑하는 이 세상 모든 아버지가 미처 ‘사실대로’ 전해줄 수만은 없는 이 세상의 고단한 산전수전. 그 모든 우여곡절을 이야기의 선물상자에 담아 보내면, 우리의 삶은 어느새 ‘덜’ 힘들고 ‘덜’ 고독하며 마침내 ‘더’ 잘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된다.
▽스토리와 스토리텔링
3. 스토리를 살찌울 문학적 장치- ‘날씨’의 힘 1
■ 왜 작가들은 소설 속에서 바람이 으르렁거리고 비는 억수같이 쏟아 붓길 바라는 걸까? 왜 작가들은 영주의 저택이나 오두막, 혹은 피곤에 지친 여행자들을 심한 비바람에 시달리게 하고 싶어 할까?
-토마스 C. 포스터
■ 소설 속에서는 왜 유독 비오는 날이 많을까. 생각해 보면 ‘비오는 날’이라는 이유만으로 더욱 잘 이해되는 사건과 분위기가 있다. 황순원의 <소나기>에서 만약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소년과 소녀의 애틋한 첫사랑이 그토록 가슴 설레는 느낌으로 시작될 수 있었을까.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 <폭풍의 언덕>에서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비극적 사랑이 ‘햇볕 쨍쨍 내리쬐는 화창한 날씨’와 어울릴 수 있었을까.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에서 ‘안개’로 진을 친 듯한 도시 무진의 음울하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가 없었다면, 과연 이 소설이 명작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을까. 이렇듯 문학작품에서 날씨는 분명 ‘날씨 그 이상’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날씨는 줄거리에 개연성을 부여하기도 하고, 등장인물의 성격이나 기분을 강하게 부각시키기도 하며, 작품의 상징적 의미를 심화시키는 역할도 하는 것이다.
■ 그렇다면 우선 ‘비오는 날’의 분위기를 십분 활용하고 있는 문학작품의 이야기로 시작해보자. 개화기 신소설이나 식민지시대 소설에는 유난히 ‘날씨’에 대한 치밀한 묘사로 시작되는 작품들이 많다. 당시 사람들은 아직 농경사회의 탈을 벗지 않았기에 현대인보다 훨씬 날씨에 민감하고 해박했던 것이다. 앞으로 우리가 만나 볼 세 작품도 ‘날씨’ 때문에 울고 웃는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바로 현진건의 <운수좋은 날>, 김유정의 <소낙비>, 그리고 손창섭의 <비오는 날>이다. 이 세 작품은 모두 ‘비오는 날’의 독특한 분위기가 작품 전체를 장악하고 있다.
■ <운수좋은 날>의 첫 장면은 이렇게 시작된다. “새침하게 흐린 품이 눈이 올 듯하더니, 눈은 아니 오고 얼다가 만 비가 추적추적 내리었다. 이날이야말로 동소문 안에서 인력거꾼 노릇을 하는 김 첨지에게는 오래간만에도 닥친 운수 좋은 날이었다.” 스스로 늘 운수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인력거꾼 김 첨지는 아내와 갓난아이를 둔 가난한 가장이다. 세상의 불운은 모두 자기 것인 양 운수가 늘 나쁘다고 생각하는 김 첨지에게 이날만은 유난히도 손님이 들끓는다.
약 한 첩도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무슨 병인지도 알지 못한 채 몇 달째 누워있는 아내를 위한 설렁탕을 사줄 수 있는 돈이 생겼던 것이다. 그러나 김 첨지는 이토록 운수 좋은 날에 이상하게도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은 불안감을 떨쳐내지 못한다. 바로 오늘 아침 출근길 아내의 애원 때문이었다. "오늘은 나가지 말아요. 제발 덕분에 집에 붙어 있어요. 내가 이렇게 아픈데……." 아내는 ‘비 덕분에’라도 아픈 자신과 함께 있어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 그는 이상하리만치 손님이 많은 이 날의 갑작스런 행운 때문에 오히려 자신에게 닥쳐올 비극을 선명하게 예감한다. 이다지도 운이 좋은 적이 없었기에 오히려 눈앞의 행운이 불행의 징조처럼 느껴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불길한 예감이 실현되는 순간을 어떻게든 미루고 싶어서, 평소에는 돈이 없어 먹지도 못하던 비싼 술과 안주를 마음껏 시켜먹기까지 하며 퇴근 시간을 늦춘다.
아내가 그토록 먹고 싶어 했던 설렁탕을 이제야 사왔지만, 집 안은 쥐죽은 듯 고요하다. 비온 뒤의 정적은 불도 때지 못한 집안의 냉기와 합쳐져 더욱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설렁탕을 사다 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마침내 현실로 이루어진 참혹한 장면 앞에서 김 첨지는 목놓아 운다. 비 내리는 거리를 미친 듯이 뛰어다니며 힘겹게 벌어온 그 소중한 돈은 이제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이렇듯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은 하루 종일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우울한 날씨가 없었다면 그 쓰라린 비극의 분위기가 반감되었을 것이다.
■ 한편 김유정의 <소낙비>에서 쏟아지는 비는 여주인공의 젊고 아름다운 육체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무대장치로 기능한다. <운수 좋은 날>에서 ‘비’의 역할이 작품의 암울한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키는 것이었다면, 김유정의 <소낙비>에서 ‘비’의 역할은 인간의 에로틱한 욕망을 더욱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역할을 한다. <소낙비>에서 춘호의 아내는 힘겹게 도라지와 더덕 등을 캐어 보리쌀과 바꾸어 먹는 가난한 살림을 꾸려간다. 남편 춘호는 도박을 하기 위해 ‘2원 만 해 달라’고 야단법석을 피우며 아내를 때리기까지 한다. 남편에게 구타당하다 쫓겨난 아내는 당장 2원을 마련할 길이 막막하기만 하다.
■ 아내는 오래전부터 동네에서 가장 부유한 이 주사와 눈이 맞아 호의호식하는 쇠돌엄마를 부러워한다. 수치심을 참고 이 주사에게 몸을 허락하면 남편에게 더 이상 매를 맞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비오는 날 인적은 드물어지고 내리는 비로 인해 어둑어둑해진 틈을 타 아내는 이 주사의 집을 찾아간다. “나뭇잎에서 빗방울은 뚝뚝 떨어지며 그의 뺨을 흘러 젖가슴으로 스며든다.
바람은 지날 적마다 냉기와 함께 굵은 빗발을 몸에 들이친다. 비에 쪼르륵 젖은 치마가 몸에 찰싹 감기어 허리로, 궁둥이로, 다리로, 살의 윤곽이 그대로 비쳐 올랐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는 여인의 젊은 육체를 더욱 관능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이주사는 기다렸다는 듯 춘호 처의 육체를 정복해버리고 만다. 이 모든 일들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렇듯 김유정의 <소낙비>에서도 만약 작품 전체를 감싸는 ‘비’의 힘이 없었더라면, 작품의 생생한 긴장감은 제대로 유지되지 못했을 것이다.
4. 스토리를 살찌울 문학적 장치- ‘날씨’의 힘 2
■ 손창섭의 <비오는 날>은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비오는 날 특유의 우울한 분위기를 십분 활용한 대표적인 소설이다. 아름답고 총명하지만 비극적 운명을 피할 수 없었던 여인 동옥의 창백한 얼굴은 비오는 날의 우울과 광기를 닮았다. 문학 작품 속에서 내리는 비는 비극적인 사랑의 슬픔이나 홀로 남겨진 자의 돌이킬 수 없는 고독을 표현하는 데 더없이 효과적인 장치다. 하염없이 내리는 비는 비참한 상황을 더욱 비참하게, 비극적인 상황을 더욱 비극적으로 만드는 감정의 증폭제 역할을 한다. 이 작품은 주인공 원구가 ‘비오는 날’마다 동욱, 동옥 남매를 떠올리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 “이렇게 비 내리는 날이면 원구의 마음은 감당할 수 없도록 무거워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동욱 남매의 음산한 생활풍경이 그의 뇌리를 영사막처럼 흘러가기 때문이었다. 빗소리를 들을 때마다 원구는 으레 동욱과 그의 여동생 동옥이 생각나는 것이었다. 그들의 어두운 방에 쓰러져 가는 목조 건물이 비의 장막 저편에 우울하게 떠오르는 것이었다. 비록 맑은 날일지라도 동욱이 오뉘의 생활을 생각하면, 원구의 귀에는 빗소리가 설레고 그 마음 구석에는 빗물이 스며 흐르는 것 같았다. 원구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동욱과 동옥은 그 모양으로 언제나 비에 젖어 있는 인생들이었다.”
■ 비에 젖어 있는 인생들. 아마 이 대목이야말로 동욱과 동옥 남매의 삶을 가장 명쾌하게 요약한 대목일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피난한 두 남매는 누군가의 관심과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원구 또한 옛친구 동욱에 대한 우정과 그의 누이 동옥에 대한 호기심을 저버리지 못한다. 동옥의 창백한 아름다움과 신출귀몰한 그림 솜씨, 그리고 심하게 절룩이는 그녀의 다리는 원구로 하여금 매혹과 연민을 동시에 느끼게 만든다.
하지만 원구 또한 동욱과 동옥을 전폭적으로 지원할 수 있을 정도의 여유는 없었다. 동욱은 원구가 누이동생 동옥과 결혼해 주기를 바라지만, 원구 또한 전쟁 중에 힘겹게 제 살 길을 찾느라 바쁜 몸이었다. 세 사람의 비극적인 운명을 암시하는 장면에도 역시 ‘빗물’이 등장한다. 동옥이 그동안 한 번도 원구 앞에서 일어서지 않았던 이유를 알게 되는 극적인 장면이다.
■ "원구는 별안간 엉덩이가 척척해 들어옴을 의식하였다. 바께스의 빗물이 넘어서 옆에 앉아 있는 원구의 자리로 흘러내린 것이었다. (……) 순식간에 방바닥은 물바다가 되고 말았다. (……)그 순간 동옥의 동작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원구에게 또 하나 우울의 씨를 뿌려주는 것이었다. 원피스 밑으로 드러난 동옥의 왼쪽 다리가 어린애의 손목같이 가늘고 짧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다리를 옮겨 디디는 순간, 동옥의 전신은 한쪽으로 쓰러질 듯이 기울어지는 것이었다. 동옥은 다시 한 번 그 가늘고 짧은 다리를 옮겨 놓는 일 없이, 젖지 않은 구석자리에 재빨리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희다 못해 파랗게 질린 얼굴에 독이 오른 눈초리로 원구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것이었다."
■ 동욱의 한없는 무기력증과 패배주의, 동옥의 타인을 향한 적대감과 폐쇄성은 결국 원구조차 감당하기 힘든 마음의 장벽이었다. 동옥은 자신의 ‘어린애의 손목같이 가늘고 짧은’ 다리를 누구에게도 보여주기 싫었고, 원구는 마치 봐서는 안 될 타인의 은밀한 상처를 본 듯 마음이 쓰라리다. 결국 세 사람은 뿔뿔이 흩어지고 원구는 비오는 날마다 그들 남매를 생각하며 알 수 없는 죄책감을 느낀다.
■ 비오는 날은 우리의 마음 깊숙이 숨겨진 수많은 우울의 씨앗들이 움트는 시간이다. 햇살 빛나는 오후의 날씨에는 살짝 망각할 수도 있고, 기분 좋게 웃어 넘길 수도 있는 모든 슬픔과 좌절된 욕망과 안타까운 삶의 회한이 불현듯 한꺼번에 떠오르는 시간. 비오는 시간은 우리 내면에 꼭꼭 감추어두었던 욕망의 속살이 투명하게 비치는 시간이다. 그리하여 비처럼 숨길 수도 멈출 수도 없는 우리의 욕망과, 비처럼 멈출 수도 숨길 수도 없는 우리의 슬픔을 더욱 생생하게 도드라지게 하는 시간이다.
비는 노아의 홍수처럼 모든 욕망의 흔적을 쓸어가는 ‘파괴’의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비온 뒤의 땅에는 언제나 새로운 생명이 솟아난다. 비는 파괴와 정화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것이다. 어쩌면 문학 그 자체가 비를 닮았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더욱 생생하게 드러내주는 문학의 역할 자체가 비를 닮은 것이 아닐까.
■ 눈 덮인 시베리아의 끝없는 설원과 살을 에는 추위가 없었다면 <닥터 지바고>의 아름답고 절박한 로맨스가 가능했을까. ‘칼날처럼 이마를 찌르는 따가운 햇살’ 때문에 살인을 저질렀다고 고백하는 <이방인>의 뫼르소. 그는 과연 그 따가운 햇빛이 없었더라도 그토록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을까. 날씨는 물론 사건의 원인 그 자체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날씨의 효과적인 묘사가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좌우하는 것만은 틀림없다.
■ 날씨는 주인공이나 사건에 대해 ‘직접’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학 작품에 나타난 날씨를 통해 우리는 주인공의 성격과 사건을 짐작하고 추론할 수 있다. 현대과학은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아직 우리는 ‘날씨의 운명’만은 피할 수 없다. 다가오는 폭풍도, 예고 없는 폭설도 막아낼 재간이 없는 것이다. 인간은 날씨와 싸우면서 운명을 만들어나가고 날씨를 통해 운명을 예감하기도 한다. 문학과 날씨의 관계는 영화와 OST의 관계만큼이나 불가분의 관계인 셈이다.
Ⅲ. 로그아웃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
천제 환인의 아들인 환웅이 3000여명의 신하를 이끌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신시를 세워 나라를 다스릴 때, 곰과 호랑이에게 쑥과 마늘을 주면서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말고 동굴 속에서 생활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호랑이는 참지 못하여 나갔지만 곰은 시련을 이겨내어 웅녀가 되었고 환웅과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다. 그 단군은 바로 고조선을 세운 우리의 시조라는 것이다. 과연 이 국사가 사실 그대로만을 기록한 역사일까. 대답을 당연히 ‘No’ 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자랑스러운 반세기 역사의 시작점을 이런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일까.
먼저, 단군신화를 통해 국사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단군신화를 두고 학계에서는 여러 가지 해석들이 존재하는데 결국 해석들을 모아보면 그 목적은 우리 민족의 뿌리를 알고, 그 우수성을 국민들에게 알리려는데 있다. 즉, 국민들에게 민족정체의식을 함양하도록 하고 애국애족심을 갖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국민들의 관심을 끌어야하고, 흥미를 유발해야 한다.
그 때 사용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스토리텔링 기법이다. 단순한 서술의 방식보다는 줄거리와 등장인물, 갈등이 있는 이야기 구조의 방식이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정리해보자면, 역사는 사실 그대로를 기록한 것보다는 이해하기 쉽도록 재밌고 매끈하게 만들어진 하나의 이야기인 셈이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 국민들의 민족정체의식과 애국애족심을 고양시킨다. 그 수단으로 쓰이는 것이 바로 스토리텔링 기법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사와 근현대사의 목적에 대한 수단으로 사용되는 스토리텔링기법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자. 위에서 말했듯이 이야기에는 줄거리와 등장인물, 갈등, 구성 등이 있다. 먼저, 줄거리에 해당하는 메시지부터 살펴보면, 메시지는 국사가 국민들에게 전하고 싶은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등장인물을 설정하고 갈등을 만들고 구성을 짜는 것이다.
또한, 국사는 메시지를 매끈한 단수의 역사로 편곡하여 현재 쓰여진 국사에 타당성을 부여함으로써 국민들을 이해시키고 설득하고자 한다. 결국 이러한 메시지는 국민들에게 만들어진 이미지를 심어주는 역할을 한다. 이것은 근현대사회의 소비행태로 비유될 수 있다. 상품이나 물건만 파는 것이 아니라 고품격 브랜드나 이미지 등을 파는 것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즉, 국사도 국민들에게 과거에 있었던 사실적 사건들만 주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이야기 혹은 이미지를 주기도 한다.
메시지만큼이나 메시지를 이끌어 나가는 등장인물도 중요하다. tv드라마를 생각보자. 줄거리가 흥미롭고 재밌더라도 배우들이 자신의 연기를 제대로 소화해 내지 못한다면 드라마의 몰입도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와 유사하게 국가도 이야기 내에서 주어진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인물을 원한다. 위기 상황에서 국민과 나라를 구하고 갈등을 해소하는 영웅 상이 대표적이다. 이런 영웅 상이 존재하려면 반드시 그 수혜자도 필요하다.
그 수혜자는 주로 국민이 된다. 이런 영웅들은 독자들에게 스스로가 영웅이 된것처럼 느끼게 하여 애국심을 고취시킬 수 있다. 즉, 영웅과 동일화되어 역사스토리에 더욱 몰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영웅의 구국활동이나 애국활동은 곧 역사 발전의 주체가 된다. 이것이 국사가 인물을 설정하고 인물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기는 목적이다.
세 번째로, 갈등이 있다. 갈등이 없는 이야기는 팥 없는 단팥빵과 같다. 이야기의 핵심은 갈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야기 내에서 이 갈등을 어떻게 조정하느냐에 따라 스토리텔링 기법의 효과는 하늘과 땅 차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갈등으로 시작해서 갈등의 해소로 막을 내리는 만큼 갈등의 설정은 독자의 긴장감과 흥미를 유지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국사의 주요갈등은 국가와 민족의 위기, 혼란(퇴보)과 안정(발전)의 갈등 등이 있다. 이런 위기가 없다면 갈등을 해소하는 영웅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위기와 갈등이 존재하고 영웅이 등장하여 갈등을 해결할 때 비로소 이야기는 한층 더 발전하는 것이다.
마지막 요소로 플롯이라고 하는 구성이 있다. 플롯은 스토리 전개의 기법으로, 서사의 틀 혹은 구조를 말한다. 위에서 말했듯이 이야기는 갈등으로 시작해서 갈등의 해소로 막을 내리기 때문에 갈등을 적절히 잘 배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갈등의 시작, 전개에서 갈등의 고조, 절정으로 그리고 갈등의 해소와 종결로의 자연스러운 연결과 그와 더불어 갈등양상의 명확한 구분은 역사 스토리를 더욱 매끈하게 해준다.
이런 매끈한 역사는 국민들이 애국애족심과 민족정체성을 보다 더 잘 함양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 사실의 포섭과 배제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출처/철조망학교 특수교육과 김새롬>
지금까지 스토리텔링에 대해 알아봤다. 장폴 사르트르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세상사 모든 것을 이야기를 통해 이해한다." 사람들은 이야기의 형태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으며, 이야기를 하는 사람과 정신적 교감이 잘 이루어지는 것을 느낀다. 거의 대부분의 인간관계에서 이야기는 빼놓을 수 없는 구성요소다. 분쟁과 다툼의 주된 이유는 '대화가 부족해서'라고 할 만큼, 이야기가 배제된 관계 속에서는 친밀감이나 애정을 느끼지 못한다.
사회생활에서도 이야기로 구성된 스토리텔링은 아주 중요하다. 문제는 사건에 대한 생각을 하나에 고정시키면 안 된다. 새로운 사유, 열린 사유를 통해 새로운 세상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리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