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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부동산 원문보기 글쓴이: 정직이최선
3개의 해상사건은 사고원인과 결과와 실행 방법이 동일하다.
금융:
모든 보험사는 타이타닉의 보험을 받았으나 로스차일드만 거부하였다..
로스차일드는 타이타닉의 해상보험을 거부했다 이유는 그렇게 큰배는 바다에 뜰수 없었을꺼란 생각에서였다...
최고의 기술업체와 금융을 지배하는 자가....
타이타닉 침몰후 대부분의 보험사는 파산했으며 로스차일드 보험회사만 모든것을 흡수할수 있었다...
전쟁보다 더 편하게 자산을 끌어당겼으며 타이타닉을 건조한 화이트 스타라인은 로스차일드 대리인인 jp모건의 자회사였다... - 경쟁자의 파산 -
증축:
브리타닉호(오하마나호) 타이타닉(세월호) 증축도 같았다... - 쌍둥이 올림픽호 -
세월호의 증축은 화물 이였으나 타이타닉호는 속도부터 설비의 호화로움까지 모든 것에 중점을 두고 설계하였다. 안전에도 신경을 써서 방수구획이 있었다. 방수 격벽은 16개의 구역으로 구분되었고, 2구역(뱃머리로부터 4구역)까지 침수해도 침몰하지 않고 떠 있을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격벽은 제어실에서 원격 조작으로 즉시 폐쇄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타이타닉호는 침몰하지 않는 배로 소문났다. 그러나 방수 격벽은 완전히 밀폐된 구역이 아니고 상부의 주 갑판에 구역 모두가 연결되어 있는 구조였다. 이는 타이타닉 호 사고가 발생하였을 때, 격벽 한계치를 넘어서면서 넘쳐나는 물이 다른 구역을 차례대로 침범하여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게 했다.
타이타닉의 설계변경은 상부와 주갑판의 구역을 변경하여 물이 들어왔을 때 침몰할 수 밖에 없게끔 하였다...
밑에 백과사전의 내용이니 자세하게 읽어보기 바랍니다...
사고:
1914년 4월14일 23시40분 사고가 일어난다... 한국 시간으로 15일 14시40분(세월호는 밤11시쯤 넘어졌다 일어남.)
타이타닉호는 출항 오전부터 빙산이 떠다닌다는 소식을 선박 사이의 무선통신으로 받았는데, 특히 4월 14일(한국날짜16일)에는 빙산 경고를 6통이나 받게 된다. 그러나 타이타닉호 통신사 잭 필립스는 승객의 통신 발신 업무에 쫓기고 있었고, 통신사들은 이 계절에서 북대서양을 항해할 때에는 자주 있는 일로 생각하여 빙산 경고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심각한 실수를 하였다. 또 빙산 경고를 선장에게 보냈지만 선장이 없어 항로를 변경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캘리포니안 호의 통신사 에반스가 마지막 빙산 경고를 보냈다. 타이타닉의 통신사 잭 필립스는 바쁘다면서 시끄럽게 하지 말라고 일침을 놓았지만 늦은 시간이었기에 통신사 에반스는 이미 잠이 든 뒤였다. (이는 1,500여명의 사람을 죽게 하는 또 한가지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 에반스는 지금의 선원들과 동일하지 않은가? 과거의 국정원편 -
타이타닉호의 제조사 화이트 스타라인과
타이타닉호의 보험가입을 거절했던 이글 스타 모두
JP모건 가문과 로스차일드 가문 직계후손들이 깊이 관여하고 있었던 건 사실인 것같군요..
(* 1902년에 화이트 스타라인은 거대한 미국 선박 재벌, IIM사에 흡수되었다. 브루스 이스메이(화이트 스타라인사 사장)는, 요율(가격) 전쟁으로 자신을 협박했던 화이트 스타라인 의 주주인 JP모건의 강력한 압력으로 IMM사에 경영권을 넘겨주었다. IIM사는 1932년에 해체되었다. In 1902 White Star Line was absorbed into the International Mercantile Marine Co. (IMM),
a large American shipping conglomerate. Bruce Ismay ceded control to IMM in the face of intense pressure from shareholders and J. P. Morgan, who threatened a rate war. IMM was dissolved in 1932.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White_Star_Line )
(* 이글 스타 보험사 역시 로스차일드 가문이 깊숙히 관련됐다는 신문기사, 각종 웹문서, 인용문 등은 발견되는군요. 하지만, 정확히 어떻게 관계되었지에 대한 자료는 귀찮아서 못 찾았습니다.)
세월호는 길어서 링크로
한성호 침몰사고의 진실(한성호는 밖에서 문을 잠궜다.)
http://blog.naver.com/verygoodwill/130191074741
http://m.blog.daum.net/aichina/16025323
침몰위치 거리상으로 보면 한국시간 1912년 4월 16일로 보입니다.
타이타닉...
RMS 타이태닉(통용: RMS 타이타닉, 영어: RMS Titanic)은 영국의 화이트 스타 라인이 운영한 북대서양 횡단 여객선이다. 1912년 4월 10일 영국의 사우샘프턴을 떠나 미국의 뉴욕으로 향하던 첫 항해 중에 4월 15일 빙산과 충돌하여 침몰하였다. 타이타닉의 침몰로 1,514명이 사망하였으며, 이는 평화시 해난 사고 가운데 가장 큰 인명피해 가운데 하나이다.
RMS 타이타닉은 첫 항해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배 가운데 하나였다. 화이트 스타 라인(로스차일드 대리인 jp모건의 자회사) 사는 RMS 올림픽을 시작으로 세 척의 올림픽급 여객선을 운용하였으며, RMS 타이타닉 역시 그 가운데 하나였다. RMS 타이타닉은 벨파스트에 있는 해럴드 앤 울프 사가 1909년 건조를 시작하여 1911년 5월 31일 진수하였다.
첫 항해에 오른 승객은 다양했으며 이 가운데에는 매우 부유한 사람들도 있었다. 대다수는 영국과 스칸다나비아 반도 등에서 새로운 삶을 찾아 미국으로 가는 이민자들이었다. 출항 당시 승선 인원은 2,223 명이었다.
타이타닉호는 선내에 체육관과 수영장, 그외 호화로운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었다.그런데 느슨한 규제때문에 구명정은 20척 밖에 없었다. 구명정의 정원은 1,178명이었다. 1912년 4월 14일 오후 11시 40분(선내 시각, GMT -3)빙산과 충돌하였고 이 때문에 주갑판이 함몰되면서 우현에 구멍이 났다. 구멍으로 물이 들어오기 시작한 지 3시간 만에 완전히 침수되어 침몰하였다. 타이타닉호는 방수용 격벽이 설계되어 있었고 문들도 물을 차단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으나 실제 사고에선 역부족이었다. 구명정에 타지 못한 채 바다로 뛰어든 수많은 사람들은 수 분 내에 저체온증으로 사망하였다. 침몰할 당시까지도 배에는 1000여명의 사람들이 남아있었다. 구명정을 타고 있다가 몇 시간 뒤에 RMS 카르파티아에 의해 구조된 사람은 710명에 불과하였다.
북아일랜드 앤트림 주에 있는 벨파스트에서 건조된 RMS 타이타닉은 세척의 올림픽급 대양횡단선 가운데 두 번째로 만들어진 것이다. 다른 두 척은 RMS 올림픽과 HMHS 브리태닉(건조 당시 이름은 기간틱)이었다.[1] 올림픽급 여객선은 건조 당시인 1912년에 소유 선사인 화이트 스타 라인이 지닌 배들 가운데 가장 큰 것이었다.[2]
올림픽급 여객선의 건조 계획은 화이트 스타 라인의 사장인 J. 브루스 이즈메이와 화이트 스타 라인의 모회사인 인터내셔널 머천타일 마린 컴퍼니를 운영하였던 미국 자산가 J. 피어폰트 모건이 나눈 이야기에서 시작되었다. 1888년 초 브루스 이즈메이의 아버지 토머스 헨리 이즈메이는 이 크기의 여객선 네 척을 만들고자 하였으나 알맞은 엔진을 구할 수 없어 포기하였던 것이다. 당시 화이트 스타 라인은 경쟁사였던 큐나드 라인이 RMS 루시타니아와 RMS 모러타니아와 같은 새로운 대형 여객선을 건조하자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즈메이는 모건에게 보다 빠르고 보다 크면서 승객에게 안락함과 화려함을 제공하는 그런 여객선이 있어야 한다고 의견을 제시하였다.[3]
화이트 스타 라인사는 당시 북대서양 항로에 있어서 속도 경쟁보다는 느긋하고 쾌적한 선박 여행에 중점을 두는 회사였다. 하지만, 타이타닉은 속도부터 설비의 호화로움까지 모든 것에 중점을 두고 설계하였다. 안전에도 신경을 써서 방수구획이 있었다. 방수 격벽은 16개의 구역으로 구분되었고, 2구역(뱃머리로부터 4구역)까지 침수해도 침몰하지 않고 떠 있을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격벽은 제어실에서 원격 조작으로 즉시 폐쇄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타이타닉호는 침몰하지 않는 배로 소문났다. 그러나 방수 격벽은 완전히 밀폐된 구역이 아니고 상부의 주 갑판에 구역 모두가 연결되어 있는 구조였다. 이는 타이타닉 호 사고가 발생하였을 때, 격벽 한계치를 넘어서면서 넘쳐나는 물이 다른 구역을 차례대로 침범하여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게 했다.
화이트 스타 라인 회사에는 타이타닉보다 1년 일찍 건조한 올림픽호와 상선인 HMS 브리타닉호가 재적했다. 원래 북대서양을 항해할 때 배 한 척으로는 운항에 차질이 생긴다. 따라서 북대서양을 항해하려면 항상 배가 두 척 이상 필요했다. 화이트 스타 라인사는 이러한 필요에 맞춰서 올림픽호를 먼저 건조하고 같은 해에 타이타닉호를 건조하였다. 이보다 조금 늦은 시기에 브리타닉호를 건조하였다.
타이타닉호는 올림픽호와 거의 동시에 건조하기 시작했다. 대계단이나 식당의 장식, 식사의 메뉴나 객실의 서비스등, 그 외관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닮았다고 한다. 영화 타이타닉에서는, 마치 타이타닉호가 가장 거대한 배처럼 연출되었지만, 당시에는 올림픽호가 대표적인 배였으며, 타이타닉호와 브리타닉호는 자매선이었다. 이 세 선박을 통틀어서 올림픽 클래스라고 불렀다. 그 때문에 타이타닉호의 사진으로 종종 올림픽호 사진이 사용된다.
앞서 운행되고 있던 올림픽호의 문제점이나 개선점을 듣고 타이타닉호 설계는 다소 변경되었다. 먼저 외관부터 올림픽호와는 다소 달랐다. 예를 들면 북대서양의 추운 강풍을 막기 위하여 A 갑판의 1등석 전용 산책용 갑판(Promenade)의 창에 유리를 장착했다. 이러한 변화는 외관상으로 두 개의 자매선을 판단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 그 밖에도 올림픽호는 B 갑판의 창가 전체에도 산책용 갑판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타이타닉호의 설계도에서는 B 갑판의 산책용 갑판이 폐지되었고, 대신에 창가 전체에 1등 선실을 새롭게 마련하였다. 그 결과, 1등실 수가 올림픽호에 비해 훨씬 많아져 올림픽호에는 없는 스위트 룸이 설계되었다. 스위트 룸은 자체 산책 갑판까지 있었다.
당초 자매선의 중량은 거의 비슷하게 만들려고 했지만 타이타닉의 객실의 수가 증가하면서 최종적으로 타이타닉호의 중량은 올림픽호의 45,324톤보다 1,004톤 무거운 46,328톤이 되었다. 엄밀한 의미로 말하면 타이타닉호는 올림픽호를 넘어, 당시 세계 최대의 여객선이었다. 그러나 그늘에 숨은 타이타닉호가 유명해진 이유는 어두운 바다 속으로 가라앉은 탓이다.
1912년 4월 10일, 영국의 사우샘프턴(Southampton)에서 E·J·스미스 선장과 승무원 · 승객을 합쳐서 2,200명 이상되는 사람을 태우고 첫 항해를 시작했다. 이 배는 프랑스의 셰르부르(Cherbourg)와 아일랜드의 퀸즈 타운에 기항한 다음, 미국의 뉴욕으로 향했다.
출항 당시 승무원들에게 쌍안경 보관함의 열쇠가 인계되지 않아 망지기들이 눈으로만 위험 요소를 확인해야 했는데, 이는 후에 치명적인 영향을 가져오는 한 요인이 된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배의 속도와 약간의 안개 때문에 쌍안경으로도 빙산의 발견에 아주 늦은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타이타닉호는 출항 오전부터 빙산이 떠다닌다는 소식을 선박 사이의 무선통신으로 받았는데, 특히 4월 14일에는 빙산 경고를 6통이나 받게 된다. 그러나 타이타닉호 통신사 잭 필립스는 승객의 통신 발신 업무에 쫓기고 있었고, 통신사들은 이 계절에서 북대서양을 항해할 때에는 자주 있는 일로 생각하여 빙산 경고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심각한 실수를 하였다. 또 빙산 경고를 선장에게 보냈지만 선장이 없어 항로를 변경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캘리포니안 호의 통신사 에반스가 마지막 빙산 경고를 보냈다. 타이타닉의 통신사 잭 필립스는 바쁘다면서 시끄럽게 하지 말라고 일침을 놓았지만 늦은 시간이었기에 통신사 에반스는 이미 잠이 든 뒤였다. (이는 1,500여명의 사람을 죽게 하는 또 한가지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1973년 1월 25일 오후 2시 반경 여객선 한성호가 목포항을 출발하여 팽목항을 향하여 항해 도중
침몰한 사건.
원인은 과적으로 알려졌으나, 수십명의 인명피해가 난 부분은 아직도 의문이 많이 나는 사건임.
사망자 18명, 실종 43명(대부분 초등학생)으로 당시 대참사였음.
의문:
희생자가 많이 발생한 이유가 객실문을 밖에서 잠근 것(누가 잠그라고 했을까?)
사고가 난 후, 그것도 대낮에 시간을 모두 허비하고 밤에 철야수색한다고 난리를 폈지만,
선실안 인명 구조 1명도 못함
(안했다는 의혹도 있음, 무능이 아니라 고의나 타의라는 뜻으로 해석).
초기에 대부분의 구조는 어선이 행함. 정부는 사고를 일부러 방치?
한성호 사건의 전후 역사적 사정을 파악할 필요가 있음.
0) 1971년 4월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는 일대 바람을 일으킴. 그리하여 오랜만에 분열되고 무기력한 야당의 모습이 아닌, 3선 개헌까지 해가며 출마한 박정희를 크게 위협하는 모습을 보여줌. 비록 선거 결과는 94만여 표 차이로 박정희의 신승으로 끝났지만 부정선거 및 개표부정의 의혹이 많았음(대다수의 사람들은 실질적으로 김대중이 이겼다고 생각함).
0-1) 이에 박정희는 독기를 품기 시작함.(심지어는 정보기관은 김대중을 바다물에 수장해 죽이려고 함)
1) 1972년 국회가 해산되고 유신헌법을 제정함.
2) 1972년 12월 23일 유신헌법에 의거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간접선거로 박정희가 100% 득표율로 당선됨, 영구집권의 발판을 마련(단임제 중임제 제한 규정이 없으므로)
3) 박정희의 꼬붕 민관식 문교부 장관이 1973년 1월 중 고교평준화 시안을 마련하여 2월에 발표하려 하나, 중학교 평준화에 이어 74년에 고교에 입학하는 특정인을 염두해 두고 교육정책을 또 바꾸는 게 아니냐는 비판 여론 비등(영구집권에 후계구도까지? 의혹)
4) 여당내에서는 물론이고 사회전반 민심흉흉 하던 차에 정치적 이슈를 묻어버릴 사회적 이슈인 대형사건이 필요함
결론:
결국 한성호의 대참사 원인의 뿌리를 캐면, 박정희와 김대중의 대선 빅 매치가 부정선거로 겨우 이겼다는 박정희의 불안감, 조급함과 정통성 부정을 당하는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았다고 본다. 한성호 사건은 정치적 이슈를 덮기에 충분했고 그 뒤 박정희는 6년간의 독재를 더 할 수 있었다. 사악한 사람들 측으로 봐선 한성호 사건은 대단히 성공적인 뉴스 물타기 성공전략이었고 향후 비슷한 위기일 때 활용할 수 있는 좋은 본보기이자 모델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한겨레 자료, 추가]
대형참사 시기 대통령 여당(현재바뀐당명) 특이점(비고)
천안 열차 충돌사건(1969.01.31) 박정희 새누리당
인명피해 : 사망41명 부상 102명
1. 와우아파트 붕괴 ( 1970.04.08) 박정희 새누리당
인명피해 : 33명, 부상 39명
1-1. 원주 수학여행 참사(1970.10.14) 박정희 새누리당
인명피해 : 사망 46명 부상 30명
2. 남영호 침몰사건 (1970.12.14) 박정희 새누리당
인명피해 : 사망 326명
3. 서울 대연각 호텔 화재 사고(1971.12.25) 박정희 새누리당
인명피해 : 사망 163명, 부상63명, 실종7명
4. 한성호 사건(1973.01.26) 박정희 새누리당
인명피해 : 사망 61명
5. 이리역 폭파사고 (1977.11.11) 박정희 새누리당
인명피해 : 사망 59명, 부상 130명
5-1.경산 영차추돌사고(1981.05.14) 전두환 새누리당
인명피해 : 사망 56명 부상 244명
6. 아웅산 폭파사건(1983.10.09) 전두환 새누리당
인명피해 : 사망 17명
7. KAL기 폭파사고(1987.11.29) 전두환 새누리당
인명피해 : 사망 115명
7-1. 논산 정신병원화재(1993.04.19) 김영삼 새누리당
인명피해 : 사망34명 부상2명
8. 부산 구포 열차전복(1993.03.28) 김영삼 새누리당 (새누리입당후당선)
인명피해 : 사망 78명, 부상 198명
9. 서해 훼리호 침몰(1993.10.10) 김영삼 새누리당
인명피해 : 사망 292명
9-1. 아시아나733추락사고(1993.07.26) 김영삼 새누리당
인명피해 : 사망 68명
10. 성수대표 붕괴사고(1994.10.21) 김영삼 새누리당
인명피해 : 사망 32명, 부상 17명
11. 대구 상인동 가스폭발(1995.04.28) 김영삼 새누리당
인명피해 : 사망 101명, 부상 202명
12. 삼풍백화점 붕괴사건 (1995.06.29) 김영삼 새누리당
인명피해 : 사망502명, 부상937명, 실종6명
12-1. 씨랜드 수련원 화재사고(1996.06.30) 김영삼 새누리당
인명피해 : 사망23명 부상 6명
13. 대한한공801편 추락사고(1997.08.06) 김영삼 새누리당
인명피해: 사망 225명 부상 29명
14. 대구지하철 화재(2003.02.18) 김대중 새정치연합 조해녕 새누리 대구시장
인명피해 : 사망192명, 부상151명, 실종21명
mb. 용산참사 (2009.01.20) 이명박 새누리당
인명피해 : 사망6 철거민 모두 쫓겨남
mb2. 천안함좌초후수장 : (2010.04.19) 이명박 새누리당 (세월호수입이명박,세월호연장선상)
사망자수 : 47명
15. 오웬춘 수원살인사건(2012.04.01) 박근혜 새누리당
인명피해 : 1명만 나와있으나 망보던 3명의 cctv 있는거로 보아 조직적으로함. (새누리당단독범행으로결론)
16. 리조트 붕과사고(2014.02.17) 박근혜 새누리당
인명피해 : 사망 10 부상 103명
17. 세월호 침몰사고(2014.04.16) 박근혜 새누리당
인명피해 : 사망 294명 실종 10명
17-1.고양버스터미널화재(2014.05.26) 박근혜 새누리당
인명피해 : 8명사망
17-2.전남효사랑요양병원화재(2014.05.28) 박근혜 새누리당
인명피해 : 환자등 21명사망
18. 판교 고의 붕괴사고의심(2014.10.17) 박근혜 새누리당
인명피해 : 사망 16(늘고있음) 부상 11
그외...
2013년 7월 아시아나기 꼬리착륙사고, 유조선고의사고, 새누리당
2014.04.16 저녁에 처리한법안
1. 국회선진화법 개정안 발의.
2. 윤리위원회에 이석기 의원 제명안 단독 상정.
3. 철도요금 인상안 통과 (KTX요금 최대 5%, 화물운송료 15% 인상).
4. 국토위원회, KTX 민영화 방지 법제화 무산.
5. 한미방위비 비준안, 국회 본회의 통과 (올해 9200억원 부담).
세간의 시선은 박근혜 대통령이 박정희, 김영삼의 대형참사 기록을 깰수있을까에 모와지고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진실(세월호처럼 기사가 미리 작성되어 있었다)...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articleId=1218856&bbsId=D125&pageIndex=1
위키리스크가 말하는 세월호
명예훼손 사건의 대응 방안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15&articleId=3123048
자로님과의 허점 몇 가지 여러 가지
자로 세월X 2시간 20분 시청 관전평
세월호 잠수함의 용도...
자로님을 분석해본 예전자료.. 자로님은 걱정원으로 추론함
자로님과 정직이의 이메일 답변내용
충격) 노무현 대통령 이제는 말할수있다. - 특 보 -
대형참사에는 우연이란 없다 -조지오웰-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하며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 -조지오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