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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검, 그 길고도 짧은 여로에 관하여' | |
-12년 전, 그때 난 초등학생이었다 거장 김혜린 작가의 걸작 ‘불의 검’이 결국 12년이라는 시간을 기다린 끝에 완간되었다. 12년. 속담에 의하면 강산이 자그마치 1과 1/5이 변했을 시간이며, 초등학교 학생이었던 내가 대학생이 되었을 정도로 긴 시간이다. 초등학교부터 대학을 마치는 교육 기간이 12년이라는 점이 의미있다. ‘불의 검’이 완간되기까지 12년 동안의 교육과정이라도 필요했던 것일까. ‘불의 검’의 완간으로 일본에 비해 한참 뒤늦게 시작된 ‘초등학생’ 한국 만화계가 일본과 비슷한 ‘대학생’의 수준으로 올라설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더 이상 일본을 부러워만 할 필요는 없다.
‘불의 검’의 12년 동안의 고행을 일단 되짚어보자. ‘불의 검’은 1992년 3월 18일, 육영재단이 운영했던 ‘댕기’ 라는 만화 잡지에서 첫선을 보였다. 당시 로맨스 일색의 순정만화 판에서 ‘불의 검’의 시도는 이례적이었다. 여자 주인공이 원치 않는 상대에게 성폭력을 당하고, 심지어 그런 원수의 자식까지 나아서 세상의 편견이나 고통을 이겨나가는 스토리는 당시로는 매우 파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주요 독자층이었던 어린 여성 독자들의 환상이나 대리 만족을 그리는 대신 ‘불의 검’은 단연 혁명적인 스토리 전개를 택했다. 그래서 ‘저 작가는 주인공을 혹사시키는 재미에 산다.’ 라는 우스갯소리를 낳기도 했다. 그러나 바로 그 스토리가 기존의 흔한(심지어 지금 현재도 흔하디 흔한) 여성의 수동적인 성공스토리, 소위 신데렐라 신화와 류(類)를 달리하는 이 작품만의 품격이다. 남성인 본 기자는 그 품격에 매료당해서 그 당시(지금도 그렇지만) ‘여자애들이나 보는 닭살스럽고 꽃가루나 휘날리는 만화’라는 순정만화(사실 본 기자는 이 단어를 매우 싫어한다.)를 사기위해 매번 서점을 기웃거려야 했다. 이는 남성적 자존심에 왜곡된 순정만화의 현실이기도 했다. 고백컨대 사실 좋은 책에 대한 소유욕과 나름의 자부심이 더 크기는 했지만, 시쳇말로 ‘X팔림’을 감수해야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 누나가 사오라고 해서요.’ 라는 마법의 주문을 온 서점안의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외쳐야만 구매가 가능했다.) 어쨌거나 이런 매력적인 스토리가 남녀를 불문하고 많은 독자를 끌어들일 수 있었던 이 작품만의 원동력이 되었다. -작품의 주인공들처럼 불운한 출판과정, 그리고 독자들 1992년 크리스마스에 ‘댕기네 책들’ 이라는 제목으로 단행본 1권이 출판 되고 작품은 순조로운 인기몰이와 연재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주인공들의 삶과 닮아서일까? 1996년 3월 10일, '댕기네 책들'로는 마지막으로 단행본 8권이 출판되었고 8월 11일엔 연재 중단, 그리고 9월 15일 ‘댕기’가 폐간 되면서 ‘불의 검’은 작품의 주인공들처럼 고행길에 나섰다. 작품을 실어줄 만한 잡지가 없었다. 때맞춰 터진 외환위기(IMF사태라 일컬어지는)는 군소 만화 잡지와 출판사를 줄줄이 도산시키며 만화시장을 얼려버렸다. 더군다나 일자리 창출과 서민들의 주머니 사정을 생각해서 싼값으로 책을 보급한다는 명목으로 책 대여점이 합법화 되어 우후죽순으로 늘어서면서 그나마도 황폐했던 만화시장은 ‘쪽박마저 깨지는’ 타격을 입었다. 많은 만화잡지들은 창간하기 무섭게 폐간했고 ‘만화가가 되면 밥 굶기를 밥 먹듯이 한다.’ 라는 농담도 오갔다. 그 서슬에 독자들의 계속되는 연재 요청에도 불구하고 ‘불의 검’은 기나긴 겨울잠을 자야만 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 고행의 서막에 불과했다. 그 뒤 1998년, 도서출판 ‘대원’에서 8권 이후의 연재분을 모아서 9권을 출판하였다. 독자들은 다시 작품의 재개에 대한 희망을 품었지만 연재는 재개되지 않았다. 단지 1999년 ‘대원’에서 한 번 더 1권에서 9권까지 단행본을 다시 출판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2000년 11월 잡지 ‘화이트’에서 ‘불의 검’의 연재가 재개 되었다. 비록 처음은 ‘댕기’에서의 연재했던 내용만이 약간 실렸을 뿐이지만 독자들은 분명 앞으로 연재가 계속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오매불망 ‘타는 목마름으로’ 기다린 독자들은 환호했다. 기나긴 기다림이 결실을 맺는 듯 하였다. 그러나 ‘화이트’에서의 연재는 5회 연재에 그쳤고, 그나마 새로운 내용의 추가는 달랑 한회에 그쳤다. 앞의 4번의 연재는 ‘댕기’에서의 기존내용을 가져왔을 뿐이었다. 이유는 2001년 3월 ‘화이트’의 사실상의 폐간이었다. 그나마 곧바로 ‘대원 씨아이’에서 상당수 연재되지 않은 분량을 실은 단행본 10권을 포함해서 다시 1~10권까지 출판한 것이 독자들에게 위안이 되었다. 그리고 연재 없이 단행본만 출간하겠다는 작가의 선언이 있었다. 독자들은 연재를 할 수 없는 한국의 만화계의 현실에 조용히 분노했지만 사실 그런 식으로나마 작품이 계속 이어져 나간다는 것에 대한 기쁨이 더 컸다. 이미 ‘불의 검’의 독자들은 기다림에 익숙해 있었다. 그리고 2002년 5월 11권이 출간되었고 10월엔 ‘애장판’이라는 형식으로 단행본 두 권씩을 묶어서 출간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2005년 1월 기나긴 산고 끝에 ‘불의 검’은 완간되었다. 사실 언론 발표로는 2003년에 완간 하겠다고 했었지만, 역시 ‘불의 검’의 독자라면 기다림에 익숙해야만 한다. 정말 독자, 작가, 주인공 할 것 없이 험난한 과정을 겪어야만 했던 완간까지의 과정이었다. - ‘대학생’은 되었지만 F학점? 다른 나라의 작품도 아니니 소위 ‘해적판’이라는 것도 없는데, 한 작품에 자그마치 네 가지의 단행본이 존재하는 것은 이 작품의 험난한 행로를 대변한다. 이 작품은 왜 이렇게 창작의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을까? 작품의 질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을 만한 내용을 실은 것도 아니다. (지탄은 커녕 문화관광부가 선정하는 2002년 하반기 ‘오늘의 우리 만화상’을 받았다.) 작품의 인기가 없었던 것도, 애독자가 없던 것도 아니다. 바로 ‘불의 검’의 완간까지의 여정은 한국 만화계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12년이나 걸려서 결국 완간을 해낸 것은 한국의 만화계에 가지는 의미가 크다. 서두에 밝혔듯이 한국 만화계도 ‘대학생’ 수준은 된 것이다. 하지만 12년 동안 ‘겨우’ 12권만을 출간했다. 물론 분량이 작품의 가치에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니며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빠르게 저급한 작품을 ‘생산’하느니 오랜 시간을 들이는 것도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불의 검’의 완간 과정이 작가의 창작의 고뇌보다 외부적인 문제, 요컨대 한국 만화계의 현실에 의해서 늦어졌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웃 일본은 비슷한 기간에 30~40권짜리 단행본을 완간하는 것과 비교하면 한국 만화계에 무엇인가 문제가 있는 것은 확실하다. -이웃의 만화계는 뭐가 다른가? 일단 일본 만화계의 형성과정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자. 일본은 2차 세계대전 패전이후 침울해진 사회분위기와 국민들의 패배의식을 개선하기 위해서 정책적으로 만화를 육성하기 시작한다. 만화를 통해서 국민정서를 함양하고 다시 한번 잘 살아 보자는 취지였다. 덕분에 일본 국민들은 만화에 친숙해졌으며 소비층이 나이나 성별에 의해 국한되지 않고 온 국민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이런 기반에 의해서 아직도 일본에서 만화는 온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당연히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그에 비해 한국은 군사독재시절 문화, 언론 통제정책에 의해서 만화 분야에서 많은 규제를 받았다. 또한 시대적 분위기가 다양한 문화생활을 향유할 수 있을 만큼 여유롭지 않았다. 덕분에 만화는 ‘일단 생존을 위해서는 공부만 해야 하는’ 그 당시 사회에서 공부를 방해하는 적대적인 존재로 자리 잡았다. 또한 당시의 사회적 격차에 의해서 책정되어진 고급, 저급문화의 분류에서 만화는 ‘애들이나 보는 유치한’ 이라는 사회적 시각의 등급이 책정되어졌다. 만화에 대한 이런 한국인의 인식은 아직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나마도 순정만화, 소년만화 식으로(애당초 이를 분류하는 정확한 기준 자체가 없음에도) 남자와 여자가 보는 만화의 류(類)를 분류함으로 독자층을 더욱 좁히고 있다. 결국 이런저런 이유로 한국의 만화시장은 규모 자체가 매우 작고 그나마 수요층도 지극히 한정되어 있다. 결국 규모가 작기 때문에 출판사들이 자랄 수가 없다. ‘불의 검’의 완간 과정에서 몇 번이나 출판사가 바뀐 것이 이런 사정을 잘 대변하지 않는가? -결론은 단행본! 그렇다고 출판사에서 작가들의 원고료를 올려주기도 어려운 형편이다. 실질적으로 한국의 만화계에서 2~3년 동안 만화잡지가 살아남으면 기적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회자될 정도로 상황이 어렵다. 또한 실제 만화잡지들의 실제 생존 현황을 봐도 2,3년을 넘기지 못한다. 출판사들은 만화잡지로 수지타산을 맞출 의도로 만화잡지를 출간하지 않는다. 다만 만화를 홍보해서 단행본을 팔기위한 판촉행위로 잡지를 출간할 뿐, 잡지 자체의 수익을 기대하지 않는다. 결국 출판사나 만화가나 돈을 벌기 위해서는 단행본을 판매하는 방법밖에 없다. -더러워서 안해먹는다!!!
그러나 한국 만화계의 현실에서는 유일한 수익수단인 단행본 판매가 매우 어렵다. 최근 일본에서 연재에서 성공하고 애니메이션으로까지 제작된 양경일 작가의 ‘신 암행어사’의 예에서 보듯 한국의 작가들의 수준이 결코 일본의 작가들에 비해서 뒤떨어지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앞 문단에서 언급했듯이 한국에서의 만화에 대한 편견은 작품에 대한 최소한의 올바른 평가도 이루어지지 못하게 한다. 영화나 음악이나 만화나 똑같이 감동을 주건만, 아무리 대작이고 명작이라고 해도 ‘그래봐야 만화’라는 인식은 작품에 대한 태도를 인색하게 하였다. 한국에서 만화책을 사서 보관하는 사람들은 단번에 ‘마니아’라는 영역에 도달하게 해주는 현실이 한국인들의 만화에 대한 인식을 간단하게 보여준다. 특히 외환위기 때 정부가 일자리 창출을 위해서 만화책의 대여를 합법화하고 대거 육성시킨 도서 대여점은 결정적으로 사람들의 단행본 구입을 가로막았다. 앞서 언급했듯이 단행본 판매만이 출판사와 작가들의 유일한 생존 수단임에도 불구하고 만화 대여점의 등장은 그나마 단행본 구입 층을 대폭 줄이는 결과를 낳았다. 게다가 대여점이 작가나 출판사에 대해 지불하는 몫은 오로지 단행본에 불과하다. 대여점에서 천 명이 빌려보던, 만 명이 빌려보던 대여점만의 이익일 뿐, 작가나 출판사에는 그 어떤 몫의 수익도 돌아가지 않는다. 따라서 대여점이 아무리 잘된다 한들 출판업계가 호황을 맞고 작가의 생활이 나아지는 것이 아니다. 이는 결국 작가들의 현실적인 수입창구를 막아버리게 되었다. 이정도면 대부분의 만화가들 사이에서 ‘차라리 막노동을 하지, 더러워서 못해먹겠다.’ 라는 푸념이 나올 만하다. 더군다나 현실이 이렇다보니 신인 만화작가의 등장이 점점 어려워져 한국 만화계의 미래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공짜 정신! 이것만은 바꾸자 더군다나 요즘은 온라인 기기의 발달로 인해서 만화책 한 권을 스캐닝해서 웹사이트에 올리는 일도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는 심각한 지적재산권의 침해로 범죄행위임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규제 수단도 없다. 자신이 고생스럽게 스캐닝해서 올린 자료이니 자신에게 저작권이 있으니 함부로 복사해서 유포하지 말라는 코미디 같은 헛소리마저 당당히 사이트에 올리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빈번하다. 자신들이 다음번에도 작품을 하기를 바란다면 대여점에서 빌리지 말고 단행본을 사달라고 부탁하던 작가들은 이젠 차라리 대여점을 가도 좋으니 스캐닝 복사본만은 보지 말아달라고 애원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한 권의 책을 내기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과 창작의 고통이 있는지 구구절절 늘어놓을 필요도 없다. 단행본의 구입은 자신을 감동시킨 작품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며 경의이다. 다음에도 좋은 작품들을 읽기를 바라는가? 그럼 최소한 다음 작품을 위해서 투자한다고 생각을 하고 단행본을 사라. 아무것도 하는 것 없이 한국만화는 좋은 작품이 안나온다는 둥 수준이 떨어진다고 하는 것은 너무 뻔뻔한 것이 아닌가? 이웃 일본의 예를 다시 한번 들면 일본에도 대여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좋은 작품이면 사서 보는 것을 예의로 안다. 물론 소득수준이나 생활의 여유가 다르다고 항변할지도 모르지만 기본적으로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무언가의 팬이라고 자처하려면 그 정도의 대가는 치루는 것이 기본이 아니겠는가? -이 손을 다시 잡는데 얼마나 긴 시간을 우리는 돌아서 온 것일까
‘불의 검’의 완간은 한국만화계의 자랑이기도 하지만 한국만화계의 치부이기도 하다. 12권이라는 짧은 길을 가기 위해 12년이라는 긴 여로를 돌아서 와야만 했다. 길고도 짧은 여로를 걸어야 하는 또다른 ‘불의 검’을 만들지 않기를, 더 이상의 불운한 독자들이 이 땅에 없기를 바라며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하고 싶다. 작가, 독자, 그리고 모든 ‘불의 검’의 등장인물들에게 정말 수고 많았다고, 12년 동안 함께해줘서 고맙다고........ |
첫댓글 밑에도 썼지만...이때도 느낀...한국의 '투자없이 받기만을 바라는 꽁짜정신' 아주...진절머리가 납니다..ㅡㅡ 김혜린 작가의 다른 작품, '비천무'나 '테르미도르', 연재가 중단되기는 했지만 HOI시절 한국에 대한 만화 '광야'도 정말 좋은 작품입니다 강추!...아...이글은 05년 1월에 쓴 글입니다..
무협이나 판타지는 너도나도 찍어낸 그런 쓰래기들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듯......
좋은 만화 소개 감사합니다 한 번 만화방 들러서 읽어봐야겠습니다.저는 사실 여류작가가 그린 만화는 피해왔습니다...딱하나 재미있게 본게 있군요...준호 쌍둥이 나오는거...초능력쓰고..ㅋㅋ 파라다이스인가 뭔가..ㅋㅋ 92년이면 한창 아큐점프랑 소년챔프 나오는 시절이네요...드래곤볼이 계속 연재하고 있었죠..인조인간 시리즈 ,셀하고 싸울때였던가 ㅋㄷㅋㄷ 제 머리속 연대기가 이렇습니다 ㅋㅋ
잘 봤습니다. 불의검.. 한동안 꾸준히 보았는데 다음 내용을 기다리다 지쳐 발길을 끊었었죠. 한국무협은 뭔가 변화의 시기인듯 한데, 근래 괜찮은 작품도 많이 나왔더군요. 좌백이나 설봉 같은 작가들의 경우 이전의 '무협지'와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느꼈습니다. 문제는 어떤 작가의 어떤 작품이 괜찮은지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느냐가 아닌가 합니다.
6권까지 산... ㅇㅅㅇ....
저도 정말 잼있게 본 작품입니다. 불의검... 중학교땐가? 첨 봤었는데 최근에서야 완결을 볼수 있었죠. 개인적으로 불의검, 비천무, 그리고 신일숙님의 리니지, 아르미안의 네딸들... 일본작가 타무라 유미의 바사라... 정도는 남자들도 볼 만한 순정만화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