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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본 성경(3) - 노아의 방주
1. 전국 꽁꽁, 향후 20년간 더 추워진다.
지난 연말부터 2주 이상 전국이 꽁꽁 얼어붙고 있다. 연말에 친지가 서울의 특별한 공연에 초대하였다가 날씨가 춥다며 그일 때문에 오기에는 무리라며 만류하였고 며칠 전에는 고시동기들 모임이 있는데 금년 중 가장 추운 날씨라서 서울행을 포기하였다. 그래도 호남지방은 견딜만한 추위라서 호남지방에 많은 눈이 내린 지난 수요일에는 우리 집에서 가까운 효천역에서 기차를 타고 익산, 남원을 거쳐 광주(남원-광주는 버스)로 돌아오는 눈꽃여행을 즐기기도 하였다.
최근 해마다 연말 연초에 지진, 쓰나미 등으로 인명과 재산피해가 많은데 지난 12일에는 중남미 카리브 해 연안에 있는 아메리카 최빈국 아이티에 진도 7.0의초강력 지진이 덮쳐 수많은 인명피해와 수도(포르토프랭스)와 국토대부분의 기능이 마비되는 대재앙이 발생했다. 이런 자연재해나 기상이변은 인력으로 막을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천재지변인 경우가 많지만 더러는 환경오염과 화석연료의 과잉사용, 시설관리 부실 등의 인재(人災)도 많다.
최근의 기후이상에 관한 보도기사를 살펴보며 앞날에 대비하자.(매일경제 2010. 1. 13)
‘한국은 물론 미국, 유럽, 중국 등 북반구 전체가 폭설과 혹한에 시달리는 반면 남반구인 호주에서는 40도를 넘는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등 기후이변이 속출하고 있는 가운데 저명한 과학자들이 향후 20년 간 세계가 더 추워질 수 있다는 '미니 빙하기 도래설'을 제기해 눈길을 끌고 있다.
독일 키엘대 라이프니츠 해양연구소 교수인 모지브 라티프 박사는 10일 영국 데일리메일과의 인터뷰에서 지구온난화가 악영향을 미쳐 향후 20년간 인류는 올해와 같은 겨울 한파를 계속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겨울철 추위는 일시적인 것이지만 장기적인 기온 상승 추세는 온난화에 따라 지속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라티프 박사는 최근 진행된 북반구 한파에 대해 북대서양진동(NAO)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NAO가 최근 30년간 빠르게 올라간 지구 기온을 설명할 수 있고 이는 화석연료 사용에 의한 기후 변화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화석연료 사용이 직접적인 원인이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 영국 기상예보회사인 멧오피스의 빅키 포페 박사는 북극의 대규모 빙하 손실이 최근 기후변화의 직접적 원인이며 이는 지구 온난화의 결과물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향후 수년간 자연의 변동 주기가 지구 온난화 현상보다 더 중요한 연구 과제가 될 것"이라며 "다양한 방법으로 2050년에 기후가 어떻게 변할지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관점과 설명은 다르지만 두 과학자 모두 향후 20~30년간 지구에 한파가 잦아져 짧은 빙하기 현상이 나타날 것으로 보고 있다.’ 많은 전문가들이 빙하기도래는 성급한 주장이라고 반대의견을 나타냈다.
추신, 아이티 지진참사관련 기사 일부를 살펴본다.
"많은 사람이 예수가 오고 있다고, 신을 믿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기도하고 있었어요." 아이티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CNN 방송과 AP, AFP 통신에 따르면 생존자들은 주위의 모든 것이 파괴된 가운데 자신도 건물 잔해에 깔리지 않을까 극심한 공포에 떨었다고 전했다. 아이티에서 12일 발생한 7.0의 강진으로 인한 사망자수가 최대 50만 명에 이를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올 정도로 상황은 극단적이다. 사망자 수가 혼선을 빚고 있지만 세계적으로 1900년대 이후 가장 많은 사망자를 낸 지진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지금까지 최악은 1976년 24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중국 탕산(唐山) 지진이었다. 최근에는 2004년 12월26일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을 강타한 규모 9.1 지진이 22만7,898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2. 노아의 방주와 홍수
1) 의로운 사람, 노아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 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노라.(창세기 7장 1절)
노아의 방주(Noah's Ark, -方舟)는 노아 때의 홍수 이야기(창세기 6:5~9:29)에 나오는 배의 이름이다. 인류의 선조들이 나날이 포악해지므로 하느님은 홍수를 내려서 인류를 멸망시켜 버리려 하였다. 다만 정의로운 사람 노아 일가(一家)만이 이 심판을 면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창세기 6장 14~16절에 보면 길이 300규빗(약 135m), 폭 50규빗 (약 22.5m), 높이 30 규빗 (약 13.5m)인 이 배는 지붕과 문을 달고 배 안은 3층으로 만들어져 있다. 2006년에 조선일보사 주최의 ‘일본에 뿌리내린 한국문화 탐방’에 참가하였을 때 승선한 배의 둘레가 300여m로 알려졌는데(방주의 길이가 135m라면 둘레는 300m가량 된다.) 이는 여러분이 일본과 제주도를 오가며 탄 배보다 더 큰 규모이다. 선체(船體)는 측백나무로 되고 안쪽에는 아스팔트를 칠하여 굳혔다.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배를 만들고 가족과 암수 한 쌍의 모든 생물을 싣고 밀어닥친 홍수를 피하였다.
2) 신학자가 본 노아의 방주와 홍수
최근에 어느 신학자(김희보, 총신대 신대원 교수)가 노아의 방주와 홍수에 대하여 쓴 글을 살펴보자.(인터넷에 실린 글을 축소, 정리한 것임)
(1) 노아의 방주의 영적 의미
성경을 공부한 사람은 누구나 말하듯이 노아의 방주는 장차 나타날 그리스도의 그림자(모형)이다. 우리는 그 방주의 구조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모형을 찾아 볼 수 있다. 창세기 6:16에 보면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을 옆으로 내라"했음을 본다. 출입을 위하여 사용될 때는 문이요, 공기와 빛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창이 된다. 그런데 그 문은 하나뿐이다. 노아의 여덟 식구와 모든 생물들이 구원을 얻기 위하여 출입한 그 문은 오직 하나 뿐이었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가 "나는 양의 문이라"고 하신 말씀을 연상케 한다. 아무리 홍수가 넘치는 무서운 심판의 날에도 그 방주 안에는 참 평안과 안식이 있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 평안과 안식의 예표였다고 본다.
또 홍수가 그치고 물이 잦은 후 방주가 아라랏 산봉에 닿은 날은 신비롭게도 7월 17일이었다.(창세기 8:4). 그날은 곧 이스라엘의 성력으로는 니산월 17일이다. 즉, 유월절을 지난 3일만의 날이었다(출에급기 12:6). 그렇다면 그날은 곧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표로 보여주는 날임이 분명하다. 그것은 이제부터 옛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부활의 세계가 시작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성경의 한 마디 한 마디의 말씀이 이처럼 우리의 깊은 관심을 끄는 것은 그 모든 기록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너무도 오묘하고 신비로운 탓일 것이다.
(2) 노아의 방주는 얼마나 큰 것이었을까?
방주는 얼마나 큰 것이었기에 그 많은 짐승들과 새들과 양식들을 실을 수 있었을까? 창6:15에 보면, 길이는 300규빗이요, 넓이는 50규빗이라고 했다. 그런데 한 규빗이란 지금까지 발굴된 고고학적 자료에 의하면 18피트가 된다. 그것을 계산한 어떤 학자에 의하면(J. P .Free) 그 배의 크기는 약 4,300톤 정도일 것이라고 했다. 지금도 2,500톤급의 배라면 어떠한 큰 바다라도 항해할 수가 있다고 한다. 물론 노아는 자기의 마음대로 그렇게 큰 배를 지은 것은 아니었다."하나님이 명하신대로 준행한 것이라"(창세기6:22)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만큼 큰 배가 되어야만 그 많은 동물들과 그것들이 먹을 양식을 실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학자들에 의하면 이 땅위의 짐승의 종류는 2,000종이요, 새는 약6,500종류라고 한다.(참고, 지난주에 살펴본 생물다양성의 숫자와 비교해보자.) 방주의 크기라면 그러한 동물들과 그것들의 40일간의 양식은 충분히 싣고 남을 것이라고 본다.
(3) 홍수의 심판은 역사적 사실인가?
노아의 홍수와 심판의 기록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요, 고대 신화의 하나였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사실상 이 땅위에 큰 홍수가 있었다는 창세기의 기록과 거의 비슷한 전설들은 고대 국가에서 공통적으로 가진 전설이기도하다. 창세기 8:5에 보면 방주는 아라랏산 꼭대기에 머물렀다고 했는데 지금 그 산은 흑해와 카스피 해 사이에 있는 아르메니아에 위치해 있다. 지금도 그 지방 사람들은 조상 때부터 그 산을 가리켜 그 지방 말로 "쿠히 누흐(Kuhi Nuch)"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 뜻은 바로 "노아의 산"이라는 말이란다.(참고, 지난해에 한국의 등반대원들도 이곳을 다녀왔다.) 이러한 사실들은 성경의 기록이 역사적 사건이었다는 하나의 방증이 된다고 본다.
노아와 그 가족들이 방주에 들어간 후에 곧 홍수가 임한 것은 아니었다."7일 후에야 홍수가 땅에 덮이니라."(창세기 7:9,10) 했다. 이 7일이란 하나님께서 그때의 사람들에게 주신 최후의 기회였다. 노아는 7일 동안이나 문을 열어 놓고 최후의 기회를 저들에게 주고자 했다. 우리는 이제 노아의 홍수와 심판의 기록을 생각하면서 우리 주님 그리스도의 말씀을 다시 되새기자.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 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그와 같으리라"(마태복음 24: 37,38).
3) 내가 보는 노아와 방주
(1) 의롭지만 불완전한 노아
아담에 이어 하나님이 택한 의로운 사람 노아는 당대에 가장 의로운 사람이다. 교회에 다니는 신자들을 성도(聖徒)라고 부르는데 이는 곧 구별된 사람, 거룩한 무리라는 뜻이다. 노아도 이처럼 당대의 타락한 세대들과 구별된 의로운 사람으로 온 인류의 멸망에서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그도 완전하지 못하였다. 방주에서 나온 후 술에 취하여 스스로를 절제하지 못하는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는가 하면 그의 흐트러진 모습을 흉 본 아들 함을 저주하고 벌주는 용렬함을 지녔다. 모든 인류가 갖는 약한 속성에서 그도 예외가 되지 못한 것에서 오히려 인간다움을 발견하게 된다.(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로마서 9장 10절)
(2) 방주는 실재하였을까?
방주가 만들어진 시기는 지금부터 약 4500년 전으로 피라미드가 만들어진 때와 비슷하다. 지금의 공법으로도 피라미드의 신비를 풀기 어려운 점에 비추어 그 당시에 그렇게 크고 안전한 배를 120년에 걸쳐 제작하였다는 것은 사실과 부합된다고 본다. 여러 가지 실험의 결과 노아의 방주는 안정성 면에서 배가 뒤집어지지 않고 잘 떠 있을 수 있는 정도를 알려주는 복원안정성은 미국선급협회의 기준 값보다 13배가 더 안전하고 파도가 43미터로 일더라도 문제없이 항해 할 수 있는 배로 판명이 났다는 주장이 있다.
3. 메러디스 빅토리호, 14000명 살리다 -크리스마스의 기적
그는 해마다 같은 날 생일상을 받았다. 초등학생 때가 돼서야 가족 중 유일하게 그만 양력 생일을 쇤다는 걸 알았다. 크리스마스인 12월 25일이 그의 생일이다. 경남 거제도에서 장승포동물병원을 운영하는 이경필 원장의 얘기다.
그의 출생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11월 초까지만 해도 유엔군은 호기롭게 국경선을 향해 진격했다. 하지만 중공군이 밀고 내려왔고 11월 영하 30도의 함경도 장진호 주변에서 양측이 충돌했다. 유엔군은 이후 함흥∼흥남으로 물러섰고 다음 달 초 아예 38선 이남으로 철수키로 결정했다. 피란민이 수십만 명에 이르렀다. 당시 37세로 흥남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던 그의 부친도 피란을 가기로 결정했다.
그의 부모는 10여 일 기다린 끝에 12월 23일 로프를 타고 한 화물선에 올랐다. 레너드 라루 선장이 모는 ‘메러디스 빅토리’호(7600t)였다. 마지막 피란 배였다. 그 배에 승선한 피란민은 1만4000명이었지만 하선할 때 숫자는 1만4005명이었다. 전원이 생존했을 뿐 아니라 항해 중 다섯 명의 ‘새 생명’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경필 원장이 마지막 탄생이었다. 순서에 따라 미국 승무원들은 그에게 ‘김치-파이브(5)’란 별칭을 붙였다.
“3일 동안 신이 우리와 함께 항해했다고 믿는다.”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레너드 라루 선장이 1960년에 한 술회다. 그는 “10년 전 크리스마스 때 지구 반대편에서 한 놀랍고 경이로운 항해를 항상 기억할 것”이라고 했다. 실제 그는 그 항해를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고 여겼다. 1950년 12월 23일 오전 11시 흥남을 출항, 이틀 뒤인 25일 낮 12시42분 거제도 장승포 앞바다에 정박할 때까지의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항해 말이다. 그 25일 오전 3∼4시 사이 ‘김치-파이브’인 이경필 원장이 태어났다.
- 당시 배 안의 상황은 어떠했다고 하나요.
“화물선이었답니다. 거기에 사람들이 엄청 탔으니, 몸을 움직이기조차 어려웠다고 하네요. 갑판 위는 무지하게 추웠고요.”
이 원장의 전언보다 배의 사정은 훨씬 엄혹했다. 애당초 2000~3000명 정도를 태울 수 있을 거라고 여겼던 배라고 한다. 하지만 라루 선장이 “될 수 있는 한 많이 데리고 가겠다”고 결정했다. 공간이란 공간마다 피란민을 밀어 넣었고 선창을 새로 내기도 했다. 승무원들이 “조그만 차에 12명의 거인이 타는 것 같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정도였다고 한다.
결국 13시간 40분 걸려 1만4000명을 태웠다고 한다. 피란민들은 배에 올랐지만 옴짝달싹할 수 없는 처지였다. 선원은 라루 선장을 포함, 달랑 48명에 불과했다. 이들이 유일하게 아는 한국어는 ‘빨리빨리’ 정도였다. 배 안엔 인화성이 높은 항공유 300t이 실려 있었고 바다엔 기뢰가 가득했다. 하지만 단 한 명의 희생도 없이, 오히려 새 생명을 잉태한 항해가 된 셈이었다.
- 출생이 특별했습니다. “하선을 준비 중이었답니다. 하선하자마자 장승포에 있는 세브란스병원에 저를 입원시키더랍니다. 미역과 모포도 선물 받았고요. 어린아이가 있다고 인근 지역에 살도록 해줬답니다.”
- 부친이 북한을 떠나기로 한 이유는 뭔가요.
“우익활동을 하던 차에 ‘로스케’(소련) 사람들이 들어왔는데 사는 게 엉망이었대요. 밤에 도둑질이 끊이질 않고, 못 살겠더랍니다. 그러다 유엔군이 들어왔고…. 할머니가 ‘너는 3대 독자니 일단 피하라’고 강하게 말씀하셨답니다. 아버지가 ‘아내가 만삭이어서 못 내려간다.’고 했는데도. 아버지가 떠난 건 ‘보름 정도면 돌아올 수 있겠지’라고 여기셨던 때문이라네요.”
- 부친께서 북쪽에 노모만 두고 오신 걸 후회하지 않으시던가요.
“아버지의 18번이 ‘고향이 그리워도…’(‘꿈에 본 내 고향’)로 시작하는 노래예요. 자주 부르셨죠. 이제는 돌아가셨겠죠? 아버지는 그래도 피란 온 것을 후회하진 않으셨습니다. 공산주의가 싫어서, 자유를 찾아오신 거는 말씀 안 해도 자식들이 다 압니다.”
이 원장은 경상대 수의학과를 졸업한 뒤 73년부터 3년간 철원에서 ROTC 장교로 군대생활을 했다. 부친은 2001년 “거제 사람들의 도움을 정말 많이 받았다. 잘해주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중앙일보 2009. 12. 25)
4. 함께 할 때, 그때에......
김 소 연
오랜만에 성경공부를 하고 글을 쓰게 됐다. 우리는 시작한지 2주 만에(1월 16일) 강진으로 체험학습을 갔다. 주 목적지는 하멜기념관으로 그 외에 병영성, 다산 정약용이 유배를 당했던 곳, 돌담길까지 제대로 공부를 하고 온 것 같다.
하멜기념관에서 우연찮게 한태식 문화해설사를 만나 하멜에 대해 다시 재미있게 듣게 되었다. 미리 예습을 해놓았던 터라 더 잘 들어왔던 것 같다. 그 곳에서 정교하게 모양이 나진 배를 보며 감탄이 멈추지 않았고, 인권이 보호되지 않아 하멜과 동행했던 사람들을 하인처럼 부려 먹은 것이 안타까웠다. 그다음에는 병영성으로 갔었는데 눈이 녹기시작해서 신발에 묽은 흙이 덕지덕지 붙게 되었다. 역시 좋은 일이 생기면 아쉬운 일도 있나보다. 이어서 우리는 하멜이 쌓은 공법에 따라 사선으로 지은 돌담길을 따라 1km 넘게 쭉 들어가며 희한하다고 웃었다.
병영의 설성식당이라는 음식점에서 맛있는 한식을 먹고, 강진의 다산초당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먼저 유물전시관에서 다산의 행적과 목민심서, 거중기, 종두예방법 등 다방면에 걸친 실학자의 위대한 업적을 살피고 다산 정약용이 유배를 당했던 곳인 다산초당으로 힘겹게 올라갔다. 목적지인 곳이 500m라고 씌어져 가깝게 여기고 올라갔는데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의권이는 이 수수께끼를 풀기위해 올라가면서 생각을 했나보다. 계단식 산이 이어져 다리에 근육이 뭉칠 무렵 의권이가 “우리가 갈 목적지는 500m가 아니라 1500m였어.”라고 표지판의 기록을 마음대로 수정하였다. 그러면서도 산을 오르며 가쁜 숨과 함께 재미있는 말로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다산초당에서 맑은 물로 목을 적시고 전망이 훤히 보이는 곳에서 한 숨을 돌린 후 800m정도인 백련사까지의 산길을 오르내렸다. 그 시간동안 우리들은 함께여서인지 즐겁고, 쌀쌀했던 날씨마저 따뜻했다.
꽈배기와 귤을 한 상자씩 싣고 가 간식도 풍성하였고 광주에 돌아와서 먹은 중국식당의 저녁도 맛있어서 즐겁고 행복한 체험학습이 되었다.
이렇게 학습체험일정을 마치고 다음날인 1월 17일 주일에 우리는 노아에 대해 성경공부를 했다. 노아는 하나님께서 믿은 의로운 사람이었다. 노아하면 노아의 방주가 떠오르는데 많은 죄를 짓고도 반성하는 자세가 없는 인간들을 보고 노하신 하나님께서 물로 사람을 다스린다고 홍수를 내리셨다. 그 전에 노아를 보고 어마어마한 크기의 배를 만들라고 하시고 사람들과 더불어 각종동물들을 태우라고 하셨지만 믿지 않은 인간들은 홍수로써 심판을 당했다. 우리가 어제처럼 같이 있어서 즐겁고, 쌀쌀한 날씨마저 따뜻하게 만들어진 것 같이 물로 심판을 할 때 많은 사람이 배에 올라 심판을 면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라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마음이 흐트러진 노아는 결국 나중에 자주 술에 취하고, 벌거벗게 되어 마지막에 좋지 않은 인상을 남겼다.
이번 학습체험여행과 성경공부 속에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지혜롭게 행할 때 더 기분도 좋고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기쁘다.
추신, 지혜란 선생이 대학원 논문관계로 소감문 작성이 늦어졌다. 작성한 글이 체험학습답사기를 자세히 기록하여 분량이 많고 사진도 곁들여져 이를 첨부파일에 올렸다. 바쁜 중에도 충실한 글을 써주어서 감사하다.
‘소감문을 토요일로 연기하고 싶어요
오늘은 오랜만에 날씨가 따뜻합니다.
다름 아니라 사실 이번주 금요일 (22일)에 논문 1차 계획서 발표가 있습니다.
마지막 마무리 작업이 한창입니다. 때문에 이번 주 소감문을 수요일까지 작성하기가 버거워 토요일에 보내드리겠습니다. 헉, 헉~ (계획서 작성하느라 숨차서 나는 소리)
감사를 전하며,,,, 혜란 드림‘
여호와의 은혜를 입은 노아
지혜란
지난 토요일(1월 16일) 우리 교회 성경 공부에 참여하는 어린이 8명과 선생님은 강진의 전라병영성, 하멜기념관과 다산초당으로 답사를 다녀왔다. 이 답사에 교회와 천혜경로원의 전폭적인 후원이 있었다. 경로원에서는 우리의 답사를 위해 봉고차를 제공해주었는데 직원으로 근무하는 김태경 선생님이 봉고차를 안전하고 친절하게 운전해주어서 더 편안하고 기분 좋은 답사길 이었다.
아침에 헤이즐넛 커피를 팔팔 끓인 물에 타서 보온병에 담고 전날 밤에 사 온 귤을 챙기고 가는 길에 맞춰놓은 인기 간식 꽈배기를 찾아 교회로 향했다. 교회에는 벌써 모두들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의 답사 길을 배웅해주기 위해 강은수 경로원 원장님과 김혜경 권사님, 그리고 박주일 집사가 나왔다. 아이들은 1박 2일이 아니어서 다소 실망한 모습이지만 여행은 모두를 구름위로 올려놓는 마력이 있다. 아이들 모습이 벌써부터 상기된 표정이다. 특히 우리가 공부한 하멜기념관이 우리 고장 강진에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고 모두들 고무된 모습이다.
강진으로 향하는 중간에 나주를 지난다. 배나무는 배와 잎을 떨어뜨리고 가지만 남았다. 봄이 오면 저 앙상하고 죽은 것 같은 가지는 무성한 잎을 달고 희고도 흰 배꽃으로 덮을 것이다. 길이 길을 만들고 우리는 달려달려 눈에 덮인 월출산을 맞이했다. 멀리서 보기에도 야무지고 구부러지지 않는 곧은 선비의 상징처럼 우뚝하다. 우리는 월출산을 둘러싸고 휘돌아 나있는 길을 따라 가다 그 장관이 잘 보이는 곳에 멈춰 서서 사진을 찍었다. 갑자기 출발 하려는데 시동이 걸리지 않아 순간 당황하기도 했지만 우리가 누구냐?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차는 곧 시동이 걸렸고 안도감에 먹는 꽈배기가 입 안 가득 고소하다.
드디어 강진 병영에 있는 하멜기념관에 도착했다. 입구에는 네덜란드에서 기증한 하멜 동상이 서 있고 거대한 풍차를 제작 중에 있었으며 주변에는 튤립과 들국화를 조성하기 위해 마련된 부지가 넓다. 이 동상은 2.5m 크기에 3t 무게로 네덜란드 조각가 얍 하트만이 하멜의 고향 네덜란드 호르큼시에서 5개월에 걸쳐 완성했다고 한다.
우리가 도착하여 전시관 안으로 들어서자 마침 한태식 문화해설사가 와서 친절하게 안내를 해 주었다. 하멜기념관은 ‘하멜표류기’를 써서 우리나라를 다른 나라에 최초로 알린 하멜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오른쪽의 타원형 건물은 하멜이 표류한 우리나라의 섬을 상징하고 오른쪽의 각진 건물은 그가 타고 온 배를 상징한다고 한다.
기념관은 크게 5개의 전시실로 되어 있다. (제1 전시실 - 핸드릭 하멜, 그는 누구인가? 제2 전시실 - 17세기 네덜란드, 과연 어떤 나라인가? 제3 전시실 - 핸드릭 하멜, 그는 왜 조선으로 오게 되었는가? 제4 전시실 - 핸드릭 하멜, 그가 조선에 남긴 것은 무엇인가? 제5 전시실 - 강진이 이어가는 한국. 네덜란드 교류사)
먼저 제1전시실은 하멜이 누구인지를 소개하고 있다. 제2전시실은 하멜의 고향인 네델란드의 여러 가지 문물을 소개한다. 하멜의 고향 호르큼(Gorcum. 현재는 호린헴Gorinchem이라 불림)은 지금으로부터 천여 년 전 어부와 농부들이 세운 도시이다. 호르큼 근처로 라인 강의 지류인 왈강이 흐르는데, 이 강은 네덜란드 운하로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지리적 여건으로 호르큼은 예부터 곡물 거래를 위한 상선들의 왕래가 왕성하였고, 오늘날에는 항구도시로 발전하였다.
제3전시실은 하멜이 왜 우리나라에 오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하는 곳이다. 핸드릭 하멜은 네덜란드 호르큼 시에서 태어나, 동인도회사 소속의 선원이자 서기로 근무하였다. 1651년 바타비아에 도착하여 타이완을 거쳐 일본 나가사키를 향해 항해하던 중 1653년 8월 16일 풍랑으로 제주도에 표착하였다. 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난파하여 1666년 9월 14일 일본으로 탈출할 때까지 조선에서 보낸 기간은 약 13년 28일이다. 특히 1656년 3월부터 1663년 3월까지 약 7년 동안 강진 병영에서 지냈다.
제4전시실은 하멜이 조선에 남긴 것에 대한 이야기다. 하멜이 남긴 것은 많지만 특히 7년 동안 강진군 병영면에 살면서 독특하면서도 더 단단한 돌담 쌓는 기법을 전수하였다. 그것은 바로 2006년 근대문화재로 지정된 돌담길(한골목)이다. 돌을 반듯이 쌓지 않고 엇갈리게 쌓음으로서 더 튼튼하다고 한다.
제5전시실은 강진이 이어가는 한국과 네덜란드 교류사에 관한 이야기다. 강진군은 하멜이 7년 동안 살았던 것을 기념하여 그의 고향인 네덜란드 호르큼시와 더욱 활발한 교류를 약속했다고 한다. 우리는 기념관 방명록에 글을 남기고 원치 않은 풍랑으로 표류하여 갖은 고생 끝에 고향으로 돌아가 ‘하멜표류기’를 써 우리나라를 소개한 하멜을 생각했다. 오래 전 역사 속에서 잠깐 만난 하멜이 이제 현실로 살아나 전시관을 나오는 우리도 하멜의 고향인 네덜란드를 그리워하게 되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그의 고향에 가서 튤립이 피어있는지 꼭 한 번 확인하고 싶다.
돌담길은 생각보다 길고 운치 있다. 돌담길을 돌아 복원 중에 있는 병영성을 둘러보았다. 복원 중이라 성의 형태가 완벽하지 않았지만 질퍽한 흙길을 오랜만에 걸으며 운동화에 묻은 흙덩이를 털어내는 재미도 꽤 괜찮다. 점심은 선생님이 추천한 설성식당이다. 가정집에서 먹는 큼지막한 네모난 교자상에 20여 가지 반찬이 차려진 모습이 잔치상 같다. 특히 연탄불에 구운 돼지구이가 인기 만점이었다. 조기는 작지만 알이 차 있다. 그 외에도 바지락국, 고추, 동치미, 콩자반, 김치, 깍두기, 숙주나물, 파래 무침, 연두부가 맛있다.
점심 식사 후 우리 일행은 강진 다산기념관으로 향했다. 개혁사상가이자 탁월한 과학자이기도 한 다산은 강진에 18년간 유배되었다. 18년간 유배생활 속에서도 민생을 위한 경세의 학문인 실학을 연구하여 <목민심서>, <흠흠심서> <경세유표> 등 600여권에 이르는 귀중한 저서를 남겼다. 이곳은 다산의 생애와 주요저서 그리고 수원성 축조 때 쓰인 거중기의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우리 일행은 다산기념관을 나와 다산초당으로 가는 길을 따라 걸었다. 좁은 길 양쪽에 뻗은 나무들은 어른 팔뚝 정도의 굵기지만 그 키는 5미터는 되 보인다. 아이들은 좁은 길을 따라 걸으며 꽈배기를 입에 물고 신이 나서 걷는다. 의선이는 그새 음료수를 사서 몇몇 아이들에게 나눠 주었다. 의권이는 집에서는 못 먹는 음료수를 먹어서인지 발걸음이 절로 가볍다.
동백나무가 우거진 좁다란 터에 다산초당의 건물이 서 있다. 다산 초당에 도착하여 골짜기에서 내린 물을 바가지에 받아 한 모금씩 먹고 초당 옆의 천일각으로 갔다. 그곳은 정약용이 흑산도로 유배 간 둘째형 정약전을 그리며 심회를 달래던 곳으로 정면과 측면이 한 칸씩인 누각이다. 이곳은 날씨가 좋으면 멀리 완도 쪽 다도해가 한눈에 들어온다고 한다.
다산이 이 곳 초당 생활을 소묘한 시다.
초암에 살고부터 세상과 떨어지니
본래부터 청정하여 새 향기를 끊었네.
책 속의 큰 논란을 첫 결단함 흔쾌하고
티끌 속에 서로 다툼 이로움 상관 않네.
시내 이는 댓잎 소리 밤비를 거둬가고
꽃기운을 산이 불어 봄 구름 피어난다.
부들자리 잠 달콤해 아침 늦게 일어나니
어이 진흙 신발 신고 종일 애써 달리리오.
<기념관에 있는 다산 선생의 친필>
잠시 쉬었다가 선생님은 백련사까지 산길을 걸어가자고 하였다. 힘든 사람은 다시 차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하였는데 전원 동참하여 백련사까지 걷게 되었다. 김태경 선생님은 봉고차를 가지러 다시 내려가고 우리는 백련사로 향했다. 주현이는 맨 앞장서 걸으며 갈림길이 나오면 이 길이 맞는지 선생님께 묻는다. 그때마다 선생님은 “쭉 걸어가라”,“아니 그 옆길로 가라.”한다.
800미터 정도의 산길은 양쪽에 대나무와 소나무가 서있는 좁다란 길인데 오르막과 내리막이 적절하여 걷기에 지루하지 않고 운치 있다. 주현이가 맨 앞에 가고 아이들과 선생님이 한 줄로 길게 늘어서 걸었다. 아이들의 재잘대는 소리가 고요한 숲을 떠들썩하게 만든다. 산토끼가 놀라 쫑긋하고 다람쥐들이 흉볼 것 같다. 너무 시끄럽다고.
다산초당과 함께 만덕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백련사는 따로 다산의 유적이 남아있는 곳은 아니다. 그러나 다산은 당시 이 절에 거처하고 있던 혜장이라는 인물을 만나 서로 왕래하며 토론하는 가운데 자신의 학문적 성취를 높이고 유배 생활의 윤기를 더할 수 있었다고 한다. 백련사를 둘러보고 내려오니 우리의 똑똑한 김태경 선생님은 어느 새 봉고차를 가지고 왔다. 꽤 긴 길을 걷고 둘러본 터라 피곤하여서 봉고차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봉고차를 타고 광주로 향하던 중 강은수 원장님이 전화를 하였다.
“광주에 도착하여 저녁 식사 하십시오.”한다. 우리 원장님 최고!!
우리는 식당에 도착하여 목사님을 모시고 오늘의 무사한 답사를 감사하는 기도를 드리고 식사를 하였다. 목사님은 교회의 아이들이 성경 공부를 하고 또 체험학습을 다녀온 것이 무척 흐뭇하신 모양이다. 겨울 방학에 마땅한 체험학습을 다녀오지 못하여 걱정하고 있던 동건 엄마는 오늘 하멜기념관과 다산기념관 답사로 아이들 숙제를 하게 되었다며 좋아 한다. 아이들은 귤과 꽈배기 그리고 점식 식사까지 든든히 먹었는데도 신락원에서 자장면을 맛있게 먹는다. 생각해보니 꽤 오랜 시간 산길을 걷고 기념관을 답사하느라 피곤하고 체력이 소진되었을 것 같다. 아이들은 가정과 학교와 지역사회가 함께 키운다. 교회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을 위해 기획하고 후원하여 다녀오게 된 이번 답사는 그래서 더욱 의미가 깊다.
답사를 다녀온 다음 날은 주일날이다. 오늘 성경 공부는 노아다.
창세기 6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의 은혜를 입었더라.’고 나와 있다. 왜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을까? 또 성경은 답을 한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였다. 노아는 하나님이 이르신 대로 잣나무로 방주를 짓고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안팎을 칠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이 명하신대로 아들들과 아내와 자부들과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암 수 한 쌍씩 방주에 태움으로써 다 준행하였다.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모두 준행한 노아의 믿음은 대단하다. 하나님은 의로운 노아와 그 가족을 구원하였다. 하지만 죄악의 세상에서 악을 행한 사람들을 물로 심판하였다. 하나님의 방주에 탄 노아는 세상과 구별된 사람이었다. 우리는 세상에 살지만 노아처럼 구별되어야 한다.
첫댓글 너무나 좋은 공부가 되어 이루 소감을 쓸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다시 찬찬이 읽으면서 노아와 홍수, 다산과 하멜에 대하여 새로운 지식과 교훈을 익히도록 노력하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