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조선사를 공부하면서...대륙조선 연구자님들에게서 느끼는 답답한 심정이 이거다.
광의적 개념의 대륙조선의 영역...
특히나 흉노니 선비니 숙신이니 하는 고대 고조선 전후의 조선문명의 흔적들이 중앙아를 넘어 동유럽까지 미친단 점에 착안하여...
아예 근세조선의 강역 중심까지도 중앙아로 이동시키는 연구경향들이 주로 보인단 점이다.
물론, 고조선의 전체 문명이라 분류되는 선비와 숙신 흉노의 문명은 중앙아를 넘어 동유럽까지 미쳤고...
심지언 유럽 전체에 다 스며들어 혼혈문명을 만든게 현재의 유럽제족들의 문명이란게 본인의 늘상적인 주장였다.
숙신은 섹슨의 우리식 표기이고...
앙글리(앵글로)는...바이칼 서북 앙가라강 유역에서 서역으로 이동한 알거골부 백인(황두여진)의 족속들이요 부여의 백민(白民)들과 유사종이라 한 것도 본인의 주장이다.
현 바이칼유역과 알타이산맥 유역의 어느 종족들이...1만년 전후한 해빙기에 대거 남하하면서...
현 중원은 물론, 중앙아와 서유럽까지 문명을 전파하고 혼혈되는 과정이...환단고기의 그 12환국(桓國)역사이며...
그 중심은 천해(天海=알알해+발하쉬호+준가르분지)의 동부이자 파나류(파미르)의 인근인 현 신강성 천산지역을 이른다 추정한다는 것도 본인의 주장이다.
본인은 분명 중앙아를 넘어 유럽이 단군조선의 윗대인 환인제국의 문명과 관계없다 하지 않았다.
현대 인류들의 유전자는 물론...모든 고등종교들과 그 뿌리인 샤머니즘 자체도 ..
시베리아(사백력)의 중심인 바이칼과 알타이에서 남하한 환인족들의 혼혈유전자요 종교를 뿌리로 한다고 본인은 추측한다.
그러나...환웅의 신시 배달국문명은 좀 다르다.
분명 환인의 서자부(序子府)에서...천부인(天府印)을 가지고 무리를 이끌고 와서 신시 배달국을 개국하고 이후 웅녀의 아들이 단군조선을 개국한다 한다.
여러 학자들 천태만상의 자기식 해석들이 난무하나...원전 그대로 직역하는게 가장 진실에 가깝다 하겠다.
말 그대로...신시배달국문명은...환인제국의 직통 장자문명이 아닌...서자가 이끌고 신흥문명을 개척한 신 제국이란 소리요...
이때 환인제국의 천제(天帝)로 부터 천부(천자조정)가 내린 도장(印)인 옥새를 가지고 왔단 내용이라고 본인은 확신한다.
고 지도들에 수도없이 나오듯이...천해(天海)는 알알해와 발하쉬호 인근이요...
더 넓게는 서쪽으론 카스피해와...동쪽으론 고비사막(翰海)서부까지를 천해(天海)라 했고...
그 중동부에 천산(한 탱그리산)이 엄연히 존재한다.
그럼 직계 장자부가 아닌 서자부의 신시 배달국문명은...
최초엔 이곳을 벋어난 다른 곳에 문명의 기틀을 열었다 봐야 정상이다.
본인 생각으론 현 청해성 인근 기련산 지역이다.
고지도들에도 거기에 삼위산(三危山)이 표기되어 있고...황해도의 조건을 갖춘 여러 지형들과 유적들이 보인다.
환웅이 신시 배달국을 연 최초의 태백산이 현 천산(탱그리산)이라면...태백이 아닌 천산(天山)이라 병기했을 것이다.
총령(파미르)의 동북쪽 지맥인 현 천산산맥 동쪽지맥이 요동벌에서 잠시 끈겻다가 백두산에서 우뚝일어났다니...
동부지역의 박격달봉이 원조 백두산...그 동부 돈황지역이 원조 요동벌...그 동부 기련산맥이 태백산맥이요...
그 기련산맥의 여러 고봉들 중 청해호 서북단 인접한 고봉이 원조 황해도 묘향산일 것이다.
청해호 서북단 기련산맥 서남단이 신시배달국의 개국장소고...그 동부 대통하(원조 대동강?) 유역의 서녕티벳자치구가 아마도 최초의 평양이요 왕검성일 거란게 본인의 생각이다.
섬서성 서안은...단군조선이나 고구려가 밀려난 동쪽의 신 평양성(신 장안성)일 가능성이 많다 하겠다
환인제국의 중심인 천산유역은...동이계열의 환웅세력이 주도한다 보이며...
이때 대표적으로 일어나는 천자권쟁탈 주도권 전쟁이 황제 헌원과 치우천자와의 교전였다 보인다.
환인족의 혈통을 이어받은 티벳지역의 황제 헌원과...역시,환인족의 혈통이면서 동이지역을 다스린 치우세력이 인류 최초다 싶은 대 전쟁을 치룬 역사요...
역사에서 중국(中國)이니 중원(中原)이니 하는 지역은 환국의 중심이 바로 중국(中國)의 정체일까 한다.
어느 세력이 차지하던...이곳을 차지한 나라가 중국(中國)이요 그 우두머리가 천자(天子)인 셈이다.
황제의 후예들이 쓴 역사서에도 치우는 동이의 천자라 했고...헌원은 치우에게 연전연패를 했으니...
사실상 치우의 동이족이 중국(천산유역)을 차지하고 천자위에 올아 있었단 역사로 해석해 본다.
황제 헌원족의 한(漢) 문명은...치우세력에 밀려 티벳오지와 파미르 서역을 전전한 문명으로 보이며...
치우의 동이족이라 함은 그 상대적 동부 천산산맥 동부부터 기련산맥과 그 동부 현 중국영토 전체를 이르며...
상대적으로 중국(천산유역)에서 서남으로 밀린 황제헌원의 후예인 한(漢)족들은...테벳과 아랍지역을 중국(中國)이라 역사에 집필했을 것이 뻔하다 하겠다.
그 상대적 북쪽인 현 카자흐와 러시아지역이 서흉로요 서선비요 서융족이라 불리운 세력들이고...
역시 상대적 동부인 동이족들과 고조선의 천자권을 다투던 싸움들이 주나라(서선비)와 은나라(동이)의 싸움...
선비족과 고구려의 싸움...서선비(당나라)와 고구려의 싸움 등이라 보이며...
티벳등의 한(漢)지역은...고조선이 망할 당시에 단군이 이동한 마한지역...그 동부인 사천과 호북 ,호남,광서성일대는 백제계가 ,,,
그 동부인 광동과 복건 강소성 산동성 일대는 진한(신라)계가...
그 남부인 현 베트남과 태국등지는 백제계와 신라계가 경합하던 변한이자 가야지역이라 사료된다.
말이 길어지니 중략하고...
대륙조선 연구자님들 상당수는...중국은 근세조선 까지도 조선의 황성이 있는 지역을 이른다 해석들 하시나...
난 아니라고 단언한다.
중국은 엄연히...고조선 멸망 이후엔...동이계인 부여 고구려와 한(漢)이나 선비계열이 경합하던 천산유역을 말하며...
고구려 멸망이후인 통일신라 이후엔...당나라(중앙아세력)과 발해(大震)와의 경합지역이며...
야율아보기의 요나라에 발해가 동쪽으로 밀리다 멸망하곤...요나라(카라키타이=힛타이트)의 영역이고...
이후엔 왕건고려와 그를 이은 근세조선이 이 지역을 장기적으로 차지하진 못한 조선문명의 관할을 벋어난 지역이라 항시 역사에 명기됀다.
물론 발해(고구려+속말말갈)의 유민출인 금나라(고구려+흑수말갈)나 몽골(흑수말갈+속말갈+고구려)이 다시 차지하고 중국을 자처하긴 했으나...
그게 우리의 현재 직계인 왕건고려와 근세조선의 역사강역이라 하기엔 무리가 많다 보인다.
그 천산유역인 중국(中國) 북경과...고려와 근세조선의 중간 경계지역인 요동벌이 바로 현 돈황유역인 정황이 보이고...
이 때의 조선 태백산이니 백두산은...천산산맥이 아닌 현 기련산맥을 기준으로 한다는 정황도 보인다.
중국 역사서를 보면...늘상 발해와 금나라 몽골과 청나라의 발상지...
또는 고유의 아지트를 대사막 넘어 북경(천산유역?)중심 동북쪽 장령(고비알타이산맥?)넘어
5천여리에 있는 영고탑지 주변이라 한다.
현 외몽골이 가장 적합한 지역조건이다.
이 지역은 숙신과 말갈의 발흥지역으로...대사막 넘어 장령을 넘어 사방이 고립됀 별지이기에...
중원이 이 지역을 점령하거나 통치하기 버거운 지역이라 했다.
본인이 아무리 객관적으로 대입해 봐도 외몽골이 분명하다.
그럼, 영고탑 북쪽에 흑룡강과 그 지역에서 악라사나 와랄군과 교전한 조청연합군의 라선정벌은...
톨강과 셀렝게강이 합류하는 현 외몽골 셀렝게지역과 바이칼호수지역을 얘기하며...
와랄과 악라사군은...바이칼이 북해(카라해=흑해)로 나가는 유일한 강인 앙가라강 이르크츠크(예락하?)지역 예니세이(예니체리?)지역을 이른다 사료된다.
이 지역 출신들이 예전부터 서방으로 이동한게 키르키즈요...앵글로섹슨이고 원조 철륵(투르크)인 정황이다.
그들이 전파한 바이칼의 샤머니즘(원조불교)이 서방식으로 진화한게 최초의 서방불교요...그게 진화한게 기독교요 이슬람이요 힌두교요 자이나교요 마니교라 보인다.
미륵불교,마니교, 메시아교(미트라교=기독교)모두 미래 인류를 구원할 미륵(메사아)를 선망한단것도 공통점이다.
역시 말이 길어지니.중략하고...
중국(천산유역?)의 상대적 동북쪽...대 사막(고비사막)넘어 장령(고비알타이산맥)넘어 5천여리 정도에 영고탑지가 있다 했으니...
현 외몽골 울란바타르 인근 툽(아이막) 지대가 영고탑지의 중심이라 보인다.
이쯤에서 중요한게 그 동부에 뭐가 있었냔 것인데...
근세 연행사들의 기록엔...영고탑지역의 동부는 조선 동북면 오지와 여진의 경계지역이라 했고...여진의 경계지역을 넘으면...
왜가 다스리는 부상국(일본열도)의 북쪽(사할린?)과 연결됀다 했다.
일본왜는 동서남아 해양잡족들의 연맹이기도 하지만...현 일본열도도 분명 포함됨을 알 수 있다.
연행사들의 기록엔...녕고탑(외몽골?) 동북 5천여리 건너엔...5년에 한 번 얼어붙어 건너다닐 수 있는 바다가 나온다.
아무리 찾아 봐도 그런 바다는 알래스카(알류사)를 넘나드는 베링해 밖엔 없다.
거길 역사는 흑진국(黑眞國)이라 하여 여진의 일파로 분류함도 알 수 있다.
날고기를 먹고 곡식은 못 먹는다.
온 몸을 털가죽으로 덮고 얼굴만 내 놓고 다닌다.
정확히 현 알래스카 에스키모들의 문화를 말하고...
단지 다른건 머릿카락이 양털같은 곱슬이고...키가 3장(7M)~1장(1M40CM)란 점이 현재와 다를 뿐인데...
상당수 고지도들엔...알래스카를 포함한 현 아메리카 대륙에...분명 신장 3장(7M)거인들이 표기되어 있음으로 보면...
흑진국의 괴수인간들은 알래스카를 넘나들며 청나라에 가끔식 나타난 정황이다.
그럼 청나라의 통치강역은...중앙아에서 베링해 유역까지며...
조선의 동북도 영토와 겹친다니...대륙조선의 극동영토는 현 블라디보스톡 인근까지임을 알 수 있다.
이로 미뤄보면...
근세의 대륙조선 강역은 서북은 청해성과 감숙성 인근에서...동북은 현 흑룡강인 블라디보스톡 인근까지란 얘기도 됀다.
근세조선이 신장성을 넘어 중앙아까지를 구한말까지 다스리고 있었단 주장들은...
과거 환인제국과 신시배달국 고구려와 근세조선 개국초기 잠시의 역사강역을...
이미 같은 단군조선의 후예인 청나라에 상당지역 상실한 근세조선까지 무조건 근세조선땅이라 대입한 무리수라고 보인다.
중국(中國)이라 불리우던 천산유역(?)은...치우천자등의 환웅시기엔 당연 동이계의 영역였고...
부여와 고구려를 이은 발해가 경영했다는 역사정황은 분명 들어나나...
그 지역은 요나라와 금나라 몽골이 인수하지...통일신라나 왕건고려 그를 이은 이성계의 근세조선이 경영했단 정황은 전혀 없음도 인정해야 할 듯 하다.
단지, 원제국의 멸망시기 ...명나라(무굴리스탄?)의 초기 발흥시기...
무주공산에 가깝던 돈황(원조요동?)지역과 그를 넘어 중가르분지의 타타르족등...여러 여진제족들을 제압하며...
카자흐와 우즈벡등의 중앙아를 잠시 호령하던 의문의 인물인 티무르(아미르티무르)가 조선태조 이성계(아기발도=아자로 시작하는 철의영웅)일 가능성은 많다고 예상해 본다.
대륙조선 연구자들은...
일본(倭)을 동남아 제도와 서남아...더하면 지중해 남부 아프리카까지라 산정하시고...
현 일본열도는 왜(倭)와는 상관없다가 구한말에나 왜들에게 점령당했다 하시는데...
이것도 좀 아닌듯 하다.
동남아와 인도양 여러 섬들의 키 작은 족속들이 왜와 관련 많은 왜국(倭寇)들의 발원지이자 주요 활동지인건 맞지만...
려몽연합군의 일본 정벌기를 보건데...왜(倭)의 극동 아지트인 부상국은...현 일본열도가 맞으며...
이들의 서부 영토가 동남아 제도들과 인도양 인근인 정황이다.
임란시기 조선에게 명나라 치는 길을 열어달라함은...기록들을 보건데...
대륙조선연구자님들 말대로 현 한반도길을 통해 현 베이징으로 가는 길을 빌려달라 함은 물론 아니다.
그렇다고 하여...일본(부상국)왜들의 영토가 현 일본열도는 아님의 증거는 됄 수 없다.
부상국이란 극동의 영토를 아지트로 하는 왜들은...
점점이 이어진 오키나와 제도의 여러 섬들을 통해...원조 대마도로 사료되는 현 대만에 접근하고...
그 건너 복건성이 바로 대륙조선의 동남부땅인 경상도 부산지역이라 보이기 때문이다.
조선 전라도가 왜들이 중국으로 가는 길목이라 함은...현 광동, 광서성이 전라도 해안이요...그 상대적 서쪽인 탐라(태국등지)넘어 방글라데시 부터 인도 동부해안이 중국(명나라=무굴?)의 동남해안이란 정황이다.
려몽연합군이 일본을 동정(東征)한 역사기록은...이 반대경로를 얘기함도 들어난다.
그 서쪽의 필리필과 인도네시아등은...왜구들의 영역인 왜(倭)의 서부영토일 뿐이라 사료된다.
이 당시의 남송(중국?) 용병들이 역사가 말한 10만의 만군(蠻軍)인 셈이다.
역사가 기술한 왜(倭)들의 행색은 정확히 현 동남아와 서남아 토인들로 들어나지만...
그 지배족들은 상당수는 현 일본일들과 유사함도 들어난다.
현 일본열도의 전통 지배족들이...역사가 말한 그 난쟁이 왜인들이 아닌...고구려나 백제 신라,가야의 유민들...
고려나 금나라 여진의 유민들임이 다를 뿐...현 일본열도가 왜(倭)족들이 드나들던 강역이 아니였단건 무리수가 많다 보인다.
그 주도권이 임란시기에나 구한말기에 서양인들의 도움으로 동남아 왜들로 뒤밖인 정황밖엔 없다 보인다.
크겐 서남아제도들까지도 왜들이 설치던 지역이라 하여...
아라비아반도와 북아프리카가 왜들의 전통강역이고...그 상대적 북쪽인 지중해 연안이 근세조선의 강역이요...
거기가 조선의 중조(中朝)인 중국(中國)이라 함은...참으로 무리수가 많은 과대해석일지 싶어 걱정이 된다.
조선역사강역의 공부는 애국애족심에 불타는 뜨거운 가슴으로 해야 겠으나...
과학적 근거제시와 논리적 해석을 하려면...냉정한 머리로 해야...객관적 진실에 가까워진다고 주장해 본다.
......................................................................................................................................................
흑진국(黑眞國)은 영고탑(寧古塔) 동쪽 수천 리 얼음바다 밖에 있다. 바닷물이 5년에 한번 어는데 서로 건너다니지 못한다. 그 나라 사람은 온몸에 짐승의 가죽을 두르고 다만 머리와 얼굴만 내놓는데, 고수머리가 양과 같으며 물고기나 짐승 고기를 날로 먹는다. 건륭(乾隆) 때에 흑진인이 홀연히 바다를 건너 육지로 나왔으므로 건륭 임금이 불러왔으나 말이 통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 물건을 그 앞에 벌여 놓고 그것들 중 가지고 싶은 것을 살펴 보았으나 끝내 원하는 것이 없었지만 한 여자를 보더니 기뻐하며 다가가서 끌어안았다. 그리하여 총명한 여자를 골라 짝지어 주고 또 영리한 사람 5명으로 하여금 그를 호위하게 하여서 그들을 데리고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오곡(五穀)의 씨앗과 농구를 주어 농사를 가르쳐 주었더니, 5년 후에 그 여자와 함께 다시 얼음바다를 건너서 왔는데, 사은의 표시로 주먹만한 큰 구슬과 길이가 1장(丈)이 넘는 몇 장의 표범 가죽을 가지고 와서 바치었다.
여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큰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군장(君長)이 없다. 사람들은 키가 3장이며, 더러 1장 남짓한 작은 사람도 있다. 오직 새가 짐승의 사냥을 일삼고 생선과 자라를 날로 먹으며, 구슬과 조개가 바다에 넘치는 그 광채의 기괴한 것을 헤아릴 수가 없다.”
....................................................................................................................................
몽고(蒙古)는 일명 달단(韃靼)으로 사막에 있는데, 천하의 막강한 나라이다. 48부(部)의 왕이 해마다 들어와 조공(朝貢)한다. 나라 풍속이 귀천이 없이 다 누런 옷을 입는데 황제의 의복 빛깔과 같다. 건륭(乾隆)이 황화요(黃花謠)를 듣고부터는 더욱 견제하고 있다 한다.
회자(回子)는 회회국(回回國)이라고도 하며, 바다 가운데에 있어 다섯 달이 걸려야 비로소 중국에 이른다. 강희(康煕) 때에 명령을 거역하였으므로 드디어 군사를 풀어 토벌하여 그 왕을 사로잡아 서울로 데려오자 그 딸을 후궁으로 바치었다. 그곳 사람들은 검은 얼굴에 눈이 깊고 구레나룻이 더부룩하다. 옷과 모자는 청인과 같고, 여자는 알롱달롱한 옷을 입으며 머리는 땋아서 늘어뜨린다. 도광(道光) 때에 또 반역하였으므로 양우춘(楊遇春)을 보내어 토벌, 평정하였다.
악라사(鄂羅斯)는 대비달자국(大鼻橽子國)이라고도 하며 흑룡강(黑龍江)의 북쪽에 있으니, 중국에서 2만여 리나 떨어져 있다. 10년에 한 번 와서 관에 머무르며 교역(交易)을 할 뿐, 조공은 하지 않는다. 그 나라 사람은 검은 얼굴과 우뚝한 코에 성질이 사납다.
섬라(暹羅 태국)는
적미유종국(赤眉遺種國)이라고도 하며, 점성(占城 참파 Champa, 2세기에서 15세기 사이에 인도차이나 남동 기슭에 있던 참(Cham)족의 나라)의 극남(極南) 쪽에 있다. 8000리를 항해하여 광동(廣東)에 이르러 육지에 내려, 거기서 다시 7000리를 가 연경에 이른다. 5년에 한 번 조공을 한다. 그 나라 사람은 모두 박박 깍은 머리에 몸은 작고 얼굴은 못생겼다. 강남이라 춥지가 않아서 겨울에도 홑옷을 입는다. 공물은 용연향(龍涎香 향의 이름), 침향(沈香), 백단향(白檀香), 강진향(降眞香), 금강찬(金剛鑽),
빙편(氷片), 장뇌(獐腦),
대풍자(大楓子), 두관(豆蒄 약용 식물),
필발(蓽撥), 계피(桂皮), 취조가죽[翠鳥皮], 공작 꽁지, 상아(象牙), 무소뿔[犀角], 서양담요[西洋毯], 홍포(紅布),
오목(烏木), 소목(蘇木) 등등이다.
《일통지(一統志)》에 이르기를,
“섬라는 풍속이 침략을 숭상하고, 부녀자는 생각과 도량이 남자보다도 뛰어나서 나라 안의 형법(刑法)의 경중과 전곡(錢穀)의 출입을 다 참여하여 결의(決議)한다.”
하였다.
안남(安南)은 옛 남교(南交)의 땅이다. 진(秦)이 상군(象郡)을 두었고, 한(漢)이 교지(交趾)를 두었으며, 연경에서 1만 1100여 리 떨어져 있다. 역대로 임금의 자리를 빼앗는 일이 계속되면서 서로 이어왔다. 건륭(乾隆) 때에 광남(廣南) 사람 완혜(阮惠)가 스스로 즉위하여 왕이 되었는데, 드디어 안남왕에 봉하였다.
진랍(眞臘 캄보디아 지방)은 땅이 사방 7000여 리인데, 점성(占城) 남쪽에 있다. 국왕이 사흘에 한 번 조회를 보는데 그때에는 오향칠보상(五香七寶床) 위에 앉고 보장(寶帳)을 치며, 조하길패(朝霞吉貝)를 입는데 허리와 배를 감아 배 아래로 늘어뜨려 정강이에 이르게 한다. 머리에 금보화관(金寶花冠)을 쓰고 몸에는 진주 영락을 걸치며, 발에는 가죽신을 신고 귀에는 금귀고리를 하고 있다. 그 신하가 왕에게 조회드릴 때에는 세 번 머리를 조아리고 다섯 번 부르며, 계단에 오르면 꿇어앉아 두 손으로 어깨를 끌어안고 왕을 에워싸고 둘러앉아 정사를 의논한다.
국성(國城)은 70리, 전우(殿宇)는 30여 곳인데 자못 장엄 화려하다. 풍속이 화려하고 사치함을 숭상하며, 농산물이 풍요하다. 남녀가 다 머리를 깎고, 여자가 10살이 되면 곧 시집을 간다. 중국 사람들은 ‘부귀진랍국(富貴眞臘國)’이라 일컫는다.
농내국(農耐國)은 안남의 부속국이다. 그 군장(君長) 완복영(阮福映)이 안남을 쳐서 멸망시키고 표를 올려서 새로 봉하여 주기를 청하되, 남월(南越)이라는 이름으로 해 주기를 원하였다. 부신(部臣)들이 논박한 끝에 월(越) 자를 위에다 놓아서 월남국왕(越南國王)으로 하여 봉하였다.
유구국(琉球國)은 동쪽 바다 가운데에 있어 우리나라의 탐라(耽羅 제주도)와 가장 가까우며, 나라 안에 보물이 많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유구의 태자가 탐라에 표착(漂著)하였는데, 탐라 사람이 그 보화를 탐내어 물에 빠뜨려 죽였다 한다. 그래서 탐라 사람이 만약에 유구에 표착하면 반드시 죽였으므로 탐라의 표류인은 반드시 다른 고을 사람으로 일컬어 죽음을 면하기를 꾀하였다.
흑진국(
黑眞國)은
영고탑(寧古塔) 동쪽 수천 리 얼음바다 밖에 있다. 바닷물이 5년에 한번 어는데 서로 건너다니지 못한다. 그 나라 사람은 온몸에 짐승의 가죽을 두르고 다만 머리와 얼굴만 내놓는데, 고수머리가 양과 같으며 물고기나 짐승 고기를 날로 먹는다. 건륭(乾隆) 때에 흑진인이 홀연히 바다를 건너 육지로 나왔으므로 건륭 임금이 불러왔으나 말이 통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 물건을 그 앞에 벌여 놓고 그것들 중 가지고 싶은 것을 살펴 보았으나 끝내 원하는 것이 없었지만 한 여자를 보더니 기뻐하며 다가가서 끌어안았다. 그리하여 총명한 여자를 골라 짝지어 주고 또 영리한 사람 5명으로 하여금 그를 호위하게 하여서 그들을 데리고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오곡(五穀)의 씨앗과 농구를 주어 농사를 가르쳐 주었더니, 5년 후에 그 여자와 함께 다시 얼음바다를 건너서 왔는데, 사은의 표시로 주먹만한 큰 구슬과 길이가 1장(丈)이 넘는 몇 장의 표범 가죽을 가지고 와서 바치었다.
여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큰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군장(君長)이 없다. 사람들은 키가 3장이며, 더러 1장 남짓한 작은 사람도 있다. 오직 새가 짐승의 사냥을 일삼고 생선과 자라를 날로 먹으며, 구슬과 조개가 바다에 넘치는 그 광채의 기괴한 것을 헤아릴 수가 없다.”
부제국(浮提國)은 바다 밖에 있는데 그곳 사람은 모두 날아다니는 신선으로 천하에 노닐기를 좋아한다. 그 어느 곳에든 이르면 능히 그 지방 말을 알며 본국으로 되돌아가고 싶으면 단숨에 갈 수 있다. 만력(萬曆) 말엽 어사(御史) 섭영성(葉永盛)이 강우(江右 강서성 지방)를 안찰할 때, 한 무리의 광객(狂客)이 있어 능히
황백사(黃白事)를 말하며 술을 몹시 마시고 즐겨 놀며, 저자에서 사는 물건들이 매우 사치하여 구슬과 아름다운 비단을 많이 취하는데 값보다도 많은 돈을 치른다.
날이 저물면 보이지 않다가 이른 아침에 다시 온다. 사람들이 대수색(大搜索)을 청하였으나 섭 어사는 허락하지 않고 다만 부르기만 하였더니, 어사 앞에 이르러서는 능히 강우(江右)의 토어(土語)를 말할 줄 알며 스스로 부제 사람이라고 칭하였다. 손에 7자쯤 되는 수정 비슷한 돌 하나를 가지고 와서 책상의 상하에 놓았는데 전후의 물건들이 그 속에 비친다. 또, 금을 박은 작은 함 하나를 가지고 있는데, 그 속에는 경권(經卷)이 있어 검은 종이에
녹자(綠字)로 쓴 것이
반야어(般若語) 같으며, 다 보고 나면 글자가 날아간다. 이 두 가지 물건을 바치기를 청하였으나, 섭 어사는 말하기를,
“너희들은 필시 이인(異人)이다. 바치는 것을 나는 받지 않을 것이니, 빨리 국경을 나가 우리 백성을 현혹하지 말라.”
하니,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사라졌다.
건륭 말년에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는 300명이, 모두 붉은 머리에 눈빛은 불같이 이글이글하고 의복이 이상하며 걸음걸이가 매우 재빠른데 남방으로부터 왔다고 하나, 군현이 다 그 정체를 알지 못하였다. 그들이 연경에 와서 예부에 이르러 천자에게 보기를 청하였는데, 그때 시위(侍衛)가 삼엄하였다. 그중의 13살 난 아이가 가장 총명하였는데, 먼저 화신(和珅)에게 절을 하므로 대신 아숙(阿肅)이 꾸짖었더니 대답하기를,
“이제부터 폐하를 뵈는 예를 물으려 하는 것이오.”
하였다. 탐탁하지 아니하여 문밖으로 내쫓았더니 곧 간 곳을 모르는데, 그것이 혹시 부제 사람이 아닌가 의심된다.
무릇 여러 나라의 풍요(風謠), 지계(地界)에 대하여 들은 바에 따라 약간 초록하였으나 모조리 다 기록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지금의 중국 땅이 서북쪽은 감숙(甘肅)에 이르고 서남쪽은 면전(緬甸 미얀마)에 이르며, 남쪽 끝에 운남(雲南), 귀주(貴州)가 있고 동쪽에는 오랄(瓦喇 랴오닝 성[遼寧省] 부근), 선창이 있다. 이른바 서역, 토번(吐蕃), 돌궐(突厥)의 땅이 모두 다 판도에 들어 있다. 신강(新彊)을 개척한 뒤부터는 폭원(幅圓)의 큼이 고금에 없었다. 조공하는 나라도 전대의 갑절로서, 점성(占城),
우전(于闐), 조와(爪哇 인도네시아의 자바), 유구(琉球), 안남(安南), 섬라(暹羅), 진랍(眞臘), 발니(渤泥 타이 남부의 바타니), 소록(蘇祿 군도의 이름), 타회(打回), 안정(安定), 합밀(哈密 신강성 합밀현) 등의 나라가 그 가장 두드러진 것이다. 조공은 한 해에 한 번 오는 것과 해를 걸러 한 번 오는 것, 3년, 5년, 10년에 한 번 오는 것이 있고, 또한 1세(世)에 한 번 오는 것도 있다.
첫댓글 상고로부터 근세까지 망라한 내용이군요. 님의 말씀대로 조선 말기까지 중아아세아를 영토로 했다는 것은 과장된, 확대해석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병지호란이후 조선영토의 서쪽인 신강성과 감숙 서쪽 및 청해성 청해호 건너까지, 청의 영토로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당시 시대를 살다가 간 선대님들의 유고집에 기록된 내용으로 판단합니다. 대통하와 황하와 황수가 겹치는 곳의 서쪽지방을 언제 수복할 수 있을까? 하는 내용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청에게 빼앗긴 땅이라고 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시의 지명을 찾는 것입니다. 지명대사전이나 호위우공추지등을 보면, 내몽고 서쪽 거연(현 액제납기)지방에 부여기 있다했는데,
거연이란 지명은 자주 등장하는 지명인데, 독사방여기요를 보면, 이 "거연"이란 지명은 최소한 천산(헹텡그리산이나 박격달산)의 서쪽지방에 있을 수 있다라는 단서가 있습니다. 대막지대를 정의한 것을 보면, 거연으로부터 요해까지의 음산의 북쪽지방으로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막(대적)의 중심부를 알타이산맥과 포류해(토노번.언기 서남)까지를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대막지대는 요해로부터 거연까지라고 기록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보면, 당초의 지명을 찾는 것이 아주 종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부여가 현 신강성 천산유역에 있었다 보면...당연 그 서부지역인 카자흐 동부 정도까지도 부여의 직접통치강역이고...부여 전성기라면...그 훨 서부 불가리아까지도 그 문명의 전파영역이라 해석해 봅니다...단지, 역사서가 말하듯...그 부여인들은...정확히 현재의 중원인들과 한반도인들 같은 얼굴였다기 보다는...백민(백인)이 많은 황백 혼혈적인 얼굴였다 보고여...
@궐한 백민이란 말은 두 가지 뜻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얼굴이 희다. 흰옷을 숭상하였다.> 라고 우선 생각할 수 있는데, 백민이란 말로 백인종족이란 판단은 섣부른 일이 아닐까 판단합니다. 그렇다면 부여에서 출발하는 고구려와 백제등 역시 백민의 후예가 됩니다. 그럴 경우가 가능할까요? 아주 오래전 상상고시대 황인종의 터전이 곧 분포가 어디까지 였는가 하는 것이 줗은 척도가 될 수 있을 것 같군요.
@문 무 부여 또는 부여 북쪽에 백민이 있는데...그 몸도 희고 털도 희다 되어 있으니...노랑머리 백인도 아닌 흰머리의 원조 백인이 부여의 백민일까 싶습니다...당연 부여와 그 유종인 고구려는 백민(백인)의 혼혈이 많고...그게 현재의 북방몽골로이드인 상당수의 카자흐나 위구르,몽골과 북중국 한반도인들의 조상일지 싶습니다...중원 남부와 동남아인들관 다르게... 체구는 더 크고 피부색이 더 밝은 황인들...이들은 백부인의 혼혈일지 싶습니다.
백민의 뜻이...옷이 희니, 광명족이니는...근세의 반도인에 맞춘 우리의 자의적 해석이라 봅니다.
넓고 깊게 통챃하신 력작 입니다 감사 합니다
과분하신 칭찬에 쥐구녕이라도 찾고 싶습니다...ㅡ. .ㅡ
궐한 선생님의 모처럼 글을 대하니 무척 기쁨니다. 제가 본 싸이트에 입문(?)하게 된 동기도 궐한님의 글을 통해서였읍니다.
궁금한 점은, 병자호란 이후의 조선 연행사들의 행로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루트를 설정해 보신 적이 있으신지 .....있었다면 그 행로는 어떻게 되는지가 궁금합니다 .
제가 처음 산정해 본 연행사의 연경가는 루트는...돈황(요동)을 지나 중가르분지를 지나 오히려 동쪽으로 하라호름 가는길 아닐지 하다가...다시,아니다...바로 알타이 서남부 카자흐고개를 그대로 넘어 아스타나 정도로 가는게 연행길였다 봤는데...여기서 요동벌은 중가르사막이고...요수(遼水)는 이르티쉬강을 이른다 봤는데...문무님등의 여러 고견들을 종합하고 냉정이 산정해 본 바...소륵하(압록강?)넘어 요동(돈황인근?)과 백룡퇴(요동벌?) 건너 요해(거대했던 포창해?)인근 천산(탱그리산맥)동남부 투르판 정도가 연경의 위치가 아닐지 싶은게 현재의 생각입니다.
뮨무 선생님의 글을 봐서도 느끼는 것인데, 조선 역사의 개략적 윤곽은 드러나는듯 합니다. 즉 조선의 강역은 대략 현 동아시아라 가정하고 그 중앙부에 (현 중원지방 )조선의 중앙정부인 중국이 있고 그 중국의 영역은 지금의 한반도 크기 많한 현 중국의 일개 성 크기많한 영역일것입니다. 궐한님과의 의견 차이가 있으나 조선사의 기본 개념에는 문무선생님과 궐한님과 큰 차이는 없는것 갔읍니다.
옛 조선...광역의미의 조선(고조선)문명권(환국)의 중심인 중국(中國)이라면 몰라도...근세조선의 왕도가 중국이란건 틀렸다가 제 생각이고...문무님의 고견도 대동소이하신거로 전 알고 있습니다.
무슨 한편의 소설을 보는 듯 하군요. 왜곡도 심하구요. 뭐하시는 것입니까?
그냥 아마추어의 가설정도로 봐 주십시요.
이 글에서 주장하고픈 중점은...베링해 넘어 알래스카도 흑여진의 땅이였고...청나라나 조선의 극동 통치영역이 베링해 근처까지 미쳤단 얘기입니다...중앙아에만 조선이 있었단 주장들에 반해 나름 조선강역의 중심을 잡기위한 글였습니다.
이를 하나로 꿰어야 하는데, 조선사의 기본틀을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가 중요 한 것 같습니다. 단지 제 사견을 말씀 드리자면 이렇습니다.
부여의 위치는 현 산서성 일대 입니다. 전통적으로 중국의 개념은 현 황하 북쪽인 산서성 이대를 이릅니다. 이곳에서 고구려의 주몽이 갈라저 나와 현 서안 일대에 자리잡습니다. 이로부터 화하와 북쪽 오랑케가 분리되어 조선사 내내 조선과 중국(?)이 서로 다른 나라인양 갈등을 해 왔던 것이죠....
현 감숙성 서쪽은 그야말로 조성의 변방일 따름입니다. 적어도 병자호란 이후의 조선 중앙 정부는 현 산서성 일대일 것입니다. 연행사들의 헹로를 설정해 보십시요 .....
산서성은 금나라시기 부턴... 고려나 조선의 동북도라 보입니다...망한 발해나 금나라의 유민들을 모두 여진이라 했는데...개중 극동쪽에 몰린 여진인들이 현 동북삼성에 있었던 것이며...이는 몽골 대제국도 완전히 복속시키지 못한 강력한 지대였단 정황이 있습니다...태행산맥과 흥안령산맥을 잇는 북경인근 어디가 바로 고려나 신라의 철령으로...상고대엔 신장 3장(7M)의 거인족(흑여진)들을 막던 요새가 거기였다 봅니다...그 거인족들이 숙신의 화살공격에 점차 베링해를 넘어 아메리카 대륙으로 몰린게 맘모스들의 이동과 멸종과도 희안하게 같은 것이라 보입니다.
현 요동과 요서는 하나의 강을 건너서 간 것으로 되어 있는데 실제 연행록등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연행사들은 강('''계곡..)을 따라 갔고 그 강 (발해)의 가장자리에 제방을 만들어 버드나무도 심고 해서 이정표를 삼아 연경을 향하여 갔읍니다. 그 연로의 끝자리에 산해관이 있고 그 산해관은 군사적 요충지(병목현상과 같은 혹은 요동 벌이 다하고 병목과 같아 험한 산악지대로 이여지는 길목의 초입새 지리학에서 선상지 같은... )지점입니다.
궐한 선생님의 연행사 들의 행로는 어떻게 되는가를 듣고 싶습니다...
연원직지 유관별록 천지산천
무릇 이 지방 토질은 요동에서 북경까지가 모두 곱고 부드러우면서도 찰져서 해동(解凍) 때나 장마 때는 바퀴에 붙어 지나가기 어렵고, 또 집 벽에다 바르면 빗물이 스며들 걱정이 없다. 그런데 곱고 부드러운 이 흙은 다 모래여서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마치 연무(煙霧)처럼 먼지가 인다. 그래서 아무리 큰 눈이 쏟아져도 이 먼지와 뒤범벅이 되어 버리면 이내 눈발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 되는데 그중에도 사하역(沙河驛)이 제일 심하다. 산해관 안쪽은 왕래하는 거마(車馬)가 더욱 많아서 밤낮으로 먼지를 일으키어 아주 바람이 없는 때라도
꼭 잿가루가 날리는 것같이 분분하다. ~~~중략~~~
이곳은 석탄(石炭) 앙금으로 된 지방으로서 가루가 쌓여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옛날 문자의 ‘치진(緇塵 세상 풍진 속에 분주하여 의복이 더럽혀짐)’이란 것이 곧 이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러한 요건을 충족시킬 위치를 먼저 이야가 해야 하지 않을까요....
연행사들이 간 곳은 유주로 유주의 땅은 검다 했읍니다. 그 검은것의 정체는 바로 석탄 앙금입니다. 우기(雨期)에 비가 오면 노천 탄광은 검은 물이 흘러 내려 이른바 흑수가 됩니다. 이런 물이 평야지대를 만나면 유속이 느려 강물의 고형체가 침전이 되죠... 따라서 땅이 검게 되고, 건조한 겨울이 되면 수레 바퀴에 먼지가 흩날리어 이른바 검은 모래사막이라 하는 실체가 됩니다...적어도 연행사들의 행로는 산서성 일대일 것입니다...
옥문관이나 백룡퇴 등의 지명은 왜곡 이동된 것이라 생각됩니다. 동쪽으로 요동과 심양이 왜곡 이동 되었듯이 서쪽으로도 옥문과 백룡퇴 등의 지명이 이동되어 우리의 시야를 흐리개 하고 있읍니다. 기존의 지명은 믿을것이 거의 없읍니다. 제 생각에 대륙조선의 중국에 있던 지명들이 현 중국 대륙 사방으로 이동되여 일개 성 크기의 본래의 중국이 현 중국대륙으로 왜곡 이동되여 우리를 혼란케 한다 생각됩니다.
대륙조선을 주장하시는 분들의 일관된 생각이 현 중국 중원 지방은 조선의 중요부이다 라고 하실것입니다 저 역시 그렇개 생각하고 있읍니다만 정작 이 중요부를 파 헤치는 글은 보기 어렵습니다. 조선의 심장부인 현 산서성과 섬서성을 파 헤치지 않고서는 조선의 실체를 파악하기 어렵다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