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면서 오늘은 어디 조용한 절에 가서 기도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해가 들어서면서 직장에서 기구개편이다 뭐다 여러가지로 복잡스러웠다. 그다지 번다하지 않은 절, 하루종일 혼자서 기도 할 수 있는 작은 절을 생각하니 덕산 보덕사였다.
부리나케 집안 청소를 끝내고 가장 두꺼운 바지에 무릎아래까지 내려오는 겨울 돕빠를 걸치고 집을 나섰다. 법당은 대개 난방이 잘 안되기때문에 겨울에 절에 가려면 완전 무장을 해야한다. 읍내를 떠나기전에 빵집에 가서 빵을 산다. 보덕사는 비구니스님들의 선원이고 지금은 동안거이기 때문에 많은 스님들이 공부를 하고 계실 것이다. 간소한 절음식에는 가끔은 빵이나 과자같은 단것을 먹고 싶기 때문에 이런 것을 사가면 아주 좋아 하신다.
덕산면 소재지를 지나니 옥계리 저수지 푸른 물위엔 물오리들이 점점이 한 줄로 줄지어 앉아 있다. 처음에는 어떤선인가 했으나 아마 얼음과 물의 경계를 따라 줄지어 앉아 있나보다. 좀 있으면 그애들도 저희들의 고향인 서늘한 시베리아로 날아갈 것이다. 보덕사에 갈때마다 언덕을 오르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파아란 물은 언제나 고향에 온듯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파란색이 눈의 피로를 풀고 마음을 안정되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하는데 정말 그런가보다. 이 저수지의 파란 물만 보면 엄마의 품에 안긴 것 같은 느긋한 마음이 되어 언제나 차를 천천히 운행하면서 에프엠 음악을 크게 틀고 따뜻한 겨울 햇살아래 오수를 즐기는 엄마 물오리들과 깔깔거리는 아기 물오리들의 장난에 웃음을 짓는다.
10시 바로 전에 도착해서 법당에 들어가니 이제 사시예불을 시작하려는 스님 한분이 준비를 하고 계시다가 사온 빵을 소반에 담아서 부처님전에 올리며
" 아침에 구운 빵을 사오셨나봐요? 아직 따뜻해요" 하신다.
미소로 답하며 같이 예불을 시작한다. 이 보덕사 법당은 아주 작아서 스님들이 다 들어 오실 수도 없다. 대원군이 가야사를 불태우고 남연군 묘를 썼기 때문에 고종 즉위 후에 은혜를 보답한다는 뜻에서 건너편 산에 보덕사를 다시 지어 주었지만 그때 당시 조선말의 나라형편이 아주 궁색했기 때문에 큰 절을 지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비구니 스님들이 깔끔하게 절을 운영하시기 때문에 어찌나 단아하고 조용하고 이쁜지 나는 우람하고 큰 절보다는 이런 작은 절에 더 정이 간다.
갑자기 법당문이 열리고 여러분들이 들어오셔서 삼배를 하신다. 또 스님들이 예쁜 화병에 꽃을 한아름 넣어서 불단에 올리신다. 노란 후리지아와 보라색 후리지아 꽃이다. 창호지 문을 통하여 밝은 겨울 햇살이 들어오는 것이 아름답다. 나는 이런 풍경이 좋아서 더 절에 온다. 법당 아래로 보이는 설선당의 기와, 하얀 회벽에 크기대로 차례로 줄지어선 절구공이와 돌 절구, 장독대위에 윤기나게 잘 닦여진 크고 작은 항아리, 격자무늬 문창살과 우윳빛 창호지문들을 보면서 먼 옛날부터 아주 눈에 익은 풍경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예불을 끝내고 식당방으로 내려간다. 전에는 그냥 부엌이었지만 지금은 식당이 있는 주방으로 바뀌었다. 모든 것이 편하게 시설이 되어야 일하는 사람들도 온다. 그래도 보덕사는 모든 일을 비구니 스님들이 나누어서 일을 하신다.
'"경북 의성에서 공양물이 왔어요, 안동식혜래요, 한번 드셔보세요" 원주스님이 말씀하신다. 그러고보니 의성에서 스님과 신도들이 동안거하시는 스님들을 위하여 공양물을 갖고 오신 것이다. 콩가루와 밀가루를 합한 칼국수와 메밀 묵과 안동식혜였다. 안동식혜는 생강을 넣어서 그런지 국물김치 같아서 우리 입맛에는 맞지 않았으나 한번도 먹어보지 못한 별미임에 틀림없다. 오늘 날을 잘 맞춰 오셨다며 스님들이 웃으신다.
보덕사는 내 젊은날에서는 빼 놓을 수 없는 절이다. 삼십대 후반에서부터 다니기 시작하여 십여년을 한달에 두번은 와서 대금도 불고, 책도 읽고, 그때는 부처님을 믿어서라기 보다 절 분위기가 좋아서 놀러 왔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가을 날 느티나무 아래에서 대금을 불때 바람이 한번 지나가면 우수수 떨어지는 작은 나뭇잎새는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친했던 스님들이 떠나시고 낯선 스님들이 오시자 좀 서운해서 한참은 오지 않았으나 이제 다시 기도하러 오고 있다. 아무래도 보덕사는 멀리 하기에는 너무 아름다운 절이다.
점심 공양을 마치고 다시 법당에 올라가서 기도하다가 다리가 저려서 절 마당을 걷기 시작한다. 절아래 계곡에는 대나무 잎새가 파아랗다. 전에 지형스님들이 계실 때 겨울에 대나무가 다 얼어 죽었다. 옛날 속설에는 대나무가 죽으면 집안에 변고가 일어 난다더니 그 봄에 그 스님들이 다른데로 가시게 되었다. 조계종 절은 4년마다 다시 주지임명을 하기 때문이다. 그 생각을 하면서
'다시 대나무가 무성해졌네" 혼잣말을 하였다.
산책하고 싶어서 밭둑을 따라 걸어 올라서 뒷산으로 간다. 숲속에 난 작은 길을 따라 가니 산을 넘어 묘지가 있고 밤나무 단지가 있다. 정선이가 어릴 때 이 산에 같이 왔었다. 그때는 길이 안 나있어서 낫을 들고 풀을 쳐내며 길을 내었다.
" 우리가 길을 내어주면 풀들도 좋아 할거야"
그런데 다음 주에 가보니 산소에 가는 길을 내려고 불도저로 밀어서 하얀 풀뿌리가 이리저리 어지럽게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이가 " 풀이 다 죽었네요, 풀이 아파서 울었겠어요" 속이 상해서 얼굴이 빨개져서 소리쳤던 생각이 난다. 그 아이가 지금 대학생이니 네가 어렸을 때 그런 말을 했다고 하면 웃을 것이다.
밤나무 사이에 의자처럼 잘려진 나무 그루터기가 있어서 편히 걸터 앉는다. 겨울햇살이 따사롭고 때마침 지나는 산바람이 살랑살랑 얼굴을 간지른다. 저 아래로 보이는 작은 집 하나가 정겨웁다. 전에 쑥을 뜯다 만난 밭일 하시던 그 할머니는 지금도 살아 계실까?
첫댓글 ..................초등학교 3학년 봄소풍때에 처음으로 보덕사를 찾았어요.. 그 때에 절 어귀에는 넓다란 머위잎이 왼벽을 덮고 있었는데~~~~ 참으로 포근한 정이 울어 나오는 절이예요 .. 담에는 우리 동행해서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