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알(人) 큰알(大) 한알(天)
‘이 나는 누구인가? 이 나는 무엇인가? 이 나는 무엇하는가?
이 땅 위에 왔다 간 수많은 사람 가운데 이 ‘나’를 알고자 한 구도자(求道者)들이 온갖 고행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나를 모르고 제 맘대로 살은 방탕자(放蕩者)들이 온갖 추행을 일삼았으며 이 나를 바로 안 자각자(自覺者)들이 빛나는 성행(聖行)의 자취를 남겼다.
이 나를 바르게 알고자 하면 반드시 내 생명의 임자이고 근원이시며 참나 되시는 마루(머리)님이신 한알(한얼)님의 말씀을 직접 들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은 세 겹으로 되어 있다. 몸과 맘과 얼이 그것이다. 몸이 자랄 때는 땅의 어버이가 한얼님 노릇을 한다. 맘이 자랄 때는 스승님이 한얼님 노릇을 하고 마지막 얼이 자랄 때는 한얼님을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마하트마 간디는 사람이 올바른 사람 노릇을 하려면 몸과 맘과 얼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날마다의 명상록>에서 말하였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육은 얼나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으니 다석 류영모는 오늘의 교육은 도둑놈의 교육을 해 공부할수록 교만해진다고 말했다.
몸나는 몸으로 어버이의 품속에 안겨 일체감을 느낄 때 내가 어버이의 몸아들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어버이의 품 속에 안기지 못한 아이는 나란 존재에 대해서 회의를 일으켜 나에 대한 자신감을 갖지 못하게 된다. 몸나의 마르(머리)님 곧 한얼님인 어버이에 대한 회의는 곧 자신에 대한 의심이요, 나의 존재를 의심하게 되면 삶의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어릴 때 어버이를 잃은 고아가 가장 가엾은 것이다. 어버이가 없는 고아는 살았으되 죽은 삶을 살게 된다. 그래 고아들이 정상으로 자라지 못하고 문제아가 되기 쉬운 것이다. 다석 류영모는 광주 동광원에서 6·25 전쟁고아들을 돌보는 수녀들에게 당부하기를 아이들의 맘속에 어머니상을 뚜렷하게 심어주라고 하면서 자신도 자기 맘속에 심어진 어머니의 40대의 모습이 뒤에 예수님의 상, 늙어서 한얼님의 상에 뚜렷해질 때까지 삶의 힘이었다고 말하였다. (YMCA 연경반에서) 어버이 품속에서 어버이 가슴속에서 뛰는 심장의 박동 소리를 듣고 자라는 아이는 나는 어버이에게서 나왔고 어버이를 사랑하며 높이는 효심(孝心)이 생긴다. 효도가 한얼님께 이르는 신앙의 첫걸음인 것이다.
몸나가 자랄 만큼 자라면 이제는 맘나가 자라야 한다. 어버이를 통해서도 맘이 어느 정도 자랄 수 있고 자라기도 하지만 맘나가 인격이 형성되도록 자라려면 훌륭한 스승을 만나야 한다. 제자가 스승의 맘에 안기고 스승이 제자의 맘을 안아줄 때 제자의 맘이 쑥쑥 자라서 제자의 언행(言行)이 하루가 다르게 달라진다. 제자는 자기가 스승의 맘아들, 곧 제자가 된 것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옛말에도 스승의 그림자도 안 밟는다는 것이다. 스승님은 화장실에 안 가는 줄로 알았고 스승님의 방귀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기도 한다. 스승님 맘은 스승님의 생각이다. 스승님의 생각은 말과 글로 나타난다. 그래서 스승님의 말 듣기, 글 읽기를 기뻐하고 고마워한다. 칼라일이 ‘도서실은 교회요 독서는 예배다’라는 말을 하였다. 그래서 책을 밟거나 깔고 앉는 일은 대단히 불경스럽고 해서는 안될 일로 알았다.
공자의 제자 안연은 스승의 말씀을 지루해한 적이 없었다 하고 석가의 제자 수보리는 스승 석가의 말씀을 듣고서 감격하여 울었다고 한다. 제자 베드로는 스승인 예수의 말씀이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으로 알았다. 마지막으로 얼나 곧 살고 죽음을 초월한 영원한 생명인 얼나로 한얼님의 아들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땅의 아버지 어머니는 물론 스승님까지도 떠나서 한얼님의 품속인 얼나요, 허공인 한얼님의 품속에 안기어야 한다, 예수와 석가는 얼나로 솟나(깨달아) 한얼님(니르바나님) 품에 안긴 한얼님의 아들들이었다. 예수가 “아버지께서 내 안(맘)에 계시고 내(얼나)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고 한 말은 예수가 얼나로는 한얼님과 하나가 되어있는 것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석가 붓다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춘다야 니르바나님이 보낸 얼나는 모든 생명 가운데 으뜸이니라. 그러므로 내 말을 믿는 것은 가장 으뜸가는 믿음이다. 또 모든 가르침 가운데서 제나(ego)의 자만심을 깨뜨리고 애욕과 번뇌를 없애고 나고 죽는 생사(生死)를 벗어나는 것은 내가 가르쳐 보인 니르바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으뜸이다.”(팔만대장경 아함경법문 제6장 제1절)’
다석 류영모도 예수 석가와 같은 진리의 말을 했다.
‘이 사람은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에 이러한 말을 하였다. 사람이 자고서 남은 것이 깸이다. 잠을 푹 잔 뒤에 깨는 것이다. 우리가 밤에 8시간 동안 잘 잔 뒤에 깨면 머리가 산뜻하다. 우리가 이 세상에 나와서 참나인 얼나를 모르고 있는 동안은 잠을 자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우리가 얼나를 모르고 있는 동안은 잠자고 있는 것이다. 그 동안 몇 년이나 잠을 자고 있었는데 잠자고 있는 동안은 잠자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있다. 한잠 푹 잤으면 깨야 한다. 게으른 잠에 빠지면 안 된다. 얼나인 한얼님이 참나임을 아는 것이 깨는 순간이다.
사람의 몸뚱이라는 것은 벗어버릴 허물 같은 옷이지 별것이 아니다. 몸 옷은 마침내 벗어 버릴 것이라 결국 사람의 임자는 얼이다. 사람의 생명에서 불멸하는 것은 얼나 뿐이다. 얼나는 영원한 생명인 한얼님이시다. 시작해서 끝나는 것은 몸의 세계다. 그러나 상대를 끝맺고 시작하는 것은 얼의 세계이다. 얼나는 제나(自我, ego)가 죽고서 사는 삶이다. 말하자면 형이하(形而下)의 생명으로 죽고 형이상(形而上)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다. 몸나로는 죽을 때 얼나가 드러난다. 얼삶에는 끝이 없다. 그래서 얼나는 영원한 생명이다.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자는 것도 멸망이다.’ (류영모 <다석강의록>·이상은 박영호 저 <새 시대의 신앙> 일부 간추림 인용)
다석으로부터 단사(斷辭)하자는 선언을 받아들이고는 4년이 지나도록 편지 한 장 ‘띄운 일이 없었습니다. 새 시대의 신앙을 탈고하고 출판까지 하였으나 책도 보내지 않았습니다. 2000평 넘는 논밭의 농사를 하자니 늘 바쁘게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책 쓰는 일도 주로 겨울 농한기에 했습니다. 이웃집 사람들이 ‘어디 여행 다녀왔느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해 봄 못자리에 볏모가 파릇파릇 자랐을 때 봄에 금요강좌에서 자주 뵙던 전병호님이 이 사람의 집으로 찾아 왔습니다. 다석이 ‘박영호 죽었는지 살았는지 통 소식이 없으니 한번 찾아보라’고 해서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석 모임에는 회식하는 일이 없으니 친분을 쌓을 시간도 없었습니다. 다석이 단사하자면서 ‘찾아오지도 말고 편지도 하지 말라’고 했는데 무슨 걱정을 하시다니요라고 반문하자 스승이 크게 걱정하고 계시니 한번 찾아보도록 하라는 당부를 하면서 떠나는데 그동안에 쓴 책이라면서 두 권을 드렸습니다. 한 권은 다석에게 갖다드리면서 ‘박영호는 잘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인사말씀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다석이 제자 박영호에게 준 마침보람(졸업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