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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한국)전쟁이다 ! -1-
This Is War ! David Douglas DUNCAN
This is War! A Photo-Narrative of the Korean War 이것이 전쟁이다! 6.25전쟁 사진집
*지은이: 데이비드 더글라스 던컨 (David Douglas Duncan, 1916.1.23.-2018.6.7) 2차 세계대전 6·25전쟁 및 베트남 전쟁을 보도한 저명한 사진작가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던컨은 미 해병대 소속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해병대원들, 피란민들, 전쟁의 수많은 희생자 등을 사진으로 담았으며, 이 사진들은 라이프
(Lite)지에 게재되어 6·25전쟁과 전쟁의 참상을 국제사회에 알렸다. 그는 "나는 전쟁이 사람을 어떻게 변모시키는지 보여주고 싶었다."는 말로 자신의 작품 의도를 설명했다.
* 옮긴이: 박종왕 (예)육군 준장
(Park Jong Wang Brigade General(R))
충남 보령 출생으로 육군사관학교, 서울대학교(불문학)를 졸업하였다. 이후 프랑스 지휘참모대학, 동국대 행정대학원, 미국 조지워싱턴대 동아시아 문제 연구소 등에서 수학했다. 그는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육군본부 인사운영처장, 보병제2사단장, 국방대 안전보장 대학원장 충남대 평화안보 대학원 겸임 교수를 거쳐 국가보훈처 제대군인 국장 등 대한민국의 안보 및 보훈분이 직책을 두루 역임하였다. 현재는 유엔평화기념관장직을 맡아 유엔 참전용사의 명예 선양과 유엔참전국과의 유대강화를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이것이 전쟁이다" 목차
* 옮긴이의 말(증보판을 발행하면서) 6
I. 저자 소개: 데이비드 D. 던컨 14
Ⅱ. 저자의 말: “책을 내면서" 18
III. 1950년 한국 48
IV. 낙동강 방어선: 고지전 89
V. 서울 탈환: 시가전 133
Ⅵ. 장진호 전투: "후퇴라니, 말도 안돼!" 160
VII. 사진자료 178
* 부록 183
옮긴이의 말 (증보판을 발행하면서)
1. 이 책은 6.25전쟁을 기술한 그 어떤 책이나 자료보다도 전쟁의 현장을 객관적인 사실 그대로 기록하고자 한 책이다. 대부분의 전쟁관련 서적들은 참전 장병의 시각에서 고급장교들이 저술한 책인데 반하여 This is War'는 전투부대에 특파된 종군기자의 시각에서 본 사실을 그대로 기술한 점에서 상대적으로 더 사실적이다.
2. 이 책은 일반적인 전쟁 관련 서적들이 갖고 있는 문어체적인 서술보다 기자 특유의 글짓기 형식을 빌리면서 많은 부분을 지국인(미국인) 이해 기준으로 구어체 형식으로 기술함으로써 전투 현장감을 더했으며 보다 더 정확하고 세밀한 번역이 요구되었다.
3. 이 책을 번역함에 있어 무엇보다 6.25전쟁 이전과 이후의 일본, 중국, 소련 등 극동지역의 이해관계와 저자에 대한 충분한 사전 연구가 요구되었다.
4. 이 책의 높은 가치 중 하나는 현 시점에서는 실제훈련을 할 수 없고 현장감을 살리기조차 어려운 SOI(Reception, Staging. Onward Movement. Integration 한미연합전시증원연습)나 NEO(Noncombatant Evacuation Operations(비전투원 소개훈련)에 관한 내용을 부분적이나마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는
점이다.
5. 6.25전쟁에 관한 매우 정확하고 사실적인 자료이며 전투현장에 발생하는 전우애, 처절함, 절박함, 극단적 상황. 눈앞에 보이는 비참한 모습의 죽음들, 그리고 이에 직면하는 인간의 심리 등 전쟁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현역 군인은 물론, 사관생도와 장교후보생을 포함하여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꼭 한 번은 읽어 봐야 할 귀중한 자료이다.
저자가 의도했던 핵심적인 부분은 책의 첫머리에 모두 나와 있다. 딘은 '전쟁' 이라는 의미를 각국 정상들이 뒷짐을 지고 결정하는 그것으로부터 실제 전쟁을 수행하는 전투병 한 명 한 명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전투현장의 상황을 완전히 분리하기를 원했고, 실제로 이 책은 병사들의 전투현장에서 눈앞에 벌어지는 극적인 상황들을 놀라울 정도로 세밀하게 표현하고 있다.
전투 최전방에서 사진기 하나만을 들고 죽음을 무릅쓰고 임무를 수행하는 중군기자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직업은 아니다. 미 해병대에서 잔뼈가 굵은 저자에게도 6.25전쟁의 현상은 뼈가 깎이고 살이 찢어지는 고통의 나날이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6.25전쟁을 가장 객관적으로 정리한 자료라는 점에서 그 가치와 중요성이 매우 높다. 인간의 기억은 왜곡되기 마련이고 특히 목숨이 오가는 전장에서 소총 한 자루만을 쥐고 자리를 지켜야하는 병사가 느꼈던 감정은 그 순간이 지나면 생생하게 전달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병사들에게는 어쩌면 일생에 단 한 번 뿐이있을 죽음이 다가오는 극단적인 경험을 저자는 그들의 표정과 몸짓, 얼룩진 얼굴로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이에 더해서 이 자료는 현장을 직접 보고 느낀 저자 자신이 전해주는 전투의 느낌과 전장의 실제 사진을 통해서 그대로 전달하는 소중한 자료들이다.
6.25전쟁에서 이 수준의 역사 자료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수천 명의 참전용사들을 직접 인터뷰해야함은 물론이고 사실성을 입증하기 위해 동일한 사안들을 다른 자료와의 검증, 고증을 거쳐야 자료화 할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이런 전쟁자료들을 바로 그 전쟁의 순간순간을 자료화하면서 지금 이 시간에도 당시의 현장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자료로 만들었다. 본 자료를 통해서 우리는 일각에서 제기하고 있는 민간포로나 민간인 관리에 있어서 미군에 대한 부정적 내용과 달리 이들을 매우 조심스럽게 관리하면서 전쟁을 수행했다는 점도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이 책이 주는 불변의 교훈은 6.25전쟁 당시나 지금이나 미국은 우리의 가장 중요한 군사 동맹국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민주주의의 대한 민국을 위해서 수만 명의 미국 젊은이들이 목숨을 바쳐 지킨 민주주의 국가임을 기억하고, 그들의 희생의 대가로 우리는 오늘날 따뜻한 방안에서 풍족한 식사를 하고, TV 프로그램과 인터넷 오락을 마음껏 즐길 수 있음을 감사한다.
이 번역본이 그들의 희생을 추모하고 보답하는 밀알이 될 것을 바라마지 않는다. 특별히 6.25전쟁의 귀중한 자료를 이 땅에 남겨준 데이비드 D. 던컨과 모든 자료를 저자와 직접 상의하여 기증해 주신 파스칼 서너랜드 여사께 진심으로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
본 번역본은 2018년 11월 최초 발간하였으며 필요기관과 관련 독자들의 추가 발간 요청과 6.25전쟁 사료로서의 중요성이 부각되어 증보판을 발간하게 되었다. 그 리고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의 6·25전쟁에 대한 이해를 돕고, 특별히 UN과 16개 전투지원 국가와 6개 의료지원 국가에 대한 감사함을 영원히 간직하는 뜻에서 대한민국 국방부와 국가보훈처에서 발간한 자료를 인용하여 전투지원국 참전약사, 의료지원국 의료지원약사 그리고 6.25전쟁 주요상황도를 포함하여 증보판을 발간 하였다.
2021, 6, 25. 유엔평화기념관장 (예)준장 박종왕
《평화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된 22개국 1,957,733명의 용사들 대한민국 국민의 자유와 평화수호를 위해 싸운 그들의 숭고한 헌신과 희생을 잊지 않겠습니다.》
《We will never forget the sacrifice and devotion of those 1,957,733 veterans from 22 countries who united in the name of peace, and fought for the freedom and peace of Korean.》
I. 저자 소개: 데이비드 D. 던컨
데이비드 더글러스 던신(David Douglas Duncan. 1916년 미국 미주리주 캔자스시 출생)은 2차 세계대전, 6.25전쟁 및 베트남 전쟁을 보도한 저명한 사진작가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던컨은 미 해병대 소속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해병대원들, 피란민들, 전쟁의 수많은 희생자 등을 사진으로 담았으며, 이 사진들은 라이프(Life)지에 게재되어 6.25전쟁과 전쟁의 참상을 국제사회에 알렸다.
그는 나는 전쟁이 사람을 어떻게 변모시키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라며 자신의 작품 의도를 설명한다. 또한, 이를 가장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서는 캡션을 달지 않는 것이 낫다고 믿었다.
던컨은 한국을 찍은 사진을 모아 이것이 전쟁이다 (This is War!)」라는 책을 편찬하고, 1951년 뉴욕시의 현대미술관 (Museum of Modern Art)에서 한국 전쟁의 충격(Korea: The Impact of War)' 이라는 제목으로 전시회를 가졌다.
던컨의 한국전쟁 사진은 2008년 비자 뿌르 리마쥬 페르피냥(Visa pour IImage -Perpignan) 포토저널리즘 전시회에서 발표되었다. 그는 2018년 6월 7일, 여생을 보내던 南프랑스에서 별세했다.
유엔평화기념관(United Nations Peace Memorial Hall)은 그의 사진들이 갖는 중요성을 높이 평가하며 던컨 작가의 관대한 기부에 대해 깊은 감사를 드린다.
Ⅱ. 저자의 말: “책을 내면서"
이 책을 읽는 여러분에게 무언가 설명해 드리는 것은 제가 전에 한 번도 하지 않은 이야기를 하도록 여러분들이 도움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없었다면 그리고 여러분 주위의 모든 사람처럼 날마다 여러분에게 있었던 무수한 기억의 단편들과
경험들, 그리고 공포들을 가진 여러분이 없었다면 제 책은 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 이야기에 깊이 관련되어 있으므로 여러분들이 주인공입니다. 여러분들은 골짜기에 설치된 간이 구호소 밖에서 전우가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그 결과를 기다리며 서 있었던 생존자이고, 길가에 기대어 축 늘어진 자세로 앉아 콩통조림을 먹던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은 상처를 입지도, 동상에 걸리지도 않았지만, 월등히 우세한 전력을 가진 적군의 포위망을 마지막 힘까지 다 소진하며 빠져나와 눈앞을 가리는 눈의 소용돌이 속으로 사라졌던 사람입니다.
"This is War !"는 한국에서 일어난 전쟁으로 만들어질 수 있게 된 책입니다. 이 책은 한국전의 경과에 대한 보고서가 절대 아닙니다. 또한, 무력으로 공산군의 침략을 중지시키기로 한 유엔의 개입 결정에 대한 이유를 이야기하여 유엔을 대변하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책에는 클라이맥스도 결론도 없습니다.
이 책은 단지 자신의 국가가 전쟁에 참여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 결정에 관한 정당성이나 개인적인 동의 여부를 막론하고 전쟁 속에서 개개인이 겪고 이겨내는 것들을 보여주기 위한 노력입니다. 이 책은 세상의 모든 권력층으로부터 극적으로 던져진
'전쟁'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생애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담배 한 모금을 길게 내뿜으며 그의 소총과 용기와 꿈들을 움켜쥐고 고지에 있는 적을 향해 돌격하는 한 이름없는 병사의 눈에 비추어진 '전쟁'의 의미와 완전히 분리하기 위한 노력입니다.
그 병사의 눈에 비친 광경이 그가 느꼈던 것을 더욱더 분명하게 말해주리라 믿으면서 저는 이 책을 사진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없이 여러분에게 제시할 것입니다. 제가 쓰는 설명이 제가 느끼고 있었던 것이나 주관적인 생각을 반영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가 자리에 앉아 각각의 사진에 대한 부제를 적고 사진 속의 인물이 생각하는 바를 적어 낸다는 것은 가장 잘못된 명령을 흉내 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가 사진을 찍었을 당시에도 해당 인물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전혀 알고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책에서 사진들은 단지 그들이 했던 것, 그들이 느꼈던 어떤 것, 그리고 아주 드물게 그들이 생각했었던 것들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책은 세 개의 장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각 장은 전쟁의 지상전투에 있어서 어려웠던 점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첫째, 고지에 대한 공격(낙동강방어전: 고지전) 둘째, 도시 점령(서울 탈환: 시가전), 셋째, 후퇴작전(장진호 전투: "후퇴라니, 말도 안돼!")입니다.
그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단 한 줄의 설명도 없이 이 책을 발간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도 나의 어머니나 아버지처럼 이 사람들이 겪었던 시련이나 그들이 죽어갔던 참담한 환경들을 이해하기 어려운 많은 이들을 위해 나는 매 장 짧은 텍스트 블록으로 서문을 썼습니다. 각 서문은 부대들이 직면한 전투상황과 즉각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밤과 낮에 걸쳐 취했던 살아남기 위한 활동들을 제법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는 가능한 여러 방법으로 이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이야기를 투영하는 단어들의 화면만을 제공하려고 하였습니다.
또한 사진들 속에 담긴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의 몇 달 동안 한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 났는지에 대한 깊은 관심이 있는 몇몇 분들을 생각하여 나는 이 책을 짧은 부가적인 서술 부분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이 부가적인 텍스트는 라이프지의 특파원으로서 한국전에 참여하게 된 저의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입니다.
나는 여기에 4개의 르포 기사를 포함했습니다. 도쿄에서의 전쟁 첫날과 맥아더 장군의 첫 전선 방문을 시작으로 하여 다음으로는 종군기자로서는 최초로 시도했던 공군의 제트전투기 탑승기를, 셋째 르포 기사는 한국군 부대의 공격을 따라 취재한 것과 내가 알게 된 것에 대한 실망, 넷째 기사는 미 해병대가 한국에 상륙한 후 치른 첫 교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4개의 르포 기사는 모두 다음 두 가지의 분명한 이유 때문에 포함되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전쟁이 발발한 6월 하순의 첫날로부터 이 책의 사진 부분이 시작되는 9월 첫 주까지의 전반적인 군사적 상황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 부가적
설명 부분이 포함된 두 번째 이유는 독자 여러분들이 내가 이 책을 당시 상황을 알지 못하거나 진심을 담지 않고 편집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길 바래서입니다.
저는 이 책의 사진 속 인물들이 여러분에게 이야기를 시작하기 이전에 그 전 몇 달간의
음울한 기간에 제가 느꼈던 점들과 가능하다면 제가 했던 생각들도 어느 정도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알기 위해서는 사진들을 소설에 쓰인 각 페이지의 내용을 글로 읽는 것처럼 주의 깊게 읽어야 합니다.
이야기를 그 사람들의 얼굴과 손과 몸짓을 통해 전달받는 것이 충격의 그 순간에 그들이 느꼈던 감정을 공유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며 또한 그들을 느끼는 바른 방법일 것입니다. 사진을 감상하는 관람객들에게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참여가 요구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사람은 미 해병대원들입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저는 세계 제2차 대전에서 그들의 일원이었습니다. 남태평양으로부터 전 일본제국의 항복을 받기 위해 도쿄만까지 이동했던 3년 동안 그들과 생사를 같이했던 나는 그들이 한국에 도착했을 때 당연히 그들의 전투를 찍게 되었습니다.
저는 전쟁이 사람에게 무슨 일을 했는지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들이 공동의 위험과 싸울 때 그들을 굳게 묶어주었던 전우애의 일부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들이 죽음 가운데 있음을 알았을 때, 그리고 그들이 한 번도 서로 본 적이 없고
개인적으로는 당장 전혀 다툴 일도 없는 상대방, 그러나 보자마자 단번에 그들을 죽이려 할 적들의 전진을 막기 위해 총검만으로 무장한 채 포복으로 나아갈 힘을 아직 찾을 수 있었을 때, 그들이 어떻게 살고 죽었는가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저는 극심한 고뇌와 고통과 끔찍한 혼란 속에 '적'이라고 불리는 다른 사람들을 조준하여 소총의 방아쇠를 실제로 당겨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매일매일 일어나는 영웅적 행위들에 대한 것들을 보여주길 원했습니다. 저는 인류 역사 내내 계속 있어 왔던 전쟁 이야기를 하고자 했습니다. 다만 그들이 사용한 무기들, 전투지역, 그리고 전쟁의 이유만 바뀌었을 뿐입니다. 1951년 3월 데이비드 D. 던컨
III. 1950년 한국
6월 25일(일요일), 도쿄는 연중에 가장 강한 폭우를 내리게 했던 짙은 구름이 걷히고 수십 일 만에 해가 뜬 아름다운 날씨였다. 습도가 90% 가까이 올라갔지만 수십만의 도쿄시민들이 근교에 있는 후지산 기슭의 언덕들이나 해변으로 쏟아져 나왔다. 모두가 오랜만에 화창한 여름의 첫날을 즐기려 했고, 나도 그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때 나는 라이프지에 기고한 '일본예술의 가장 흥미로운 하이라이트'에 대한 방대한 이야기의 첫 부분을 막 끝내는 중이었는데 이를 알고 있는 친구들이 국립박물관의 작업실보다 훨씬 더 매혹적인 바닷소리가 들리는 해변으로 나를 이끌었다. 한참 라이프지의 편집자들에게 일본예술을 이해시킬 수 있는 소재로서 적합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이국적인 청동 불상 사진의 주석을 어떻게 달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거의 9년 전의 다른 일요일 아침처럼(일본의 진주만 기습이 있었던 해), 전쟁뉴스 최후통첩과 같이 간단한 성명으로 발표되었다. 이번에는 내가 일본에 있다는 점만이 달랐다. 일본이 내 근무지였다. 두 시간 뒤에 도쿄에 있는 맥아더 장군의 사령부로 돌아왔지만, 아직 우리 특파원 수준에서 알아볼 수 있는 전쟁에 대한 의미 있는 소식들은 없었다.
기자들을 태우고 한국으로 향했던 비행기가 한 시간이 지나 아무런 설명도 없이 하네다 공항으로 돌아왔다. 한국으로 가는 발이 묶인 것이었다. 대한민국의 이승만 대통령이 맥아더 장군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전화를 했다는 말이 들렸다. 또 다른 이들은 남한 측 인원이 파괴했다고 주장하는 소련제 탱크들로부터 소련군이 퇴각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먼저 집단적인 잔혹 행위 기사들이 널리 퍼져 나갔다가는 거의 모두가 아주 빠르게 사라졌다.
'라디오 도쿄'가 비중이 큰 오후 방송으로 누군가로부터 듣고 인용한 공격뉴스, 뉴스단신, 특별긴급통신 등을 내보냈다. 일본은 한국을 그들 고유의 작은 진주만으로 점유했었으나 이제는 한국이 더 이상 일본의 영역이 아니고, 지금 대한민국을 지키고자 하는 한국 사람들은 일본이 최근까지도 적이었고, 그들이 현재 회복한 국권을 다시 쉽게 유린 할 수도 있는 적이라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잊은 것 같았다.
그 첫 일요일 저녁. 다른 비행기 한 대가 서울로 특파원들을 수송할 예정이었으나 나는 해변에서 너무 늦게 돌아오는 바람에 포함되지 못해 차선책으로 공산 침략군에게 폭격을 퍼붓는 전투기들을 준비시키는 미 공군기지가 있는 큐슈로 가서 맥아더 사령부가 제공하는 비행기를 타기로 했다. 맥아더 사령부가 자정 직후에 서울행 비행기가 무기한으로 취소되었다고 알렸기 때문에 이러한 조치는 첫 번째로 전화위복이 된 나의 행운이었다.
나의 차선 조치는 특파원 사이에서 갑자기 가장 뜨거운 카드가 되었다. 그런데도 내가 마침내 4명의 다른 특파원들과 이타주케 이착륙장과 인접해 있는 후쿠오카행 비행기를 탄 건 화요일 오전 중반쯤이나 되어서였다. 눈 아래 펼쳐진 빛에 반짝이는 논을 보면서 나는 남태평양의 섬들과 내가 항공사진을 찍을 당시 적의 대공포화에 유명을 달리하고 내 가슴에 어깨를 기대였던 전투기 조종사 한 명을 떠올렸다.
나는 또 과달카날의 신비한 나비들, 해병대와 같이했던 3년, 장비들을 망치는 곰팡이 그리고 시체처럼 악취를 풍기며 우리 피부를 산성 물질같이 망가뜨리는 오물들을 기억했다. 나는 일본과 일본사람, 그리고 평범했던 최근의 수년보다 훨씬 더 길게 느껴졌던 전쟁의 작은 덩어리를 기억했다. 자리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 보면서 나는 그것들을 잊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고 그것을 받아들였다. 일본은 이전에 다른 섬들이 나의 집이었듯이 내 인생의 5년을 지낸 나의 집이었다.
우리는 연료가 바닥나기 전에 착륙하려고 우리 뒤에서 굉음을 내는 두 대의 F-80 제트기와 함께 이타주케에 착륙했다. 우리가 비행기에서 내렸을 때 나는 인접한 오른쪽 활주로에서 구경 50 대공포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병사들을 보았다. 나는 곧바로 이 새로운 전쟁에 대한 나의 첫 사진을 찍었다. 그때 또 두 대의 F-80 전투기가 쉭 굉음을 내고 내려오며 공중전 승리를 상징하는 이중 좌우 회전을 하면서 번쩍였다.
나는 충격에 찬 의문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미 연합통신사의 톰 햄버트를 발견하고 돌아봤다. 우리가 보는 조종사들이 그저 제트기로 멋 부리는 것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아니라면 미국이 직접 살상전에 다시 개입됨에 따라 이들도 적을 사살하고 돌아왔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들은 멋 따위를 부리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화요일 밤 6대의 북한 전투기가 격추되었다는 전과 기록이 알려졌는데 그중의 3대는 바로 이 젊은이들에 의한 것이었다.
편대 대기실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게시판 벽 가까이 앉아 있는 젊은 조종사를 알아보았다. 그의 얼굴의 무엇인가가 나에게 신속히 사진을 찍도록 만들었다. 다음날 나는 우연히 그 젊은이가 한국전쟁에서 첫 번째로 적기를 격추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아직도 내가 그의 얼굴과 구부정한 몸에서 보았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확신하지 못한다. 내가 첫 번째로 북한전투기를 격추한 그와 그 동료들의 사진을 찍고 돌아보는 바로 그 순간에 대형 수송기들이 활주로에 착륙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활주로 끝에 두 개의 격납고가 등록대, 급식줄, 적십자구호소 등을 갖춘 거대한 접수센터로 전환되어 있었다. 수송기가 활주로를 빙빙 돌아 멈췄을 때 소개민들이 그 장소를 가득 채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허름한 옷만을 걸친 채로 한국으로부터 왔고, 단지 몇 사람만이 코트를 입고 있었다. 많은 남자들이 지난 오리 사냥철의 잔재로 보이는 엽총을 소지하고 있었다. 화요일 즉 6월 27일 낮 동안 1,000여 명의 미국시민과 우방국가의 시민들이 단 한명의 손실도 없이 소개(疏開) 되었다.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수송기의 흐름이 점점 줄어들더니 마침내 완전히 멈추었다. 미국 시민권자로 알려진 모두가 침략지대로부터 소개됐다. 거기에는 이 낯선 나라로 비행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들을 안전하게 데려와 달라는 축복을 빌었던 많은 기도가 밤마다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해가 빛났던 맑은 하늘과 고요한 달빛이 비쳤던 밤은 이들이 지난 저녁부터 날씨가 급변하여 먹구름이 내려와 비를 퍼붓기 시작했다.
작전상황실은 서울 가까이에 있는 김포비행장까지 수송해주라는 우리 특파원들의 요구사항을 알렸다. 그러나 김포가 북한군의 수중에 떨어졌기 때문에 더 이상의 비행은 없었다. 이러한 전쟁 상황은 나라를 지키는 데 이바지하고자 긴급으로 P-51 무스탕전투기의 조종법을 배우기 위해 바로 전날 한국을 떠나 이곳에 도착한 한국 공군의
젊은 조종사들이 어떤 기분일지 나를 궁금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미국인 교관은 한국공군의 풋내기 조종사들에게 희망 없는 임무처럼 보일지라도 그들이 매우 기본적인 기술에 숙달하도록 자신이 가르쳤기 때문에 앞으로 24시간 안에 공중에서 그들을 볼 수 있게 될 것을 확신한다고 내게 말했다. 교관의 통역이 영어를 말하지 못하는 한국공군 조종사 중의 몇 몇이 녹색 불빛은 '착륙허가. 적색 불빛은 '착륙거부' 신호라는 것을 알게 된 이상 관제탑과의 소통은 걱정할 게 없다고 설명했을 때 모두가 박장대소했다. 분명히 이것은 아주 수준 높고 민주적인 비행장이다! 날기만 해라!
말은 필요 없다! 적색! 녹색! 아주 간단하잖아! 나는 그들의 전쟁도 이와 같을지 궁금했다.
수요일 동이 틀 무렵. 우리는 두 번째 행운을 잡았다. C-47 수송기 한 대가 약 30분 뒤에 다른 비행장으로 가게 되었는데 우리가 그것을 타게 된 것이었다. 이 수송기는 이제 막 설치된 맥아더 야전사령부를 위한 무전 지프들을 싣고 한국의 중앙에 있는 수원비행장으로 가도록 명령받았다는 것을 알게 된 우리는 곧바로 지프에 올라 비행기를 탔다. 비는 이륙하기에 충분할 만큼 걷혔고, 우리는 출발했다.
창문을 통해서 나는 유리 위에 구르는 매끈매끈한 보석같이 미끄러지는 물방울과 소용돌이치는 회색 구름만을 볼 수 있었다. 일본으로부터 대략 2시간을 비행했을 때 구름이 갑자기 걷히기 시작했고. 우리는 땅을 볼 수 있었다. 우리가 처음 본 것은 남쪽으로 향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검게 보이는 길이었다. 다음으로 피란민으로 완전히 덮인 채 단선 철로를 따라 모두 남쪽으로 기어가고 있는 세 대의 기차가 나타났다.
수원 비행장에 도착했을 때 뉴욕타임스 기자이자 도쿄에서부터 오랜 친구인 버튼 크레인이 우리를 맞아 주었으나 우리는 그를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그의 머리는 붕대로 감겨 있었다. 그는 지난밤 한국군들이 북한 침략자들의 전진을 막기 위해 서울의 한강 다리를 폭파할 때 그가 타고 있었던 지프의 바람막이 창이 박살나는 바람에 머리에 부상을 입었다.
그가 우리 비행기로 뛰어와서 바로 직전에 두 대의 적 야크기로부터 막 폭격을 당했었고,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했으나 활주로 끝에 유기된 미 전투기와 폭격기가 나뒹굴고 있었다. 두 비행기는 여러 구멍으로부터 기름을 쏟아내고 있는 것으로 보아 못 쓰게 됨이 분명했다. 그것의 재활용 여부는 다음날 북한 공산군의 폭탄에 의한 두 번의 빗나간 폭격이 그들을 완전히 날려버렸을 때 더 이상 고려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6월 28일 오후, 거의 알려지지 않은 마을 가까이에 있는 4천 피트짜리 비행장에 우리만 남았다. 이 비행장은 심한 폭격을 당한 상태였고 우리의 동반자는 그 두 대의 구멍 난 비행기뿐이었다. 우리가 막 야전사령부 본부를 찾았을 때 머리 위로 쏟아지는 포격이 모두를 뒤덮었다. 미군 엄호 전투기가 일본으로 복귀하고 임무 교대 전투기가 도착하기 전 바로 그 순간에 4대의 적 야크기가 갑자기 공습해왔다. 바로 그때 C-54. 수송기가 막 땅에 내려앉았고, 2대의 야크기가 기총소사를 가하며 급강하해왔다.
C-54 수송기의 조종사가 적기들을 본 것 같았다. 그는 멈춤 없이 다음 계절이면 수확하게 될 벼가 자라고 있는 논을 가로질러 이륙을 했다. 맥아더 야전사령부 본부로 돌아온 뒤에 나는 그 조종사가 함정으로부터 무사히 빠져나왔고, 비행기는 손상을 입었으나 타고 있던 누구도 다치지 않았다고 들었다. 다른 야크기가 활주로를 급강하 폭격했고 두 번의 폭발이 사령부 본부를 진동시켰다.
비행장의 피해를 확인하기 위해 지프에 올랐을 때 램버트와 나는 한 공군 대위가 활주로를 걸어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프 뒷좌석으로 기어 올라와 돌아보며 말했다. "제기랄! 포격을 직접 맞아본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그는 활주로에서 야크기에 피격 당했던 다른 하나의 C-54 수송기 조종사였다. 어쨌든 그는 큰 무리없이 비행기로부터 빠져나와 반 마일이나 떨어진 곳에 있었다.
우리는 비행장 활주로의 한쪽 끝에서 두 개의 왜 큰 구덩이를 발견했고, 또 왼쪽 날개의 연료탱크로부터 휘발유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C-54 수송기를 보았다. 그 수송기 조종사는 지프로부터 깡충 뛰어내려 자기 비행기를 점검하더니 논으로 전력 질주해 달렸다. 그것은 매우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내가 비행기 앞부분을 지나고 있을 때 무언가가 오른쪽 날개 위의 햇빛 속에서 내 눈에 들어왔고, 나는 낡은 구형 지프의 기어를 힘껏 당겼다.
날개의 앞쪽 언저리가 화염에 휩싸여 있었고, 고무로 된 제빙장치가 주황빛으로 돌돌 말리면서 타고 있었다. 기총소사가 왼쪽 날개를 벌집같이 만들었고, 또 폭탄 파편들이 오른쪽 날개를 쳤다. 이 비행기는 운이 다한 것 같아서 나는 활주로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사진 찍기에 좋은 위치를 찾아 비행기가
폭발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비행기는 곧바로 폭발하지 않았다. 조종석의 창문으로부터 돌돌 말려 올라가는 작은 주황빛 화염과 연기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아주 조용했다.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해가 내려갈수록 화염이 점점 높이 올라가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보였다. 부서진 조종석 창문으로부터 연기가 올라오기 시작했고, 우리는 그 내부에서 점점 더 밝은 빛을 내고 있는 불을 보았다. 그 조종실의 불은 좌우 창문을 통해서 그리고 천측 창 위로 타올랐고, 이어서 조종석 앞으로 솟구쳤다. 곧 비행기 앞쪽 전체가 화염에 휩싸였다. 비행기의 앞은 타버렸고, 거대한 꼬리날개가 천천히 하늘을 향해 곤두 서면서 오른쪽 날개가 폭발했다.
수원으로 돌아오면서 우리의 전진은 길을 따라 남쪽으로 향하고 있는 피란민들의 거대한 흐름에 의해 거의 완전히 차단되었다. 어떤 북한 전투기도 그 길을 아직 폭격하기 시작하진 않았지만, 누구도 그것이 언제 시작될지는 몰랐다. 어둠의 보호 아래서 한국인 전 인구가 걷고 있는 것 같았다. 온갖 종류의 차들이 쟁기로 밭을 가는 것처럼 피란 군중을 따라가고 있었으며, 대부분의 차들이 나뭇가지들로 두껍게 위장을 한 한국군과 경찰들을 가득 태우고 있었다. 거기에 어떤 공황의 증거가 보였던 것은 아니지만 리더십은 없는 것 같았다. 그들은 단지 남쪽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가는 대 집단과 만난 것처럼 보였다.
그날 오후 기차역에서 나는 기차를 온통 그 자신들로 덮어 장식하고 있는 듯한 피란민들을 찍었다. 그들은 애처롭게 보였고 지금은 매일 볼 수 있는 그런 모습이었다. 내가 그리스나 팔레스타인, 인도, 중국 등에서 찍을 수 있었던 사람들은 오히려 더 잘 입었고 훨씬 깨끗해서 이들과는 달랐다. 이들은 불확실한 과거로부터 약간 덜 확실한 미래로 향해가는 가난에 시달리는 소작농들이 아니었다. 그래도 소작농은 맘이라도 편하고 배는 곯지 않았을 테니까. 그러나 그들을 둘러싼 삶이 허물어지고 남쪽으로 가는 그 길의 끝에 바다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피란길을 차분히 품위 있게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어떤 방식으로라도 언제나 그 행렬에서 빠져나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사이에서 일하고 있음에 당황함을 느꼈다. 내가 피란민 중의 한 큰 아들이 부모의 안전을 위해 안간힘을 쓰며 손수레의 끈을 당기고 있는 동안 차분하게 수레 안에서 손잡이를 잡고 있는 늙은 부부를 우연히 만났을 때 나는 그 셋보다 덩치가 큰데도 내 작은 카메라만 무력하게 쥐는 부끄러움 말고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나의 사진들이 이러한 상황에서 실제로 어떤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사령부로 돌아왔을 때 램버트가 자신이 모든 뉴스의 출처들을 확인했노라고 내게 말했다. 아무도 아직 상황이 나쁘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전반적인 상황을 알지 못 했다. 명백히 북한군은 한강 바로 이북에서 재편성 중이었고, 새로 점령한 서울을 그들의 총사령부로 이용하고 있었다. 북으로부터 전차들이 한강 남쪽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보고는 아직 없었고, 아무도 북한군들이 왜 이렇게 길게 공격을 멈추고 있는지 몰랐다. 공산군들이 남침 시 사용한 전차들은 한국의 방어자들을 표현할 수 없는 두려움으로 마비시켰고, 또 어떠한 응징보복을 생각할 수도 없는 공황상태로 만들었다.
6월 29일 여명 직후에 나는 사령부의 문안에 서 있는 약간 구부정하고 작고 여원 장교를 보았는데 그는 한국군의 미·군사고문단 단장으로 새로 부임한 존 처치 준장이었다. 그는 내가 한강을 따라 전개된 그의 병력에 대해 브리핑해줄 것인지 물었을 때 약간 아쉬운 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는 바로 전날에 도쿄로부터 날아와서 아직도 그의 지휘체계를 확립하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듣자 하니 1/2 이상의 한국군 부대가 북한군의 첫 공격으로 차단되었거나 포로가 되었다고 했다. 거의 모든 야포도 손실되었으나 그것은 단순히 버려졌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와는 달리 이 야포들은 사거리가 훨씬 긴 북한군의 소련제 포들에 의해 압도 당한 무기였다. 따라서 공산군의 포들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종심에서 아군의 보호를 받으며 포를 쏘는 대신에 전방 쪽으로 이동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북한군은 그냥 간단히 한국군 포병 진지를 방어할 수 없도록 만드는 탄막사격만을 하면 됐다. 그러고 나서 모든 것들을 폭파하여 산산조각 낸 후 그들은 그 위를 유유히 걸어와 진지를 점령했다. 한국군 포들은 미제였고 그것들은 38선을 가로질러 그들이 마주한 무기경쟁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정부가 운용할 수 있는 전부였다.
전쟁 발발 5일 차인 6월 29일 목요일 아침은 아름답고, 맑고, 기분 좋게 온화한 날씨였다. 또한, 불행히도 전차 운용에 좋은 완벽한 날씨였다. 일본보다 적어도 수주일 후에 시작되는 한국의 본격적인 장마는 약간 늦어지고 있었다. 서울과 수원을 연결하는 도로는 아주 건조하고 단단해서 전차의 돌파 기동에는 이상적인 상태였다.
길가에 있는 논까지도 몹시 건조해서 거의 말라 있었다. 이런 날씨로 인해 미군 전투기들은 거의 매일 낮에는 꽤 넓게, 그리고 낮게 완만히 경사진 전장을 지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밤에는 미군기들이 그들의 기지로 복귀하게 됨으로써 북한군들이 어디에서 새로운 공격을 펼치게 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의심할 여지없이 새로운 보급품과 군용차량, 그리고 부대들이 어둠을 이용하여 북으로부터 내려왔을 것이었다. 이와 같은 것들이 그 목요일 아침에 처치 장군이 당면한 주요 문제였다.
수원비행장으로 돌아와서 나는 그날 오후 바로 직전의 적 공격으로 부상당한 공군장병 2명의 후송 장면 사진촬영을 막 마쳤을 때, 경정찰기 두 대가 착륙했다. 정찰기 쪽으로 걸어가는 처치 장군을 보고 도대체 전방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좀 더 분명히 알아볼 생각으로 따라갔다. 그런데 포병 관측장교 대신에 정찰기로부터 내린 사람은 한국대통령 이승만이었다. 그리고 당시 주한 미국대사인 무쵸가 다른 한대의 정찰기에서 내렸다.
그 학자 같은 늙은 신사와 우리 미국대사는 방금 그들의 생명을 건 비행을 했었다. 수원으로부터 약 90마일 남쪽에 있는 임시수도 대전에서 출발한 그들을 적 야크기 한 대가 불시에 덮쳤었다. 두 미군 조종사들은 나무 꼭대기 정도의 고도를 유지하고,
그 작은 정찰기의 방향을 재빨리 움직여 바꾸며, 능선과 계곡을 넘나들면서 야크기 조종사가 그들에게 사격할 기회를 절대 가질 수 없도록 노련하게 비행했다.
나는 이승만 대통령이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정력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가 방금 겪었던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사람과 같이 이 적나라한 순간에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는 그를 보고 깊은 찬탄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활주로 옆에 있는 밭에 우리가 서 있었을 때 우리의 발아래를 쳐다보았던 그의 태도였다. 나는 이승만 대통령의 이 모습을 항상 기억할 것이다. 그는 아래위를 쳐다보며 부드럽고 온화한 표현으로 이렇게 말했다. "이런 어쩌나. 우리 발들이 어린 콩 싹을 뭉개 버렸네"
적 야크기의 재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무쵸 대사는 이승만 대통령을 급히 대기 중인 차량까지 안내하여 서둘러 비행장을 떠났다. 내가 처치 장군이 그의 사령부로 향하는 대통령을 수행하지 않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며 놀라고 있을 때, 다른 C-54수기 한 대가 거의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조용히 착륙해서 우리 쪽으로 곧바로 활주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바탄'이라는 이름이 수송기 앞부분에 페인트로 쓰여 있었다. 맥아더 장군이 긴 자루가 달린 파이프를 무기처럼 손가락 사이에 움켜쥐고 수송기로부터 내렸다.
맥아더는 자신감에 차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눈은 내가 가끔 고열 환자의 얼굴에서 본 것과 같이 밝게 빛나는 그런 광채를 띠고 있었다. 내가 그를 최근에 마지막으로 본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미주리함에서 일본제국이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것을 지켜봤던 때였다. 그는 그 때나 지금이나 양쪽 모두에 아주 적합한 인물이었다. 그가 약간 돌아보았는데 그 순간 그의 눈이 나의 오래된 야구모자 위에 있는 해병대 마크부터 나의 얼굴을 훑어보다가 나의 눈과 마주쳤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다가가 내 이름과 내가 라이프지의 표지를 장식했던 칼 마이던스의 장소를 찍은 사진작가라고 소개했다.
그가 내게 답했을 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는 칼 마이던스가 일본으로 오고 있는 도중이라고. 이틀 전에 그로부터 전보를 받았노라고 말했다. "그가 돌아오고 있다고." 그리고 그가 내게 몇 마디 말했을 때 그의 눈 뒤에서 무언가가 편안해졌다. 나는 그것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바치는 가장 위대한 찬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칼에게 말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고 혼자 다짐했다.
활주로 주변에서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맥아더, 처치, 그리고 다른 몇몇이 지프에 탔고, 모두가 수원시내에 있는 사령부 건물로 향했다. 오래된 사령부 건물에서 일련의 짧은 브리핑과 회의를 가진 후에 맥아더가 차를 대기시키라고 명령했고, 그는 곧 거의 정찰을 하지 않은 길을 따라 전선으로 향했다.
맥아더는 서울을 향해 북쪽으로 가면서 직접 보았던 것들로 인해 낙담했음이 틀림 없었다. 도로는 아직도 남쪽으로 향하는 피란민들로 꽉 막혀 있었고, 무장한 군인들을 가득 태운 트럭들도 남쪽으로 가고 있었다. 도로 주변 어디에도 방어진지 하나 없었으며 도로를 따라 분산된 군인들이 싸우려는 의지를 갖고 있다는 어떤 증거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모두 꽁무니를 빼며 도망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마치 그들이 이 혼돈의 붕괴가 어떤 다른 군대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먼지를 휘날리며 북으로 달리면서 새로운 힘을 얻었다 - 맥아더 장군이 첫 번째 차에 타고 있어서가 아니라 오로지 우리가 단호하게 먼지로 더러워진 채로 우리의 본업을 위해 북으로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첫 몇 마일을 달리자 낙오된 피란민들의 수가 점점 적어지더니 더는 볼 수 없게 되었고, 한국군들을 수송하는 나뭇가지로 위장한 트럭들을 제외하고는 길 위에 우리만 남았다. 나는 모든 낙오된 한국군 장병들을 재편성하여 새로운 저항선을 재구축할 수 있는 집결장소가
명령으로 하달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또 우리의 앞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부대가 한강 바로 남쪽 강변에 있다고 들었다.
나는 서울을 향해 20여 마일을 가는 동안 어디에서도 한국군 지휘부의 흔적을 볼 수가 없었다. 전선으로 향하는 보급품도 보지 못했고, 통신선 비슷한 것도 없었으며, 전투 후에 부상을 당하면 우선적으로 치료를 받았을 응급처치 장소 등 군인들이 머물렀음을 보여주는 어떤 흔적도 볼 수 없었다. 아마 이러한 부대들이 있기는 있었을 텐데 우리가 전방으로 곧바로 올라왔기 때문에 내가 그들을 못 본 것 같았다. 나는 또한 미군과 북한군 사이에 놓여 있는 것이 바로 무엇인지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길이 여러 곳으로 갈라지고 서울의 동쪽으로 향하는 한 분기점인 영등포 교차로에서 우리는 북한군의 포탄이 1마일도 안 되는 한강 남쪽의 제방 위에 떨어지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맥아더는 교차로에 곧바로 서서 급하게 지형과 진지들에 대한 브리핑을 들었다. 교차로에서 맥아더가 보여준 완벽한 오만과 거의 분통을 터트리는 듯한 그의 호전성 등이 나를 매우 즐겁게 했다.
오히려 방향을 돌려 수원으로 복귀하는 길을 따라오면서 우리는 놀랄만한 현상을 목격했다. 피란을 위해 몇 가지 짐만을 챙겨갔던 침울한 표정의 피란민들이 떠나기 직전에 살았던 그 마을에 지금은 모든 계급의 군인들이 차렷 자세로 서 있었다. 그들의 장교들이 경례했고, 다른 군인들은 손을 흔들며 환호했다. 우리는 "맥칼트, 빅톨리"
라는 소리를 두 번이나 들었다. 거기에는 또 북으로 향하는 트럭들의 여러 호송대가 있었는데 트럭마다 반갑게 손을 흔드는 군인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수천의 군인들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내겐 답이 없는 심각한 의문이 남았다.
이 군인들이 신중히 선택된 방어진지를 점령했었다가 미국의 유명한 장군이 지나가는 동안 잠시 그 진지들을 버리고 나온 군인들인가? 아니면 그들은 이동하기 편한 저녁 시간대에 다시 한 번 남쪽으로 이동하기 전, 한낮의 더위를 피해 집안의 그늘 속에 몸을 뻗고 누워 있었던 것이란 말인가?
한 가지가 나를 심히 화나게 했는데 그것은 아주 큰 미국 신문사 가운데 한 신문사에서 나온 긴 최신 기사였다. 그 기사는 한국군이 아시아에서 '최고의 군대'라는 것이었다. 정확한 정보 보고서들이 적임자들에 의해 타전되었을 텐데 거대 신문사의 과장광고로 부풀려져 무시되었음이 틀림없었다.
해가 서쪽 하늘로 질 무렵에서야 우리는 수원의 야전사령부로 돌아왔다. 햇볕이 아직 내리쪼였지만 시원한 미풍이 서울에서 수원, 그리고 그 남쪽을 연결하는 긴 골짜기에 꽤 많은 먼지를 일게 했다. 우리는 흐릿한 가을의 태양과 석양이 감싸고 있는 나무들 밑에 앉아 맥아더 장군이 마지막 회의를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가기 위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나는 우리가 즉시 비행장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내 예감이 맞을 것이라고 램버트를 설득하여 우리는 지프에 올라 활주로를 향했다. 우리는 수원의 서쪽 철로들을 건너기 위해 설치된 구름다리를 넘었다. 바로 그때 야크기 한 대가 흐릿한 안개로부터 굉음을 내며 날아와 우리가 방금 지났던 다리를 따라 폭탄을 투하했다. 연기와 먼지가 공중으로 치솟았다. 근처에 있던 몇 사람이 쫓기는 닭처럼 이쪽 거리에서 저쪽 거리로 우왕좌왕하다가 도로를 가로 질러서 내달렸다.
우리의 공중엄호 전투기들이 침입한 적기와 싸우기 위해 기체를 기울여 굉음을 내며 급강하할 때 머리 위의 하늘은 아주 멋진 공중전으로 가득 찼다. 폭탄들이 활주로에 쿵쿵 떨어졌다. 기관총알들이 온 하늘을 난무했고, 서로가 서로를 쫓는 공중에서
모든 전투기의 방아쇠 스위치는 꾹 눌려 있었다. 새로 도착한 대공포들도 사격을 개시했다. 활주로 끝을 움푹 파이게 한 두 발의 폭탄을 제외하고는 비행장에 별다른 피해는 없었지만 그곳은 소음으로 가득 찼다.
불쌍한 고령의 이승만 대통령은 그곳에서 또 다른 하나의 힘든 시간을 겪었다. 적의 공격기들이 이륙을 위해 활주로로 가고 있는 이 대통령의 비행기를 덮쳤기 때문이다. 조종사가 비행기를 멈춘 뒤, 모두 뛰어내려 불행히도 또다시 망가진 콩밭으로 날쌔게 움직였다. 맥아더 장군의 비행기인 '바탕'이 착륙하여 막 자리를 잡았을 때, 장군이 활주로에 도착했다.
물론 나도 그 비행기를 타고 돌아가야 한다는 걸 알았고, 지금이 맥아더 장군의 사진을 찍어 이것을 뉴욕에서 제 때에 발간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유일한 기회임을 알고서 장군에게 사진을 찍을 수 있는지 요정했을 때 그는 즉시 "물론입니다"라고 흔쾌히 대답했다. 그러면서 다시 한 번 나의 모자와 얼굴을 쳐다보고 나서 그의 참모에게 말하려고 웃음을 띠면서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