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감상 –
킹덤 오브 헤븐, 2005
며칠 전 TV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 십자군 전쟁에 대한 영화다. 예루살렘을
차지하려는 두 종교 진영의 갈등 속에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를 비판적으로 그린 영화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종교가 교리에 갇히게 될 때 어떤 난관에 봉착하는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이 영화에 나오는 기독교 교리 비판은 다음과 같다:
1. 자살한 사람은 지옥에
간다?
2. 사람을 화장(火葬)하면 부활할 수 없다?
3. 하나님의 군대는
결코 패할 수 없다?
4. 예루살렘은 신의
도성(Kingdom of Heaven)이다?
5. 이교도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
영화의 초두에 나오는 주인공 발리언의 아내는 아이를 잃은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하고 만다. 그 시신을 장사 지내던 신부는 목을 베어 묻으라고 한다. 자살한 사람은 지옥에 갈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하지만 신부
자신이 죽은 사람의 목걸이를 훔치고 그것을 감추기 위한 비열한 행동에 지나지 않았다. 어쩌면 신부 자신도
그 교리를 믿지 않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도 30년 전에는
사람이 죽을 때 시신을 화장하면 부활할 때 몸이 없어서 곤란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화장 대신에
매장이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선호되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교리는 근거가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근거 없는 교리를 판단할 분명한 양심과 상식이 있는 사람은 공연한 두려움으로 사람을 겁주는 종교적 교리에 매이지
않는다. 그렇게 왜곡된 교리를 명하는 신이 있다면 그는 신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그래서 더 두려움을 떨치고 가장 좋은 길을 택한다.
하나님의 군대는 결코 패하지 않는다고 우기면서 결사 항전을
하자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이스라엘이 얼마나 많이 패했는지 성경을 읽어보지 않았나 보다. 믿는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 다 잘 될 것이라는 믿음은 근거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얼마나 이런 생각에 쉽게 빠져드는가! 도리어 우리는 생사화복은 하나님께 달려 있으며 그 결정을
아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겸손히 인정하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런 종류의 믿음은 이슬람교 신자들 안에도 있었다. 죄가 많아서 전쟁에 패했다고 진단하는 젊은 무슬림에게 살라딘은 말한다: ‘그것은
내가 아직 준비가 덜 되었기 때문이야!’ 어떤 종교에 속해 있든지 상식을 배제한 믿음은 근본주의적 과격함을
드러내어 패망으로 갈 것이다.
예루살렘은 신의 도성이 아니다. 성지순례는 오늘날의 십자군 원정의 망령에 홀린 일이 될 수도 있다. 만약
예루살렘을 신의 도성 또는 하나님의 보좌가 자리한 곳이라고 믿는다면. 발리언에게 하나님의 도성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발리언의 고향이었다. 주님의 뜻을 따라서 양심적으로 살며, 약자를
돌보는 일에 자신을 바치는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그 어디나 천국의 도성이요, 그가 하는 일은 그 무엇이나
성직이며, 그는 거룩한 제사장이다.
그러므로 현자 살라딘은 예루살렘에 대하여 두 가지로 평가한다: Nothing! And Everything! 아무 것도 아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다! 진리를 따르는 사람에게는 벽돌로 세워진 예루살렘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현상을 따르는 사람에게는 예루살렘은 모든 것을 바쳐서 차지해야 하는 하늘의 도성이다. 살라딘은 그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영화에서 기독교인들은 이슬람 신자들을 목매달아 죽였다. 하지만 이슬람 신자 살라딘은 기독교인들을 하나도 죽이지 않고 살려서 안전하게 보내주었다. 천 년 전 기독교는 이슬람교보다 훨씬 배타적이고 독선적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 나는 종교인이 교리에 갇히게 될 때 공동체를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빠뜨리고 최악의 결정을 하는지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보면 오늘날 기독교가
믿는 교리는 어떨까? 나는 다음과 같은 교리를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확신한다:
1. 오직 예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2. 기독교 외에는 구원이
없다?
3. 구원이란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4. 천국은 하늘에 있는
나라다?
5. 동성애는 죄악이다?
기독교인들이 가장 오해하는 구절 중 하나는 요한복음 14장 6절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리고 사도행전 4장 12절: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이 두 구절을 합하면 ‘오직 예수’ 만이 구원의 길이 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자기 비움과 사랑의 길이
아니라면 다른 길로는 아버지께 올 자가 있겠는가 라는 의미로 이해한다면 달라질 수 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근거와 정당성을 묻는 관원들에게 대답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가
믿고 따르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이 말은 나에게 아버지는 한 분뿐이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고 이 세상에 다른 아버지들은 아버지가
아닌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도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고
하셨다. ‘오직 예수’ 또는 ‘오직 기독교만!’ 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사실은 구원을 바르게 이해할 때 명확해진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구원이란 무엇일까? 예수님은 언제 구원받았다고
말씀하셨는가? 그것은 사람이 사람다움을 회복하게 되었을 때였다. 죄나
질병 또는 사회적 편견에 매여 있어서 사람 구실을 못하던 사람이 그 묶임에서 풀려나게 되었을 때 예수께서는 구원받았다고 선언하셨다. 그러므로 나는 구원을 이렇게 정의한다:
‘구원이란
하나님이 처음부터
우리를 위하여 계획하신
참 인간의 삶을
회복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인간다움을 회복하여 사람들이 더불어 상생하며,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세상을 만드시려고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고 지금도 일하고 계시며 장차 그런 세상을 완성하실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어떤 사람은 이미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있으며, 하나님 나라는 이미 그들 가운데 있다. 그것이 구원이다.
구원은 죽어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 살아 있는 동안에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고 닮아가는 것이다(요 17:3). 이것이 영생이라고 성경이 말하지 않는가! 바울 사도도 말하기를, ‘하나님 나라는…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참되고 따뜻하게 살아가는 곳이며, 그런 곳이면 그 어디나 천국이다.
하지만 사람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죽음 이후를 경험하고 온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물론
태초에 천지가 창조되는 모습을 구경한 사람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원이나 종말에 대하여 성경의 이야기를
통해서 상상할 뿐이다. 성경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기원과 미래를 그려보고 현실을 살아간다. 세상은 하나님의 작품이며 인생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리고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다시 하나님께 돌아간다. 그리고 이 세상이 다시 새롭게 되는 날 우리도 새롭게 되어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한다. 성경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바로 이것이다.
끝으로, 동성애에
대한 우리의 판단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화장으로 장례식을 치르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던 때가 있었다. 자살하면 지옥간다는 말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여 오직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이 생각하는 구원이나 천국은 십자군
원정대가 꿈꾸던 환상과 다르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 관점이나 사고 체계 안에서 보면 동성애는
죄악 그 자체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동성애에 대하여 함부로 판단하지
않을 것이다.
교리는 사람의 삶을 다 담을 수 없다. 오직 사랑으로 역사하는 하나님의 영이 모든 것을 품고 다시 살려낼 수 있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말하기를 ‘율법조문(문자)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고후 3:6)고 했다.
<끝>.
영화 감상 – 킹덤 오브 헤븐, 2005.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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