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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은 바다를 낀 항구도시이다. 바다와 더불어 유명한 산들이 운치를 더해주는데, 바다가 포근하게 부산사람들을 품어주는 어머니라 한다면, 산은 부산사람들을 보듬어주는 아버지같은 존재이다. 부산에는 여러 산들이 있지만 뭐라해도 산중의 산은 역시 금정산이다. 산이 있으면 그속에는 으례히 유명 사찰도 있기 마련이니, 금정산에는 바로 부산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범어사가 있다.
▲ 금정산 금샘
금정산의 금샘 설화는 부산의 진산 금정산이 예부터 신령스러운 영산임음 일러주는 것과 함께 금정산 이란 산이름과 범어사라는 절이름, 그리고 이 사찰의 창건 내력을 알려주는 것으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는데 아래와 같은 그 설화는 동국여지승람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금정산 산정에 세 길 정도 높이의 바위가 있는데, 그 위에 우물이 있다. 둘레가 10여척(尺)이며 깊이는 7촌(촌)쯤 된다. 황금색 물이 항상 가득 차 있고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 세상에 전하는 말로는 한 마리의 금빛 물고기가 오색 구름을 타고 범천(梵天)에서 내려와 그 곳에서 놀았다." 고 하여 금빛 나는 우물 곧 '금정(金井)'이란 산 이름과 범천의 고기 곧 범어(梵魚)라는 절 이름을 지었다.
▲ 범어사 조계문(일주문)
조계문(일주문)은 조선시대에 세워진 문이라고 한다.일주문은 사찰에 들어서는 산문 중 첫번째 문인데, '만법이 모두 갖추어져 일체에 통한다'는 불교 사상이 담겨있다. 선찰대본산이라고 일주문에 크게 씌여져 있음은 선찰대본산은 마음을 닦는 맑은 도량이라는 뜻이다. 참선을 통해서 마음속에 일어나는 갖가지 잡념과 망상을 쉬게하고 자신의 내면세계의 참다운 불성을 깨닫게 하도록 마음을 수행하는 근본도량이라는 뜻이다.
구한말의 범어사에는 오성월스님이 주지 소임을 보고 있을 때 스님은 먼저 범어사를 선찰대본산으로 명명하고 당대에 최고 고승 경허스님을 범어사 조실스님으로 초빙했다.사람은 누구나 "마음"이라는 존재의 본질을 가지고 있다. 어리석은 중생의 마음을 부처님의 마음으로 변화시키는 선수행 도량이다. 양산 통도사가 불보종찰이요, 합천 해인사가 법보종찰이며, 순천 송광사는 승보종찰이다. 그러면 범어사는 그 네번째 선종본찰로서 마음의 근원을 궁구하는 수행도량이어야 한다. 이것이 선찰대본산의 의미이다
조계문(일주문)은 처음 세워진 때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조선 광해군 6년(1614)에 묘전화상이 절의 여러 건물들을 고쳐 지으면서 만들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숙종 44년(1718) 명흡대사가 나무기둥을 돌기둥으로 바꾸고, 정조 5년(1871) 백암선사가 현재의 모습으로 고쳐지었는데 앞면 3칸의 맞배지붕이다. 일렬로 된 4개의 초석위에 짧은 배흘림기둥을 세워 틀을 짜고 다포계 겹처마의 지붕을 올려놓아 자체의 무게로 몸을 지탱하는 구조로서 여타 일주문들보다 걸작이라 한다.
▲ 범어사 천왕문과 사천왕
천왕문은 2010년 12월15일 밤 10시20분경에 범어사 경내의 천왕문이 화재로 전소하였다는 뉴스가 다음날 전국을 강타하였다. 서울의 숭례문 화재가 발생되어 안그래도 우리 문화재의 관리가 또 다시 도마 위에 오르게 된 사건이었다. 화재 당시 소실된 천왕문이 현재 말끔히 복원이 되어있다.
당시 상황은 '범어사 경내로 들어서면 먼저 보물인 일주문(조개문)을 만나게 된다. 이 건물 30m 뒤에 4천왕상을 모신 천왕문이 있다. 문을 열고 한 남자가 들어와 서성이다가 이 남자가 나가고 난 뒤 곧 바로 천왕문에 불길이 치솟았다한다' 천왕문은 문화재는 아니지만 조선숙종때의 건축물로 3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범어사를 지켜 왔고 그 안에 모셔진 4대천왕상은 천왕문안에다 모사품을 세우고 보수를 위해 경내의 성보박물관에 보관을 하던 중이라 화재의 참사에서 피할 수 있었다.
▲ 범어사 석조(石槽) 범어사 사찰 입구에 있는 물을 받아두는 수조. 돌로 만들었고, 마치 배 모양이다.
금정산 북동쪽 기슭에 자리한 범어사는 678년(문무왕 18)에 의상이 창건한 절로 통도사·해인사와 함께 영남의 3대 사찰을 이룬다. 범어사 주변에는 계명암·내원암 등 여러 개의 암자가 있으며 의상대사가 당시 해동의 화엄십찰종의 하나로 창건하였는데 화엄경의 이상향인 맑고 청정하고 서로 돕고 이해하고 행복이 충만한 아름다운 삶을 지상에 실현하고자 설립한 사찰인 것이다.
▲ 범어사 대웅전과 각 전각들
대웅전의 최초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때 불탄 것을 1602년(선조 35)에 관선사가 재건 하였으나 불타버렸다고 한다. 지금의 대웅전은 1614년(광해군 6) 묘전화상이 건립한 것으로 1713년(숙종 39) 흥보화상이 중수한 것이다. 내부의 불단과 닷집, 삼존불상은 묘전화상의 중건 때 조성된 것이며, 불상 개금(改金)은 1824년(순조24)경 해민대사가 하였다고 전한다. 원래의 건물들은 임진왜란 때 대부분 소실되고, 그 이후 광해군때 중건되기 시작하여 현재의 모습은 숙종대에 갖추었다고 볼 수 있고, 대웅전은 금정산에서 해운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앞면 3칸, 옆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이 불전은 규모는 그리 크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다포양식의 공포와 겹처마를 하고 있는 약간 무거워보이는 느낌을 주는 건축물이다. 기둥 위의 장식과 처마의 구조가 섬세하고, 화려하지 않지만 섬세한 문살을 두고 있다.범어사의 창건설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신라시대부터 왜구의 침입을 물리치고자 하는 소망이 담겨있는 호국사찰의 성격이 강한 곳이기도 하다.
▲ 범어사 대웅전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과 그 뒤 석가영산회상도
이 삼존좌상은 범어사 대웅전의 주불로서 개금할 때 복장에서 발견된 불상기문과 불상기인발원축을 통하여 석가모니불과 미륵보살, 제화갈라보살의 수기삼존불로 조성되었음을 알려주고 있으며 아울러 순치 18년(조선 현종 2년, 1661년)이라는 정확한 조성연대와 수두, 희장을 비롯한 보해, 경신, 쌍묵, 뇌영, 신학, 청언등이 조각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 삼존불은 비례가 적당하여 당당하고 균형 잡힌 형태를 보이며, 상호(相好)는 풍만한 양감 속에 부드러운 미소가 어우러져 자비롭고 단정 우아한 모습을 잘 보여준다. 법의 주름은 직선의 선묘로 간략히 처리하여 여백을 많이 남겼지만, 전체적으로 힘이 있으면서도 잘 정돈되어 있다.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67호 "범어사 대웅전 석가영산회상도"는 화면 중앙에는 우견편단에 결가부좌를 하고 항마촉지인을 한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셨고, 좌우로는 8보살을 배치하였다. 본존불을 중심으로 위쪽에 두 분의 화신불(분신불)을 비롯하여 10대 제자와 신중들을 묘사하였으며, 무릎 아래 왼쪽에는 가섭존자와 문수보살을, 오른쪽에는 아난과 보현보살을 모셨고 양쪽에 사천왕도 그렸다. 중앙의 본존불과 8보살을 큼직하게 그린 반면에 상단과 하단의 상들은 상대적으로 적게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보통 가섭과 아난의 위치는 본존불의 어깨 좌우측이나 머리 부분의 상단에 보살들과 같은 크기로 배치되는데, 이 그림에서는 무릎아래에 작게 묘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1882年(고종 19년)에 조성된 것으로 삼장탱과 신중탱과 관음전의 관음탱을 같은 시기에 봉안한 작품이다. 또한 19세기 이후에 자주 사용되는 화려한 군청색이 눈에 띈다.
▲ 범어사 청동으로 만든 쇠북인 "금고"
금고는 청동으로 만든 쇠북으로 사찰에서 의식에 사용되는 법구로서, 금구 또는 반자등으로 불린다. 범종이 주로 아침, 저녁의 예불이나 중요한 의식법회 때 사용된 것과는 달리 금고는 시간을 알리거나 사람을 불러 모으는 등 범종보다 단순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범어사 대웅전 우측 문 앞에 걸려 있는 금고는 고려시대에 가장 많이 조성된 일반적인 금고 양식과 같은 양식을 지녔으나, 직경 90cm 안지름 71cm로서 규모 면에서 고려시대에 조성된 금고보다 거의 2배 내지 3배에 이르는 대형 금고이다. 형태는 금고의 측면이 뒷면까지 연장되어 안쪽으로 경사지게 10cm 가량 들어간 채 넓게 뚫린 징 모양에 고리가 세 개 달린 형태이다.
따라서 고려시대 주류를 이루던 뒷면 입 가장자리를 한 단 높게 돌출시킨 금고 형태를 따르고 있지만, 앞면에 두 줄의 동심원으로 장식되어 있을 뿐 두드리는 부분인 당좌를 비롯한 표면 전체에는 문양이 전혀 없다. 좌·우측면에는 점으로 새긴 명문이 있는데, 좌측면에는 조성연대와 무게, 우측면에는 시주자가 새겨져 있다. 명문에 의하면 범어사 대웅전에 사용하기 위해 1862년(철종 13)에 무게 252근 7량(약 152kg)의 금고를 조성하였고, 시주자는 동래부 서하리에 사는 갑인생 윤성희임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뒷면이 넓게 뚫린 금고를 반자등으로 표기하고, 뒷면이 거의 막힐 듯 작게 뚫린 공명구가 있거나 앞·뒷면이 모두 막혀있고 측면에 장방형의 공명구를 뚫은 형태를 금고(金鼓, 禁鼓)나 금구(禁口)등으로 표기한 것과는 달리 조선 후기에 제작된 범어사 금고는 특이하게 ‘금구(金口)'로 표기하고 있다. 따라서 범어사 금고는 조선 후기에 제작된 보기 드문 대형 금고인 동시에 조성연대, 명칭 및 당시의 금고 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 범어사 사찰내 이모저모 풍광이 수행처 답게 아름답다
금정산에 위치한 영남의 3대 사찰로서의 범어사는 역사적으로 많은 고승대덕을 길러내고 도인을 배출한 수행사찰로 오랜 전통과 많은 문화재가 있는 곳이다. 범어사는 의상대사를 비롯하여 원요대사 · 표훈대덕 · 낭백선사 · 명학스님과 그대에 경허선사 · 용성선사 · 성월선사 ·만해 한용운선사 · 동산선사 등 고승들이 수행 정진하여 명실상부한 한국의 명찰로서 그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 금정산 고당봉 고모당은 산신각을 겸하고 있는 범어사 소유이다
금정산 고당봉에는 고모당(姑母堂)이 자리잡고 있는데, 고당봉은 대단한 길지로 1년내내 무속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으며 신령한 양기(陽氣)와 영험함이 깃든 곳이다.고모당의 내부에는 “고모영신(姑母靈神)”,“산왕대신(山王大神)”이라고 적힌 위패가 2개있는데 이는 당(堂)집과 산신각(山神閣)을 겸하고 있다. 또 금정산 고당봉의 남쪽아래에 용호암과 용왕굴,용왕샘이 있는데 1년 365일 향과 촛불이 끊어지지 않는 영험한 기도처이다.
이곳 일대가 신령이 깃든 영험한 곳임을 말해주고 있는 셈인데 고당봉 너머에는 극락굴·미륵굴 등으로 불리는 토굴이 산재하며, 곳곳에 상주 천막을 쳐놓고 굿이나 기도를 하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다. 행정당국에서 이들을 단속해도 그때 뿐이다. 바위 아래 여기저기에는 무속신앙 숭배자들이 쓰는 솥이며 식기 따위가 숨겨져 있다고 한다. 금정산 주봉 고당봉은 풍수지리학적으로도 길격(吉格)으로 친다고 장영훈씨의 <부산의 풍수>라는 글에서 잘 기록하고 있다.
"금정의 주봉은 고당봉으로서 도투락하니 튀어 나온 바위들로 형성되어 있다. 산의 모양이 아와 같이 불길의 형상인 경우 이를 화성이라 하며, 고당봉을 중심으로 금정산의 전체적 안목에서 본 형은 토기(土氣)가 윤택한 토성(土星)이다. 이는 불탄 자리에는 흙이 생성된다는 오행의 해석에 비추어서 화생토(火生土)의 상생(相生)이므로 길격으로 친다."
이 영험한 곳 고당봉에 자리한 고모당은 그 존재가 아주 절묘하다. 무당과 보살들이 밤낮없이 들끓는가 하면, 스님들이 정성껏 당제(堂祭)를 모시기도 한다. 일년 내내 무당들이 점령하고 있다시피 하지만, 이 건물은 범어사에서 세웠으니 주인도 물론 범어사이다. 이처럼 불교와 무속신앙이 혼재하고 있는 것도 고당봉에 어린 양기의 영험으로 밖에는 달리 해석하기가 어렵다.
▲ 금정산 고당봉 고모당 산왕대신과 고모영신의 위폐
고모당은 육중한 돌담을 두르고 튼튼하지만, 당집의 규모가 워낙 작고 내부도 아무런 장식이 없이 '산왕대신(山王大神)''고모영신(故母靈神)'이라는 두개의 위폐만 모셔져 있으며 당집 내부가 너무 비좁다보니 당제를 올릴 때도 제물만 방안에 차려놓고 사람들은 건물 밖에서 절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좁은 돌담 내부에 천막을 쳐놓고 며칠씩이나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도 있다. 이 고모당의 연유에 대한 내용(≪궤범어사서기궤유전≫ 신령축, 1902)은 대략 다음과 같다.
"지금으로부터 400여년 전에 밀양인 박씨가 결혼에 실패하고 불가에 귀의하면서 범어사에서 화주보살이 되어 여생을 보내면서 불사로 사부대중 들끼리 칭송이 대단 했다고 한다. 어느날 이 보살은 큰스님께 "내가 죽으면 화장을 하고, 저 높은 고당봉에 고모영신을 모시는 산신각을 지어 고당제(高堂祭)를 지내주면 높은 곳에서 수호신으로 범어사를 돕고 지어주겠다"고 유언을 남기고 숨졌다. 큰스님은 유언에 따라 고당봉에 산신각을 지어 1년에 두차례(정월보름날과 단오날)에 제사를 지내니 범어사가 아주 번창한 사찰이 되었다."
향토사학자는 이러한 사실을 들고, 고당봉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을 덧붙였다."고당(故堂)은 할미가 높은 곳에 앉아 있는 할미 당집이다. 고모영신은 그 품에 생산과 풍요를 안겨 주는 그 영원한 할미의 원력인 인신계통의 신령 여성신이다. 박씨 할미의 높은 덕행을 기리기 위해 인격신이 되어 금정산을 담당한 진호신(鎭護神)으로 모셔 백성의 한재 수재 병재 등이 발생되지 않도록 지금도 고당제를 지내고 있으며, 무속에서 인간을 돕고 수호하는 역할로 산신에게 경의를 표시하는 기도를 밤낮 올리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한때, 범어사의 젊은 스님들이 고모당에서 당제를 올리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당집을 훼손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뒤로 범어사에서 잇따라 좋지않은 일이 일어나 다시 고모당을 고쳐지었다고 한다. 사실여부는 알수 없으나, 고모당을 신성시하는 이야기 가운데 하나이다. 고당봉 전체는 거대한 암석들이 뒤엉켜 있는 암봉이다.
정상은 바위들로 뒤덮여 풀 한 포기 자랄 틈도 없고 고모당과 용호굴까지 암괴 속에 자리한다. 용왕샘은 금정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는 샘인데 온통 암괴 뿐인 곳에서 샘물이 솟아나고 있어 신비롭게 생각된다. 이 샘 역시 치성을 올리는 민중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 용왕샘(일명 고당샘) 좌우편에는 비록 상당한 거리를 두고는 있지만 유명한 금샘과 미륵샘이 있다. 금샘은 범어사 창건 관련 설화만이 아니라, 마치 기둥처럼 생긴 바위 위에서 솟아나는 샘이기 때문에 더욱 유명하다. 미륵사의 샘 역시 거대한 암괴를 뚫고 솟아나는 영험한 약수로 이름이 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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