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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불자님으로서 생활상에 어려운 일이 있을때 어?F게 해야 하는가? ◆
사람이 살아가는데 어려운 일을 만나는 것은 보통 두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는 생각과 행동에 잘못됨이 있을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능력, 행동능력이 부족할 경우입니다. 이 두가지 경우에는 대부분 어려운 일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하여 이러한 사실을 깊이있게 깨달아서 스스로 생각과 행동을 가다듬어 잘못됨이 없도록 해야하며, 불교의 수행을 쌓아 부족한 능력을 키워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깨달음과 수양이 부족한 상태에서는 어떠한 어려운 일을 만나게 될 수 있으므로, 그런 경우에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부족한 점을 크게 반성하여 부처님께 참회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 자신은 부처님께 소홀함이 있을지라도 부처님께서는 결코 불교 믿는 사람을 버리시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더욱 분발하여 용기를 가져야 하며, 평소보다 더 큰 신앙심을 일으켜서 자신의 수행에 더욱 신경을 써야합니다.
만약 실망하거나 마음의 중심을 잡지 못하면 그 어려움은 이겨내기 어렵다는 것을 명심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행하는 데 정성을 기울여 나가면" 자연히 지혜가 생기고 어떤 어려움이라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정성을 기울여 어려움을 이겨냅시다.>
◆ (2) 고통이나 어려움이 있을때 부처님께 의지하면 해결되는가?
<고통과 어려움.!>
이 얼마나 심각하고 절실한 말인가?
세상은 계속 변해가고, 우리 자신들의 마음 또한 안정되지 못하여 변해가는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할 때고통과 어려움이 따라다니는 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크나큰 걱정거리입니다.
괴롭고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우리들은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더 큰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살고있는 실정이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 이제부터는 너무 심각하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처님께 의지하면 되니까요.>
걱정이 하나 둘씩 생길때마다 불교를 믿는 사람이 부처님께 의지하고자 하는것은 자연스러운 마음이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진리 그 자체이신 부처님* 광대무변하신 법신 부처님* 무한한 광명이신 부처님* 영원한 행복의 주재자이신 부처님* 한량없는 은혜의 몸이신 부처님* 대자대비하신 부처님,...>바로 이러하신 부처님께 "온 몸을 바쳐 의지하면" 부처님께서 자상하신 손길로 우리들을 고통과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해 주십니다.
믿고 의지 하십시요, 반드시 해결해 드립니다.
<법화경, 약초유품>을 보면, 대지위에 비가 내릴때는 어느한곳 빠뜨림이 없이 촉촉히 내립니다.
큰 나무, 작은나무, 풀 한포기에도 공평하게 내립니다.이 나무는 모습이 뛰어나니까 많이 내리고 저 나무는 모습이 안좋으니까 적게 내리는 경우는 없습니다. 나무가 잘자라고 못자라고는 비가 차별되게 내린 탓이 아니라 뿌리에서 얼마나 충분히 빨아들여 영양을 공급하였나 못하여나가 문제가 될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부처님께서도 <대자대비* 영원한 행복* 한량없는 은혜* >를 한없이 언제 어느곳에든지 내려주고 계십니다. 부처님의 한량없는 은혜가 이렇게 충만히 내리는데도 우리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여 받지 못하고는 어리석게 한탄만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마음에 드니까 많이 주고 저사람은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적게 주는 경우는 절대 없습니다.
<무한한 광명* 영원한 행복* 한량없는 은혜*>를 골고루 내려주고 계십니다.
이 집에도, 저 집에도, 큰 건물위에도, 화장실 위에도,썩어 고인 물위도 차별됨이 없이 골고루 내려주고 계십니다.
이렇게 부처님께서는 골고루 내려 주시지만 그것을 우리는 차별되게받아 가집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우리들이 받을 마음의 그릇이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큰 그릇, 작은 그릇, 깨진 그릇등등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할 수 없이 "준비된 마음의 그릇" 크기만큼 받지를 못합니다. 자기 자신이 훌륭한 마음의 그릇을 준비하지 못하고서 차별되게 받았다고 원망을 하는 경우가 있으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입니까? <마음의 그릇>
그렇다면 이 마음의 그릇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진리 그 자체이신 부처님* 광대무변하여 어느곳 아니계시는 곳이 없으신 법신 부처님* 무한한 광명이신 부처님* 한량없는 은혜를 베푸시는 부처님*...>께 온 몸을 다 바쳐 귀의하며, 부처님과 내가본래 한 몸임을 믿어 내 자신이 부처님의 아들, 딸임을 믿고, 모든 사람이 더불어 영원한 행복의 길에 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하나의 행동이 바로 마음의 그릇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서야 이러한 것을 알고 느낀 우리는 행동 하나 하나마다 선행이 되어 차곡차곡 쌓여 훌륭한 그릇이 될 수 있도록 "계속적인 선행"을 해야할 것입니다.
선행을 하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훌륭한 그릇을 가질 수 있게 되고, 고통과 어려움은 우리에게 더 이상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설사 이 과정중에서 고통과 어려움이 생기더라도 대자대비하신 부처님께서 당신의 아들, 딸들이 훌륭하게 되고자 노력하는 것을 굽어 살펴 보시고, 근심, 걱정, 괴로움, 고통, 어려움 등를 해결해주실 것입니다. 또한 마음의 지혜가 적고 연약한 우리가 순수하게 부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깊고, 부처님의 보살핌이 있음을 깨끗하게 믿는 마음이 강하면 자연히 지혜가 커지고 약한 마음이 튼튼해져 고통과 어려움이 해결되는 것을 알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그릇을 훌륭하게 준비합시다.
온 몸을 다 받쳐 부처님께 의지하고 귀의 합시다. 이와같이 하기만하면 고통, 어려움, 더 나아가서 모든 일이 해결되는 불가사의를 한껏 느낄수 있을 것입니다.
★ (3) 부처님께 정성스럽게 하면 누구든지 복을 주는가? ◆
우리 불교는, 우리 불자들은 그 누구보다도 복을 받아야하고 번창해야 합니다. 그것이 부처님의 뜻입니다.
이 같은 부처님의 뜻을 잘 알아 부처님께 정성스럽게하면 복을 주는지 잘 알아 보기로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의 본질은 마음이며, 마음은 허공을 머금는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전 우주에 가득차 있는 마음에 이어져 있으며 이 마음이 바로 부처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은 부처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의 마음에 일어난 희망과 그에 대한 정성과 전 우주의 마음이신 부처님 마음과 연결되어 그 희망을 채워주려는 작용을 일으키고 끝내는 우리의 희망을 충족시켜 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반드시 감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희망은 헛되지 않으며, 우리의 정성도 또한 헛되지 않습니다.
이와같은 것을 이해한다면 우리들 개 개인이 모두 대우주의 거대한 생명의 흐름에 이어져 있음을 파악할 수 있으며, 그같은 사실에 눈을 뜨고 있다면 우주적 존재인 우리들에게 결코 가난과 불행은 존재할 수 없다는 진리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직 남은 것은 복을 받는 일만 남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부처님의 마음과 호흡을 맞추는 일입니다.
부처님의 마음과 호흡을 같이 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뜻에 합치되는 마음"을 찾는길 뿐입니다.
부처님의 뜻에 합치되는 길은 부처님께서 <무한한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는 대자대비하신 분>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일이며, 그와 같은 확신을 바탕으로 탐욕과 다툼과 갖가지 어리석은 마음을 버리는 일입니다. 다투고자하는 마음은 상대방을 미워하고 원망하는 등의 어리석고 부정적인 마음이 되어 결국 함께 진흙 구덩이로 빠지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목이 마를때 한 컵의 물이라도 두사람이 서로 빼앗으려는 마음을 내면 쏟아져 버리지만 "당신이 먼저 마십시오" 하고 둘이 사이좋게 나누어 마실 수 있습니다.
스스로를 복되게 하고, 이 땅을 복도게하고, 이사회를 복되게 하는 근본은 바로 이같은 마음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이같은 사실을 놓고 생각해볼 때 과연 우리들의 마음이 어떠해야 할 것인지는 분명해 졌습니다. 결국 복을 부르는 마음, 복을 받을 마음이 되면 복을 받을 것이고, 재앙을 부르는 마음, 재앙을 받을 마음을 지니면 재앙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남에게 이익이 가도록, 보탬이 되도록 작용하는 것이 자비요 사랑이라고 한다면 자비와 사랑은 복의 원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진실로 복이란 사랑과 자비, 지혜와 생명의 결정체이며, 단순한 사랑이 아닌 실천을 통한 사랑의 결실을 말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함께 영원한 행복을 얻어야 한다"고 가르침을 베푸셨습니다. 우리는<불자>입니다. 부처님의 아들, 딸입니다.
우리가 부처님께 지극, 정성을 다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아들, 딸들이 지극정성을 다 하는것도 포함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 안듣는 자녀가 있어도 부모님께서는 이해를 해주시려고 애씁니다.
말 잘듣는 자녀가 있으면 이것은 이해정도가 아니라 기특하고 너무 고마와 무엇인가 주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마찬가지로 생각해보면 우리 불자들은 부처님의 아들, 딸입니다. 그냥 아들, 딸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행복을 얻을 수 있도록" 애쓰고 노력하는 아주 말 잘듣는 아들이요, 딸입니다.
말을 잘 안들어도 귀엽다 하실터인데 이처럼 부처님 말씀을 잘 듣고 따르고 실천하는 우리들에게 어찌 복을 안 줄 수 있겠습니까?
한량없는 복을 주십니다. 너무 복에 겨워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복을 주십니다. 내가 부처님의 아들이요, 딸이듯이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도 아들이요, 딸입니다.
우리 모든 불자들은 결국은 한 형제요, 도반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 지극정성을 다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아들과 딸에게 지극정성을 다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부처님과 우리 모든 중생은 결국 한 집안 식구이기 때문입니다.
주변의 모든 중생에게 이익이 가도록, 보탬이 되도록해주는 이 지극 정성심을 보시고 부처님께서 어찌 우리를 기특하게 아니볼 수 있으며 , 어찌 복을 아니 주실수 있겠습니까?
비가 골고루 내리듯이 지금도 한량없는 복이 내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자신들입니다. 복은 한량없이 내리는데 우리는 그것을 받을 그릇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준비를 하더라도 아주 작은 그릇만 준비했습니다. 이 그릇은 우리의 마음의 크기에 달려 있는데 아직 우리는 마음이 굉장히 넓거나 남을 이해하는 마음이 크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현재 가지고 있는 조그만 그릇으로 복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복을 조금 밖에 주지 않는다고 부처님께 투정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너무 사랑스러워 한량없는 복을 주시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가 욕심스럽고, 다투고, 어리석은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넓지 못하여 마음의 그릇이 크지 못해서 복을 얼마 담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다만 나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부처님께 지극정성해야 한다는 것 더나아가 부처님 아들, 딸들이 내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되도록, 보탬이 되도록 지극정성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부처님의 대자대비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꾸준히 계속하면 언젠가 내 마음의 그릇이 커질 것이고 한량없는 복을 마음껏 누릴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부처님께 지극정성 하겠습니다.>
<부처님의 아들이요, 딸들인 내 주변의 모든 이에게 자비를 베풀겠습니다.>
<마음을 넓게 가지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주신 한량없는 복을 누리겠습니다.>
◆ (4) 불교를 믿으면 잘 살 수 있는가. ◆
이것이 불교를 믿는 우리 불자들의 최대의 관심사입니다.
"과연 잘 살 수 있나? 글쎄 불교을 믿는다고 잘 살 수 있다면 누구나 불교을 믿게?"
"불교을 믿어서 잘 살게 됐나? 내가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잘 살게 됐지."
이러한 나약한 생각과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습니다.
또한 "불교를 믿고나서 부터 건강도 좋아지고 돈도 많이 벌게 됐어."
"불교를 믿기 전에는 못 살았는데 불교를 믿고 난 뒤부터 잘 살게 됐어."
이러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것이 진실에 더욱 가까울까요?
불교가 빈곤을 미덕으로 삼는 종교인 줄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불교는 현실을 무상한 것으로 보고, 재물을 부정하는 종교가 아닌가?"하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읍니다. 상당히 많습니다. 이와같은 사람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천부당 만부당 잘못 이해하고 계신 분들입니다.
<금색왕경>이라는 경전을 보면.!
"가난하게 사는 고통이야말로 어느 고통보다 무거운 고통이며 죽음의 고통과 다를 바가 없다. 차라리 죽음의 고통을 당할지언정 가난하게 살기는 어렵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부처님께서는 결코 가난을 미덕이라 말씀하신 적이 없읍니다. 모든 우리 중생들에게 "번영하라* 번창하라* 나의 문안에 들어오는 모든 자들이여! 그대들은 영원한 즐거움(열반락)을 누리리라." 하셨습니다.
불교의 기본 입장은 번영과 발전입니다. 번영하고 발전해야 불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코 가난속에 미덕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허술한 집에 살고, 누더기 옷을 입으며, 굶주린 배를 쓸어 않고 이곳 저곳을 방황하기 위해 이 땅 위에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오직 부처님의 문중에서 더욱 풍요롭고 영적으로 진화된 생활을 위해 이 곳에 태어난 것입니다.
"재물을 가까이 하지 말라" 는 소승적인 가르침은 재물을 오용하거나, 악용하거나, 남용하거나, 부정적인 방법으로 긁어 모으는 것을 경계한 말이지, 재물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돈이란 더러운 것도 또한 깨끗한 것도 아닙니다. 돌고 도는 것입니다. 불교의 원리가 인연법에 의해 순환의 원리이듯이 돈의흐름도 순환하는 것입니다 근면성실로 열심히 벌어 멋들어지게 보시하는 것, 멋들어지게 다른 이에게 회향하는 것, 멋들어지게 모든 것을 돌리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입니다.
혹시 가난을 미덕으로 아는 불교인이 있다면 그는 부처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언가 있어야 베풀 것 아닙니까? 혹시 마음으로 보시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고 반문한다면 이렇게 말해줄 수 있읍니다. 생활에 찌들고 겨우겨우 살아 가는데 그 마음이 얼마나 크고 넓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흐름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이 형성되지 않았고, 세상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데 그 마음이 어찌 제대로 된 것이라고, 그다지도 쉽게 마음으로 보시하면 된다고 말할 수 있읍니까?
물론 수행을 열심히 하여 눈이 뜨이고 마음이 풍족한 상태가 된 구도자는 얼마든지 마음 법문으로 보시할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일반생활에 얽매어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마음마저도 바람직스런 방향으로 형성되지 못한 것이 상식 일 진대 어찌 그렇게도 쉽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이제 이 세상에서 부자가 될 권리와 의무가 있읍니다. 만약 스스로가 부자가 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음에도 그를 실현하지 않는다면 그는 삶의 의욕을 상실한 자이고 진정한 불자라 할 수 없읍니다.
부의 원천은 부유한 마음에 있읍니다. 모든 인간은 풍부하고 행복하며 열반락을 얻을 권리가 있읍니다.
만약 이 세상의 참된 실상을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무한한 보물창고를 열 수 있읍니다.
<법화경>의 "장자* 궁자의 비유" 에 보면 모든 사람들이 다 무한한 보배(불성)을 지니고 있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할 수 있음에도 그것을 모르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또한
<법화경> 의 "무가보주의 비유" 에도 그와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량없는 무한한 값어치를 갖고 있는 보배를 내자신이 갖고 있음에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훌륭한 삶을 살아가지 못해서 그렇지, 이 사실을 알고 열심히 노력만 한다면 보물창고를 열고 얼마든지 잘 살 수 있고 훌륭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부(富)를 증오하지 맙시다. 부조차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물론 부정적인 방법으로 탐욕스럽게 재물을 끌어 모으는 사람들도 있읍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근면* 성실한 가운데 부를 쌓아가고 있읍니다.
헐뜻고 비난하고 사회의 모든 현상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만을 가진 사람에게는 재물은 결코 손을 내밀지 않읍니다. "나는 왜 이렇게 못났지, 아무리 노력해도 내 능력은 요 정도 밖에 안돼, 돈이 원수야!!"등등 스스로의 능력을 평가하고 불신하는 사람에게는 재물은 결코 따라 다니지 않읍니다.
"마음이 밝고 명랑하고 부유한 자는 더욱 더 큰 부 가 가해지며, 불평불만과 결핍감 속에서 사는 자는 더욱 더 큰 결핍이 가해진다." 는 말이 있읍니다. 그러니
부유한 마음을 가지고 불평불만에서 벗어나십시요. 결코 나약한 인간이 되지 맙시다.
이제 우리 불자들은 이같은 것을 명백히 이해 하고 받아들여, 결코 남을 시기하거나 질투하는 마음을 털어 내고 부를 건설해야겠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통해 이 세상에 "베푸는 마음" 이 가득한 불국토를 가꾸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부라는 것은 혼자 갖고 있으면 더 이상 부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베풀어야 합니다. 베풀어야 진정으로 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풀면 베풀수록 마음이 흐뭇합니다 마음이 저절로 풍족해집니다. 재물이 풀족해 베푸니 마음도 또한 풍족해집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부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바세계는 더 이상 약육강식의 세계가 아닙니다. 투쟁의 세계가 아닙니다. 서로 살리고 벙영의 길로 이끌어가는 화합의 세계입니다. 근면 성실로 모은 부를 온 세상에 베풀어 주는 불국토의 세계입니다.
이와같은 길로 나아가는 불자는 진정한 의미에서 스스로의 능력을 확신하고, 스스로가 무한한 보배창고의 열쇠를 지닌 존재임을 투철히 자각한 사람입니다.
부처님께서 이 땅 위에 오신 이유는 모든 인간들에게 스스로가 나약한 피조물이 아닌 대우주의 진리를 머금은 실존적 실체임을 드러내 보여 엄청난 부와 번영을 베풀어 주려 오셨다는 말씀을 믿고 따르고 생활하는 불자가 있다면, 그는 진정코 멀지않은 장래에 부를 두손 가득히 움켜질 수 있을 것입니다.
"확신하십시요, 잘 살 수 있읍니다. 반드시!!"
◆ (5) 부처님께 참회하면 죄가 없어지는가? ◆
참회라는 것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뉘우치고 살피며, 앞으로는 결코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현재의 잘못을 고쳐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당나라의 의정대사는 참회의 뜻을 구별하여 "참"은 단순히 용서를 비는 가벼운 뜻이 있고 "회"는 다른 사람에게 자기의 죄를 고백하여 죄를 없애는 중요한 뜻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와같은 참회하는 방법은 부처님 당시부터 시작되었는데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이 죄를 범하였을 때 그 전부의 참회를 행하게 하였는데, 정기적으로는 보름마다 "포살"을 하며, 안거의 막지막날 "자자" 를 하였습니다.
이때 자기 자신들의 과거를 뉘우치고 불, 보살, 대중앞에 나아가 자기의 죄를 고백하며 예를 올리는 것으로써 죄가 없어지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듯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지옥에 가야만 한다고 했는데 그 말씀이 결국 예삿 말씀이 아니셨음을 느끼게 합니다.
끊임없이 죄를 짓고 참회를 모르는 중생들이 이 세상에 가득해 항상 부처님께서 슬퍼하신다는 말씀이 가슴에와 닿기도 합니다. 죄와 벌ㅇ이 도가니 속에서 허우적대는 중생들을 바라보며 부처님께서는 참으로 안타깝고 괴로운 마음이 되셨을 것으로 믿어집니다.
"사람이 먼저 악을 저질렀어도 선한 힘으로 그것을 없애면 구름 사라진 뒤의 달과 같고 능히 뉘우치면 선이 되어서 공덕을 잃어버리지 않나니, 참회가 있는 사람은 선한 법이 있고 참회가 없는 사람은 짐승과 같다."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는 항상 우리 죄업 중생들을 위하여 참회를 강조하셨습니다.
"고백된 잘못은 이미 절반이 시정되었느니라. 고백된 과오는 새로운 미덕이다. 알고 잘못을 저질러 참회심이 없으면 악인이라 아니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의 삶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진정한 참회를 통하여 끊임없이 정화되고 세척되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항상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는 삼요소를 말과 생각과 행동이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릇된 말과 행동과 생각을 통한 부정적인 업을 경계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말* 행동* 생각*<신(身)* 구(口)* 의(意)*>3업 으로 죄를 짓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이 온통 죄로 물들어 모든 사람들의 말과 행동, 생각이 혼탁해져서 위험한 지경에까지 도달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와같은 상황에서 우리 불자들은 항상 참회하는 마음을 가지고 생활해야 합니다. 악행을 했으면 참회하십시요.
그리고 악행을 더 이상 하지 마십시요. 그래서 이러한 삶을 통해 악업을 소멸시켜 가야만 할 것입니다.
마직막으로 부처님의 참회에 대한 말씀을 들어 봅시다.
"하루에 자주자주 자신을 돌아보라.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면 세수하고 집안을 청소하고 손이 더러우면 씻을 줄 알면서, 마음에 끼어있는 때는 왜 씻을 모르는가? 하늘 가득한 허물도 뉘우칠 마음을 지닌 사람에게는 새벽안개와도 같다. 정직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감추는 사람이고, 진실한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그것을 참회하는 사람이다."
" 참회 합시다."!
" 죄를 소멸합시다."!
◆ (6) 무슨 목적으로 절에 다녀야 마땅한가? ◆
절이란 곳은 원래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전달하는 곳이며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수도하는 곳으로 만들어진 것이므로 절에 다니는 목적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기 위한 것이며, 그 가르침을 익히는 수련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자가 절에 가면 마땅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데 힘써야 하며, 오로지 그 가르침에 대하여 깊은 믿음을 가지고 마음을 수양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기본적인 실습을 하는데 성를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불자라면 절에 가서는 반드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배우는 데 힘을 기울여야 마땅한 것임을 알고 다 같이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 (7) 부처님의 경전을 오우면 무엇이 좋은가? ◆ 수행의 길은 많이 있지만 근기에 따라 해야만 성취가 빨리 이루어집니다. 참선이나, 독경이나, 염불이나, 모두 성불해 가는 과정에서 수행방법상 차이가 있으나 마침내 성불하는 데 있어서는 다 ??이 하나로 회향 된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빠르고 늦은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근기가 수승한 최상근기는 한 생각 화두를 일념으로 들어가 모두 깨달아 가고, 지혜가 수승한 근기는 부처님의 일대시교를 열람하여 지혜를 닦아 깨달아 가고, 믿음이 투철한 근기는 오직 한 마음으로 염불기도하여 깨달음을 성취시켜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것을 잘 알고 독경 즉 경전을 읽고 외워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경전은 부처님의 거룩한 가르침을 기록한 것으로써 곧 진리이며, 우리 불교에서는 법보라하여 부처님과 같은 신앙의 대상으로 받들고 있읍니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경을 읽음으로써 부처님의 교훈을 항상 되새기며,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바를 받들어 지키고 수행을 쌓아 생활에 밝은 지혜를 얻어 마침내는 모든 괴로움에서 풀려나 성불할 수 있는 길로 나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불교를 믿는 사람이 부처님의 경전을 읽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수행법의 하나인 것입니다. 믿는 마음과 정성스럽고 경건한 마음으로 항상 부처님의 경전을 읽고 외우면 자연히 그 마음이 깨끗해지고 안정되며 모든 일에 참는 힘이 생깁니다. 또한 계속적으로 하다보면 경전의 뜻을 알게되는 지혜가 싹트게 되므로 생활하는 데 있어서 여러가지 괴로움이 있는 일을 잘 해결해 나아가는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경을 인연으로 해서 깨달으신 스님들이 많이 계시니, 저 유명한 육조 혜능스님도 시장에 나무 팔러 갔다가. <금강경> 읽는 소리에 깨우쳤다고 합니다.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는 한 마디에 깨달음을 얻은 것입니다. 그 뒤에 황매산에 5조 흥인대사를 찾아가 법을 이어받아 천하에 제일가는 스님이 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경을 읽는 공덕은 또한 한량이 없다고 했으니, <금강경>에 "세상에 수미산보다 높은 금은보화로 보시 한다해도 무상의 진리를 담고 있는 금강경 사구게 한귀절을 읽고 외워 그 뜻을 펴는 것 보다 뛰어나지 못하다" 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경을 읽는 공덕은 깊고 깊어 신묘하여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항상 부처님을 생각하고 그 깨달음을 염원하며 지극정성으로 일념된 마음을 가지고 경을 읽으면 그독경의 공덕이 나타납니다. 독경(경을 읽음)은 과거세와 현세와 미래세의 어려움과 재액을 소멸시키는 무량한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삼보에 귀의한 후 진실되게 의지하면서 독경하도록 가르치고 계십니다. 진실한 진리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경을 읽는 공덕은 진실 자체 속에 있는 힘에 의해 성취되는 것입니다. 또한 좋지 못하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옛날에 어떤 사미는 스승이 경 읽는 것을 흉내내며 개 짖는 소리를 냈다가 그만 후생에 개의 몸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경을 존중하고 정성스럽게 진실도게 독경을 귀히여겨야 할 것이요 함부로 대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서산대사는 독경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경을 들으면 귀를 거친 인연도 있고 따라서 기뻐하는 복도 짓게 된다. 물거품같은 이 몸은 다할 날이 있으나 참다운 행실은 없어지지않는다." 고 하셨으며 덧붙여 말씀하시기를 "경을 보되 자기의 마음 속을 향하여 공부를 지어가지 않으면 비록 만 권의 장경을 읽어도 아무 이익이 없다." 고 하셨으니 우리는 서산대사의 말씀을 항상 잊지 말고 지극정성으로 경을 읽어야겠습니다. 온세상의 이치를 다 담고 있는 부처님 경전을 부지런히 읽어서 공덕을 닦아 마침내 성불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모두 지극정성 일념으로 경전을 읽고 외워 봅시다."
◆ (8) 부처님 경전을 아무 뜻도 모르고 읽어도 효과가 있는가? ◆ 불교를 믿는 사람이 불경을 읽는 것은 마땅히 해야하는 신행상의 일과인 것이며, 또한 수행방법의 하나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뜻을 알던 모르던 정성을 다하여 순수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교를 믿는 사람이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경전을 읽을 때는 뜻을 알고 읽어야 한다느니, 뜻을 모르고 읽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느니 하는 따위늬 생각으로 분별하고 시비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다만, 한 귀절 한 귀절이라도 모두가 부처님의 거룩하신 가르침의 말씀이라는 것을 순수하게 믿고 공경심을 내어서 정성스럽게 읽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계속 일념으로 읽어가면 자연 아음이 깨끗해지며 자기 자신도 모르게 지혜가 생겨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뜻을 저절로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지혜가 있어서 경전의 말씀을 이해하고 그 뜻을 알면서 읽으면 더욱 좋지만 경전의 뜻을 안답시고 글귀의 해석이나 알고 부처님의 말씀하신 참된 속 뜻을 모르고 잘못 읽으면, 오히려 뜻을 모르고 순수한 마음으로 읽느니만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불자들은 아무런 부담도 갖지말고 오직 정성스런 마음을 가지고 일념으로 경을 읽으면 좋은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을 반드시 믿으십시요. " 불* 보살님의 가피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 오직 믿으십시요."! " 경을 읽으십시요."! " 좋은 가피가 있음을 믿으십시요."!
◆ (9) 일반 가정에서는 어떤 경을 읽어야 좋은가? ◆ 불교의 "경"은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므로, 경을 읽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혀서 잊어버리지 않고, 항상 생활하는 가운데 실천할 수 도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은 가정에서 읽는 것 따로, 절에서 읽는 것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자신이 읽을 수 있는 능력에 따라서 알맞는 것으로 선택하면 되는 것이지 특별히 좋고 나쁜 것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교의 불자로서 신앙 생활을 하는 데는 수시로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경전을 읽으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워서 생활에 실천하여 밝은 지혜를 얻어가는 것이 본분이므로, 일상생활 가운데 언제든지 경을 읽거나 혹은 염불하거나 혹은 참선을 하는 시간을 가져야 수행생활에 보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반 가정에서 능력에 따라 읽을 수 있는 경은 보통 반야심경 * 천수경 * 금강경 * 관음경 * 아미타경 * 법화경 * 능엄경 * 원각경 * 법구경 * 백유경 * 숫타니파아타경(경집) * 지장경 * 사십이장경 *등이 있습니다.
◆ (10) 칠성과 산신 신앙은 불교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 불교가 여러 나라로 널리 전파 되면서 포교를 하는 초 창기에는 그 지방 사람들이 믿고 있던 갖가지 많은 토속신앙과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을 거쳐 내려오는 동안 불교의 근본도리에 입각하여 그 지방의 토착신앙을 불교에 흡수시켜 불교의 신앙으로 변형시켰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칠성신앙과 산신신앙 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절에 가보면 어느 곳이든지 칠성각, 산신각 등이 없는 곳이 없는데, 이는 불교가 뿌리를 내리면서 민속신앙, 토착신앙을 받아들인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는 본래 진리의 깨달음과 참된 삶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그 당시의 시대성과 주변 환경 및 각 지방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을 무시하지 않는 지극히 인간적이고 생활적인 특성을 가진 종교입니다. 그래서 옛부터 내려오는 생각과 그 지방의 생활풍속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도 그것들을 무조건 배척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모두 포섭하여 불교의 한 방편으로 쓰여지게 하는 특성을 가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교는 모든 나라에 있어 왔던 종래의 풍속과 신앙을 버리지 않고 동화시켜 포용하는 훌륭한 태도를 견지하여 왔던 것입니다. 여기에 불교 나름의 독특한 역사성과 진리성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칠성 신앙은 본래 북두신군을 신앙하는 도교 신앙이었으나 불교에 흡수된 신앙입니다. 도교의 북두신군이 불교의 치성광여래불의 보좌관 격으로 <북두대성 , 칠원성군>이라는 호칭을 얻어 불교 안으로 흡수되었습니다. 또한 후대가 되자 불교의 화신설에 근거하여 북두신군을 인간의 수명과 복록을 맡은 보살의 화현으로 보는 상태로 발전하였는데 칠성불공 올릴 때 *가영" 탄백에 보면 " 옛 성인은 자비심을 일으켜 북두칠성으로 화현했으니...."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이와 같은 경우를 놓고 볼 때 칠성신앙은 완전히 불교신앙의 한 형태로써 굳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칠성신앙은 현재 우리 불교 불자들 사이에서 아주 친근한 신앙 형태로 나타나는데,그 이유는 북두대성 칠원성군이 현세에서 일어나는 모든 재난을 관장하며, 특히 "출산과 수명"을 관장하고 있다고 하는 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한 사월 초파일이 불교의 가장 큰 명절이라면 그 다음의 명절이 바로 칠성신앙과 관계있는 칠월칠석인데서 그 이유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 점으로만 보아도 우리 불교의 불자들 사이에서 칠성신앙이 얼마나 깊고 넓게 자리잡고있는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산신신앙은 본래 옛부터 세계 각지에서 성행하던 산악신앙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옛날 사람들에 있어서는 산악은 신들과 정령들이 사는 성스러운 곳으로써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국토의 절반 이상이 산이므로 옛부터 이 산악신앙이 성행하였습니다. "신라시대"에는 삼산오악(三山五岳)신앙이 있었는데, 이는 신라의 호국신이 머무는 내림산* 혈례산* 골화산의 삼산과 토함산* 지리산* 계룡산* 태백산* 팔공산의 오악에 정규적으로 제사를 올렸읍니다. "고려시대"에도 역시 산신제를 지내는 등 산신신앙이 대단했으며 "조선시대"에 와서는 거의 모든 마을의 산마다 산신당을 두거나 산신에게 제사드리는 행사가 유행했습니다. 이러한 산신신앙은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이 산신신앙이 더욱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산이나 바위 등으로 막연하게 생각되었던 산신이 불화*탱화의 형식을 빌어 산신의 화상이 제작되면서 더욱 구체화 되었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인 신앙예문인 산신유치*청사가 제작 되었습니다. 산신에게는 <산왕대신>이라는 거대한 칭호가 주어졌으며, 이 산왕대신을 모신 곳은 <산신각, 산령각>이라 하여 거의 모든 절마다 높고 외진 곳에 필수적으로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이와같이 이 산신신앙이 완전히 불교 속으로 들어오면서 산신불공, 산신기도의 형태로 오늘도 불자님들 사이에서 널리 행해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칠성신앙과 산신신앙의 경우에서 보듯이 불교는 그 시대, 그 지역을 교화하여 시대와 지역에 알맞는 독특한 나름대로의 불교를 나타내지만, 그 근본정신은 결코 변질됨이 없는 것 입니다. 이것은 불교가 종교 일반을 포함하고 포용하는 초 종교적인 정신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한량없는 대자비와 모든 중생을 인도하고자 하시는 마음은 일반 중생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방편으로써 더우기 한 민족의 정신적, 문화적인 지주로서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포용하는 모습이 불교의 한 부분으로 존재하였기 때문이며 우리 조상들로부터 거리감없이 받아 들여질 수 있던 이유가 바로 이 포용의 정신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불교의 근본도리를 정확히 깨달을 수 있다면 칠성신앙과 산신신앙의 불교의 신앙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도리를 투철히 깨닫지 못했다면 불교신앙이 아니라고 서투른 소리가 나옵니다. 칠성신앙과 산신신앙은 더 이상 다른 신앙이 아닙니다. "불교신앙입니다."! 깨닫지 못하여 과연 그런 것인지 아니면 다른 것인지 모르겠으면 우선 확인하십시요. 불교신앙이라고!! 그리고 세월이 흘러 부처님의 가르침을 근본도리를 알때가 오면 그때는 이해하실 것입니다.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입가에는 빙그레 미소를 머금고 말할 때가 오겠지요. " 아! 칠성신앙과 산신신앙은 불교신앙이었구나, 하고."!!!
◆ (11) 불상이 생기게 된 동기와 유래를 알고 싶습니다.? ◆ 부처님께서 성불하신 후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인도지역을 두루 돌아다니실때, 우전국의 우다야나 라고 하는 왕은 부처님께서 그 곳에 머물러 계시는 동안, 아침. 저녁으로 부처님을 찾아가 예배하고 법을 물었습니다. 그러다가 부처님께서 다른 곳으로 설법하러 가셔서 석 달이나 오시지 않자, 우전국의 우다야나 왕은 너무나도 부처님이 뵙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왕은 조각하는 사람에게 "전단향" 나무로 부처님과 똑같은 모습을 조각하도록하여 부처님께 하듯이 매일 불상에 예배드리며 마음의 위안을 얻고 있었습니다. 얼마 후 부처님께서 돌아오셨을때, 왕은 부처님께 말씀 드렸습니다. " 부처님!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저처럼 부처님을 뵙고 싶을때, 불상을 만들어 모시고 부처님을 생각하여 예배하면 어떻겠습니까?" 왕의 말을 들으신 부처님께서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되어 허락을 하셨습니다. 이때부터 불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불상 숭배의 전통이 생겼다고 합니다. 우리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모든 인류에게 둥글고 밝은 빛이 되어 주심에 감사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불상에 절을 하는 것이며, 불상은 올바른 마음의 상징이므로 더욱 열심히 부처님을 믿고 그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한 다짐을 나타내는 하나의 예의로 경건하게 절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 (12) 불상을 모시지 않으면 안되는가? ◆ 불교에서 불상을 모시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치신 법이 부처님의 생존시처럼 지켜질 수 있는 마음을 내도록하기 위함이요, 불상을 거룩하게 잘 모심으로써 그 불상을 대할 때마다 부처님이 생존하여 계시는 것처럼 여기고 수행을 잘하고 신심을 더욱 크게 내도록하기 위한 것이므로 불상을 모신곳을 볼때마다 부처님의 가르치신 법을 잘 배우고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현재의 말법시대에는 사람들의 지혜가 얇고 신심이 약하고 무디무로 불상을 법도에 맞게 잘 모시면 그 불상의 거룩한 모습의 힘으로 신심을 내게되고, 또한 부처님을 공경하는 마음이 생겨 수양할 수 있는 근본적인 지혜의 힘이 점점 늘어나므로 지극한 마음으로 불상에 대해 경배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 (13) 불상 앞에 절하는 것은 우상숭배인가? ◆ 불교에서 불상을 모시는 것은 부처님의 거룩하신 행동을, 불상을 대할때마다 되새기며 수양을 쌓아 가려는 뜻으로 모시는 것이며, 또한 믿음이 적은 사람들이 불상의 거룩한 모습을 보며 싱심을 더욱 깊어지게 하려는 뜻으로 모시는 것이기 때문에 불상은 우리들의 마음을 비추어 보는 거울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불상 앞에 절하는 것은 결코 그 불상에다 절하는 것이 아니고, 진리(법) 그 자체이신 부처님의 거룩하심에 대하여 예배함으로써 공경심을 길러내고, 자신의 마음가운데 자만심(자존심, 거만심)을 꺽어버리는 수행을 하는 것이므로 우상숭배와 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우상숭배란 말은 학술적으로 보면 " 특정한 물체에 대하여 특정한 가치를 인정하고, 그 물체로부터 복이나 화를 받는다고 믿는것" 을 뜻합니다. 그런데 불교는 결코 우리 마음 밖에서 신앙의 대상을 찾지 않는 것입니다 우주에 두루하여 계신 부처님이 어찌 특정한 물체에 국한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은 원래 진리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어떤 모양을 가지고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우리 모든 사람의 마음에 이미 와 계십니다. 마음 밖에서 새삼스러이 찾아 헤매일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그 모양없는 부처님을 뵐 수 있는 지혜의 눈이 열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진리 그 자체이신 부처님을 석가모니 부처님의 모습에 견주어서, 우리가 볼 수 있게 조성해 모신 분이 <불상>인 것이지, 물체인 불상 그 자체를 신앙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들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태극기를 지극히 소중히 다룹니다. 그러나 그 태극기도 과학적으로 분석하면 헝겊에 물감 칠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건의 가치로 보면 헝겊조각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헝겊에 물감 칠한 태극기를 통해서 조국을 봅니다. 그 깃발을 통해서 우리 조국을 본다는 것이 우상 숭배일수 있겠습니까? 그 깃발이 바로 조국을 상징하는 까닭에, 그 앞에 경례를 올리고 애국심을 다짐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결코 헝겊조각에 경례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이 조국에 대한 마음의 표시인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이 조국에 대한 마음의 표시인 것입니다. 그와같이, 우리는 불상을 통해서 부처님을 뵈옵고 불상에 예배 드림으로써 진리 그 자체이신 부처님께 예배드리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어떤물질이나 물체를 숭배하는 것이 아님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불교를 우상숭배라 하는 것은 너무 피상적으로만 본 무식한 말임을 일깨워 주어야 힙니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 말입니다만, 참으로 우상숭배는 기독교인들이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신앙의 대상으로 내세우는 창조주는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물주가 이 세상을 만들어 놓았다는 말은 너무도 허망한 말에서 유럽, 미국 등의 여러나라 학자(신학자, 역사학자, 과학자, 철학자,등)들의 모임에서 회의를 통해 그말을 모두 부정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앞으로의 미래세계는 기독교의 논리로는 더 이상 사람을 이끄는 교리가 될 수 없다. 사람을 영원한 행복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유일한 종교는 불교 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리며 불교에 모든 관심을 갖기로 회의를 마쳤습니다. 우주과학에서 이미 증명한 " 있지도 않은 존재를 절대 신으로 모시는 신앙" 이야말로 마음속 깊이 파고든 우상숭배라고 그들에게 자신있게 일깨워 주십시요.
◆ (14) 불자님들은 전쟁을 어떻게 보아야 하나요? ◆ 전쟁이란 서로 싸우고 죽이고 파괴하는 행위이므로 원칙적으로 좋은 일이 아닙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어쩔수 없이 수많은 생명이 죽게되며 산천초목 등 모든 주변환경이 부서지고 망가지고 생활하는 데에 엄청난 지장을 초래합니다. 더 나아가서 생활이 극도로 피 폐해지므로 사람의 인심이 흉흉해지고 서로가 서로를 돕는 마음가짐 대신에 서로를 불신하고 미워하며 해를 끼치는 일이 많아지게 됩니다. 그래서 불자들은 전쟁을 좋지 않은 것으로 보며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좋지못한 생각 "사견(邪見)을 가지고 무고한 인간을 죽이고 사회의 질서를 파괴하여 온갖 악한 짓을 다하는 법의 파괴자의 침략이 있을 때, 불제자들은 언제나 정의로운 마음으로 침략자들을 막아 나라와 민족을 수호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정신은 파사현정의 깊은 자비심에서 우러나오는 보살의 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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