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직원이 지난 주 '문수사'에서 찍은 사진>
소설가 정찬주(57)씨가 지난달 입적한 법정 스님의 일생을 그린 『소설 무소유』(열림원)를 냈다. 정씨는 1984년부터 샘터사 편집자로 일하며 스님의 책 10여 권을 만든 인연으로 계를 받고 재가 제자가 됐다. ‘세상에서 살되 물들지 말라’는 뜻으로 ‘무염(無染)’이란 법명도 받았다.
『소설 무소유』는 덕조·덕현 등 상좌 스님들이 감수하고 추천사를 썼다. 법정 스님 추모 열기를 타고 관련 책이 여러 종 나왔지만 이 책이 달리 보이는 까닭이다. 책에는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법정 스님의 일화가 여럿 담겼다.
법정 스님이 열반에 들기 며칠 전, 스님의 속가 어머니와 유일한 형제인 여동생이 찾아왔다. 스님은 여동생에게 “꿋꿋이 살라”는 말씀을 남겼다. 평소 글에서 단 한번도 언급하지 않았던 여동생이었다.
‘청년이 인정하는 어머니는 여동생이 생기기 전의 어머니였다. 밭을 매면서도 치마 끝에 흙을 묻히지 않는 정갈한 어머니였다. 청년이 4살 때 병으로 돌아가신 아버지 제삿날에 정성을 다해 상을 차리는 어머니였다.’(25쪽)
스님이 고교생일 때 어머니는 여동생을 낳았다. 사춘기 소년의 가슴엔 수치심이 자리잡았다. 그러나 출생부터 손가락질 받았을 여동생의 삶은 오죽했겠는가.
스님은 강원도 오두막에 여동생 또래를 연상시키는 단발머리 소녀를 그린 박항률의 ‘봉순이’를 한동안 걸어뒀다.
작가 후기에서 정씨는 “단성사에서 영화 ‘서편제’를 보는 중에 스님께서는 손수건을 꺼내 들고 자꾸 눈물을 훔치셨다”며 “오누이가 나오는 영화였기에 더 각별하게 보셨던 것 같다”고 적었다.
전남 송광사 불일암 시절 스님은 서울에 나올 때 조조 영화를 즐겨 봤다. 영화를 좋아한 스님은 손수 만든 의자에 ‘빠삐용 의자’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빠삐용이 절해고도에 갇힌 건 인생을 낭비한 죄였거든. 이 의자에 앉아 나도 인생을 낭비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보는 거야.’(204쪽)
지금껏 알려진 공식적인 스님의 출가 이유는 ‘동족상잔의 비극’이다. 그러나 작가는 감수성이 예민하던 스님에게 가난도 출가의 배경이 되었으리라 짐작한다. 공부를 잘해 해남에서 목포의 중학교로 유학을 갔지만, 작은아버지가 제때 납부금을 보내주지 않아 울며 집으로 찾아온 일화가 있다. 고교 시절엔 인쇄소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었다. 대학교 3학년 때 학업을 중단하고 출가해서야 고학의 고달픔에서 벗어났다.
가난하던 스님은 『무소유』로 엄청난 인세를 ‘소유’하게 된다. 그런데 그 많은 수입을 어디에 썼을까. 스님은 가난한 대학생들에게 남몰래 장학금을 줬다.
‘학생에게 학비를 보낼 뿐 절대로 찾거나 부르는 법이 없었다. 학생 통장으로 송금하면 그만이었다. 자신뿐만 아니라 학비를 받는 학생들도 세상에 드러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207쪽)
그런데 그 비밀은 1993년 금융실명제로 인해 드러났다. 통장 잔고가 몇 십원 뿐이던 스님에게 엄청난 세금이 부여됐던 탓이다.
보통학교(초등학교) 5학년 때 일본인 행세를 하며 조선말을 못 쓰게 하던 조선인 교사를 비아냥거렸다가 잔인하게 맞은 일화도 있다. 교사는 자동차 타이어로 만든 슬리퍼를 벗어 피가 터지도록 무자비하게 후려쳤다. 당시 싹튼 폭력에 대한 저항의식은 훗날 함석헌·장준하 등과 반민주·반독재 운동을 한 심리적 배경이 됐다는 것이다. 작가는 후기에서 책을 쓴 이유를 밝힌다.
‘어떤 이는 스님의 저서들을 보고 스님이 글만 쓰는 문인인 줄 안다. 한마디로 큰 오해다. 스님이 글 쓰는 시간은 하루 한두 시간에 불과하고 종일 정진하시는 참 수행자였다는 것을 모른다. 스님은 정작 책의 지식에 중독되지 말라고 하셨다. 스스로의 침묵과 체험에서 얻는 지혜를 강조하셨다.’
소설은 법정 스님의 ‘무소유’가 어떤 배경에서 나왔는지, 또 어떻게 실천하고 가셨는지를 오롯이 보여준다. 28일 순천 송광사에서 열리는 49재가 끝나면 스님의 유골은 불일암 인근에 뿌려진다.
이경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