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옹진군 연평도 (延坪島)
인천광역시 옹진군 연평면에 있는 섬.
내용
대연평도와 소연평도로 나뉘어져 있다. 대연평도는 인천에서 서북쪽으로 약 83.2㎞
떨어져 있다. 대연평도에서 남쪽으로 약 5.2㎞ 지점에 소연평도가 있다. 대연평도는
동경 125°45′, 북위 37°65′에 위치하며, 면적은 7.0㎢이고 해안선 길이는 16.6㎞이다.
소연평도는 동경 125°45′, 북위 37°56′에 위치하며, 면적은 0.24㎢이고 해안선 길이는
5.5㎞이다.『고려사(高麗史)』·『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신증동국여지
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의 문헌에는 연평(延坪), 연평평(延平坪) 등으로 표기되어
있다. 섬의 지형이 대체로 평탄하고 들판처럼 길게 뻗어 있어 유래한 지명이라고 한다.
전체적으로 삼각형의 저평한 구릉성 산지(최고 높이 127m)로 이루어져 있다. 해안은
주로 암석해안으로 연안에 간석지가 넓게 분포한다. 1월 평균기온은 -4℃, 8월 평균
기온은 25℃, 연강수량은 1,273㎜, 연강설량은 255㎜이다.
현황
곳곳에 패총과 무문토기·빗살무늬토기 등이 발견되어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여겨진다. 조선시대에는 해주목 송림면(松林面)에 속하였는데, 한국전쟁 이후 경기도
옹진군 송림면이 되었다. 1995년에 인천광역시에 통합되었고, 1999년에 연평면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2007년 기준으로 대연평도와 소연평도가 속한 연평면의 전체 인구는
1,536명(남 865명, 여 671명)이고 세대수는 754호이다. 토지이용 현황은 0.45㎢, 밭
0.66㎢, 임야 5.57㎢이다. 대부분의 주민이 농업과 어업을 겸하고 있으며, 농산물로는
쌀·콩·고구마·땅콩·마늘 고추 등이 생산된다. 한때 조기 파시(波市)로 우리나라의 대표
적인 조기어장을 형성했으나 현재는 명맥이 끊어지고 꽃게잡이 조업과 굴, 바지락
채취가 연평도 주민의 주요 소득원이 되고 있다. 대연평도의 동쪽에는 방파제(856m)가
설치된 2종항인 연평도항이 있고, 남쪽 끝에는 등대가 있다. 연평도는 백령도·대청도
·소청도 등과 함께 황해의 어업 중심이 되는 섬으로 북서쪽으로 휴전선과 인접하고
있기 때문에 전략적인 가치가 크다.
병자호란 때 임경업(林慶業)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세자를 구하기 위해 중국으로
가던 중 선원들의 부식이 떨어지자, 연평도에 배를 대고 나뭇가지를 꺾어 개펄에 꽂아
두었더니 물이 빠진 뒤 가지마다 조기가 걸려 있어, 이것이 조기잡이의 시초가 되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면사무소 뒷산에 임경업 장군을 기리는 충민사(忠愍祠)라는 사당이 있다.
교통은 인천에서 정기여객선이 운항된다. 교육기관으로는
연평유초등학교와 연평중고등학교가 있다.
참고문헌
『옹진군통계연보』(옹진군, 2008)
『2008군정백서』(옹진군, 2008)
『인천의 섬』(김종혁 외,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역사문화연구실, 2004)
『한국도서백서』(전라남도, 1996)
『한국지리; 각 지방의 자연과 생활』(권혁재, 법문사, 1995)
『도서지』(내무부, 1985)
『한국지명요람』(건설부국립지리원, 1983)
옹진군청(www.ongjin.go.kr)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연평도를 가기위해 배를 타는 곳.
충민사에서 연평초교 옆의 북한 포격으로 집을 수리중인 임시 주거지와 마을 풍경.
충민사에서 바라본 소연평도.
연평 초등학교.
옹도군 연평면사무소 전경. 좌측길로 직진하면 충민사가 나온다.
동진정에서 바라본 연평면 시내 전경.
연평대운동장 주변에 위치한 동진정.
육용사충혼탑.
한국통란당시 패전잔당공비가 양민을 학살하는 만행에
분노한 연평도 청년 30여명이 황해도 구월산 공비토벌 작전에
자진 종군하여 용맹히 싸우다가 전사한 육용사의 영령을 위로
하고자 연평도 주민이 뜻을 기리어 건립한 탑으로, 현재는
연평도 마을 전경 및 서해 일출이 한눈에 들어 온다.
연평시내 전경.
2010년 11월 북한의 연평도 포격사건으로 피해입은 주택들 복구 공사현장과 대피시설들.
북한의 황해도.
앞에 보이는 섬들도 NLL위쪽에 위치하고 있어 북한
땅이지만 북한 주민들은 살고 있지 않다고 한다.
다만 꽃개철에는 중국인들이 왕래한다고 하는데...
평화 추모 공원.
추모 공원의 위령탑.
추모공원 주변 풍경들.
등대 공원의 등대.
조선 16대 인조대왕 14년(1636년) 임경업 장군에 의해 연평도에서
조기를 처음 발견한 후 해방전후 부터 1968년 전까지 황금의
조기파시어장을 이루었다. 멀리 평안도, 함경도,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등 팔도 각처에서 수천척의 어선이 조기떼를 쫓아 연평도
앞바다를 메우던 시절 연평도 등대는 이들의 길잡이로 1960년
3월 첫 점등을 시작하여 찬란한 황금어장을 굽어 비치어 왔으나
1974년 7월 국가안보의 목적으로 일시 소등하게 되었고, 1987년
4월 등대로서의 용도가 폐지되면서 현재의 빛도 소리도 없이 침묵
으로 층청거리던 지난 과거를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등대에서 전망대로 향하는 길
조난어업자 위령비.
이 비석은 1934년 6월에 발생한 조난사고 희생자들의 영혼을
달래고, 우가족들을 다소나마 위로하고자 세운것이다.
연평도는 수 백년동안 조기어장을 그 명성이 자자했다. 황금
어장인 연평 앞바다에는 조기철이 되면 만선의 꿈을 싣고 온
배들과 파시로 인하여 장관을 이루었다. "연평바다로 돈 실러
가세"라는 뱃노래에서 그 화려했던 면모를 짐작 할 수 있다.
그런데 1934년 6월 1일 폭풍우를 피하여 연평항으로 들어온
어선이 600여척이었다. 그러나 2일 오후 2시경 밀물때를 기하여
폭풍이 더욱 세차지고 태산같은 파도가 휘몰아쳐서 어선 끼리
충돌하였다. 당시 피해선척수가 323척이고, 사상자가 204명에
달하였다는 신문보도를 통해 그 피해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능히 알 수 있다. 이에 황해도 수산회에서는 1934년 9월 연평
어업조합 서쪽에 이 비를 세워 피해 영령을 위로 하였다.
군사용으로 사용되던 터널.
관광전망대 조기 역사관 앞의 전망대.
가래칠기해변과 빠삐용바위. 멀리 북한의 선도 보인다,
관광전망대 조기역사관.
북한 땅. 좌측 섬 뒤편에 있는 육지에 "위대한 수령..." 어쩌구
하는 선전 문구도 보인다.눈으로는 안보이고 관광전망대에 있는
망원경으로 보면 또렸하게 잘보인다. 오늘 날이 맑아서 20km의 시계.
가래칠기 해변과 주위 풍경.
당섬과 선착장.
등대공원 추모공원을 오르는 길에 나무를 심기위해 땅을 파고 있다.
가래칠기 해변에서...
가래칠기 해변 옆에 위치한 빠삐용바위.
가래칠기 해변에서 바라본 관광전망대 조기역사관. 산 중턱즈음에 군터널도 보인다.
가래칠기 약수터. 먹을수 있는 물인지 알수가 없다. 주변의
화장실은 깨끗하게 관리되는데 여기는 수질검사 증명서나
안내문구 하나 안보인다.
연평도의 모습.
이상한 버섯과 열매. 낮에 찍은 달. 당섬으로 향하는
연육교와 연육교 아래 예전에 다니던 길.
안목어장으로 향하는 포장길.
구리동 해변
연평면 시내 전경과 당섬.
구리동 해수욕장.
구리동 해수욕장.
당섬 입구에 있는 연평해전 전승비.
망둥어 잡는 조사님들. 물때가 맞아서 그런지 꾸준하게 잡아 올린다.
연평도 마을 풍경.
하룻밤 신세를 진 숙소와 마을회관. 쉼터, 우체국.
담이 없는 마을 풍경과 연평대운동장. 좁은 골목길. 호박. 등등....
연평도를 떠나면서 등대공원의 등대와 조기역사관이 보인다.
길쭉한 대연평도.
소연평도를 떠나면서 바라본 얼굴바위.
소연평도.
인천연안여객터미널에 다다를 즈음 인천 송도와 인천국제공항를 연결하는
인천대교(교량길이 18.4km, 주탑의 높이 238.5m(63빌딩:249m))
연평도 관광 안내도.
눈물의 연평도(1964년)
작사 강남풍
작곡 김부해
최숙자 노래
조기를 담뿍 잡아 기폭을 올리고
온다던 그 배는 어이하여 아니오나
수평선 바라보며 그 이름 부르면
갈매기도 우는구나 눈물의 연평도
태풍이 원수드라 한많은 사라호
황천간 그님은 언제 다시 만나보리
해 저문 백사장에 그 모습 그리면
등대불만 깜박이네 눈물의 연평도
2017-08-25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