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도암 이재(李縡) 撰비문
목사 유공 묘갈명(牧使兪公墓碣銘)
송(宋)나라 선비는 음보(蔭補)를 영화롭게 여기고 과거를 통해 벼슬하는 것은 하찮게 여겼으며, 한(漢)나라 때, 공경들은 순리(循吏)와 양리(良吏)와 같은 수령에서 나온 경우가 많았는데, 우리나라의 풍속은 이와는 반대다. 그러나 종종 상규를 벗어난 경우도 오히려 꼽을 수 있다. 유명건(兪命健) 공은 음사(蔭仕) 가운데 성대하게 정승감이라는 명망이 있었으나 만난 시대가 불우하여 그 뜻을 펼치지 못했기에 식자들은 안타까워하였다.
공의 자는 중강(仲強)이니 기계(杞溪) 사람이다. 신라 때 아찬(阿飧)을 지낸 삼재(三宰)라는 분이 처음으로 족보에 보인다. 본조에 들어와서는 경안공(景安公) 휘 여림(汝霖)과 숙민공(肅敏公) 휘 강(絳) 부자가 연이어 판서를 지냈다. 숙민공의 증손 휘 성증(省曾)은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이분이 사헌부 대사헌을 지낸 휘 철(㯙)을 낳았다.
우암(尤菴) 선생이 그의 묘지명을 지었으니 공은 이분의 둘째이다. 모친 청주 한씨(淸州韓氏)는 봉사를 지낸 전(甸)의 따님이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영특하여 어려서는 장난을 좋아하지 않았다. 대사헌 공은 항상 공을 애지중지하며 말하기를 “우리 집안에서 재상을 지낼 아이다.”라고 하였다.
사방(四方)을 겨우 알았을 때이미밖에서 대사헌 공을 모시고 잠들었으며출입하실 적에 부축해드렸다. 드시고 싶은 음식을 여쭙고 공경스럽게 올려드렸다. 8세에 대사헌 공이 세상을 떠나고 상복을 벗자마자 한 부인(韓夫人)도 연이어 세상을 떠났는데, 무릎 꿇고 절하며 곡읍하는 애통함이 주위 사람을 감동시켰다.
기사년(己巳年, 1689, 숙종 15), 간사한 무리가 율곡(栗谷)과 우계(牛溪) 두 선생을 문묘에서 출향시키기를 청하자 공은 동지들과 함께 상소를 올려 변무하였다. 성후(聖后인현왕후)가 폐위되고 우암이 사약을 받자 공은 의리상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갑술환국 때 다시 과거에 나아가 임오년(壬午年, 1702, 숙종 28)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해 겨울에 전설사 별검에 제수되었으며 임기기 만료되어 사재감 주부에 올랐다. 병술년(丙戌年, 1706, 숙종 32) 사헌부 감찰로서 외직으로 나가 양성 현감(陽城縣監)이 되었다.
양성(陽城)은 경기 안의 작은 고을인데다 재정이 탕진되었는데 공은 싫어하거나 피하려는 마음을 품지 않고 한결같이 맡은 관직에 직분을 다한다는 마음으로 온갖 폐단을 모두 없애니 얼마 되지 않아 버젓한 고을이 되었다. 임기가 차서 고을을 떠나자 그곳 백성이 송덕비를 세워 공을 사모하였으며 또 서로 말하기를,
“만일 전쟁이 일어나 유 후(兪矦)께서 어려움을 겪게 된다면 우리들은 응당 목숨을 걸고 유 후를 구하러 달려갈 것이다.”
하였다.
마침 조정에서 관찰사에게 명하여 관하에 있는 인물을 추천하라고 했는데 한포(寒圃) 이건명(李健命) 등이 일제히 공을 추천하였다.
경인년(庚寅年, 1710, 숙종 36), 청나라로부터 온 자문(咨文)이 경보를 알리자 공은 또 특별히 추천을 받았다.
신묘년(辛卯年, 1711, 숙종 37), 종부시 주부에서 외직으로 나가 해주 통판(海州通判)이 되었다.상정법(詳定法)을 시행한 이후로 폐해가 더욱 심해졌는데 공은 통렬하게 정비하여 알맞게 조절하니 백성이 이 덕분에 소생하였다. 풍속이 또 소송하기를 좋아하였는데 물 흐르듯이 판결하여 책상에는 정체된 문서가 없었으니 백성이 공을 가리켜 “백 년 이래 이렇게 훌륭한 태수는 없었다.”라고 하였다.
계사년(癸巳年, 1713, 숙종 39), 한산 군수(韓山郡守)로 옮겼다가 얼마 되지 않아 작은 혐의로 인해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부여(扶餘)의 은산(隱山)에 정착하여 물가에 정자를 짓고는 각금정(覺今亭)이라고 편액을 달고 그곳에서 벼슬을 그만두고 노년을 마치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얼마 뒤에 어떤 일로 서울로 돌아왔다. 강화부 경력(江華府經歷)에 제수되었는데 사직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사복시 판관을 지냈다.
을미년(乙未年, 1715, 숙종 41), 안악 군수(安岳郡守)가 되어 공은 한결같이 해주(海州)를 다스린 방책으로 고을을 다스리니 백성이 모두 열복하였다. 군수는 영장(營將)을 겸하였는데 군정(軍政)이 잘 이루어지고 병장기는 일신되었다. 또 18방(坊)에 방마다 사창(社倉)을 설치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영구토록 이롭게 하였으니, 어사가 공의 치적이 도 전역에서 제일이라고 보고하였다.
무술년(戊戌年, 1718, 숙종 44), 담양 부사(潭陽府使)에 올랐다. 부임할 적에 공은 가솔들을 데리고 가지 않았다. 청렴하고 명민하며 위엄이 있어 교활한 아전들은 숨을 죽이고 지내니 사람들은 공을 지목하여 청렴한 호랑이〔廉虎〕라고 하였다.
경자년(庚子年, 1720, 숙종 46), 전지(田地)를 측량하는 일에서 그 경계를 정도에 맞게 하니 원망하는 백성이 없었다. 곧 나주 목사(羅州牧使)에 올랐다. 나주는 공무가 번다하기로 유명하였는데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거침없이 공무를 처리하였고 너그러움과 엄격함을 안배하여 다스림의 교화가 크게 행해졌다.
임인년(壬寅年, 1722, 경종2) 사화(士禍)가 일어나자 공은 벼슬을 그만두었다. 서울로 돌아오지 않고 남포(藍浦)의 남전촌(藍田村)에 우거하여 두문불출하며 서사(書史)로 즐거움을 삼았다. 갑진년(甲辰年, 1724, 경종 4) 9월 뜻밖에 병에 걸려 그달 20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겨우 환갑을 넘긴 나이였다.
양주(楊州) 구소곡(龜沼谷)에 있는 전배(前配) 김 숙인(金淑人)의 묘 오른쪽에 반장(返葬)하였다가 이후에 양지현(陽智縣) 고동(古東)의 삼은리(三隱里) 계좌(癸坐)의 언덕에 이장하고 두 숙인을 합장하였다. 김 숙인(金淑人)은 참판 곡운(谷雲) 휘 수증(壽增)의 따님으로 딸 하나를 낳았는데, 딸은 참봉 이진성(李晉聖)의 처가 되었다.
안 숙인(安淑人)은 사인 후선(後宣)의 따님으로 아들 둘을 낳았다. 최기(最基)는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을 지냈고 직기(直基)는 진사에 합격하여 현령을 지냈다. 최기의 외아들은 어리고 세 딸은 각각 김한태(金漢泰), 이춘빈(李春彬), 진사 홍재한(洪在漢)에게 시집갔다. 직기의 네 아들은 언집(彥鏶), 언선(彥䥧), 언횡(彥鈜), 언호(彥鎬)이다. 사위 이진성의 아들 규문(揆文)은 현감을 지냈고 딸은 황처후(黃處厚)에게 시집갔다.
공은 풍모가 준걸하고 품성이 방정하였다. 평소 지나치게 엄숙하지도 않았지만 나태한 모습도 없었으며 재물과 이익에는 담담하고 사양하고 받는 데에는 신중하였다. 집안에서의 행실은 더욱 독실하였다. 형님 부부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공은 대신 제사를 주관하여 정성과 예를 다하였고 부모를 여읜 조카가 성인이 될 때까지 보살펴주었으며 그가 장가들자 일체 종가의 일을 돌려주었다.
상을 당하거나 힘든 일이 있을 때면 집안일을 잘 처리하였으니 대부분 남들이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형제와 숙질이 한 집에 같이 산 지가 20여 년이었는데도 집안에는 이간하는 말이 없었다. 대사헌(大司憲) 공의 상례 때 부친이 남긴 옷 한 벌을 가져와 여막에 두고 함께 거처하며 삼년상을 마쳤고 죽을 때까지 부친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선조를 받드는 일에는 그 정성을 다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멀고 가까운 묘소에 두루 돌아다니며 성묘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봉분을 쌓았고 묘표가 없으면 주관하여 비석을 세웠으며, 또 누락된 선대의 사적을 한데 모아서《기계세보(杞溪世譜)》를 만들었다. 종계(宗禊)를 다시 만들어 사시(四時)로 신의를 다지는 모임을 가져 친척 간에 화목하게 지내는 의리를 베풀었다.
이러한 마음을 미루어 벗을 사귀거나 벼슬할 때에도 각기 그 이치에 마땅하게 행동하였다. 남에게는 하대하여 부르지 않고 한 번도 이불을 가지고 가서 밤새도록 논 적이 없으며, 감괴(甘壞)하는 일이 없이 교의는 두터웠다. 남의 악행을 비난하기보다 남의 선행을 칭찬하는 경우가 많았고, 횡역을 당해도 남을 탓하지 않고 스스로 반성하기를 좋아하였다. 남들과 담소를 나누는 자리에 있더라도 말씨는 간약하고 진중하였으며 혹여 급박한 상황을 만나더라도 행동은 엄중하고 침착하였다.
백성을 다스릴 적에는 분란하게 만들지 않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다. 너그럽고 온화하면서도 강직하고 분명함을 겸하였으며, 자세하고 주밀하면서도 각박하게 하지는 않았다. 원대한 계획에 힘쓰고 작은 시혜는 일삼지 않았다. 옥사를 판결할 때는 반드시 마음을 다하였고 검시(檢屍)를 해야 하면 직접 손으로 검안(檢案)하며 말하기를 “사람의 목숨과 관계되는 일이니 신중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공의 행적을 살펴보면 옛날의 이른바 낭묘(廊廟)의 재목이거늘 규정에 구애되어 이로움과 은택이 미친 곳이 주군(州郡)에 그치고 말았으니, 아! 이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공은 벼슬살이에 부침하면서도 늘 초탈하여 속세를 벗어난 의취가 있었으니 만년의 절의를 보면 알 수 있다. 풍류는 돈후하고 지상(志尙)은 유아하고 질박하여 명문 집안에 전해오는 가법을 실추시키지 않아 무궁토록 후손에게 남겨줄 수 있으니 공경할 만하구나. 명(銘)은 다음과 같다.
사람을 관찰하는 방법이 있으니 / 觀人有術
덕이 가장 중요하네 / 維德爲大
몸은 세속을 벗어나지 않아도 / 身不離俗
마음은 실로 개결하였네 / 中實耿介
너그러우면서도 위엄 있고 온화하면서도 조리 있어 / 寬栗溫理
곧장 밖으로 드러내었네 / 卽見于外
발양하여 정사를 펼치니 / 發爲政事
어진 은택이 두루 내렸네 / 仁澤旁沛
통달한 재주와 뛰어난 기량으로 / 通才偉器
한 시대의 명망을 받았건만 / 時望攸載
저 산언덕에 묻혀있으니 / 埋彼山邱
현인들의 탄식이 일어나네 / 賢嗟之會
세상의 기운 시들해져 / 世氣衰薄
풍치를 더 이상 볼 수 없구나 / 風韻莫逮
내 공의 행적을 새겨 / 我銘其行
어린 자손들에게 당부하노라 / 庸敕稚昧
-----------------------------------------------------------------------------------------------------------------------------------------------------------------------
[脚註]
[주01] 목사 유공 묘갈:
저자가 유명건(兪命健, 1664~1724)을 위해 쓴 묘갈문이다.
[주02] 사방(四方)을 …… 때:
6세의 나이를 뜻한다.《예기》〈내칙(內則)〉에 “6세에 수와 방향의 이름을 가르친다.[六年, 教之數與方名.]”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주03] 밖에서 …… 잠들었으며:
원래는《예기》〈내칙(內則)〉에 “10세에 밖의 스승에게 나아가 밖에서 기거한다.[十年, 出就外傅, 居宿於外.]”라고 한 데서 나
온 말인데, 여기서는 10세가 안 된 나이임에도 부친을 따라다니며 밖에서 기거한 것을 뜻한다.
[주04] 상정법(詳定法):
황해도에 실시한 세법(稅法)의 하나이다. 대동법의 내용을 그 지방의 특수성에 따라 알맞게 조정한 세규로서 전 1결에 쌀 12말을 징
수하던 것을 별수미(別收米)라는 명목으로 3말을 추가하여 15말을 징수하였다.
[주05] 감괴(甘壞)하는 일:
솔깃한 말과 행동으로 담담한 교우 관계를 해치는 일을 가리킨다.《예기》 표기(表記)에 “군자의 교제는 물과 같고 소인의 사귐은
단술과 같으니, 군자는 담담한 가운데 교우 관계가 이루어지고 소인은 단맛 때문에 그 관계가 깨진다.[君子之接如水, 小人之接如
醴, 君子淡以成, 小人甘以壞.]”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주06] 낭묘(廊廟)의 재목:
묘당(廟堂)에 앉아서 천하를 다스릴 만한 인재를 뜻한다. 두보(杜甫)의 〈자경부봉선현영회(自京赴奉先縣詠懷)〉시에 “살아서 요
순 같은 임금을 만났기에 차마 영원히 하직할 수 없었네. 지금 낭묘의 재목으로 말하자면 큰 집 짓는 데 어찌 재목이 없다 하겠는가.
[生逢堯舜君, 不忍便永訣. 當今廊廟具, 構廈豈云缺.]” 한 데서 온 말이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