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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인 3 - 4세기에 고구려와 백제, 왜국에서 나타난 여러 반역자들!
1. 백제 사람으로 고구려에 도망했다가 백제를 도운 사기
사기는 치양 전투 기록에서 등장하는데..... 본래 백제에서 왕의 말을 돌보던 일을 하다가 말굽을
상하게 해서 벌을 받을 것이 두려워 고구려로 망명했으며 그후 치양 전투가 벌어지자 다시
백제로 귀순해 태자였던 근구수에게 고구려군의 기밀을 알려줘서 백제군이 승리하게 도왔습니다.
“저쪽 군사가 수는 많으나 모두 가짜 군사로서 수를 채운 것에 불과합니다.
그중 제일 강한 부대는 붉은 깃발을 든 부대입니다. 만일
그 부대를 먼저 공략하면, 나머지는 치지 않아도 저절로 허물어질 것입니다.“
彼師雖多, 皆備數疑兵而已. 其驍勇唯赤旗. 若先破之, 其餘不攻自潰.
백제의 영명한 군주 근초고왕이 국경인 충청도를 넘어 전라도의 마한 정복을 성공적으로 완수할
즈음인 369년 9월, 고구려 고국원왕이 20,000명 군대를 이끌고 남침해 오는데.... 고구려는
342년에 전연의 모용황 군대에게 크게 패했으니, 백제를 쳐서 세력을 보충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전인 245년 8월, 위(魏) 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공하니.... 2만을 이끌고 출진한
동천왕은 크게 패해 고구려군 1만 8천명을 잃고 도주하니 추격해온 관구검은 고구려 수도
환도성(국내성) 을 함락 시킨바 있으니 이제 고국원왕대에 2번째로 수도가 함락되었던 것입니다.
342년에 선비족 전연의 모용황은 고구려를 침공하여 남도에서 고구려군을 대파하고 이어 수도
환도성(국내성) 이 함락되니 고국원왕은 단기로 달아났고..... 전연은 보물들을 약탈한후
왕모와 왕비에다가 미천왕의 시신과 국내성 주민 전부인 "5만명을 포로" 로 잡아 끌고 갔습니다.
거의 망하다시피 된 고구려는 27년간 전연에 조공하고 왕이 책봉을 받으면서 인고의
나날을 보내며 국력을 길렀는데..... 아직은 강성한 선비족 전연 과는 전쟁하기
어려운지라 만만한 백제를 쳐서 사람과 물자를 약탈해 국력을 보충하려고 한 것입니다.
고국원왕은 황해도 치양에 주둔하며 민가를 약탈하자 근초고왕이 태자인 부여구수를
파병하니 3만으로 고구려군을 격퇴하는데 삼국사기 〈근구수왕 본기〉 의
기록에 따르면 죄를 짓고 도망간 사기라는 인물이 백제로 돌아와 적군의 정보를 알립니다.
'정예군은 고국원왕 근처의 군대 뿐이므로 그들만 박살내면 승리할 수 있을 것' 이라고 말하니
치양전투에서 승리한후 부여구수는 수곡성 서북까지 진군했으나.....
막고해가 도가의 말을 인용해 너무 깊게 들어왔으니 그만둘 것을 주청해 정벌을 마쳤습니다.
369년 11월 근초고왕이 한강 남쪽에서 군대를 사열하며 황색 깃발을 사용했는데, 고구려군이 적색(赤色)
깃발을 사용했기 때문에....... 오행 순환 논리에 따라 백제군이 황색 (黃色) 깃발을 사용했다고 봅니다.
중국에서 들어온 오행 사상에서는 나무 (木)- 불 (火)- 흙 (土)- 쇠 (金)- 물 (水) 의 순서로 왕조가 교체
된다고 보는데, 앞서 치양 전투에서 고구려군이 불의 속성을 의미하는 적색 깃발을 사용했기에
백제는 고구려 보다 우월하다고 나타내기 위해.... 흙의 속성을 의미하는 황색 깃발을 사용한 것 입니다.
고구려와 백제 사이 분쟁은 격화되어, 2년 뒤에는 재차 남침하는 고구려 군대를 패수
에서 저지한 백제군은 북진해서 평양성을 포위해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니
평양성 전투로.... 이후 두 나라는 수백년 동안 말 그대로 '불구대천의 원수' 가 됩니다.
중국의 25사 중에 하나인 진서》 에 따르면 고국원왕을 죽인 이듬해인 372년에 근초고왕이
동진으로 부터 '진동장군 영낙랑태수 (鎭東將軍 領樂浪太守)' 라는 작호를 받아
평양 일대의 지배를 확인받았으니..... 이는 백제왕이 중국 사서에 최초로 등장한 기록입니다.
2 독산성 성주의 배신
이렇게 잘나가던 백제도 불과 4년 후인 373년에 독산성 성주가 주민들과 함께 신라에 투항
하자 백제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는데, 그전에 백제는 독산책 (禿山柵) 과
구천책 (狗川柵) 을 설치해 낙랑으로 가는 길을 막았다.” 고 했으니 북쪽 국경이지 싶습니다.
十八年, 百濟秃山城主率人三百來投. 王納之, 分居六部. 百濟王移書曰, “兩國和好, 約爲兄弟,
今大王納我逃民, 甚乖和親之意. 非所望於大王也. 請還之.” 荅曰, “民者無常心.
故思則來, 斁則去, 固其所也. 大王不患民之不安, 而責寡人, 何其甚乎.” 百濟聞之, 不復言.
18년 (373년) 백제 독산성 (禿山城) 성주가 300명을 거느리고 투항해 왔다. 6부(部) 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백제왕이 말하기를, “두 나라가 화친을 맺어 형제가 되기를 약속 했는데, 대왕께서 도망한 백성을 받아
들이니 화친한 뜻에 어긋납니다. 대왕에게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청컨대 그들을 돌려 보내십시오.” 라고 하였다.
나물이사금이 대답하기를 “백성은 일정한 마음이 없습니다. 생각이 들면 오고 싫어지면 가버리니
진실로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대왕은 백성이 편안하지 않음을 걱정하지 않고 과인을
나무라시는 것이 이렇게 심하십니까?” 라고 하였다. 백제는 그것을 듣고 다시 말하지 않았다.
이 보다 175년 후인 548년에 독산성 (禿山城) 전투가 발발하는데..... 백제와 신라 양측에 고립된 가야
제국 (諸國) 이 고구려에 사주해 백제를 공격하게 했으나, 나제동맹에 따른 신라군의 신속한
원군 파병으로 연합군이 고구려군을 대파했으니 곧 깨질 듯 했던 나제동맹이 굳건했음을 알수있습니다.
6세기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의 장수왕 시대부터 시작된 남하 정책을 방어하기 위해 나제동맹을 맺은 상태
에서, 두 나라 가운데 가야 소국들을 두고 파워게임을 벌이고 있었는데, 고구려라는 강적 때문에
가야 쪽으로 대대적인 군사 동원은 자제하고 있었지만 쟁탈전은 6세기 초반 부터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먼저 가야를 공격한던 백제니, 백제는 512년에서 513년에 거쳐, 모루국(순천), 사타국(광양), 상다리(여수),
하다리(돌산), 상기문(임실), 하기문(남원), 대사국(하동) 등 전라도 일대의 가야 소국들을 멸망시킵니다.
위기를 느낀 대가야는 백제에 대항하기 위해 신라와 우호 관계를 추진했으니 522년 3월 대가야
이뇌왕은 신라 법흥왕에게 사신을 보내 혼인동맹을 청했고 이에 가야 지역으로
영향력 확대를 노린 신라에서는 이찬 비조부의 누이를 대가야에 보내 혼인동맹이 맺어집니다.
대가야와 더불어 유력한 가야 세력이었던 아라가야(안라국) 는 529년 백제와 신라에
중립을 선언하자..... 백제 성왕은 아라가야를 공격하여 걸탁성을 빼앗았습니다.
신라는 백제가 소백산맥 이서 (전라도) 가야 땅을 차지하는 것까지는 방관하고 있었지만 529년 백제가
소백산맥을 넘어와 내륙의 아라가야까지 공격하자, 신라도 더이상 가만히 있지 않았으니
529년 탁기탄 (양산) 을 시작으로 532년 금관가야를 병합하고 538년 탁순국 (창원) 을 병합 합니다.
함안의 아라가야등 소국들은 멸망을 피하기 위해 신라에 교섭을 시도했으나 실패했으며 한편 백제는
가야 소국의 군주들을 두 차례 수도 사비성에 불러모아 사비회의를 열었지만 끝내 결렬됩니다.
아라가야(안라국) 는 백제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왜국에 도움을 청했으나 실패하고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니, 이에 고구려의 양원왕이 고구려에 속국화된 동예인들을 대거 동원해 백제의 북방을 공격합니다.
고구려가 침공하자 성왕은 신라에 원군을 요청하니 신라는 주진 (朱珍) 에게 3,000명 병사를 주었고 고구려군은
신라- 백제 동맹군에게 대패했으며.... 이후 백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안라국은 관산성 전투(554년) 에서
백제가 신라에 대패한후 신라의 속국이 되었고 561년 2월 파사산 전투에서 신라에 패배해 최종적으로 멸망합니다.
고구려는 이 전투에서 타격이 컸는지 3년 뒤 나제동맹군의 대대적인 침략을 방어
하지 못하고,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이 차지해 100여년간 지배한
경기도와 강원도 한강 유역을 모두 백제와 신라에 내주고 전성기를 마감하게 됩니다.
고구려는 북쪽에 강력한 세력인 돌궐과 대립이 본격화되었기 때문에 남방전선에 집중하는게 갈수록
점점 어려워지니..... 돌궐군을 방어하느라 병력을 남쪽 전선에 내려 보낼수 없어
나제동맹군에 패한 것이고, 그리고 새로 얻은 한강 유역을 두고 백제와 신라가 서로 싸우게 됩니다.
548년 당시 한강 이북의 독산성이 백제의 영유하에 있었다는 것은 적어도 그 이전에 백제가 한강 유역을 차지
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데, 학계에는 475년~ 551년 사이 한강 유역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논란이 분분합니다.
434년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맺은후 5세기 후반에 이르면 두나라 관계가 소원해져서 495년 이후 동맹군
의 활동이 없다가 이때 다시 공동 군사활동을 한 것이며... 541년에 백제가 신라에 사신을 보내 우호
관계를 복원한후 첫 결실이었고 곧 548년 독성산성 전투는 나‧제동맹의 추이와 관련해 의미가 있습니다.
일본서기 흠명기 에 마진성 (馬津城) 전투가 언급되는데, 마진성(馬津城) 전투 ( 정월 신축에 고구려가
군사를 이끌고 마진성을 포위하였다.) 에서 사로잡은 포로가 ‘안라국과 일본부가
(고구려를) 불러들여 (백제를) 정벌하기를 권했다.’ 라 적었습니다. - 일본서기 권제 19 <흠명기> 9년 4월
이 전투가 일어난 시기가 삼국사기에서 독산성 전투가 일어난 시기와 미묘하게 겹치니 548년 정월 신축일에
고구려 군대가 백제 마진성을 포위 공격했다는 기록인데.... 삼국사기에는 548년 정월에 고구려가 예와
손을 잡고 독산성을 쳤다는 기록이 나오기 때문으로 마진성 전투와 독산성 전투가 같은 전투로 추측 됩니다.
백제는 독산성이 신라로 넘어간 2년후 375년 황해도 수곡성을 고국원왕 아들 소수림왕 침공으로 빼앗겼음에도
보복하지 못하니, 근초고왕 사후 근구수왕이 전성기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약화되던 백제 중심의 국제 질서는
382년 왜국 장군 카츠라기노 소츠히코의 배신과 396년 광개토대왕 이후 장수왕의 남정으로 완전히 붕괴 됩니다.
3. 카츠라기노 소츠히코 (葛城襲津彦)
백제 요청으로 왜군이 여러번 한반도로 들어와 용병으로 활약했는데... 369년 근초고왕은 장군 목라근자
와 사사노궤에게 군사를 주어 탁순국과 안라국 및 가라국을 칠때 왜인으로 아라타노 와케
와 가가노 와케가 보이며... 391년에 건너온 왜인들이 서러벌을 포위했고, 554년
성왕이 신라 관산성을 칠때 모노노베노 마가무와 츠쿠시노 쿠니노미야츠등 왜군 장수들이 참전했습니다.
한국의 삼국사기가 1145년에 지어졌는데 비해 일본서기는 425년이나 앞선 720년에 완성된 것이지만,
초기 왜왕들의 기록은 과장됐고 고대의 기록은 2주갑 (120년) 연대를 올려서 적었으며, 또 백제
왕의 기록을 고구려의 주몽이 부여국 동명왕의 건국 신화를 도용한 것 처럼 왜국왕의 것인양 도용합니다.
그러니까 백제 근초고왕이 남정을 해서 신라와 가야를 치고 전라도 마한 지방을 아우른 기사를 마치
신공황후가 바다를 건너와 한반도에서 행한 것 처럼 주어를 바꾸어 도용 했는데..... 이후
5세기가 되면 일본서기도 연대나 내용들이 사실에 가까워지니 무령왕 무덤의 발굴로 확인 됩니다.
홍윤기씨는 “일본 천황은 한국인이다” 라는 책에서 일본 북규슈 가카라시마
加唐島 (가당도) 에서 탄생한 백제 무령왕 의 성씨가 야마토 라고
말하며 이후 일본 국왕(천황) 은 그 아들인 순타태자의 후손들 이라고 주장합니다.
고구려의 침공 위험이 임박한 서기 461년 백제 개로왕은 동생 곤지에게 자신의 씨를 잉태한
후궁을 주어 왜국에 사신으로 파견하니 일본에서 무령왕을 출산한 것인데.... 1145년
쓰여진 삼국사기에 곤지는 개로왕의 아들 이고 무령왕 또한 동성왕의 아들이라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삼국사기 보다 425년이 빠른 720년에 편찬된 일본서기에는 곤지는 개로왕의
동생이며, 무령왕은 동성왕의 이복형으로 나오니 어느 기록이 맞는 걸까요?
우리나라에서는 일본서기 는 위서 수준으로 보아 번역서 조차 발간하지 않는
데.... 1971년 충남 공주시에서 한국 고고학계를 뒤흔드는 일대 사건이 일어납니다.
공주 송산리 고분에서 벽돌 무덤을 발견했는데, 지석에는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으니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 (寧東大將軍 百濟 斯麻王)”이라! 사마 (斯麻)
는 백제 25대 무령왕 의 본명이고.... 영동대장군은 무령왕이 521년에 중국
양나라의 임금 무제로 부터 책봉받은 관직이니 일본서기의 기록이 정확한 것입니다!
저 무령왕릉은 백제식이 아니라 벽돌을 쌓아 무덤방을 만든 중국 양나라식 이었으며
무령왕과 왕비의 시신을 담은 "관" 은 "일본 남부에서만 자생하는 금송" 이라!
출토된 지석에 무령왕은 462년에 태어나서 40세가 되던 해인 501년에 왕위 에
올랐으며 523년 5월 62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니 "일본서기의 기록과 일치" 합니다!
백제에서 문주왕과 삼근왕이 잇달아 신하들에게 살해당하니, 일본에 갔던 곤지의 아들로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동성이 왜국 유랴쿠왕의 격려를 받고는 479년 500명 왜군의
호위병을 거느리고 귀국해서는 백제 왕위에 올라 고구려군과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그후 동성왕 마저 신하에게 살해당하자 동성왕의 형으로 일본에서 태어난 무령이 501년 백제로
나와 왕위를 이은 것입니다. 그런데 저 무령왕릉에서 나온 지석의 글자로 무령왕의 정확한
나이가 밝혀지니 동성왕 보다 나이가 많은지라, 1145년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에 무령왕이
동성왕의 아들이란 것은 틀린 것이 되고 720년 일본서기 기록이 정확한 것으로 밝혀진 것입니다?
카츠라기노 소츠히코 (かつらぎのそつひこ) 는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야마토 정권의 장군으로
다른 사서에는 '사지비궤 (沙至比跪)', '증도비고 (曽都毘古さちひこ)' 라는 이름으로도 나옵니다.
'~히코' 라는 인명은 오랫동안 쓰여온 일본식 이름이며 게다가 '카츠라기씨' 가 유래와 통치 지역까지 자세히
기록된 일본 호족의 성씨이기 때문에 백제인일 가능성은 낮으며.... 4세기 후반 ~ 5세기 초반의 왜인 입니다.
한편 소츠히코를 백제 도래인이 아닌 신라 도래인으로 보는 설도 존재하는데, '히코' 가 고대 부터 일본 남성 인명에
쓰이던 단어는 맞으나, 애초 신라에서 왔다고 전해진 천일창 (天日槍, 아메노히보코) 의 증손자의 이름이
“키요 '히코' (淸彦)” 였으니 일본인 뿐만 아니라 한반도에서 넘어온 도래인들 또한 '히코' 라는 이름을 쓴 것입니다.
한편, 712년에 편찬된 고사기 에서는 소츠히코를 제8대 고겐 덴노 (孝元天皇) 의 후손이며, 타케우치노 스쿠네
(武內 宿禰) 아들로 적고 있는데, 혈연 관계는 창작되었다고 보지만 타케우치노 스쿠네는 삼국사기
에서 ‘우도주군’ 이라는 이름으로 석우로 기록에서 교차 검증되기에 실존 인물이니 둘다 실존인물임은 확실합니다.
첫 등장은 진구 5년 (205년) 에 박제상이 미사흔을 신라로 귀환시킨 사건이라 연대가 안 맞는데,
일본서기는 205년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삼국사기 에는 418년이고, 1281년 삼국유사에는
425년으로 미사흔과 함께 쓰시마로 파견되었다가 박제상에게 낚여서 미사흔을 신라로 보내줍니다.
이후 진구 62년 (262년) 에 왜왕의 명으로 가라(대가야) 를 돕기 위해 신라를 공격한 것이 사실상 첫
등장인데.... 백제측 기록에는 중간에 신라 여자에게 코가 꿰여서 신라는 안 치고 오히려 백제 및
야마토와 긴밀한 우호관계에 있던 가야를 공격하니 기본 한기 (己本 旱岐) 를 비롯 가야의
왕실과 백성들이 백제로 피난했으며.... 이후 반파국의 사직은 백제의 장수 목라근자에 의해 복권됩니다.
(진구) 62년. 신라가 입조하지 않았다. 이해 카츠라기노 소츠히코를 보내 신라를 치게 하였다. (《백제기》에
말하길 임오년에 신라가 귀국에 오지 않았다. 귀국이 카츠라기노 소츠히코를 보내어
치게 하였다. 신라에서 미인 2명을 단정하게 꾸며 항구에서 마중하여 (카츠라기노 소츠히코를) 유혹하였다.
카츠라기노 소츠히코는 미녀를 받고서 도리어 가라국을 쳤다. 가라국왕 기본 한기 (己本 旱岐)
및 아들 백구지 (百久至), 아수지 (阿首至), 국사리 (國沙利), 이라마주 (伊羅麻酒),
이문지 (爾汶至) 등이 인민을 거느리고 백제로 도망갔다. 백제는 이들을 후하게 대했다.
가야국왕의 누이 기전지 (旣殿至) 가 야마토 (大倭) 를 방문하여 "천황은 카츠라기노 소츠히코를 보내어
신라를 치게 했습니다. 그런데 신라의 미녀를 받고는 신라를 치지 않고 도리어 우리나라를 쳐서
멸망시켰습니다. 형제, 백성들이 유랑하고 있으니 근심을 이기지 못하여 와서 여쭙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천황이 크게 노하여 목라근자를 보냈다. 군사를 거느리고 가라에 이르러 그 사직을 되돌렸다. 일설에
카츠라기노 소츠히코는 천황이 노한 것을 알고 감히 돌아오지 못하고 숨었다. 그의 누이는 황궁에서
은총을 입은적이 있었다. 카츠라기노 소츠히코는 몰래 누이에게 사람을 보내 천황의 화가 풀렸는지 묻게 하였다.
누이는 (천황에게) 꿈을 핑계대어 "오늘밤 꿈에서 카츠라기노 소츠히코를 보았습니다." 라고 말했다.
천황은 크게 화를 내어 "카츠라기노 소츠히코가 어찌 감히 오는가?" 라고 하였다.
누이는 말을 전해주었다. 카츠라기노 소츠히코는 용서받지 못함을 알고 동굴에 들어가 죽었다. 라고 했다.
이 연대는 이주갑 인상된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 관련 기사들 사이에 존재하는 사건이니
'기본 한기' 를 금관국의 왕으로 보고《삼국유사》 에서 인용된 《가락국기》의
이시품왕 으로 본다면 4세기 후반이라는 연대는 확고해지니 382년의 것으로 파악됩니다.
일설에 적힌 기록인 소츠히코가 바위굴에 들어가서 죽었다는 기록이 실제로는 백제가 신라를
공격하려고, 왜국에 지원군을 요청하여 왜국의 장수 소츠히코와 왜국의
병사들이 백제로 파견되었는데, 신라의 미인계에 넘어간 소츠히코가 엉뚱한 가야를 점령하였다.
분노한 가야 국왕의 누이가 백제 국왕에게 소츠히코가 저지른 짓을 고하자, 백제왕이
노하여 소츠히코를 죽이려고 했고, 이에 동굴에 숨어서 목숨을 부지한 후에
적절한 시기를 타서 백제에서 몰래 왜국으로 도망간 사건일 가능성도 짐작할수 있습니다.
382년 당시 백제 왕은 근구수왕이므로 이 경우 뻘짓한 소츠히코를 족치려 한 건 근구수왕일
가능성이 높으며, 소츠히코를 미인계로 낚은 신라 왕은 내물 마립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소츠히코가 등장하는 문제의 오진왕 14년 (283년, 403년) 기사에 따르면, 그는 백제
에서 왜국으로 건너오려다가 신라에 막혀 가야에 머무르고 있었던 궁월군
(유즈키노키미, 弓月君) 과 그를 따르는 120현의 사람들을 데려오도록 파견되었다.
그러나 3년 가까이 지나도록 데려오지 못하다가 오진왕 16년 (405년) 추가 파병된 원군의
도움으로 간신히 돌아왔다. 이때의 기사도 대개 2갑자 내려 403년의
것으로 보면 403~ 405년 당시 백제 왕은 아신왕이고, 신라 왕은 실성 마립간 입니다.
정리하자면 382년 카츠라기노 소츠히코는 미인계에 낚여서 가야 공격, 403년 백제
이주민 이송에 참여했으나 지연, 405년 지원병에 힘입어 이주민과 함께
왜국으로 귀국, 413년 백제 왕족 압송, 418년 (혹은 425년) 박제상 사건이 됩니다.
이후 고구려는 남쪽에 뺏긴 땅인 한강 유역과 남한강 일대를 되찾을려고 노력했으니.... 바로
온달 장군의 활약이지만 성공하지 못한채 비극으로 끝나고 그후 바로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의 공격을 받으니.... 남쫒 전선에는 신경을 쓰지 못하니 요동 전선에 전념하게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