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미스테리(1)-성서 고고학
기독교가 인류 문명의 역사 한 축을 담당하면서 우리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일반인들은 물론이거니와 기독교인들이라 할지라도 성경 속에 있는 갖가지 사건들을 잘 모른다. 대표적인 예가 ‘運命의 槍’(The Spear of Destiny)에 대한 것이다. 이에 본지는 ‘運命의 槍’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 알아본다. <편집자주>
運命의 槍(The Spear of Destiny)
롱기누스의 창(槍)으로 알려진 `운명의 창`은 로마시대의 병기로 당시 이스라엘의 선지자 피네아스가 제작한 거으로 전해진다. 전승(傳承) 에 의하면 이 창은 왕조에서 왕조로 수세기에 걸쳐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내려왔다고 한다.
운명의 창
예수가 십자가형에 처했을 당시 이 창의 주인은 로마군대의 백부장이었던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였다. 그는 다름아닌 예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러 핏물이 낭자하게 만들었던 자였다.
예수의 피와 물의 범벅이 그의 얼굴에 튀기자 이제까지 약해져 있던 그의 시력이 회복됐다. 예수의 십자가형 이후의 기적에 따른 공포와 양심의 가책으로 말미암아 크게 뉘우친 그는 당시 생존해 있던 사도들을 찾아 가르침을 받게 된다. 이후 갑바도기아의 가이샤라로 옮겨 수도승이 되었으나, 이곳에서 기독교인이란 이유로 결국 처형됐다.
다음은 한때나마 `운명의 창`을 소유했던 인물들이다.
유대왕 `헤롯`(37BC~4BC), 이집트 출신으로 306년경 사망할때까지 막시미안 황제의 핍박으로부터 이 창을 지킨 마니교도 `모리스`, `콘스탄티누스` 황제(로마 황제로 24년 재위중 이 창을 간직하고 로마 북부의 티베르 강을 가로지르는 밀비안 다리에서 벌어진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따라 명명한 신도시 콘스탄티노플의 설계를 위한 예비조사과정 때도 이 창을 간직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고트족의 왕으로 로마를 침공했던 `아라리크 테오도시우스`, 451년경 훈족의 아틸라 대왕을 격퇴한 유일한 인물인 `테오도릭` 대왕, `칼 마르텔`(프랑크 왕국의 지배자이며 샤를마뉴 대제의 조부), 그리고 `샤를마뉴` 대제(771~814, 카롤링거 왕조,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운명의 창을 갖고 47번에 걸친 각종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우연히 이 창을 떨어트린 직후 사망했다.)등이다.
서기 900년 초 `운명의 창`은 독일 작센(Saxon)왕가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된다. 마자르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했을 때도 이를 지니고 있던 하인리히 1세(919~936)는 작센 왕가의 재배자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그의 아들 오토 대제(AD 955~963)에게 창을 물려주었다. 교황 요한 12세(AD955~963)는 오토 대제에게 세례를 주면서 이 창을 사용햇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토 대제는 이 창을 지니고 `렉 전투`(The Battle of Leck)에서 몽고족을 격파했다.
오토 대제의 죽음과 함께 `운명의 창`의 행방과 관련해 복잡한 설이 나돌았다.
일설에 따르면 `운명의 창`은 오토 2세에서 오토 3세로 전해졌고, 이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헨리 2세의 소유가 되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오토 대제 사후 안디옥으로 옮겨져 제1차 십자군 원정 당시인 1098년경 우연히 재발굴 될때 까지 그곳에 방치돼 있었다는 설이 있다.
이 창은 작센가의 후예인 호엔슈타우펜 왕가의 소유가 되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12세기 이탈리아를 정복한 프레드릭 바바로사(1152~1190)에게 전해졌다. 바바로사 황제는 우연히 이 창을 시냇물에 떨어뜨린 후 곧 서거했다. 이후 `운명의 창`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헨리 8세(1190~1197)에서 오토 4세(1218~1250)에게 전해졌다. 한편 구전에 의하면 `운명의 창`은 또 다른 3명의 호엔슈타우펜가의 황제들의 소유물로 전전했다고 한다.
나폴레옹은 아우스테리츠 전투 후 이 창을 획득하려 시도했지만 전투 직전 비엔나 외곽으로 빼돌리는 바람에 이를 손아귀에 넣는데 실패했다.
분명한 것은 `대제`(the Great)가 이름앞에 붙은 사람들의 경우 운명의 창을 소유하여 `황제`(Emperor)가 될 기회는 더 증가했다는 점이다.
20세기 초 ‘운명의 창’은 비엔나 합스부르그 왕가의 보물창고가 바닥나기 직전 잠시 빌헬름 황제의 소유였다. 히틀러는 1912년 9월 바로 이곳에 보관된 ‘운명의 창’을 처음으로 관찰하게 된다.
“나는 바로 이 순간이 내 생애에서 가장 중대한 순간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나는 창앞에서 서서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는 동안 내 주변의 상황은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이것은 나를 피하려고하는 감춰진 내면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의미를 마음속으로 감지할수 있었으나 내 마음은 ‘운명의 창’을 떠날 수 없었다. 나는 마치 수백년 훨씬 앞선 역사속에서 그 창을 내 손아귀에 쥐고 있는것처럼 느꼈다. 또한 그것이 나의 권력을 위한 행운의 부적이라고 선언했다든가 세계의 운명을 내 수중에 장악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거침없이 파고들어 내 마음이 이처럼 뒤흔들어 놓다니 이 무슨 망령된 생각인가?”
아돌프 히틀러는 오스트리아를 병합했던 1938년 3월 12일에 제3제국의 이름으로 ‘운명의 창’을 압수했다. 그리고 10월 13일 나치 친위대의 무장열차에 실려 뉘렘베르크로 수송되어 성 캐더린 교회에서 6년간 있다가 지하실 창고로 옮겨져 수장된다.
1945년 4월 30일 오후 2시 10분, 군번이 01326328인 美 제7사단의 중위 윌리엄 혼은 美 합중국 정부의 이름으로 운명을 창을 접수했다.
미국이 이 창을 입수한지 90분만에 아돌프 히틀러는 지하벙커에서 애인과 더불어 권총자살했다.
아이젠하워 원수와 패튼 장군은 그 직후 합스부르그 왕실에 그 창을 반환했다.
창의 손잡이 부분은 오랜전에 분실됐으며, 현재 남아있는 것은 창의 머리(2개부분)와 창의 머리 부분을 연결했던 나사 1개 그리고 예수를 십자가에 매다는데 사용했던 못이 하나 남아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운명의 창’은 법적으로 한동안 합스부르그 왕가의 소유였다. 현재는 1912년 히틀러가 처음 창을 목격했던 합스부르그 왕실의 박물관에 다시금 놓여있다. 그리고 매주 월요일에서 토요일 오전 9시~오후 6시까지 무료로 모든 관람객에게 개방된다.
현재 창의 모조품은 폴란드의 크라코우에 있으며, 진품으로 알려진 창은 13세기 십자군 원정에서 귀환한 세인트 루이스가 파리로 가져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함께 또 다른 진품으로 알려진 창은 1492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바자제트가 교황 이노센트 6세에게 증정했다. 이 창은 현재 로마의 성 베드로 바실리카 성당의 돔을 지탱하고 있는 한 기둥속에 안치돼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