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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 國 時 代
楚(초)
초나라의 선조는 高陽氏(고양씨)전욱에서 나왔다. 고양은 황제의 손자이자 昌意(창의)의
아들이다. 고양은 稱(칭), 칭은 卷章(권장), 권장은 重黎(중려)를 낳았다. 중려는 帝嚳(제곡)
高辛氏(고신씨)의 火正(화정)으로 공적을 쌓았다. 능히 천하를 밝게 비출 수 있어 제곡이
그에게 축융의 칭호를 내렸다. 당초 共工氏(공공씨)가 반기를 들자 제곡은 중려에게 토벌
을 명했다. 그러나 철저히 소탕하지 못했다. 제곡이 경인일에 중려를 죽이고, 그의 동생
吳回(오회)를 후계자로 삼아 화정에 임명하고 축융으로 칭했다.
오회는 陸終(육종)을 낳고, 육종은 여섯 아들을 낳았다. 모두 배를 절개해 낳았다. 첫째 아
들은 昆吾(곤오), 둘째 아들은 參胡(참호), 셋째 아들은 彭祖(팽조), 넷째 아들은 會人(회인),
다섯째 아들은 曹姓(조성), 여섯째 아들은 季連(계련)이다. 계련의 성은 羋(미)다. 초나라 왕
족은 그의 후손이다. 곤오는 하나라에서 후백을 지냈다. 은나라 말기에 멸망했다. 계련은
附沮(부저), 부저는 穴熊(혈웅)을 낳았다. 이후 점차 쇠락해 일부는 중원, 일부는 동남쪽에
있는 만이 일대에 살았다. 이들의 가계를 자세히 기록할 수 없는 이유다.
楚 王 朝 世 家
춘추전국시대 楚(초) BC. 9세기∼BC. 223 위치 湖北省(호북성) 성: 羋(미) 작위 자작
| 代수 | 在位期間 | 位 | 諱 | 關係 | 首都 | 現地名 |
| 鬻熊(죽웅) | 郢 | 湖北省 江陵 | ||||
| 熊麗(웅려) | 육웅의 아들 | (영) | 호북성 강능 | |||
| 제1대 | 熊狂(웅광) | 웅려의 아들 | ||||
| 제2대 | 熊繹(웅역) | 웅광의 아들 | ||||
| 제3대 | 熊艾(웅애) | 웅역의 아들 | ||||
| 제4대 | 熊달(웅달) | 웅애의 아들 | ||||
| 제5대 | 熊勝(웅승) | 웅달의 아들 | ||||
| 제6대 | 熊楊(웅양) | 웅달의 아들 | ||||
| 제7대 | 熊渠(웅거) | 웅양의 아들 | ||||
| 熊毋康(웅무강) | 웅거의 장남 | |||||
| 제8대 | 熊摯紅(웅지홍) | 웅거의 차남 | ||||
| 제9대 | BC. ?∼BC. 848 | 熊延(웅연) | 웅거의 쎗째 | |||
| 제10대 | BC. 847∼BC. 838 | 熊勇(웅용) | 웅연의 아들 | |||
| 제11대 | BC. 837∼BC. 828 | 熊嚴(웅엄) | 웅용의 아들 | |||
| 제12대 | BC. 827∼BC. 822 | 熊霜(웅상) | 웅엄의 장남 | |||
| 제13대 | BC. 821∼BC. 800 | 熊徇(웅순) | 웅엄의 넷째 | |||
| 제14대 | BC. 799∼BC. 791 | 熊咢(웅악) | 웅순의 아들 | |||
| 제15대 | BC. 790∼BC. 764 | 若敖(약오) | 熊儀(웅의) | 웅악의 아들 | ||
| 제16대 | BC. 763∼BC. 758 | 霄敖(소오) | 熊坎(웅감) | 약오의 아들 | ||
| 제17대 | BC. 757∼BC. 741 | 蚡冒(분모) | 熊순(웅순) | 소오의 아들 | ||
| 제18대 | BC. 740∼BC. 690 | 武王(무왕) | 熊通(웅통) | 분모의 동생 | ||
| 제19대 | BC. 689∼BC. 675 | 文王(문왕) | 熊貲(웅자) | 무왕의 아들 | ||
| 제20대 | BC. 674∼BC. 672 | 莊敖(장오) | 熊艱(웅간) | 문왕의 아들 | ||
| 제21대 | BC. 671∼BC. 626 | 成王(성왕) | 熊惲(웅운) | 문왕의 아들 | ||
| 제22대 | BC. 625∼BC. 614 | 穆王(목왕) | 熊商臣(웅상신) | 성왕의 아들 | ||
| 제23대 | BC. 613∼BC. 591 | 莊王(장왕) | 熊侶(웅려) | 목왕의 아들 | ||
| 제24대 | BC. 590∼BC. 560 | 共王(공왕) | 熊審(웅심) | 장왕의 아들 | ||
| 제25대 | BC. 559∼BC. 545 | 康王(강왕) | 熊招(웅초) | 공왕의 아들 | ||
| 제26대 | BC. 544∼BC. 541 | 郟敖(겹오) | 熊員(웅원) | 강왕의 아들 | ||
| 제27대 | BC. 540∼BC. 529 | 靈王(영왕) | 熊比囲(웅비위) | 공왕의 차남 | ||
| 제28대 | BC. 529 | 初王(초왕) | 及子(급자) | 영왕의 동생 | ||
| 제29대 | BC. 528∼BC. 516 | 平王(평왕) | 熊弃疾(웅기질) | 공왕의 아들 | ||
| 제30대 | BC. 515∼BC. 489 | 昭王(소왕) | 熊珍(웅진) | 평왕의 아들 | ||
| 제31대 | BC. 488∼BC. 432 | 惠王(혜왕) | 熊章(웅장) | 소왕의 아들 | ||
| 제32대 | BC. 431∼BC. 408 | 簡王(간왕) | 熊中(웅중) | 혜왕의 아들 | ||
| 제33대 | BC. 407∼BC. 402 | 聲王(성왕) | 熊當(웅당) | 간왕의 아들 | ||
| 제34대 | BC. 401∼BC. 384 | 悼王(도왕) | 熊疑(웅의) | 성왕의 아들 | ||
| 제35대 | BC. 380∼BC. 370 | 肅王(숙왕) | 熊臧(웅장) | 도왕의 아들 | ||
| 제36대 | BC. 369∼BC. 340 | 宣王(선왕) | 熊良夫(웅양부) | 도왕의 아들 | ||
| 제37대 | BC. 339∼BC. 329 | 威王(위왕) | 熊商(웅상) | 선왕의 아들 | ||
| 제38대 | BC. 328∼BC. 299 | 懷王(회왕) | 熊槐(웅괴) | 위왕의 아들 | ||
| 제39대 | BC. 298∼BC. 263 | 頃襄王(경양왕) | 橫(횡) | 회왕의 아들 | ||
| 제40대 | BC. 262∼BC. 238 | 考烈王(고열왕) | 熊元(웅원) | 경양왕의 자 | ||
| 제41대 | BC. 237∼BC. 228 | 幽王(유왕) | 悍(한) | 고열와의 자 | ||
| 제42대 | BC. 228∼ | 哀王(애왕) | 猶(유) | 고열왕의 자 | ||
| 제43대 | BC. 227∼BC. 223 | 負芻(부추) | 고열왕의 자 |
周 文王(주 문왕) 때 계련의 후손인 鬻熊(죽웅)이 있었다. 죽웅은 아들을 돌보듯이 주 문
왕을을 섬겼으나 일찍 죽었다. 그는 熊麗(웅려), 웅려는 熊狂(웅광), 웅광은 熊繹(웅역)을
을 낳았다. 웅역은 주 성왕 때 살았다. 주 성왕이 주 문왕과 주 무왕의 공신 후손에게
논공행상을 할 때 웅역을 초 땅에 봉하고 자작의 작위를 내렸다. 성을 羋(미)로 하고 丹
陽(단양)에 도읍하게 했다.
제1대 웅광(BC, ?〜BC, ?) 웅려의 아들이며, 웅역의 아버지
周 成王(주 성왕)시대에 丹陽(단양) 땅에 봉지를 받았다고 한다.
제2대 웅역(BC, ?〜BC, ?) 육중의 증손이며, 웅려의 손자이며 웅광의 아들
웅광이 죽고 그 뒤를 이어서 초나라의 군주가 되었다. 초나라가 가탁한 역사서의 내용
에 의하면, 이때부터 공식으로 제후로 인정되어서 자작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齊 丁公
(제 정공), 晉侯 燮(진후 섭), 衛 康伯(위 강백), 주공 단의 아들이자 노나라 후작인 백금
과 함께 주 강왕 때 대신이었다고 한다.
제3대 웅애(BC, ?〜BC, ?) 웅역의 아들이며, 웅달의 아버지
웅역이 죽은 뒤 그 뒤를 이어 초나라의 군주가 되었다. 웅애가 다스린 시대에 周 昭王
이(주 소왕) 초나라로 쳐들어왔는데 주군을 막아냈다. 그가 죽고 웅달이 뒤를 이었다.
제4대 웅달(BC, ?〜BC, ?) 웅애의 아들이며, 웅승의 아버지
웅애가 죽은 뒤 그 뒤를 이었다. 그가 죽고 웅승이 뒤를 이어 초나라 군주가 되었다.
제5대 웅승(BC, ?〜BC, ?) 웅달의 아들이며, 웅양의 형이다.
웅달이 죽은 뒤 그 뒤를 이었다. 그가 죽고 아우 웅양이 뒤를 이어 초나라 군주가 되었
다.
제6대 웅양(BC. ?∼BC. ?) 웅달의 아들이며, 웅승의 동생. 웅거의 아버지.
웅승이 죽은 뒤 그되를 이었고, 그가 죽은 뒤 웅거가 뒤를 이었다.
제7대 웅거(BC. ?∼BC. ?) 웅양의 아들이며, 웅지홍과 웅연의 아버지.
아버지 웅양이 죽고, 그 뒤를 이어 초나라 군주가 되었으며, 그가 죽고 웅지홍이 뒤를
이어 초나라의 군주가 되었다.
제8대 웅지홍(BC. ?∼BC. ?) 웅거의 아들이며, 웅연의 형.
아버지 웅거가 죽고, 그 뒤를 이어서 군주가 되었으며, 그가 사망하자, 초나라 군위를 동
생 웅연이 이었다.
제9대 웅연(BC. ?∼BC. 847) 웅거의 아들이며, 웅지홍의 동생. 웅용의 아버지.
본명은 집자. 웅현이 초나라 군주로 즉위했던 연도는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지만, 웅연
이 사망하고 퇴위한 연도는 기록에 남아 있다. 웅연 즉위 초년, 형인 웅지홍이 후계자가
없이 죽자, 그 뒤를 이어서 동생인 웅연이 초나라 군주가 되었다. 웅연 재위 말년( 847
년), 웅연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웅용이 뒤를 이어서 초나라 군주가 되었다.
제10대 웅용(BC. ?∼BC. 838) 웅연의 아들이며, 웅엄의 아버지다.
이때부터 초나라 군주들의 재위기간이 명확하게 알려져서 역사서에 기록되기 시작했다.
웅연 원년(기원전 847년), 웅연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웅용이 초나라 군주로 즉위하
였다. 웅용 10년(기원전 838년), 웅용이 죽음으로 아들 웅엄이 초나라 군주가 되었다.
제11대 웅엄(BC. ?∼BC. 828) 웅용의 아들이며, 웅상과 웅순의 아버지.
웅엄 원년(기원전 837년), 초나라 군주 웅용이 죽자, 그의 아들 웅엄이 군주로 즉위하였
다. 웅엄 10년(기원전 828년), 웅엄이 죽었고, 그 아들인 웅상이 뒤를 이었다. 웅엄의 아
들인 웅상이 죽은 뒤에 그의 형제끼리 초나라의 군위을 차지 하려고 왕자의 난을 벌였다.
제12대 웅상(BC, ?∼BC. 822) 웅엄의 아들이며, 웅순의 형이다.
웅상 원년(기원전 827년), 웅엄이 죽고 웅상이 즉위했다. 또한 주 선왕도 즉위했다. 웅상
6년(기원전 822년), 웅상이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그러자 웅상의 형제들끼
내분이 일어났는데, 웅순이 승리하여 초나라 군주가 되었다.
제13대 웅순(BC. ?∼BC. 800) 웅엄의 아들
형 웅상이 죽어서 자리가 비어있는 초나라 군위를 두고서 형 熊雪(웅설). 叔熊(숙웅)과
싸워 웅설은 죽고, 숙웅은 濮(복) 땅으로 달아났다. 웅순 원년(기원전 821년), 웅순은 형
제들을 물리치고 나서 초나라 군주가 되었다. 웅순 22년(기원전 800년), 웅순이 사망하
자 그의 아들인 웅악이 초나라의 군주가 되었다
제14대 웅악(BC. ?∼BC. 791) 웅순의 아들이며, 약오의 아버지다.
웅악 원년(기원전 799년), 웅악은 아버지 웅순이 죽은 뒤에 초나라의 군주로 즉위하였다.
웅악 9년(기원전 791년), 웅악이 사망하자, 그 아들 웅의가 뒤를 이어서 초나라의 군주
가되니, 그가 바로 약오이다.
제15대 약오(BC. ?∼BC. 764) 웅악의 아들이며, 소오와 투백비의 아버지다.
약오 원년(기원전 790년), 약오는 아버지 웅악이 죽자, 초나라의 군주가 되었다. 약오 2
6년(기원전 764년), 약오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웅감이 군위를 물려 받으니 그가 소
오다. 소오의 동생인 백비는 씨를 鬪(투)로 써서 투씨 가문의 조상이 되었다.
제16대 소오(BC. ?∼BC. 758) 약오의 아들이며, 초 여왕과 초 무왕의 아버지다.
소오 원년(기원전 763년), 아버지 약오가 죽자, 아들인 소오가 뒤를 이었다. 소오 6년(기
원전 758년), 소오가 사망하고, 그의 장남인 초여왕 분모에게 군위를 물려주었다.
제17대 초 여왕(BC. ?∼BC. 741) 소오의 장남이며, 초 무왕 웅철의 형이다.
소오 6년(기원전 758년), 아버지 소오가 6년 동안 초나라의 군주로 재위하다가 죽고, 장
남인 분모 웅순이 뒤를 이어서 초나라의 군주가 되었다. 초 여왕(분모)은 재위 초기, 개
간을 적극적으로 시행하고 병사를 훈련시키는 등 국력 강화에 힘써서 초나라의 힘은 날
로 강해졌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서 초 여왕은 백성들을 압박하여 경고하는 공포 정치
를 시행했기 때문에, 점점 민심을 잃어갔다. 변화하는 인물이 초 여왕에게 옥의 원석을
가지고 바쳤을 때, 변화가 자신에게 사기를 쳤다면서, 변화의 원쪽 다리에 월형을 가한
것도 그 예라 보면 되겠다. 초 여왕(분모) 17년(기원전 741년), 아우 웅철이 병사를 일
으켜 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니 그가 초 무왕이다.
제18대 무왕(BC. ?∼BC. 690) 소오의 아들
분모 17년(기원전 741년). 초 무왕은 형 분모를 시해한 뒤 군주에 올랐다. 그는 등나라
후작(鄧侯. 등후)의 딸 鄧曼(등만)을 아내로 삼았다. 그리고 鬪伯比(투백비)를 영윤으로
삼고 屈瑕(굴하)를 막오에 임명하면서 국력이 날로 신장하였다, 그런데 초나라는 자작이
었기 때문에, 지위가 매우 낮았다. 그리하여 웅철의 승진욕구가 샘솟았다. 주 환왕 16년
이자 초 무왕 37년(기원전 704년), 여름에 침록 부근에서 회맹을 가졌는데, 그 때 참여
한 나라는 파나라, 용나라, 복나라, 등나라, 교나라, 羅(라)나라, 軫(진)나라, 신나라, 이
나라, 운나라, 강나라였다. 황나라, 수나라는 오지 않았다. 초 무왕은 대부 위장을 보내
황나라를 책망했다. 막오인 굴하로 하여금 수나라를 치게 했다. 그리하여 수나라를 크게
이겼다.
패배한 수후는 달아나고, 거우인 투단은 포로로 잡고 전리품을 얻었다. 그리고 이 일을
계기로 왕을 칭하니 바로 초 무왕이다. 초 무왕 41년(기원전 700년), 초군은 교나라에게
에게 승리했고, 정립성 아래서 회맹을 가졌다. 초 무왕 42년(기원전 699년), 굴하로 하여
금 나나라를 치게 했는데, 패전하였다. 굴하는 패잔병을 거느리고 황곡으로 갔으나 초 무
왕의 꾸지람을 듣고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초무왕 51년(기원
전 690년), 수나라를 정벌하는데, 한수 동쪽에 이르러 갑자기 무왕이 병이 들어 죽었다.
초나라의 영윤 투기와 막오 굴종은 초 무왕의 발상을 비밀에 부치고 여전히 안원에서 동
진할 계획을 세웠다. 초군들이 수나라의 성 근처에 이르자 수의 군신들이 굴복하였다. 초
군이 회군하여 한수를 건넌 뒤 발상하고 그 뒤를 이어 아들 웅자가 즉위하여 초 문왕이
되었다.
제19대 문왕(BC. ?∼BC. 675) 초 무왕의 아들이며, 장오와 초 성왕의 아버지다.
초 무왕의 뒤를 이은 초 문왕은 즉위 초창기에 수도를 단양에서 郢(영) 땅으로 옮겼다.
초 문왕 2년(기원전 688년), 문왕은 병사를 일으켜 申(신) 나라를 치고 등나라를 지나가
는데 신하가 鄧 祁侯(등 기후)에게 초 문왕을 습격하자고 했으나 등 기후는 듣지 않았다.
그리고 초 문왕은 신나라를 멸했다. 초 문왕 3년(기원전 687년), 등나라를 쳤다. 초 문왕
6년(기원전 684년), 초가 채나라를 쳐서 峷(신)땅에서 이겨 채 애후를 포로로 잡았다. 그
런데 오래지 않아 석방했는데 채 애후는 식후의 아내이자 陣(진)의 군주의 딸인 息嬀(식
규)가 천하 제일의 미녀라고 소개했다. 그래서 문왕은 식규을 차지할 계획을 짰다.
그 후 문왕이 식나라를 방문했는데 식후가 그를 접대하며 환대했으나 식나라를 멸해 식
규를 차지했다. 식후는 그 일로 충격을 받아 병을 얻어 죽었다. 식규는 장오. 초 성왕 두
아들을 얻었다. 초 문왕 10년(기원전 680년), 초나라 병력이 채나라로 쳐들어 갔다. 초
문왕 11년(기원전 679년), 제 환공이 패자가 될 때 초나라의 국력을 키웠다. 초 문왕 12
년(기원전 678년), 등나라를 멸했다. 초 문왕 15년(기원전 675년), 병사를 거느리고 파나
라를 침공했으나 대패했다. 결국 영도로 귀환했는데 鬻拳(육권)이 그를 받아들이지 않고
초 문왕에게 “황나라를 치고 오십시요“하고 말했다. 결국 황나라를 제압했으나, 회군중에
병을 얻어 그 해 8월에 죽었다. 육권은 자결하여 순장되었다. 초 문왕이 죽은 뒤 식규의
소생인 장오가 즉위 했으나 그는 초 성왕에게 죽임을 당했다.
제20대 장오(BC. ?∼BC. 672) 초 문왕과 식규의 아들
초 문왕이 죽고 웅간이 초나라 왕이 되었는데, 나라는 여전히 강하고 부유했다. 그러나
장오는 사치하고 사냥질만 일삼았기 때문에, 민심을 잃었다. 그러면서도 중원을 노리고
있었다. 장오 3년(기원전 672년), 결국 아우인 웅군이 그를 살해하고, 왕이 되니 그가 초
성왕이다.
제21대 성왕(BC. ?∼BC. 626) 초 문왕과 식부인인 규씨의 아들이며, 장오의 아우이다.
형인 장오를(기원전 671년), 시해하고 위에 올랐다. 초 성왕 원년(기원전 671년), 초나라
왕으로 즉위하여 나라를 잘 다스렸고, 초나라가 왕을 칭한 뒤로는 처음으로 주나라 왕실
에 조공을 바쳤다고 한다. 초 성왕 6년(기원전 666년), 초 성왕이 정나라를 치고 실패했
을 때, 절치부심하고, 투누오도와 함께 정사를 돌보았다. 그렇게 초나라는 국력을 착실히
쌓아 나갔다. 초 성왕 13년(기원전 659년), 초 성왕 14년(기원전 658년), 초 성왕 15년
(기원전 657년), 이 3년 동안 연달아 정나라를 쳤고 정나라는 그 공격을 끝내 막아내지
못했다. 그리하여 정나라 군주인 정 문공은 초나라와 화친하기 위해 정나라의 대부 공숙
을 보내 강화하여 제나라와 긴장이 감돌았다. 그러나 초 성왕이 선정을 베푼지 십수년이
지난 후 주 왕실에 대한 조공을 끊어버리자 초 성왕 16년(기원전 656년), 당시 춘추오패
였던 제 환공이 관중의 조언을 받아들여 주 소왕이 남정했을 때 죽게한 죄와 공물을 끊
은 죄를 물어 초나라를 공격해왔다. 결국 이것을 두려워한 초 성왕은 굴완에게 병력을
거느리게 하여 소릉에서 그것을 사죄하는 회맹을 가졌다. 그리하여 양강은 전투 없이 일
을 끝냈다. 초 성왕 17년(기원전 655년), 弦(현)나라를 멸망시켜 현나라의 군주가 황나라
로 달아났다. 초 성왕 18년(기원전 654년), 허나라를 쳤다. 초 성왕 21년(기원전 651년),
제 환공이 규구에서 회맹할 때 초 성왕은 감히 제 환공과 정면으로 싸우려 하지 않았다.
초 성왕 22년(기원전 650년)에 황나라를 쳤다. 초 성왕 23년(기원전 649년)겨울, 초 성
왕은 황나라가 공물을 바치지 않자 황나라를 쳤다. 초 성왕 24년(기원전 648년), 초 성
왕이 강나라를 쳤다. 여름에는 황나라가 망했다. 초 성왕 26년(기원전 647년), 英(영)나
라가 망하였다. 그리고 그로 인해 초나라는 회수 일대에 세력을 미치게 된다. 초 성왕
27년(기원전 645년) 봄, 서나라를 쳤다. 3월 제 환공은 송나라, 노나라, 陳(진)나라, 衛
(위)나라, 정나라, 허나라와 함께 서나라를 구원했다. 초 성왕 29년(기원전 643년), 제
환공이 죽게 되자 초나라는 중원에 영향력을 끼치고자 하는 야망을 노골화했다. 이 무
렵 송나라의 송 양공이 패자가 되기 위해서 제나라, 초나라 등의 여러나라와 회맹을 가
졌으나 초 성왕은 송나라의 국력이 초나라보다 약한 것을 알고 그를 무시하였다. 그때
송 양공은 자신이 공작이고, 초 성왕이 자작임을 상기시켰으나, 그 언사가 심히 모욕적
이었기 때문에 초 성왕은 거기에 앙심을 품었다. 초 성왕 30년(기원전 642년), 정 문공
이 초나라에 입조했다. 초 성왕 32년(기원전 640년), 隨(수)나라가 초나라를 배신하자
초 성왕이 겨울에 투노오도를 보내 수나라를 치니 수나라가 강화를 요청했다.
초 성왕 33년(기원전 639년), 송나라를 기습하여 송 양공을 사로잡았는데, 송나라 공자
목이가 송나라의 공작이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초 성왕은 송나라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
해 송 양공을 놓아주었으나 목이는 사심없이 그 자리를 송 양공에게 돌려주어 초 성왕은
닭쫓던 개가 지붕만 쳐다보고 있는 격이 되고 말았다. 초 성왕 34년(기원전 638년), 정
문공을 입조하게 했으며, 송나라를 쳐서 홍수전투에서 송 양공에게 부상을 입혔다. 그리
고 다음 해 송 양공은 사망했다. 초 성왕 35년(기원전 637년), 성득신에게 진을 치게하
여 초 땅과 이 땅을 차지해 병력을 주둔시켰다. 성왕은 성득신의 공로를 인정해 영윤에
봉했다. 같은 해 겨울, 진 문공이 정나라에서 초나라로 오자, 그를 환대했다. 그러자 성
득신이 그를 죽일 것을 권하나, 초 성왕은 단칼에 거절했다. 초 성왕 37년(기원전 635년
성득신에게 秦(진)나라의 병력을 추격하게 했다. 초 성왕 39년(기원전 633년), 노 희공에
게 병사를 빌려서 제나라를 칠 것을 청하자 곡 땅을 취했다. 제 환공의 7명의 아들들이
초나라로 달아나자 초 성왕은 그들을 상대부에 봉했다. 그리고 夔(기)나라를 멸했다. 같
은 해 여름에 송나라를 쳤는데, 송나라는 진 문공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초 성왕 42년
(기원전 630년), 영윤 성득신이 진 문공의 진을 칠 것을 청하자 초 성왕은 거절했다. 하
지만 끈질기게 설득해 결국 들어주었다. 진 문공은 초나라에 의탁하던 시절 이런 약속을
했었다. “제가 진나라의 군주가 된다면 90리를 물러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진나라 측에
서는 약속을 이행했다. 같은 해 4월 성득신은 진군에게 성북 땅에서 크게 패하고 말았다.
초 성왕은 크게 노하여, 성득신에게 자결을 명했다. 그러나 초 성왕은 후회하고 그 후임
으로 위여신을 영윤으로 삼았다. 그 소식을 들은 진 문공은 크게 기뻐했다. 초 성왕 46
(기원전 626년), 웅상신을 폐태자하고 총애하는 왕자 웅직을 태자로 세웠다. 같은 해 10
월 웅상신은 이에 불만을 품어 반숭과 모의하여 성왕을 살해하러 갔다. 그러자 초 성왕
은 웅산신이 반란을 일으킨지 얼마 안되어 준비가 안되어 있음을 간파하여 이렇게 말했
다. “과인은 곰발바닥 요리가 먹고 싶다.”그러나 웅상신은 이를 간파하고 다음과 같이 말
했다. “곰발바닥은 익히기 어렵잖소!”곰발바닥은 먹을 수 있을 때까지 며칠이 걸린다. 초
성왕은 그동안 지방의 근왕군이 상경하여 웅상신을 토벌해주길 기대한 것이다. 결국 초
성왕은 아들의 핍박을 못이겨 스스로 목 졸라 자결했다. 그래도 아버지인지라 장사는 후
히 지내주었다고는 하지만, 태자를 폐위하려는 시도에 어지간히 쌓인게 있는지 靈(영)이
라는 시호를 줄 것도 고려한 적이 있다.
제22대 목왕(BC. ?∼BC. 614) 초 성왕의 장남이다.
그는 위에 언급한 대로 초 성왕의 적장자였기 때문에 왕위 계승에 가장 유력한 후보였
다. 하지만 초 성왕이 젊고 예쁜 후궁에게 빠져서 아들인 웅직을 낳은 후 상신을 패하고
후처의 아들을 태자로 세우려 하자 거기에 반발하였다.
초 성왕 46년(기원전 626년), 웅상신은 태자의 스승인 潘崇(반숭)의 계책을 듣고 궁으로
쳐들어가 초 성왕을 협박해 자결하게 한 뒤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鬪越椒(투월초)를 시
켜 동생 職(직)을 죽이고 즉위하니 그가 목왕이다. 목왕 3년(기원전 623년), 秦(진)나라와
함께 晉(진)나라에 맞서 싸웠으며, 즉위 초부터 공격한 江(강)나라를 멸망시켰다. 초 목왕
4년(기원전 622년), 육(六)나라와 蓼(요)나라를 멸했다. 초 목왕 5년(기원전 621년), 晉(진)
나라 군주인 진 양공이 죽자 조돈이 그 아들을 군주로 세우니 그가 진 영공이다. 초 목왕
6년(기원전 620년), 晉(진)의 대부 조돈은 강대해지는 초나라에 대응하기 위해 제나라, 송
나라, 위나라, 陳(진)나라, 정나라, 허나라, 조나라 등과 동맹을 맺었다. 초 목왕 8년(기원
전 618년) 여름에 陣(진)나라가 晉(진)나라를 따르자 열받은 초 목왕이 陳(진)나라를 쳤다.
호구 땅에서 크게 싸워 공자 주를 이기고, 공자 벌을 포로로 잡았다. 초 목왕 9년(기원전
617년), 송나라, 정나라, 陳(진)나라 등을 굴복시켰다. 초 목왕 10년(기원전 616년), 장군
성대심을 보내 균나라를 쳤다, 그리고 균나라를 굴복시킴으로써 중원의 강대국으로 발돋
음했다. 초 목왕 11년(기원전 615년), 영윤 성호가 죽자, 성가를 그 후임 영윤으로 임명
했다. 같은 해에 舒(서)나라가 초나라를 배신하자 초 목왕은 그것을 응징하기 위해 서나
라를 치니 서나라 군주를 포로로 잡고, 덤으로 宗(종)나라 군주도 포로로 잡았다. 그리고
또한 巢(소)나라도 쳤다. 그렇게 하여 초나라는 강회 지역에 세력이 두루 미치게 되었다.
초 목왕 12년(기원전 614년), 초 목왕이 죽으니 그 아들 웅려가 즉위했다. 그가 바로 춘
추오패인 초 장왕이다.
제23대 장왕(BC. ?∼BC. 591) 초 목왕의 아들
기원전 614년 부친인 초 목왕이 급사하여 아주 어린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거기에 재위
초반에 홍수. 냉해로 인한 기근까지 발생하여 민심이 흉흉해졌으며, 이를 진정시키려 측
근 반숭과 영윤 자공이 동정을 나간 사이 약오 씨족 투극이 반란을 일으켜 수도를 함락
시키고 공자 섭을 내세워 장왕을 납치하여 자신의 근거지인 상림으로 향했다. 그러나 여
땅에서 즙리와 습윤 등의 유인에 빠져 사망하고 장왕은 간신히 풀려난다. 장왕 3년(기원
전 611년), 庸(용)나라를 멸했다. 초 장왕 6년(기원전 608년), 송나라를 공격하여, 전차 2
00승(대)를 얻었다. 초 장왕 8년(기원전 606년), 초 장왕은 육혼의 戎(융)을 정벌하였고,
洛河(낙하)에 이르자, 주나라의 국경 부근에서 군대를 사열하였다. 한편 위기를 느낀 주
나라는 권력은 없었지만, 종주국이라는 명목은 있는 나라였는데 周 定王(주 정왕)은 왕
손만을 초나라에 보낸다. 주나라의 사신인 왕손 만이 오자, 초 장왕은 구정의 무게가 얼
마나 나가냐고 물었는데, 왕손 만은 “덕이 중요하지 솥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라고
대답했다. 초 장왕 9년(기원전 605년), 투월초를 재상으로 임명했다. 어떤 이가 투월초를
왕에게 헐뜯었는데, 초 장왕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 두려웠던 투월초는 반란을 일으켰
다. 투월초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투월초의 활 솜씨는 신궁에 가까워서 전쟁 중에 초
장왕을 두 번이나 활로 위태롭게 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병사들 사이에선 초 장왕이 투
월초의 화살에 곧 죽게 된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 말을 들은 초 장왕이 초나라에 보물로
내려오는 화살이 3발이 있는데, 그걸 투월초가 두 발을 훔쳐가서 이제 두 발을 다 썼으
니 다시는 초 장왕의 목숨을 노릴 일이 없다며 병사들을 안심시켰다. 이런 소문을 퍼트
린 한편으로 초 장왕은 계략을 써서 투월초가 활을 쏘는 것을 막아내고, 병사들의 사기
를 떨어트리는 일이 없게 하여 투월초를 물리칠 수 있었다. 초 장왕 13년(기원전 601년),
舒(서)나라를 멸망시켰다. 초 장왕 16년(기원전 598년) 陣(진)나라에 夏御叔(하어숙)이라
는대신이 있었다. 하어숙의 부인인 정나라 출신 夏姬(하희)는 미인으로 유명했는데 하어
숙이 죽고 난 이후 하희가 정나라의 다른 사람들과 바람을 피우는 사건이 발생했다. 게
다가 陳(진)나라의 군주였던 靈公(영공)까지 하희와 스캔들이 나서 하희의 아들이었던 夏
征서(하징서)가 영공을 살해해버린다. 당시 맹주였던 초 장왕은 신하가 왕을 죽였다는 사
실에 분노하여 진나라를 징벌하기 위해서 신하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신하들은 진나라는
성벽이 높고 양식이 많으며 무기가 많아 작은 나라일지라도 쉽게 정벌할 수 없다고 하였
으나, 초 장왕은 그 말을 듣고서 진나라가 그 정도로 성벽이 높으며 양식이 많고 무기가
많다는 것은 백성들을 고달프게 해서 성벽을 높게 하고 양식을 빼앗고 무기를 만들게 해
그 원망이 얼마나 클 것이냐라고 하면서 진나라를 쉽게 정벌할 수 있다고 설득하여 진나
라를 공격했다. 진나라를 공격하여 하징서를 죽여버리고 하희를 초나라로 데려왔다. 하지
만 하희가 워낙 미인이라 초 장왕이 탐을 내 첩으로 삼으려고 했지만, 신하인 申公 巫臣
(신공 무신)이 하희는 남자를 망치는 여자라 하면서 초 장왕이 첩으로 삼는 것을 극구 반
대하였다. 그러자 초 장왕은 그 말을 들어 얼마 전에 아내를 잃은 신하에게 하희를 시집
보낸다. 하지만 그도 전쟁에서 죽게 되자 하희를 정나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15년 후,
제나라의 사신으로 무신이 자청해서 가게 되었다. 무신이 제나라로 가던 도중 정나라에
있던 하희를 데리고 晉(진)나라로 도망가 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초 장왕은 무신의 가족을 몰살시켜버렸다. 잘한 것 하나 없는 무신은 이에 극도로 분노
해 진나라 군주에게 본인을 오나라로 보내주면, 오나라를 크게 일으켜 두고두고 초나라
의 근심거리로 만들어 주겠다고 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오나라는 무신에 의해 중원
문물을 받아 들이고 교류하기 시작했으며 합려 시대에 이르러서는 오자서와 손무를 장
군으로 삼아 대규모 원정군을 조직, 초나라의 수도를 점령하고 종묘를 불태우기까지 이
른다.
초 장왕 17년(기원전 597년) 봄, 초 장왕은 정나라를 공격하여 포위를 하고 3달 만에 함
락시켰다. 그해 여름에는 邲(필) 땅의 싸움에서 晉(진)나라를 물리치고 중원의 패권을 장
악했다. 초 장왕 23년(기원전 591년), 초 장왕이 죽으니 그의 아들 웅심이 왕이 되었다.
제24대 공왕(BC. 600∼BC. 560) 초 장왕의 아들이며, 초 강왕, 초 영왕의 아버지
초 장왕 23년(기원전 591년), 장왕이 승하하고, 웅심이 초나라 왕이 되었는데, 그는 아
직 어렸으므로 영윤 자중이 섭정했다. 초 공왕 6년(기원전 585년), 자의의 난이 일어났
다. 그 일로 대부 석공이 晉(진)나라로 달아났고 ‘초재진용’이라는 고사가 생겨났다. 그리
고 당시에 晉(진)나라의 군주인 경공이 초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巫臣(무신)이라는 자를
오나라에 보내 국력을 키워 초나라를 견제하려 한 때도 이 때였다. 초 공왕 14년(기원전
577년), 정나라와 허나라를 쳐서 그곳을 복속시켰다. 초 공왕 16년(기원전 575년), 鄢陵
(언능)에서 晉(진)나라 여공의 군대와 전투를 벌렸는데, 초 공왕은 이 전투에서 화살에
맞아 애꾸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공자 무는 포로가 되었으며, 군사인 자반은 초 공왕과
의 작전 회의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책임을 물을까 두려워 자결하였다.
초 공왕 31년(기원전 560년), 공왕이 죽었는데, 죽기 전에 그는 언릉 전투에서 대패한
것을 자기 책임이라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악시를 쓰라고 유언했다. 그러니까 대부들
끼리 의논한 끝에 영윤 자양은 고이라는 시호를 올렸다. 그래서 초 공왕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뒤는 아들인 웅소가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초 강왕이다.
제25대 강왕(BC, ?〜BC, 545년) 초 공왕의 장남이며, 영왕의 형이며, 겹오의 아버지
초 강왕 원년(기원전 559년), 강왕은 아버지 공왕이 죽은 뒤 초나라의 왕이 되었다. 초나
라는 晉(진)나라와의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하는데 그 증거로 초 공왕 대에 정나라가
진나라를 따랐다. 그 이유는 바로 초나라가 북쪽의 진나라만 상대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동쪽의 오나라와도 상대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같은 해 晉(진)나라는 제나라, 정 나라,
송나라, 노나라와 합종해 秦(진)나라를 정벌했다. 晉(진)나라가 정나라와 회맹하자 秦(진)
나라는 초나라와 손잡았기 때문에 당시 초나라는 자기와 화친한 秦(진)나라를 구했다.
이에 역 전투에서 승리했다. 晉(진)나라는 秦(진)나라 영토깊이 들어가 경수를 건넜다.
秦(진)나라 사람들은 경수에 독을 퍼드리는 등 식수에 피해를 주었으나 晉(진)나라의 공
세는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晉(진)나라는 秦(진)나라를 끝내 굴복시키지 못했다. 같은
해 가을 초 강왕은 출병해 秦(진)나라를 구원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동쪽 오나라와의
전쟁 때문이었다. 초 강왕은 자낭을 보내 오나라를 쳤는데, 오군이 나가 싸우지 않는 지
구전을 펼쳤으므로 초군이 돌아가는 바람에 이기지 못했다. 자낭은 뒤쳐져서 진군했는데,
그 이유는 오나라 사람들이 무능하여 경계를 하지 못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
군은 험요지에서 초군을 막았다. 초군은 서로를 구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초군은 오군
에 대패해 공자 의곡이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초 강왕 2년(기원전 558년), 초 강왕은 공
자 오를 영윤으로 임명했고, 공자 파융을 우윤으로 임명했으며, 위자빙을 대사마, 공자
낭사를 우사마, 공자 성을 좌사마, 굴도를 막오, 공자 추서를 잠윤, 굴탕을 연윤, 양유기
를 궁구윤으로 삼아 나라를 안정시켰다. 초 강왕 3년(기원전 557년), 晉(진) 평공 원년으
로 晉(진)나라는 병력을 이끌고 초나라를 쳤는데, 담판 전투에서 진군에게 패배해 초나라
의 국력이 약해진 것을 만천하에 알리고 만다. 초 강왕 8년(기원전 552년) 여름, 자경이
죽자 위자빙을 영윤으로 임명했는데, 그는 이 일을 두고 신숙예와 상의했다. 그때 신숙
예가 말했다. “금상이 어리며, 또한 총애하는 신하들이 많아 국사가 어렵다고 봅니다.”
이에 위자빙은 병이 들었다면서 그것을 사양했다. 그리하여 강왕은 자남을 영윤으로 임
명했다. 초 강왕 9년(기원전 551년), 초 강왕은 다시 위자빙을 영윤으로 임명하고, 공자
의를 사마로 삼았으며, 굴건을 막오로 봉했다. 초 강왕 12년(기원전 548년), 위자빙이 죽
자 굴건을 영윤으로 임명했고, 굴탕을 막오로 봉했다. 이해 가을에 오나라와 싸웠으나 오
나라를 굴복시키지 못했다. 초 강왕 13년(기원전 547년), 강왕이 대부 초거를 시기하자
그는 晉(진)나라로 달아났다. 초나라의 대부 채성자는 초나라로 돌아와 영윤 자목과 의논
했다. 그리하여 晉(진)나라와 초나라 양국의 정사를 언급했는데, 채성자가 말했다. “지금
초나하는 음란한 형벌이 많으니, 그 대부가 사방으로 달아나 다 죽게 생겼소. 그런데, 그
군주를 도모하는 것은 나라를 되일으키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오. 이 일로 인해 ‘楚
材晉用’(초재진용)이라는 고사가 생겼다. 초 강왕 15년(기원전 545년) 겨울 강왕이 죽고
그 아들인 웅운이 겹오로 즉위하였다.
제26대 겹오(BC. ?∼BC. 541) 초 강왕의 아들이며 초 영왕의 조카
초 강왕 15년(기원전 545년), 강왕이 사망하자, 아들 웅운이 왕위를 물려 받았다.
겹오 3년(기원전 542년), 자신의 삼촌인 웅위를 영윤에 봉하고, 병권을 주었다. 그런데
이게 화근의 시작이었다. 겹오 4년(기원전 541년), 웅위가 정나라에 사자로 갔을 때 겹
오가 병이 들었다. 그것을 안 웅위는 병문안을 한다는 핑계로 겹오를 찾아가 살해했다.
그리고 겹오의 아들인 莫(막)과 平夏(평하)를 죽이고,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초 영왕
이다.
제27대 영왕(BC. ?∼BC. 529) 초 공왕의 차남
겹오 3년(기원전 542년), 웅위는 조카인 겹오에 의해 영윤이 되어 병권을 장악하였다.
그는 공자 흑굉과 백주리로 하여금 정나라와 초나라 경계 땅에 주, 겹, 역 3개 성을 쌓
는다. 겹오 4년(기원전 541년), 초 영왕은 정변을 일으켜 자신의 조카이자 전대 초왕인
겹오를 시해했다. 초 영왕 3년(기원전 538년), 제후들과 신 땅에서 회맹했다. 7월에 오
(吳)나라를 쳐서 오나라에 의탁한 제나라의 몰락한 권신 경봉의 일족을 멸하였다. 초 영
왕 7년(기원전 534년), 장화대를 건립했고, 그곳에 미녀들을 채웠다. 초 영왕 8년(기원전
533년), 공자 기질에게 명하여 陣(진)나라를 멸했다. 초 영왕 10년(기원전 531년), 채나
라 군주인 蔡(채) 영후에게 입조를 요구해 술을 먹여 취해 곯아 떨어졌을 때 죽여버렸다.
그리고 공자 棄疾(기질)로 하여금 채나라를 멸망시키게 했다. 그리고 그를 채공에 봉했
다. 초 영왕 11년(기원전 560년), 徐(서)나라를 정벌해 오나라를 위협했다. 초 영왕 12년
(기원전 529년) 봄, 진나라와 채나라의 옛 신하들이 초 영왕의 아우인 공자 비, 공자 흑
굉, 채공 기질을 설득하여 초나라 백성들을 거느리고 그의 치세를 뒤엎으려했다. 그러자
초 영 왕은 쫓겨났고, 반란군은 공자 비를 왕으로 세우니 그가 초 자오다. 초 영왕은 정
처없이 달아나다가 우윤 신해의 집에 숨었다. 여름인 오월에 초 영왕은 스스로 목을 메
어 자결하였다. 우윤 신해는 그의 두 딸을 초 영왕과 같이 순장했다.
제28대 자오(BC. ?∼BC. 529) 초 공왕의 아들이며, 강왕. 영왕의 아우이고 평왕의 형이다.
형인 영왕이 재위할 때 대신 백주리가 죽자. 그는 아우들과 함께 晉(진)나라와 정나라로
로 달아났다. 초 영왕 12년(기원전 529년), 웅비는 아우들과 함께 정변을 일으켜, 영왕을
쫓아낸 후 왕이 되었고, 흑굉을 영윤에, 기질을 사마로 삼았다. 그런데 기질은 투성연과
짜고 영왕이 살아 돌아왔다고 속였다. 그러자 자오와 흑굉은 혼란에 빠졌고 둘다 자결하
였다. 그후 기질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초 평왕이다. 웅비는 자땅에 묻혀서 “자오“라고
불리므로 시호가 없다.
제29대 평왕(BC. ?∼BC. 516) 초 공왕의 막내 아들이자 초 강왕, 초 영왕의 아우이다
초 영왕이 죽자 영왕의 아우인 비가 자오로 즉위했으나 초 평왕이 속임수를 써서 영윤
인 공자 흑굉과 자오를 죽게한 뒤 왕위에 올랐다. 초 평왕 원년(기원전 528년), 초 평왕
은 왕위에 오른 뒤 형과는 달리 대외적으로 팽창하지 않았다. 오히려 陣(진)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진 애공의 아들인 진도태자 언사의 아들 공손오를 군주로 세우니 그
가 진 혜공이다. 채나라도 역시 다시 일으켜 세웠는데 채 경후의 아들이자 채 영후의 아
우인 공손려를 세우니 그가 바로 채 평후다, 초 평왕 덕에 이 두 나라는 다시 부흥하게
되었다. 그러나 벌써부터 맛이 가기 시작했는지 간신배인 費無忌(비무기)를 총애하였다.
초 평왕 2년(기원전 527년), 秦(진)나라와의 우호를 위해 사돈을 맺으려했다. 그 때 사신
으로 간 비무기가 일단 태자비가 될 진의 공주 맹영을 보았는데, 매우 아름다웠으므로,
초 평왕에게 잘 보이기 위해 그녀를 초평왕과 연결했고, 초 평왕은 그녀를 차지해 버렸
다. 그리고는 태자에게는 잉첩 중 가장 예쁜 여자를 태자비로 주었다. 한편 비무기는 나
중에 일이 들킬 것을 우려해 태자를 음해하였다. 그 음해에 넘어간 초 평왕은 태자 웅건
을 국방 수비명목으로 변방에 보내버렸다. 비무기는 그러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태자
를 계속 음해하며, 반란을 도모 한다고 모함했다. 초 평왕 6년(기원전 524년), 비무기는
결국 태자의 스승인 오사를 잡아 감금하였다. 그 이유는 태자를 잘못 가르쳤다는 명목에
서였다. 그리고 비무기는 화근을 없애기 위해 그 아들인 오상과 오운마저 제거하려 했다.
그러나 오상만 오고 오운(오자서)은 거부하고 정나라로 달아났다. 태자 건도 체포될 위기
에 처하자 정나라로 도주한다. 평왕은 오사와 오상만 참수했다. 그 후 오자서는 정나라에
서 太子 建(태자 건)이 엉뚱한 생각을 하는 바람에 정 정공에게 죽자 정나라를 탈출한다.
이때 태자의 아들인 공자 승을 데리고 오나라로 가야 했는데, 오나라로 가려면 반드시 초
나라를 거쳐야 했기 때문에 신포서의 조력을 받아 오나라로 갔고, 그는 거기서 새 둥지를
틀며, 초 평왕에 대한 복수를 하려고 했다. 초 평왕 10년(기원전 520년), 송 원공은 화씨
가문의 당주 화해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제나라, 晉(진)나라, 衛(위)나라, 오나라에게 도움
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초 평왕은 오나라와 진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화씨를 도왔다.
초 평왕 11년(기원전 519년) 송 원공은 제나라, 진나라, 위나라라, 오나라의 힘을 빌어 화
씨 가문을 초나라로 출출하는데 성공하였다. 초 평왕 14년(기원전 516년), 초 평왕이 죽
었다. 그 뒤를 그와 진나라 공주 사이의 자식인 웅진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초 소
왕이다.
제30대 소왕(BC. ?∼BC. 489) 초 평왕과 맹영의 아들이며, 초 혜왕의 아버지
초 평왕 14년(기원전 516년), 초 평왕이 사망하자 태자인 그가 왕위에 오르니 그가 초
소왕이다. 초 소왕 2년(기원전 514년), 오나라의 왕 僚(요)는 초 평왕의 상을 틈타 초나
라를 쳤다. 그래서 공자 掩餘(엄여)와 燭庸(촉용)을 보내 초나라의 육읍과 장읍 두 개의
읍을 포위했다. 그런데 오군은 초군 때문에 길이 끓였고, 이에 오왕 요의 친위 세력이
묶이자 오나라 내에서 公子 光(공자 광)이 오왕 요를 살해하고, 왕이 되는 사건이 발생
했다. 그리하여 공자 엄여는 舒(서)나라로, 공자 촉용은 鐘吾國(종오국)으로 달아났다. 초
소왕 4년(기원전 512년), 오왕 합려는 2년간 국력을 키운 뒤 오자서, 손무, 백비, 공자
부개와 함께 초나라를 침공했다. 이때 서나라와 종오국을 쳐서 공자 엄여와 촉용을 죽여
버렸다. 그 후 오왕 합려는 초의 도읍 영성을 치려 했다. 그러나 손무가 간했다. “아직
그럴 시기가 아닙니다.” 오왕 합려는 그 마을 옳게 여겨 따랐다. 초 소왕 5년(기원전 51
1년, 오나라가 육읍과 잠읍을 점령했다. 초나라의 사마 沈尹戌(심윤술)은 잠읍을 구하러
갔다. 초 소왕 7년(기원전 509년), 이대로 당할 수 없다고 여긴 초 소왕은 영윤 囊瓦(당
와)를 보내 오나라를 치게 했으나 예장에서 탈탈 털렸다. 초 소왕 10년(기원전 506년),
봄에 晉(진) 제, 노, 송, 채, 衛(위), 陳(진), 허, 조, 당, 邾(주), 돈, 호, 등, 실, 기, 소주
등 재후국들이 힘을 합쳐 초나라를 치는 와중 오왕 합려는 5,000명의 정예군사를 이끌고
대별산맥을 넘어서 수도인 郢(영)을 급습했다. 이때 낭와는 중앙군을 거느리고 심윤술의
계책에 따르기로 하고는 독자적으로 거짓후퇴를 하는 오군을 추격하다가 대별산맥 초입
에서 3번 대패하고 흩어지는 군을 추슬려서 백거에서 대항해 심윤술의 꾼대를 기다렸지
만 합려의 동생 부개의 돌격에 의해 또 한번 무너지고 후퇴하면서 淸發水(청발수)를 건
너다가 얻어터지고 후퇴하다가 밥짓는데 또다시 급습당한 끝에 결국 수도 인근 옹서에서
완전히 와해되었다. 백거에서 대치한지 10일만에 수도인 영 성이 함락되고, 초 소왕은
鄖(운)나라를 거쳐 속국인 隨(수)나라로 달아났다. 초나라의 수도 영을 함락한 오군은 약
탈과 강간 등의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 또한 전공이나 전리품을 다투면서 규율이 무너진
모습이 보였다. 오자서의 친구인 신포서는 이 위기 상황을 보고 있을 수 없어 秦(진)나라
에 가서 원병을 요청했으나, 당시 진나라의 군주인 진 애공이 초나라는 신의가 없다며,
거절했다. 그러나 7일간 이나 부탁하자, 그 정성에 진 애공은 초나라에게 원병을 주었다.
진나라 군대는 신포서와 함께 영성으로 갔다. 이때가 바로 초 소왕 11년(기원전 505년)
이었다. 초나라에게 호재가 일어났는데, 바로 오나라의 부개가 딴 마음을 품어 왕을 칭
하며 반란을 일으키자 오왕 합려는 물너나게 된 것이다. 이로써 초나라는 살아 났지만
수도 영성은 이미 개판이 되었다. 초 소왕 12년(기원전 504년), 수도인 郢(영)이 오나라
의 전쟁으로 폐허가 되자 수도로서의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결국 초 소왕은 수도
를 鄀(약)으로 천도했다. 초 소왕 16년(기원전 500년), 頓(돈)나라와 호나라를 쳤다. 소왕
20년(기원전 496년), 돈나라를 멸했다. 초 소왕 21년(기원전 495년), 호나라를 쳐서 멸하
고. 호나라의 자작 포를 포로로 잡았다. 초 소왕 27년(기원전 489년), 초 소왕이 죽고 아
들 웅장이 즉위하니 그가 초 혜왕이다.
제31대 혜왕(BC. ?∼BC. 432) 초 소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월나라여자인 越姬(월희, 월왕 구천의 딸이다)다. 초 혜왕 2년(기원전 487년),
영윤 자서는 오나라에서 죽은, 太子 建(태자 건)의 아들. 웅승을 받아들여 백읍에 봉했다.
그는 白公 勝(백공 승)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백공은 적극적으로 민심을 사며. 병사를 길
렀는데 그 목적은 바로 아버지의 한을 풀려는 의도가 있었다. 초 혜왕 6년(기원전 483년
백공 승은 영윤 자서에게 정나라를 치자고 했다. 그 이유는 태자 건이 정나라에서 반란을
일으켜 초나라를 치려는 기반으로 삼으려다가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서는 반대했다.
이 처사에 백공 승은 분노하여 자서에게 원한을 품었다. 초 혜왕 8년(기원전 481년), 晉
(진)나라가 정나라를 치자 정나라가 급히 구원을 요청했다. 그래서 초 혜왕은 자서를 보
내 정나라를 구원하게 했다. 정나라를 구원한 자서는 정나라의 대접을 받고 복귀했다.
이때 백공 승은 용사 석걸 등을 모아 영윤 자서. 자기. 초 혜왕을 죽이려고 했다. 그러자
초혜왕은 준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어머니인 월희의 궁으로 도피했다. 백공 승은 그
틈을 타서 초왕이 되었다. 1개월 후 채나라에 있던 沈諸梁(심제량)이 백공의 모반 소식을
듣고 백공 승의 난을 진압하려고 했다. 심제량이 도성 북문에 들어가 백공 승을 쳐서 이
겼다. 백공 승은 달아나다가 결국 자결하였다. 그리고 초 혜왕이 다시 조정에 복귀했다.
초 혜왕 11년(기원전 478년), 陳(진)나라가 백공 승의 난을 틈타 초나라를 쳤는데 그것을
초 혜왕은 자서와 공손조를 보내 진나라를 쳐서 멸했다. 그리고 그곳에 현을 설치했다.
초 혜왕 42년(기원전 447년), 혜왕은 병사를 보내 채나라를 멸했고 채후 제는 다른 나라
로 망명했다. 초 혜왕 44년(기원전 445년), 초 혜왕이 기나라를 멸망시켰을 때 월나라는
오나라를 멸망시켜 패자를 당당히 칭하는 등 강성해졌으나 강수와 회수 일대, 회복 일대
에 세력을 뻗을 수 없었다. 초나라가 대신해서 세력을 뻗어 사수 일대까지 영역을 확장
했고, 송나라를 쳤다. 초 혜왕 50년(기원전 439년), 초 혜왕은 노나라의 유명한 장인 공
수반으로 하여금 사다리차를 만들어 송을 치려 했으나 묵자가 그것을 말렸다. 초 혜왕 5
7년(기원전 432년), 초 혜왕이 죽고 아들인 웅중이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초 간왕이다.
제32대 간왕(BC. ?∼408) 초 혜왕의 아들이며, 초 성왕의 아버지다
초 간왕 원년(기원전 431년), 간왕은 북벌을 단행해서 齊(제)나라와 魯(노)나라의 사이에
있던 莒(거)나라를 멸망시키고, 거기에 읍을 설치했다. 초 간왕 7년(기원전 425년), 宋 悼
公(송 도공)은 초나라에 조공하였다. 이 당시 晉(진)나라는 魏(위)나라, 韓(한)나라, 趙(조)
나라로 삼분되어 이들을 묶어서 말할 때 삼진이라고 일컫게 되었다. 초 간왕 19년(기원전
408년), 초 간왕은 병사를 풀어 위나라의 상락을 쳤다. 초 간왕 24년(기원전 408년), 초
간왕이 죽고 그의 아들 웅당이 즉위하니 그가 초 성왕이다.
제33대 성환왕(BC. ?∼402) 초 간왕의 아들이며, 초 도왕의 아버지
초 간왕 24년(기원전 408년), 간왕이 사망하자, 웅당이 뒤를 이어서 초나라의 군주로 즉
위하였다. 초 성왕 6년(기원전 402년). 초 성왕은 강도들에게 살해당하고 그 뒤를 아들인
웅의가 이으니 그가 바로 초 도왕이다.
제34대 도왕(BC. ?∼BC. 381) 초 성환왕의 아들
초 성왕 6년(기원전 402년), 초나라 내부에 혼란이 일어나고 강도들이 성왕을 습격하여
살해하자, 웅의가 뒤를 이어 초나라 왕으로 즉위했다. 초 도왕 원년(기원전 401년), 당시
중국 정세는 춘추시대에서 전국시대로 흘러가 삼진(한, 위, 조)이 강성해졌으며, 제나라는
강씨가 축출되고, 田氏(전씨)가 장악했다. 그리고 초나라는 여러 국가들에게 압박을 받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초 도왕 2년(기원전 400년), 초나라는 불리한 정세하에 있었다. 이
를 틈타 한무자와 조환자. 위 문후가 초나라를 공격하자, 초군은 삼진 연합군에 맞서다
승구 땅에서 패배했다. 도왕 9년(기원전 393년), 초나라가 韓(한) 나라를 쳐서 負黍(부서
) 땅을 빼앗았다. 초 도왕 15년(기원전 387년), 오기가 魏(위)나라에서 초나라로 망명해
오자 오기를 영윤으로 삼았다. 그리고 초 도왕은 오기와 함께 부국 강병책에 논했는데,
이에 왕이 매우 기뻐했다. 초 도왕을 기뻐하게 한 오기의 부국강병책은 이러 하였다.
1, 왕족 출신의 대귀족에게 공로가 없으면 벼슬과 녹봉을 주지 않는 것으로 견제한다. 그
럼으로써 공금이 함부로 세나가지 않게 한다.
2, 관제의 정비를 시도해 쓸데없는 관직을 없앰으로써 거기서 생긴 돈을 공금으로 사용한
다.
3, 농지를 개간한다. 황무지를 개간해 거기서 수확한 농산물을 바탕으로 백성들을 부유하게
한다.
4, 군제를 개혁한다.
초나라의 법령을 정비하고, 불필요한 관직을 없애면서 군사들을 양성했는데 이런 정책을
시행하여 남쪽으로는 백월을 평정하고 북쪽으로는 陳(진)을 병합하면서 힘을 과시하였다.
도왕 21년(기원전 381년), 도왕이 죽자, 예전에 특권을 누렸던 초나라의 왕족이었던 자들
이 오기를 죽이려고 했다가, 그 와중에 오기가 도왕의 시신에 엎드리자 왕의 시신에 화
살이 꽂히는 일이 일어났고 이 일에 연루된 초나라 옹족이 처형된 자가 70여 명이 이르
렀다. 이어 숙왕 장이 즉위했다.
제35대 숙왕(BC. ?∼BC. 370) 초 도왕의 아들
초 도왕이 죽은 뒤 오기를 미워한 초나라 귀족들이 그를 죽였는데, 오기는 자신의 죽음
을 피할 수 없음을 알고 기지를 발휘해 도왕의 시신 곁에 있다가 거기서 화살에 맞아 죽
었다. 그래서 화살이 도왕의 시신에 꽂혔는데, 초 숙왕이 즉위하고, 그것을 용서할 수 없
었으므로 오기를 죽인자의 일족을 멸했는데 무려 70여 가구에 이르렀다고 한다. 숙왕 4
년, 蜀(촉)나라가 초나라를 공격해 玆方(자방)을 빼앗았다. 초나라에서는 천관에서 촉군을
물리쳤다. 초 숙왕 6년(기원전 375년), 魏(위)나라가 초나라와 유관에서 싸웠고 魯陽(노양
땅을 빼앗았다. 이때 한나라가 초나라의 속국인 鄭(정)나라를 멸하고 新鄭(신정)에 도읍했
다. 한나라 한 애후 2년의 일이었다. 초 숙왕 11년, 숙왕이 죽었으나 아들이 없어서 그의
동생 웅양부가 즉위했다. 그가 바로 초 선왕이다.
제36대 선왕(BC. ?∼BC. 340) 초 도왕의 아들이며, 초 숙왕의 동생이다
초 선왕 7년(기원전 363년), 초나라는 파나라 땅에 漢中(한중)과 黔中(검중)을 설치했다.
초 선왕 12년(기원전 358년), 초나라가 魏(위)나라를 황하의 장원에서 쳤다. 초 선왕 26
년(기원전 344년), 초나라에서는 경사를 보내 채나라의 잔당을 쳐서 그들을 제거했다.
초 선왕 30년(기원전 340년), 30년 가량의 재위 기간을 끝내고 선왕이 죽으니 그 아들
웅상이 뒤를 이었다. 그가 바로 월나라를 멸망시킨 초 위왕이다.
제37대 위왕(BC. ?∼BC. 329) 초 선왕의 아들이며, 초 회왕의 아버지다.
초 위왕 2년(기원전 338년), 秦(진)나라의 진 효공이 죽고, 그 아들인 영사가 진나라의
군주가 되니 그가 혜문왕이다. 이후 진나라에서 변란이 일어나 개혁가인 상앙이 혜문왕
에 죽임을 당했다. 그러자 초나라는 한나라. 조나라, 진나라와 힘을 합쳐 위나라를 압박
하고자 했다. 초 위왕 7년, 제나라 재상 孟嘗君(맹상군)의 부친 田嬰(전영)이 초나라와
친선을 맺는 척 하면서 월나라를 부추켜 초나라를 공격하게 하자, 초 위왕은 제나라를
공격해 서주에서 제군을 격파하고 제왕에게 전영을 축출하도록 위협했다. 같은 해에 월
나라를 공격하면서 월왕 무강을 죽이고 오 지역을 손에 넣게 되자, 장강 남안에 석두성
을 쌓았다. 그의 치세 동안 초나라의 영역은 사수 유역에서 장강 중, 하류까지 확대되었
다. 위왕 11년(기원전 329년), 위왕이 사망하자, 아들 괴가 즉위했다. 그가 회왕이다.
제38대 회왕(BC. ?∼296) 초 위왕의 아들이며, 초 경양왕의 아버지다.
초 회왕 6년(BC. 323년), 주국 昭陽(소양)에게 명해 위나라를 치게 해 양릉의 8개 성을
얻었다. 초 회왕 10년(기원전 319년), 蘇秦(소진)의 합종책을 받아들여 제나라, 魏(위)나
라, 韓(한)나라, 조나라, 연나라와 동맹을 맺었다. 초 회왕 11년(기원전 318년), 초 회왕
은 제나라, 위나라, 한나라, 조나라, 연나라 등의 추대로 종약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리고
그 기세를 타고 秦(진)나라의 함곡관으로 진격했으나 서로 간의 이해 탓에 제대로 이뤄
지지 않았다. 초 회왕 16년(기원전 313년), 초나라는 제나라와 함께 曲沃(곡옥) 땅을 쳤
으나 晉(진)나라의 반격으로 실패했다. 그리고 진나라가 장의를 보내 상오의 600리의 땅
을 주겠으니 제나라와 우호를 끊으라고 했는데, 초 회왕은 제나라 사람인 진천이 간하는
말을 듣지 않고 장이의 말을 그대로 믿고, 제나라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하면서까지 우호
를 끊었다. 그러나 장이는 나중에 입을 쓱 닦고 “저는 600리의 땅을 주겠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제 봉토 6리라도 가져가시겠습니까? 라고 하여 초 회왕은 분을 삭이지 못해
진나라와 우호를 끓고 진나라를 치려했다. 초 회왕 17년(기원전 312년), 결국 진나라의
반격을 받게 되었다. 초나라는 단양에서 패하고, 한중 땅을 잃었으며 남전에서 보낸 초
군도 진나라에게 패하고 말았다. 최 회왕 18년(기원전 311년), 같은 해에 진 혜문왕은
한중의 절반을 나누자고 했는데, 초 회왕의 대답은 이러했다. “나는 다른 건 다 필요 없
고 장의 그놈을 원하다.” 그래서 진 혜문왕은 찜찜한 채로 장의를 보냈다. 그러자 초 혜
왕은 장의를 죽이기 위해 날을 잡고 있었다. 그런데, 장의는 미리 초 회왕의 측근 근상
과 초 회왕의 정실이자 총애하는 부인인 정수를 매수해 그들의 힘으로 장의는 살아 돌아
왔다. 이것을 안 굴원은 탄식해마지 않으며 장의를 잡아 죽이라고 했다. 이에 마음이 변
한 초 회왕은 자의를 추격하게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초 회왕 23년(기원전 306년)
월나라 땅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제나라와 힘을 합쳐 월왕으로 추대된 무강을 죽였다. 회
왕 27년(기원전 302년), 진에 인질로 간 태자 웅횡이 진의 대부와 사사로이 싸우다가 그
를 죽이자 초나라로 도망왔다. 회왕 29년(기원전 300년), 진이 다시 초나라를 쳐서 초의
장수 경결을 죽이자 결국 제나라에 태자인 웅횡을 보내면서 화친했다. 회왕 30년(기원전
299년), 秦(진)소양왕이 초나라의 성 8개를 취하고 맹약을 맺자는 이유로 불렀다. 초 회
왕은 처음에는 소저의 말을 듣고 의심하여 가지 않으려 했으나 왕자 자란의 설득으로 진
나라에 갔으나 무와 검증 땅을 내놓으면 화친하겠다고 하였다. 결국 억류되어 끝내는 다
시 돌아가 왕 노릇을 하지 못하게 된다. 이에 초나라 측에서는 인질로 보내진 태자 웅횡
을 제나라에서 귀국시켜 그를 왕위에 올리니 그가 초 양왕이다.
제39대 경양왕(BC. ?∼BC. 263) 초 회왕의 아들
초 회왕이 秦(진)나라에 억류되어 더 이상 왕위를 비울 수 없다고 판단한 초나라 신하들
이 태자인 그를 제나라에서 데려와 추대하여 왕이 되었다. 초 경양왕 원년(기원전 298년),
초 회왕을 억류해도 검중 땅을 얻을수 없다고 판단한 진 소양왕은 무관에서 초나라를 치
니 초군 50.000명이 죽고, 진나라는 析邑(석읍)과 그 주변의 15개 성을 차지했다. 경양왕
3년, 초 회왕이 진나라에서 죽었다. 진나라에서는 그의 시신을 초나라로 보냈다. 여러 나
라는 이 일로 진나라가 부도덕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진나라와 초나라는 단교했다. 초 경
양왕 6년(기원전 293년), 秦(진)나라가 무패의 명장 白起(백기)를 보내 한나라의 이궐 땅
에서 韓(한)과, 魏(위)의 연합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고 이궐을 점령한다. 한, 위의 전사
자만 24만 명이 되었다. 초 경양왕 7년(기원전 292년), 경양왕은 진나라 공주를 아내로
맞이했다. 초 경양왕 14년(기원전 285년), 경양왕은 소 양왕과 완 땅에서 화친을 맺었다.
초 경양왕 15년(기원전 284년), 초 경양왕은 진나라, 삼진(한, 위, 조)과 힘을 합쳐 제나
라를 쳐서 회북 땅을 얻었다. 초 경양왕 16년(기원전 283년), 진 소양왕은 언 땅에서 회
맹을 가졌다. 그리고 같은 해 가을 양읍에서 회맹을 다시했다. 초 경양왕 19년(기원전 2
80년), 진나라가 초나라를 치자 초군이 진군에게 패했다. 결국 상용과 이북 땅을 진나라
에게 떼주고 화친했다. 초 경양왕 20년(기원전 279년), 진나라가 초나라의 서릉 땅을 빼
앗았다. 경양왕 21년(기원전 278년), 진나라의 장수 백기가 초나라의 수도 영을 빼앗고
초나라 왕들이 묻힌 이릉 땅에 불을 질렀다. 초군이 궤멸하여 더 싸울수 없었으므로 옛
陳(진)나라 땅으로 천도했다. 그리고 그곳을 郢(영)이라 불렀다. 초 경양왕 23년(기원전
276년), 초 경양왕은 진으로 천도한 뒤 패잔병을 모아들이니 그 수가 100,000명에 달했
다. 그리고 진나라가 점령한 장강 연안의 15개 군현을 되찾았다. 초 경양왕 27년(기원전
272년), 경양왕은 삼진과 함께 연나라를 쳤다. 그리고 진나라와 화친하며, 태자를 인질
로 보냈고 황헐에게 그를 보좌하게 했다. 경양왕 36년(기원전 263년), 경양왕이 위독하
자 태자 웅원이 황헐의 책략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가 초나라의 위에 올랐다. 그가
초 고열왕이다.
제40대 고열왕(BC. 290∼BC. 238) 초 경양왕의 아들
경양왕이 죽자 웅완이 즉위했으며, 고열왕은 공을 세운 황헐을 영윤에 임명하고 춘신군
에 봉해 회수 이북지역 12개 현을 봉토로 주었다. 초 고열왕 원년(기원전 262년), 州(주)
땅을 진나라에 주고 강화를 맺었다. 초 고열왕 12년(기원전 251년), 진나라에서 소양왕이
죽자 춘신군을 조문 사절로 보냈다. 고열왕 16년(기원전 247년), 춘신군이 회수 이북지역
은 제나라와 맞닿아 직접 관할하는 것이 편하다고 해 회수 이북지역의 12개 현을 바치고
강동을 봉지로 요청하자 이를 허락했다.초 고열왕 22년(기원전 241년), 각각의 제후국들
이 진나라의 계속되는 공격을 걱정해서, 서로 연합해 진나라를 공격했다가 함곡관에서
패배했다. 초 고열왕은 그 책임을 물어 춘신군을 책망했으며, 그 일로 인해 둘의 사이가
벌어졌다. 한편 같은해 수도를 수춘으로 천도하고 이름을 영이라고 했다. 초 고열왕 25
년 (기원전 238년), 고열왕이 죽고 왕의 아들인 한이 뒤를 이어 유왕이 되었다.
제41대 유왕(BC. 268∼BC. 228) 초 고열왕의 아들
아버지 고열왕이 죽자 웅한이 초나라의 국왕이 되었다. 그리고 즉위한지 얼마 뒤에 외삼
촌인 이원이 춘신군을 죽이는 일이 벌어졌다. 초 유왕 3년(기원전 235년), 조나라를 공격
한 秦(진)나라와 魏(위)나라가 초나라를 공격했다. 유왕 10년(기원전 228년), 초 유왕이
죽고 동복 아우인 웅유가 즉위하니 그가 애왕이다.
제42대 애왕(BC. ?∼BC. 228) 초 고열왕의 아들이며, 초 유왕의 동복동생
초 유왕 10년(기원전 228년), 친형인 초 유왕 웅한이 죽자, 초나라 왕으로 즉위했다. 그
러나 재위 두달만에 이복 형인 부추의 습격을 받아 죽었다.
제43대 부추(BC. ?∼BC. 223) 초 고열왕의 이복 동생
초 애왕 원년(기원전 228년), 이복 동생인 초 애왕이 즉위하자 2달 만에 반란을 일으켜
초 애왕을 죽이고 자신이 초나라 왕이 되었다. 부추 2년, 진나라는 장군을 보내 초나라
군사를 대파함으로써 10여 개 성읍을 빼앗았다. 부추 3년, 진나라가 魏(위)나라를 멸했
다. 초왕 부추 4년(BC. 224년), 秦(진)나라 장수 王翦(왕정)이 초나라를 침공하자 초나라
는 項燕(항연)을 보내 맞서나 기 지역에서 패배해서 향연은 잡혀 죽는다. 같은 해에 진
나라 장수 왕전과 蒙武(몽무)가 초나라의 수도로 침공하여 함락시키고, 초왕 부추는 진
나라 군에 사로 잡히고 난 시점에서도 아직 초나라의 지방 세력들이 여전히 진나라에 항
거했지만, 끝내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왕분과 몽염에게 모조리 진압당했다.
수도 천도
熊光(웅광) 丹陽(단양) 湖北省 宣昌 秭歸 (호북성 선창 자귀)
文王(문왕) 熊眥(웅자) 郢(영) 호북성 荊州市 江陵 호북성 형주시 강능)
소왕(紹王) 熊珍(웅진) 若(약) 河南省 南陽 하남성 남양부근)
頃襄王(경양왕) 熊橫(웅횡) 陳(진) 河南省 陳縣(하남성 진현)
考烈王(고열왕) 熊元(웅원) 巨陽(거양) 安徽省 太和 동남(안희성 태화 동남)
壽春(수춘) 安徽省 淮陽(안휘성 회양)
사료 출처
司馬遷(사마천)의 史記世家(사기세가)와 曾先之(증선지)의 十八史略(십팔사략) 그리고 馮夢
龍(풍몽룡)의 東周列國志(동주열국지)와 司馬光(사마광)의 資治通鑑(자치통감) 또한 左丘明
(좌구명)의 春秋左傳(춘추좌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