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 대 청년이었던 내가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그 때 오십 년쯤 지나 칠 십대가 되리라는 걸 상상이나 했겠는가. 아니, 이해는 했다 해도 칠십 대란 한 물간, 인생 막바지에 들어선 시기쯤으로 생각했을 거다. 그런데 아니다.
오늘은 올들어 제일 추운 날이다. 올해 첫 산행으로 강원도 횡성 태기산을 갔다. 이십 대라도 엄두를 냈을까. 사람들이 단잠에 빠져 있을 새벽에 첫사랑을 만나듯 설레며 길을 나섰다. 귀가 시리고 볼이 따가웠다. 이 시간에도 버스 승강장엔 겨울산행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아도 나보다 나이가 들어 보이는 사람은 드물었다. 아니, 못보았다. 내가 다니는 산악회는 나이든 사람들이 주축, 팔십 대 중반도 여럿이다. 건강해서 다니고 다니니 건강하다.
태기산은 높이 1,261미터로 횡성군에서 가장 높다. 진한의 마지막 왕인 태기왕이 신라 박혁거세에 저항했던 산성이 있어 태기산이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듯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이렇게 시작하는 메밀꽃 필 무렵의 이효석 생가가 있는 평창 봉평면이 바로 아래다. 약 10킬로 미터를 세 시간에 걸쳐 걸었다. 산 정상 송신탑과 풍력발전 시설을 위해 만든 아스팔트 길을 걸었다. 얼마만에 듣는 소리인가, 밟힌 눈이 뽀드득뽀드득 소리를 냈다. 겨울공기가 싸늘하면서도 신선하다. 아쉽게도 눈은 내리지 않아도 눈 쌓인 설경을 즐기는 산행이다. 풍력 발전 날개가 줄지어 돌고 있다. 올라 갈수록 바람이 세찼다. 쌓인 눈이 날려 뒤로 돌아서야 했다. 눈에 비친 햇빛이 눈부셔 썬글라스를 꼈다. 하늘은 파랬다. 체감온도가 20도는 넘지 않을까. 방한모로 감싼 귀가 시리다. 털장갑에 넣은 손가락이 곱다. 춥다고 해서 옷을 단단히 입은데다 쉴새 없이 몸을 움직여 크게 추위를 느끼지는 않았다. 옷이 좋아져서일 것이다. 오십여 년전 강원도에서 군 생활을 할 때는 잡는 곳마다 손이 쩍쩍 달라 붙었다.
일상을 떠나 버스 창밖을 내다 보며 오가는 겨울여행이 괜찮다. 눈덮인 하얀 들판을 내다 보니 옛날옛날 한 옛날이 생각났다. 잎이 떨어진 나무들로 가득찬 숲도 괜찮은 풍경인데 무거운 눈을 이고 진 소나무가 늠름하게 군락을 이루고 있는 모습을 보는 맛이 정말 좋다. 나도 그래야겠다. 내가 건강한 건 내가 좋고 애들에게도 좋다. 추운 몸에 들어간 따뜻한 정종 한 잔이 별미다. 순대국밥집으로 옮겨 마신 막걸리로 기분이 끝내 준다. 졸다 보니 덕평 휴게소다.
눈이 푹푹 쌓여 떨어 뜨린 휴대폰을 찾느라고 혼이 났다. 일행은 앞으로 가고 나는 몇 번씩 발자국을 따라 걸었다.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첫댓글 그 바람에 눈이라도
흩뿌렸으면
휴대폰과의 조우는
아마
불가능 했겠지요 ?
다행 + 다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