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원되지 못한 것들을 위하여
박 완 서
“심사료를 참 많이 주네요.”
시인 함소연이 영수증에 서명을 하면서 말했다.
“많긴 뭐가 많아.”
나는 방금 서명을 끝낸 볼펜꼭지를 송곳니 사이에서 씹다 말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함시인은 내 딸 또래의 젊은 시인이었지만 오늘 초면이어서 깍듯이 대했었는데 왜 느닷없이 반말을 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역시 정서불안 증세인가. 어쩌다 손톱이나 볼펜꼭지를 씹는 내 버릇을 보고 내 자식들이 놀리는 투로 붙인 병명이었다.
함시인의 말대로 삼사십 장 정도의 수기 심사료가 삼십만 원이면 후한 편이었다. 광고가 본문의 갑절은 되는 여성지의 경우 예선도 안 거친 수기의 심사료가 통상적으로 십만 원이었다. 거기 비하면 깔끔한 예선을 거쳐 읽을 만하게 간추려진 글을 심사위원 둘이서 서너 편씩 나누어 읽고 그만큼 받았으니 후하기보다는 과하다 해야 옳을 것이다. 더구나 이 잡지는 팔릴 것 같지 않은 교양지였다. 게다가 정부 시책을 합리화시키고 홍보하는 구실을 하는 정부 투자기관의 연구소에서 발행하는 것이었으니 어용을 꺼리는 지식인층은 거저 줘도 마다할 만한 잡지였다. 공짜인지 강매를 한 것인지 동사무소나 은행 같은 데는 으레 비치돼 있지만 대중적인 인기나마 있는 것 같지 않은 어중간한 교양지가 앞으로 살아남을 가망 또한 때가 때니만치 여간 불투명하지가 않았다.
때는 6·29선언이 있고 나서 오랜만에 국민이 직집 뽑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온갖 다양하고 새로운 욕구와 희망이 도처에 팽배해 있을 때였다. 내 심보도 나에게 심사를 의뢰한 잡지의 이런저런 불리한 여건은 아무래도 좋았다. 다만 어용한테서는 아무리 파격적인 대우를 받아도 시큰둥 약소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슨 잡지사 사장실이 그렇게 으리으리하죠?”
함시인은 쑥색 대리석이 유리알처럼 매끄러운 복도를 패션모델처럼 보기 좋은 결음걸이로 앞서다가 문득 나를 기다려주면서 말했다. 작년에 내 집 장판방에서 발목을 삐끗한 게 인대가 늘어났다 해서 한 달 남짓 깁스를 하고 고생한 적이 있는 나는 지레 겁을 먹고 벌벌 기고 있었다.
“누가 아니래지. 염불엔 마음이 없고 잿밥에만 마음이 있는 친구겠지, 보나마나.”
우리가 심사하는 동안 쓴 장소는 사장실이었는데 잡지사 사장실답지 않게 으리으리하고 권위주의적이었다. 심사방법은 원고를 합평 전까지 돌려가며 읽는 게 아니라 각자에게 돌아온 원고에서 두 편씩 추려낸 원고만을 그 자리에서 바꿔보고 나서 최우수, 우수, 가작 세 편을 뽑는 방법을 취했기 때문에 시간이 좀 걸렸다. 두 시간 가까이나 사장실에 머물렀건만 사장 코빼기도 못 봤을 뿐 아니라 담당기자 외에는 편집실이 어디 가 붙었는지도 모르게 돼 있었다.
“차나 한잔 같이 하고 가시죠?”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맞은편이 다방이었다.
“아뇨, 그 동안 두 잔이나 마셨잖아요.”
“참 그렇네요. 차 안 가져오셨죠? 제가 댁까지 모셔다드릴게요. 방향이 비슷하니까요.”
“차가 있어야 가져오죠. 신경 쓸 거 없어요. 난 시내에 나온 김에 여기저기 들러갈 데가 좀 있으니까.”
차 잡기 어려운 시간에 괜한 거짓말을 해서 아까운 차편을 놓치고 터덜터덜 지하철 입구를 찾아 걷기 시작했다. 여직껏 마치 함시인하고 뭐가 잘 안 맞아 마음이 그렇게 삐딱하게 꼬였던 것처럼 혼자가 되니까 한결 편해졌다. 그러나 전철 속에서 나는 다시 손톱을 씹었고 동네 다 와서 장을 보다가 핸드백 속에서 심사료가 든 봉투를 발견하고는 괜히 화가 나고 창피해서, 에라 모르겠다 마구잡이로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몇 가지 샀다.
“엄마 또 스트레스 받았나봐.”
막내딸이 내 시장보따리를 끌러보며 말했다. 나는 왜 샀는지 설명이 안 되는 충동구매를 하고 나서 곧잘 엄마의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법이니 봐주라는 투의 변명을 해왔던 것 같다. 나는 서양 사람처럼 어깨만 한번 으쓱해 보였다. 그러나 도대체 어디서 비롯됐는지 알 수 없는 나의 고약한 울분과 수치심은 그렇게 간단히 해소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사흘쯤 지나고 나서였다. 아침을 먹고 나서 한가롭게 조간신문을 뒤적이고 있는데 전화벨 소리가 났다. 딸아이가 냉큼 받더니 나를 불렀다.
“엄마 전화예요. 『앞서가는 조국』 잡지사래요.”
“없다구 그러잖구.”
나는 안 해도 될 소리를 중얼대며 전화를 받았다. 아니나 다를까 수기 심사 때의 담당기자였다.
“선생님 예측이 딱 들어맞았지 뭐예요. 최우수작 당선자가 당선을 없었던 걸로 해달래요. 선생님 선견지명 덕분에 여벌로 한 편을 더 뽑아놓았으니까 잡지사로선 아무런 문제도 없지만 심사위원 선생님도 알고는 계셔야겠기에 전화드립니다.”
원래는 침착하고 사무적인 담당기자의 말투가 내 선견지명에 대한 경탄으로 약간 들떠 있는 것처럼 들렸다. 나는 즉각 그걸 경멸로 받아들였고 모멸감을 만회해보려고 허둥댔다.
“아니, 사양한다고 옳다꾸나 그걸 받아들이면 어떡해요. 성의껏 권해보기는 했어요?”
“그러믄요. 부장님이 현지까지 내려가서 하룻밤 주무시면서 설득을 하셨는데도 막무가내더래요.”
“그 사람 참 이상한 사람이네, 여간 공들여 쓴 글이 아니던데 쓸 때는 언제고 발표하길 싫어할 건 또 뭐람. 후환이 두려워서 그러나본데 그 점은 보장해주마고 안심을 시키지 그랬어요. 지금이 어떤 세상이 라고…….”
“부장님도 그 수기를 큰 수확이라고 좋아하셨으니까 놓치고 싶지 않아서 별의별 소리를 다 하셨나봐요. 그렇지만 본인이 그 얘긴 정말이 아니다, 소설처럼 꾸민 이야기니까 수기의 조건을 어겼으니 안 된다고 딱 잡아떼더라니 우린들 어쩌겠어요.”
“그게 꾸민 이야기가 아니란 건 내가 보장해도 되는데…… 김 기자, 혹시 잡지사에서 그런 글 안 실으려고 일부러 일을 그렇게 꾸민 거 아니오? 『앞서가는 조국』지라면 능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어머 '선생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우리 잡지 새 시대에 부끄럽지 않게 거듭나려고 요새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아시면서.”
심사할 수기를 가지고 집에 왔을 때도 김기자는 그와 비슷한 얘기를 했었다. 관변잡지라는 종래의 잡지 성격에 맞추려는 글 보다는 거기 도전하는 글이 나오길 바란다는 요지의 얘기를 들으면서 물에 빠진 자가 검부러기라도 잡으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는 듯했었다. 수기 나부랭이로 한번 굳어진 이미지가 쇄신될 리 만무하건만 그런 기대를 하는 게 그만큼 불쌍해 보였다. 나 자신 여성 수기를 심사해보고 넌더리를 낸 경험에 비추어 수기라면 신세 한탄 나부랭이 이상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건 상금이 파격적이어선지 예선을 통과한 수기들이 다 놓치기 아까운 수준이었고 소재도 고루 다양했다. 이렇게 수준이 고를 때는 되레 당락이나 일이등을 정하는 데 애를 먹게 마련인데 이번엔 그럴 걱정도 없었다. 최우수작으로 뽑은 「복원復元」은 그중에서도 단연 돋보였다. 두 사람 이상의 심사위원이 응모작을 나누어 볼 때 자기에게 돌아온 글이 그저 그럴 때는 괜히 풀이 죽어서 심사에 임하게 되지만 이거야말로 당선작감이라고 눈에 번쩍 띄는 글을 만났을 때는 절로 신바람이 나게 마련이다.
그래도 겉으로는 시침 딱 떼고 「복원」과 또 한 편을 후보작으로 함시인 앞에 내놓았고, 함시인도 그녀가 추려가지고 온 두 편을 나에게 내놓으며 말했다.
“수준이 고르긴 한데 뛰어난 게 없어서 애먹었어요. 선생님 보신 건 어때요?”
그렇담 「복원」의 최우수작 당선은 떼놓은 당상이 아닌가. 나는 속으로만 빙긋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 뿐 짐짓 무표정하게 함시인이 뽑은 두 편을 빠르게 속독하기 시작했다.
“선생님 큰 거 건지셨네요.”
「복원」을 반쯤 읽다 말고 함시인이 말했다.
“내가 건지긴. 우리가 건졌지.”
이렇게 해서 「복원」을 최우수작으로 하는 건 쉽게 합의를 보았고 다음 우수작 가작은 한 단계 뚝 떨어진 채 비등비등해서 함시인이 하자는 대로 결정했다. 쏙 마음에 드는 작품을 만났기 때문에 그 다음 이등 삼등짜리에 대해선 그만큼 시들했다. 심사에 들어가기 전에 커피를 주더니 끝마치고 나니까 인삼차와 과일이 나왔다. 느긋한 시간이었다. 아무리 예상 밖의 좋은 글을 만났다고는 하나 순수문학의 등용문도 아니고 논픽션 부문에서 권위 있거나 알려진 관문도 아닌 별볼일 없는 잡지의 수기를 심사한 푼수로는 우리는 너무 만족해하고 있었다. 나의 만족도는 거의 행복감에 가까웠다. 그 까닭을 꼭 집어내듯이 함시인이 말했다.
“참 세상 좋아졌죠? 예전 같으면 감히 그런 걸 폭로할 엄두를 어떻게 냈겠어요. 그것도 순박한 시골 사람이…….”
그렇다. 우리가 좋아하고 있는 건 그럴듯한 당선작을 만나서가 아니라, 그런 얘기가 당당한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이었다. 그러니까 함시인이 말한 예전은 불과 몇 달 전인 6·29 전을 의미할 터였다.
「복원」은 유신을 전후한 두 번의 국회의원 선거 때 한 씨족 마을이 교묘하게 저지른 선거 부정 이야기였다. 그 당시 그 작자(作者)는 그 마을의 이장이었을 뿐 아니라 문중에서 항렬이 높아 머리가 허연 노인들로부터도 대부(大父) 소리를 듣는 한창 나이의 장년으로 몇백 년을 한결같이 척박한 땅만 파먹고 사는 침체된 마을을 어떡하면 잘살게 할 수 있을까 획기적인 변화를 꿈꾸고 있었다. 마침 문중에서 유일한 대학생의 전공이 축산이어서 그랬는지 젊은이들과 의논해보면 한결같이 내 고장의 살 길은 농업에서 목축업으로 전환하는 거였다. 말이 쉽지 보수적인 마을에서 그런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려면 자체 내의 힘만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운명을 타파할 비전을 주고, 힘차게 밀어주고, 가능하면 앞일을 보장까지 해주는 믿음직한 바깥의 힘을 필요로 했다. 그 힘이 지목이나 수로 변경, 자금 지원 등 마냥 까다롭고 힘 빼는 일까지 대행해주길 바란다면 그 힘이란 마땅히 권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같이 빽이 되어줄 권력을 목말라할 무렵 선거 때가 되었고 그는 생각할 것도 없이 당시의 여당인 공화당 입후보자에게 붙기로 했다. 붙기 위한 노력은 조금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 마을뿐 아니라 선거구 전 지역에 이장의 친인척은 고루 분포돼 있었으니 친인척간의 그의 영향력을 아는 입후보자라면 되레 그에게 빌붙는 일에 군침을 안 삼킬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양쪽은 마치 음양이 끌리듯이 힘 안 들이고 극히 자연스럽게 협력관계를 맺었다. 그가 먼저 그의 포부를 말하고, 당선되면 밀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자 한 건 말할 것도 없다. 공화당 입후보자는 그의 계획에 전폭적으로 찬동했을 뿐 아니라 한 술 더 떠서 그걸 조금도 수정하거나 가감함이 없이 그대로 공약사업으로 내걸어주었다. 그 역시 그의 영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해 선거운동에 발 벗고 나선다. 그런 과정에서 입후보자의 인격에 실망하기도 하고 서울서 따라 내려온 딴 운동원들과 마찰을 빚기도 하지만 오로지 자기 마을을 잘사는 마을로 만들어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꾹 참고 일편단심 충성을 다한다. 선거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 그가 미는 입후보자의 복잡한 여자관계가 소문나 불리해지자 그는 누가 시키기도 전에 여자를 사서 야당 후보에게 버림받아 실성한 행세를 연기하며 선거구를 누비도록 하는 짓까지도 한다. 이렇듯 온갖 위법과 추악한 짓을 닥치는 대로 하고 나서 그걸 상대방에게 씌우기를 여반장으로 했을 뿐 아니라 투표일에는 좀더 실속 있는 부정을 한다. 공개투표, 무더기투표, 사전투표, 대리투표, 개표부정 등 자유당 말기에 신문기사를 통해 그런 못된 짓이 있다는 것만 알고 있던 온갖 수법을 다 써본다. 그러면서 공화당 후보의 운동원이기 때문에 그런 못된 짓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다는 것도 저절로 깨닫게 된다. 그런 깨달음은 그를 더욱 대담하게 그리고 희망에 부풀게 한다. 그가 미는 입후보자가 당선만 되면 세상에 안 되는 게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일단 당선이 되자 그가 당선시켰단 자세를 할 새도 없이 국회의원은 서울로 가버리고 공약도 그의 노고도 꿩 구워먹은 자리가 되고 만다. 기다리다 못해 서울까지 찾아가 어렵게 만난 국회의원은 연구 검토 중이라고 거드름을 피우다가, 정국이 혼미하여 국운이 백척간두에 달린 이때 그런 청탁을 하면 어떡하냐고 노골적으로 귀찮아한다. 속았다는 느낌이 확실해질 무렵 계엄령이 선포되고 국회가 해산된다. 유신시대가 막을 올린 것이다. 그가 당선시킨 국회의원의 단명이 고소하기도 한 한편 국운이 백척간두에 달렸다는 말이 참말이었다는 것 때문에 한 가닥의 신뢰감을 버리지 못한다. 유신시대에 다시 공화당의 공천을 받은 같은 입후보자에게 그는 전번과 똑같은 언약을 받고 마치 배운 도둑질 써먹듯이 거침없고도 익숙하게 전번의 그 더러운 방법들을 그대로 써먹음으로써 또다시 당선을 시킨다. 그가 당선을 시킨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 국회의원이 그의 혁혁한 공로는 물론 자신의 언약까지를 금방 잊어버리는 것까지 전번의 각본과 똑같다.
그의 수기를 대강 이렇게 요약해놓으면, 선거 때마다 매번 경험하고 또 신문이나 텔레비전을 통해 넌더리가 나게 들은 흔해빠진 선거 부정 사례의 나열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잡지에 싣고 싶어하는 수기라면 으레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식의 신세 한탄이나 투병기 아니면 새마을 성공 사례와 유사한 자수성가기가 고작이라는 선입관에 젖어 있는 심사위원에겐 이런 소재가 특이하게 보였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탁월하다고까지 생각한 건 소재보다는 그의 특출한 기술방법이었다. 그는 마치 깨진 그릇의 파편을 주워모아 원형을 재현하듯이 우직하고도 꼼꼼하게 한 지난 시대에 어떤 외진 고장에서 있었던 부정의 추악상을 본디 모양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고 있었다. 그 드러냄이 어찌나 선명하고 여실한지 어떤 변두리에서 있었던 사건을 뛰어넘어 한 추악한 시대의 전형을 보˛는 느낌을 갖도록 했다. 그건 문장력 같은 것하곤 달랐다. 그런 걸 타고났거나 갈고 닦은 흔적이 조금도 없는 게 되레 그 수기의 미덕이었다. 그는 다만 하나의 부정을 완성하는 데 있어서 권력이 차지한 몫뿐 아니라 그 자신과 주변의 평범한 사람이 분담한 몫까지를 동정도 과장도 없이 정직하게 드러냈을 뿐이었다. 따라서 흔한 고발이나 폭로의 의도도 엿보이지 않았거니와 속죄양이 되어 모든 잘못을 자신이 뒤집어쓰는 것처럼 꾸미고, 실은 고백은 손톱만큼 하고 태산 같은 위선의 기쁨을 누리려는 참회록 따위하고도 달랐다.
그가 수기의 제목을 「복원」이라고 붙인 건 참으로 적절했다. 깨진 간장종지 하나를 복원시키려도 더도 말고 그 파편들을 잃지도 보태지도 말고 고스란히 주워모아야 하듯이 심세한 부분도 잊어버리지 않고 있다가 제자리를 찾아 맞춘 그의 기억력은 감탄할 만했다. 십수 년의 세월과 그의 연령으로 미루어 기록해두지 않으면 그럴 수도 없는 일이었다. 권력과 힘없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찰떡같이 맞물리면서 부정을 모의하게 된 경위 뿐 아니라, 부정 자체가 지닌 인력 때문에 한번 발을 들여놓자마자 정신없이 빨려들게 되는 모습이 여실하면서도 그 꼼꼼한 기록성 때문에 그 동안도 그가 깨어 있다는 걸 짐작하게 하는 거야말로 그 수기의 마지막 진가였다.
담당기자한테 당선작을 통보할 때 함시인이 말했다.
“이런 시시한 잡지에 싣긴 어째 아까운 생각이 드는데.”
“너, 우리 잡지 발행부수가 얼만 줄이나 알고 그따위 소리 하는 거야.”
“발행부수 좋아하네. 거저 뿌리려면 백만 부는 못 찍을까.”
“아무튼 엄격하기로 소문난 이선생님까지도 흡족해하시는 작품이 나왔다니 저희 잡지도 아마 빛이 날 겁니다.”
담당기자가 나에게 말머리를 돌렸다. 두 사람은 여고 동창생이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점잖게 심사료나 챙겨가지고 일어섰으면 오죽이나 좋았으련만, 내 촉새 같은 입이 나도 예기치 못한 말을 하고 말았다.
“한 편 여벌로 더 뽑아놓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마안약의 경우를 생각해서……”
나는 만약을 마안약이라고 사뭇 장중하고도 의미심장하게 끌면서 말했다.
“만약의 경우라뇨?”
“왜 있잖아요, 당선자가 당선을 사양하는 경우 말예요. 아직도 이런 유의 수기는 쓸 때하곤 달라서 발표하려면 용기를 요하는 거니까.”
촉새같이 나불댄 깐으로는 그 까닭을 둘러대는 데 있어서는 신중하고 그럴듯했다. 그러나 담당기자도 함시인도 내 말을 알아먹은 것 같진 않았다. 그냥 나잇살이나 먹은 중견 작가에 대한 대접으로 내 말을 들어주는 것 같았다. 함시인은 숫제 참견도 안 하고 나 혼자 의견으로 아깝게 탈락한 작품 중에서 한 편을 골라 여벌로 추가했다. 그 짓을 하는 동안 나는 벌써 내 촉새 같은 입에 대한 수치심과 후회로 기분이 엉망이 돼 있었다. 그러나 그 촉새처럼 방정맞은 예언이 적중할 줄은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었다.
당선된 수기가 발표된 『앞서가는 조국』지가 책방에 나왔을 무렵에는 대통령선거도 끝나 새 시대의 조짐이 보다 확실해지고 있었다. 우선 책방에 나와 있는 신간 서적만 보더라도 삼청교육대의 진상의 폭로가 있는가 하면 몇십 년 전 제주도에서 있었던 4·3사건을 비롯해서 여순반란사건, 거창학살사건, 근래의 광주 사태까지 그 동안 망각을 강요당한 사건들이 논픽션으로 또는 소설로 봇물을 튼 듯이 쏟아져나와 있었다. 그러나 『앞서가는 조국』지에서 「복원」은 예선의 반열에도 끼지 못하고 깨끗이 말살 돼 있었다. 나는 누가 나한테 그 책임을 물을 것도 아닌데 문득 문득 나 때문은 아닐 거라는 독백인지 대답인지를 중얼대곤 했다. 나의 예언이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해도 나의 촉새 같은 입
의 잘못이지 내 진의는 아니라고 여기고 싶었다.
그런 일 말고도 1988년 4월은 어수선하고 어지러웠다. 국회의원 선거가 있는 달이었다. 그 과열현상은 그 뒤에 불어닥칠 올림픽 열기까지를 감안해서 제발 조금만 덜 볶아쳐달라고 비명을 지르고 싶을 지경이었다.
한식날 성묘를 교통편이 혼잡할 거라는 핑계로 미루고 있다가 평일날 혼자서 떠났다. 나는 그때까지 무엇에다 써먹자는 마련 없이 그냥 「복원」의 작자의 주소를 기록해서 간직하고 있었다. 힘 안 들이고 찾을 자신이 있었다. 공원묘지는 그가 이장을 지낸 광안리와 같은 면에 있었고 성묘할 때 거치게 되는골프장과 호수는 그의 수기에도 몇 번 나왔었다. 광안리 사잇말에서 예전에 이장을 지낸 윤장선 노인 댁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내가 기요만은…….”
하면서 초록색 슬레이트 지붕을 인 일자집의 유리 분합문을 연 윤노인은 상상한 대로 정정하고 깨끗한 노인이었다. 너무 쉽게 만나졌기 때문인지 나를 누구라고 말해야 할지 더군다나 용건이 뭐라고 해야 할지 얼핏 생각나지 않았다. 그 동안 벼르고 벼른 용건이 당사자를 눈앞에 두게 되니 스르르 김이 빠진다 할까 열쩍어지는 것도 못 말릴 노릇이었다. 나는 비록 「복원」은 빛을 못 보게 됐지만 왜 빛을 못 보게 됐는지 그 진상이라도 캐내고 싶었다. 필시 어용잡지가 작자로 하여금 당선을 사퇴하게끔 압력을 넣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실은 그 생각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저어 몇 달 전에 『앞서가는 조국』이란 잡지에 투고하신 적이 있으시죠?”
나는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그렇소만 그건 벌써 끝난 얘기 아뇨. 난 더 헐 말 읎시다. 읎었던 걸로 혀준다고 허구설라문에…….”
윤노인이 버럭 화를 내면서 분합문을 닫으려고 했다. 나는 넉살 좋게 얼른 열린 분합문 사이로 엉덩이를 디밀어 마루 끝에 걸터 앉으며 말했다.
“저는요 선생님, 그 잡지사에서 보내온 사람이 아니구요, 그때 심사를 맡아본 소설가예요.”
그러면서 통성명을 하자 윤노인의 안색이 한결 누그러졌다. 그때 뒤란과 마주 뚫린 부엌문에서 쏜살같이 나타난 마나님이 푸성귀가 수북한 고무함지박을 봉당에 내려놓으면서 사납게 말했다. 우리의 수작을 다 들은 모양이다.
기어코 그 진정선지 고소장인지가 까탈을 부렸지유? 그치유? 그러게 내 뭐랬시유. 삼시 진지 뜨뜻허게 혀드리는 마누라 있겠다, 용돈 꼬박꼬박 부쳐주는 아들이 둘씩 있겠다, 뭐가 부족해서 붓대를 놀려요 놀리긴. 자식들헌테도 붓대보담은 기술로 벌어먹는 게 수라고 글강 외듯 허시던 양반이 망령이 나도 분수가 있지.”
마누라한테 야단을 맞고 꼼짝 못 하는 윤노인은 마치 의타심이 강한 어린애처럼 이 눈치 저 눈치 살피기에 바빴다.
나는 그 수기가 까탈을 부린 건 아무것도 없고 단지 그 수기를 심사한 사람으로서 왜 그렇게 공들여서 잘 쓴 글의 당선을 갑자기 취소하게 됐나가 궁금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해서 지나던 길에 한번 들러보았을 뿐이라고 마나님에게 누누이 설명했다.
그러나 검은빛이 도는 입술이 앞으로 튀어나와 오리를 연상시키는 안노인은 내 말을 믿지 않기로 작정을 한 것 같았다.
“아이구, 이 시골구석을 지나가다 들러유. 여기가 무신 종로바닥인 줄 아시나뵈.”
나는 다시 어렵고 참을성 있게 그 집에서 마주 바라보이는 산등성이에 연한 공원묘지까지 성묘를 왔던 길이란 걸 납득시키고자 했다. 그러는 동안도 윤노인은 내 역성을 들어주지도 않았고 자기 대신 나선 마나님을 면박 주지도 않았다. 나는 수기를 통해 평범하지만 자존심이 살아 있는 의연한 농사꾼을 연상하고 있던 터라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내가 말렸시유. 내가 절대로 안 된다구 했시유. 그러니 어쩔테유.”
내가 불순한 염탐꾼이 아니란 걸 겨우 알아들은 것 같았지만 이렇게 도전적이었다. 그리고 한숨을 섞어가며 좀 뜻밖의 얘기를 했다.
“암튼 시상만 바뀌었다 허면 미리 설치는 건 이 집안 내력이라니께.”
가뜩이나 기를 못 펴고 위축돼 있던 윤노인의 표정이 더할 수없이 불쌍해졌다. 제풀에 나에 대한 경계가 풀린 마나님이 술술 털어놓는 그 집안 내력인즉 실은 별것도 아니었다.
6·25 전까지 면장을 지냈던 윤노인의 부친은 동란 중 쭉 숨어 지내야만 했다. 안식구들이 꾀 있게 군 덕으로 그 동안을 무사히 넘기고 국군이 들어왔단 연통을 받은 면장님이 땅굴에서 나와 햇볕을 본 것까지는 좋았는데 저만치 국민학교 마당 깃대박이 꼭대기에서 태극기가 나부끼는 걸 보자 그만 감격에 치받쳐 대한민국 맏세를 부르며 날뛴 게 문제였다. 미처 도망치지 못하고 수수밭에 숨어 있던 인민군이 총을 난사해 그 자리에서 처참하게 숨졌을 뿐 아니라 총소리를 듣고 몰려나온 국민학교에 주둔해 있던 국군에 의해 인민군도 사살되고 수수밭을 수색해서 찾아낸 나머지까지 소탕되었다. 마나님 말에 의하면 조금만 참았더라면 목숨을 건졌을 걸 싶은 건 면장님뿐 아니라 인민군도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그때 그 분한 고비만 넘겼더라면 밤에 산으로 도망갈 기회도 있었을 테고 하다못해 포로로 잡혔어도 죽지는 않았을 거 아니냐는 거였다. 며느리의 입장이었기 때문인지 어이없이 잃은 시아버지의 목숨에 대해 이렇게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긴 했어도 한이 맺혀 있진 않았건만도, 요새 새삼스럽게 그 사건이 예사롭지 않게 짚이는 데가 있어 깜짝 놀라곤 했다. 이를테면, 영감님이 케케묵은 옛날얘기를 미주알고주알 캐물어가며 공책에다 뭔가 끄적거릴 때만 해도 말릴 생각은 없었다. 공화당 때 얘기를 쓰는 줄은 알았지만 그들 세도가 언젯적이라고 후환 같은 걸 염두에 두겠는가. 그보다는 시골에서는 거액에 해당하는 상금이 혹시 굴러들어오지 않나 싶어 가슴을 울렁거리기도 하다가 에잇 우리가 무슨 복에 공돈이 생긴담, 하고 자세를 하기도 했다. 그래도 행여나 서울서 무슨 기별이 있을까 영감님의 글재주에 대한 한 가닥 기대를 못 버리고 있는데 대통령 선거전이 시작되었다. 공화당을 만들다시피 한 구정치인이 대통령으로 입후보해서 그 얼굴을 포함한 대통령감들의 얼굴로 마을 양회담이란 담은 온통 도배를 할 때부터 마나님은 켕기기 시작했다. 그 공화당 후보가 읍내에서 연설을 한다고 해서 구경을 갔더니 영감님이 수기에서 고발한 바로 그 장본인은 수행원으로 따라와 대통령 후보를 극진히 모시고 있지 않은가. 세상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부터 그 글이 혹시나 당선이 되면 어쩌나 조마조마해지기 시작했다. 부전자전도 유만부동이지, 어쩌면 그렇게도 선대의 어리석은 전철을 밟을 게 뭐람. 마나님 생각으로는 영감님도 시아버지처럼 조급하게 때를 못 기다린 죄로 큰 재앙이 꼭 있고야 말 것 같았다. 그날 그들 양주는 남이라 다 받는 식권도 안 받고 유세장을 떠났다. 영락없이 도둑이 제 발이 저린 형국이었다. 바로 그 무렵 당선 통지를 받았으니 영감님 제
쳐놓고 마나님이 나서서 그 화근덩어리를 없이하려 했다는 건 보잖아도 본 듯했다.
“그때만 혀도 저 영감님은 글시 돈 욕심이 나서 안 허겄단 소릴 미적거리더라구요. 시방이야 그때 돈 안 타먹구 그 고발장 뺏어오길 월매나 잘했는지 알겄지유. 저 양반이 고발헌 그 사람은 유 이번 선거에선 서울서 나섰구유 우리게선 그 사람만 못헌 그 아랫사람이 나섰시니께유. 그럼유 둘 다 공화당으로 나섰지유. 사람덜마다 다 당선될 거라구덜 허니께 되겠지유 뭐. 그러니 내가 월매나 잘혔시유.”
외부 압력 없이 그들 자의로 당선을 취소했다는 건 이제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마나님이 설치는 동안 영감님은 내내 입 다물고 얌전히 있었다. 아마 잡지사에서 부장까지 내려왔을 때도 같은 장면이 벌어졌으리라 싶었다. 그간의 경위는 밝혀졌다손 치더라도 저렇게 등신 같은 노인이 그런 쫀쫀한 글을 썼다는 건 암만 해도 좀 미심쩍었다. 그러나 나는 곧 그 한 가닥의 의혹마저 풀고 허전해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선거 유세장이 거기서 멀지 않은지, 어디 가까운 데 마이크 장치가 돼 있는지 느닷없이 친애하는 유권자 여러분, 하고 악을 쓰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두 저기 가서 점심이나 때우고 옵시다.”
마나님은 나를 어서 쫓아버리고 싶은 눈치였다. 마이크 소리는 메아리가 져서 이중으로 들렸기 때문에 무슨 소린지 잘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오공이나 구시대의 척결 소리는 넘겨짚어서지만 알아들을 만했다. 방에 들어가서 점퍼를 걸치고 웬 벙거지같이 생긴 모자를 들고 나온 윤노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척결 척결 허지만서두 복원두 허들 않고 척결부터 허겠단 소릴 누가 믿남.”
그리고는 나하고 눈이 마주치자 멋쩍게 웃었다. 담뱃진이 많이 낀 앞니가 하나 빠져 있었다. 나는 그가 틀림없는 수기의 작자고, 복원이란 제목도 명백한 의도를 가지고 붙였다는 걸 인정 안 할 수가 없었다.
국회의원선거 결과를 보면서도 나는 마나님의 내가 월매나 잘 혔시유, 소리가 생각나서 쓴웃음이 나왔다.
오랜만에 책방에 들렀을 때다. 다행히 붓대 놀려 먹고사는 사람은 윤노인 양주분들처럼 어리숙하지도 겁쟁이도 아니어서 책방엔 6·29 전에는 꿈도 못 꿀 책이 쏟아져나와 서로 베스트셀러를 다투고 있었다. 해금된 과거의 금서뿐 아니라, 북쪽의 이념으로 최고의 가치를 부여한 그쪽 본바닥 소설까지 나와 눈길을 끌었고, 진실이 매몰된 사건들을 파헤치고 복원하고 고발한 소설이나 논픽션의 출판도 더욱 활발해진 것 같았다. 오공과 유신시대를 풍자한 콩트들은 어찌나 신랄하고 재미가 있는지 서서 몇 페이지만 읽고도 포복절도를 할 지경 이었다. 그러나 내가 마음으로부터 즐거워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나는 속으로 매우 허전했고 무엇인가에 갈급이 나 있었다.
월북 납북 문인들의 문학선집도 나와 있었다. 그들에 대해 언급하는 게 금기로 돼 있을 때부터 줄기차게 그들을 끌어들여 우리 문학사에 포함시켜온 평론가 Q씨가 편(編)한 거였다. 정지용, 김기림, 이태준, 박태원 등 북으로 간 문인들의 이름들이 비로소 복자(伏字)로 결손되지 않은 온전한 이름을 내걸고 있었
다. 상, 중, 하 세 권으로 돼 있는 이 선집에 수록된 복원된 이름들을 나는 걸신들린 것처럼 읽어내려갔다. 그리고 마침내 송사묵 선생님의 이름을 찾아냈다. 6·25 전까지 이 땅에 살았던 송사묵이란 문인은 정지용 김기림처럼 그 이름을 빼면 문학사가 제대로 안 쓰일 만큼 비중 있는 작품을 남기지도 않았고 또 한때나마 대중적인 인기를 누린 인기작가도 아니었다. 그래도 Q씨가 펴낸 현대문학사를 보면 해방을 전후한 시기에는 그의 이름이 결코 가볍지 않은 비중으로 거론되고 있었다. 물론 그의 성명에서 사(思)자는 뻥 뚫린 결손된 이름으로서였지만 나는 일급의평론가인 Q씨가 여러 가닥의 우리 문학사를 잇는 한 작은 고리로나마 빠뜨리지 않고 그의 이름을 건져올려준 걸 은근히 고맙게 여기고 있었다.
송사묵은 해방을 전후한 십여 년 동안 그닥 재미는 없지만 씹을 맛 있는 소설을 꾸준히 발표해온 소설가였고 나의 고등학교 시절의 국어선생님이었다. 장차 소설을 써보는 게 꿈이었던 문학소녀 때 진짜 소설가가 국어선생님으로 부임해왔다는 건 가슴 울렁거리는 사건이었다. 어떡하든지 그 선생님한테 인정을 받고 싶었고, 그래서 그의 작은 칭찬도 잊지 않고 인정의 표시로 간직하게 되었고, 그걸 훗날 소설을 쓰기 시작할 때 비빌 언덕으로 삼을 수가 있었다. 이렇듯 나에게 거대한 영향을 끼친 분이 문학사에 오르내리는 게 반가우면서도 성명 가운뎃자가 실종된 채인 게 서운하고 죄송스럽더니만 이제 떳떳이 복원된 걸 생각하니 감개가 무량했다.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세상이 좋아지긴 과연 좋아졌구나. 나는 송사묵이란 이름과 함께 복원된 이름들을 훑어내리면서 우선 세상 칭송부터 했다. 그러나 내 만족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복원된 건 그의 성명 삼 자뿐이었기 때문이다. 우선 그 문학선의 표제는 ‘월북 납북 문인 선집’ 으로 돼 있는데 송사묵 선생은 사형을 당한 것이지 월북을 한 것도 납북당한 것도 아니었다. 월북이나 납북이 사형보다 듣기에도 좋고, 보다 희망을 걸 여지가 남아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분의 진상은 아니었다. 망가지고 흩어진 걸 복원하는 데 있어서 제 조각을 찾으려는 노력 없이 딴 조각으로 메운 걸 진정한 복원이라고 볼 수 있을까. 설사 그 딴 조각이 금이라 해도 말이다.
몇 년 전 실제로 어느 도자기 수집가 댁을 방문해서 소장품을 감상하던 중 결손된 부분을 금으로 메운 연적을 구경한 적이 있다. 복승아 모양의 백자 연적이었는데 끝의 뾰족한 부분이 결손된 채 손에 넣게 되었다고 했다. 때깔이 빼어난 그 연적은 살짝 비튼 것처럼 생긴 끄트머리의 금빛 자태 때문에 무척 요요해 보였었다. 그래도 그 소장가는 불만이었다. 결손된 부분이 하도 아쉽고 안타까워 그렇게 해놓고 보니 금빛 부분만 튀는 게 암만 해도 본디 모양은 그게 아니었지 싶다는 거였다. 그럼 왜 하필 비싼 금으로 했느냐, 빛깔과 질감이 비슷한 사기질로 감쪽같이 때울 수도 있었을 텐데, 하고 물었더니 그 수집가는 분명히 경멸하는 투로 말했었다.
“그랬다가 아무도 이 연적이 깨졌었다는 결 못 알아보면 어떡하지요. 그건 속임수잖아요. 할 짓이 아니죠.”
그제서야 나는 그가 돈 자랑을 하려고 금으로 메운 게 아니라 결손된 부분을 분명히 나타내려고 그랬을 거라고 생각을 돌릴 수가 있었다.
나는 아직 일면식도 없는 Q씨지만 조만간 정식으로 찾아가서 송사묵의 문학을 50년대에 실종한 걸로 취급하지 말고 거기서 끝난 걸로, 그 나름으로 완성된 걸로 봐주길 요구할 작정이었다. 도매금으로 넘기지 말고 그의 독자성을 따로 취급해야 할 까닭이 Q씨로서는 없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의 문학만을 떼어내어 취급해야 할 만큼 탁월한 작품을 남긴 특수한 작가라면 모를까 작품이 도매금으로 넘어가는 수준의 작가의 특수한 운명까지 Q씨처럼 바쁜 평론가가 어떻게 일일이 아는 척할 수 있겠는가. 어쩌면 그는 알고도 귀찮아서 적당한 도매금으로 넘겼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말해주고 싶었다. 그 사실로 뭐가 어떻게 달라지길 바라서가 아니었다. 다만 그게 사실이니까, 납치보다는 훨씬 더 끔찍하지만 그래도 그게 진상이니까, 잘못 알고 있다면 가르쳐줘야 할 것 같았다. Q씨가 내 말을 듣고도 그 사실을 대수롭지 않게 흘려버릴지 혹은 그가 쓴 문학사에서 한 줄쯤 수정할 생각이 들지 그건 내가 알 바 아니었다. 그건 전적으로 그의 자유일 테고 진상을 알리고 싶은 건 나의 의무였다. 혹은 먼 훗날, Q씨가 지금보다 한가해져 문득 그 선량하고 평범한 작가가 어쩌다 사형까지 당했을까 궁금하게 여겨 파내려가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결과 한 시대의 광기와 잔인성은 동시대 지식인의 비열한 보신책하고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돼 있나와 부딪히게 된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Q씨가 수고해서 얻은 달갑지 않은 소득이지 내가 준 덤은 아닐 터였다. 거기까지는 나도 막연히 혐의를 두고 있을 뿐 확인한 진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Q씨를 만나러 갈 엄두는 쉽게 나지 않았다. 납치를 사형으로 고쳐달라는 건 왠지 상식에 어긋나는 짓 같았다. 또 나보다 사실의 왜곡을 여태껏 묵인하고 있던 유가족의 심중은 어떤 것인지 그전에 한번 헤아려볼 필요도 있었다. 송사묵 선생님은 그 시절에도 다복하다 할 만큼 여러 자녀를 둔 걸로 알고 있었다. 그렇게 미적거리고 있을 무렵 뜻밖에도 송사묵 선생님의 막내 자제라는 이로부터 만나자는 전화를 받게 되었다. 아버지의 제자 중 소설을 쓰고 있는 이가 있다는 건 어머니로부터 들어서 벌써부터 알고 있었다고 했다.
만나본 그는 우리를 가르칠 때의 송사묵 선생님을 너무나도 빼닮아 사람이 자식을 남기고 죽는 한 아주 죽는 게 아니라는 걸 소름이 끼치도록 분명히 깨닫게 했다.
“왜 그렇게 놀라세요?”
“하마터면 아버님이 살아오신 줄 알고 악을 쓸 뻔했어요.”
“저의 어머님도 저더러 젤 많이 아버지를 닮았다고 그러시죠.”
“젤 귀염받겠네요.”
“이 나이에 귀염은요.”
“실례지만 올해 몇 됐어요?”
“마흔셋입니다.”
그러면서 명함을 내놓았다. 꽤 알려진 제약회사 부장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버님이 우리 가르치실 때도 아마 지금의 송부장 비슷한 연세셨을 거예요.”
“네, 맞습니다. 아버님 이 마흔넷에 납치 당하셨다니까요.”
“납치라고요?”
나는 어벙한 질문을 했다. 가족이 송선생님의 죽음을 모를 리가 없는데 송부장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아버님이 그 일을 당하셨을 때 송 부장은 몇살이었어요?”
“제가 다섯 살 때 납치당하셨다는데 전 아버님에 대한 기억이 통 없어요.”
“그래요, 다섯 살 적 이었다면 그럴 수밖에 없겠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다섯 살짜리 막내에겐 그 사실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는 걸 납득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마흔셋이라지 않나. 충격이나 상처받을 나이가 지나고 나면 진실을 알도록 할 것이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막내라 마냥 귀염만 받았나봐요.”
나는 내가 속으로 품은 유감의 뜻을 겨우 그 정도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내 속뜻을 알 리 없건만 송부장의 표정이 심란해졌다.
“맏이라고 응석, 막내라고 귀염, 그런 건 다 부잣집 아이들한테나 해당되는 소리 아닌가요?”
“어머님이 고생 많으셨겠어요.”
“그걸 어떻게 말로 다 합니까. 자그마치 오남매를 두고 북으로 가셨으니까요. 맏형은 그때 겨우 고등학생이었구요.”
“어머님이 참 장하세요. 혼잣손으로 이렇게 잘 키워놓으셨으니.”
“형님 덕도 크죠. 형님은 그때 학교 그만두고는 다시는 학교 문턱에도 못 가보고 동생들 먹여 살리는 일에 뛰어들었으니까. 어머님하고 형님하고 죽자꾸나 고생했지만 제대로 된 대학 나온 건 겨우 저 하나뿐이에요. 그래도 효도는 형님이 다 하니 제가 송구스럽죠. 어머님 잘 모시죠, 게다가 이번엔 아버님 전집까지…….”
송부장이 나를 만나자고 한 것은 송사묵 선생의 전집에 관한 건 때문이었다. 맏형이 원해서 그 동안 아버지가 남긴 작품을 모아보니 장편이 한 편, 중단편이 사십여 편이나 되어서 세 권쯤의 전집으로 꾸밀 만하더라는 것이었다. 여직껏 가만히 있다가 별안간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건 말할 것도 없이 여태껏 금기하던 작품들이 쏟아져나오고, 복자 뒤에 숨었던 이름들이 복원되는 해빙 무드와 무관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그의 작품이 상업성이 없긴 마찬가지라 몇 군데 다녀본 출판사마다 다 뜨악해한 모양이다. 거기까지 일을 맡아 진행한 건 막내였는데 출판사가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소리를 듣고 치사하니 자비로 하겠다는 결정을 내린 건 맏이라니 맏이가 그만큼 재력도 든든하단 얘기였다. 서울 위성도시에 주유소를 가지고 있고 시내에서도 자동차 부품업소를 경영하고 있어서 형제 중 가장 알부자라고 했다. 다 된 일에 나를 만나자고 한 건 전집 끄트머리에다 아버지의 친구 문인과 나처럼 문인이 된 제자의 글을 첨부하고 싶어서라고 했다. 아버지의 친구 중 아직도 현역인 소설가와 시인을 각각 한 사람씩 찾아뵜는데 쾌히 승낙해주더라며 나한테는 편지글이 어떻겠느냐고 했다.
“편지글을 어떻게…….”
나는 저승에다 어떻게 편지를 쓰겠느냐고 하고 싶은 걸 그 정도로 얼버무렸다.
“친구분 중 시인 되시는 분은 일화 중심으로 써주신다고 했으니까 아마 아버님의 인간성을 그리시게 될 테고 소설가 선생님은 아버님 문학을 대강 짚고 넘어가시겠다고 하셨어요. 그러니까 선생님께서는 제자로서 북에 계신 예전 선생님께 선생님의 자식들이 잘 자랐고 자수성가해서 이렇게 전집까지 꾸미게 된 내력과 감격, 축하 뭐 그런 거 있잖습니까, 그런 걸 써주시면 됩니다. 실상 우리 자식들이 우리가 하는 일을 직접 자화자찬하기도 뭣하구요. 선생님이 지금 어엿한 문인이 되신 것도 우리 아버님 영향이 컸다는 걸 말씀해주시면 더욱 영광이겠구요.”
다 된 각본이었고 송사묵 선생님을 위한 일인데 각본대로 못 움직여줄 것도 없었다. 그렇지만 송사묵 선생님이 사형당한 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 어떻게 북한에 있는 것처럼 가정을 할 수 있겠는가. Q씨의 오류를 바로잡기는커녕 내가 이미 기정사실화된 거짓 위에다 또하나의 거짓을 덧칠할 판이었다.
편지 쓰는 건 일단 승낙을 했다. 제목을 북에 계신 송선생님 보십시오, 로 하건 저승에 계신 송선생님 보십시오, 로 하건 쓰고 싶은 사연은 크게 달라질 게 없겠거니 해서였다. 그러나 막상 편지를 쓰려고 하니까 그걸 먼저 정해놓지 않고는 아무것도 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속 들여다뵈는 거짓에 동조하는 게 아무리 송선생님의 유가족을 위하는 도리라고 해도 나에겐 유가족보다도 송선생님이 더 중요했다. 비록 방대하거나 화려하진 않지만 그분이 남긴 문학을 몽땅 모아논 자리라면 의당 그분의 생애도 정직하게 복원돼야 마땅했다. 그건 내 감수성이 가장 순수했을 때 존경과 동경을 바쳤던 분에 대해 이 나이에도 할 수 있는 유일한 공경의 방법이었다. 그분은 사람이고 문학이고 요사스러운 걸 가장 싫어했다. 그때는 국어시간에 문장 지도도 했었는데 제발 못 써도 좋으니 요사만은 떨지 말기를 엄하게 경계하던 그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다. 겉멋, 허영, 장식으로서의 여고생 문학 취미도 적당히 봐주지 않던 그분이 철 지난 늙은이들이 꾸미는 이 요사스러운 장난을 보면 뭐라고 할 것인가. 머리가 희끗희끗한 나이에도 유난히 맑고 진국스럽던 그분의 눈빛이 생각났다.
혹시 송선생님 사모님이 자식들의 교육상 철저히 숨겨온 게 그만 기정사실화되어 여직껏 내려왔을 가능성도 있었다. 아버지가 빨갱이 짓 해서 사형까지 당했다면 그 자식들이 얼마나 가위 눌리며 살았으리라는 건 짐작 못 할 바 아니었다. 어머니로서 의당 숨기고 볼 일이었으리라. 그러나 이제 그 자식들은 아이들이 아니다. 막내까지 마흔이 넘은 자식들이라면 아버지와 아버지를 사형시킨 시대를 포함해서 이해할 수 있는 나이다. 가위눌릴 것도 창피해할 것도 그렇다고 자랑스러워할 것도 없이 진상을 다만 바로 보기만 하면 된다.
나는 유족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송사묵 선생님의 생애의 마지막 부분을 복원해서 전집의 마지막에 첨부하려고 마음을 굳혔다. 그러기 위해선 그걸 입증해줄 제삼자의 도움이 필요했다. 사모님이 인정하지 않는 한 그 사실을 아는 건 나밖에 없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1950년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자 시민들의 기쁨은 가히 광희(狂喜)였다. 내 경험으로도 해방됐을 때보다도 기뻤던 것 같다. 굶주림과 공포에서 해방된 시민들은 복수를 원했다. 부역자를 철저히 색출하는 데 앞장섰을 뿐 아니라 사사로운 미움 때문에도 저놈 빨갱이라는 등 뒤로 손가락질 한 번으르 당장 오라를 지게 만들기도 했다. 요행 매맞고 풀려나거나 재판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군이나 청년단체에서 임의로 즉결처분을 하기도 했다. 운수소관이었다. 자유롭고도 흉흉한 시대였다.
집안 내에서 숙부가 밀고를 당해 붙들려갔다. 인공 치하에서 이밥 먹고산 죄였다. 숙부는 큰길가에서 도매상을 하고 있었는데 난리가 나자 가게는 저절로 문을 닫게 되었다. 그러나 잠긴 가게터가 꽤 넓은 게 화근이었던지 인민군 군관 숙소로 쓰겠다고 했다. 어느 영이라 싫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거기서 자진 않고 말도 매놓고 군수품 같은 것도 갖다 쟁여놓는 것 같았다. 그리고 숙모더러는 그들의 삼시 식사를 부탁했다. 워낙 식사 분량이 많아 숙부까지 그 일에 매달렸고 덕분에 식구들이 밥 걱정은 안 하게 됐다. 그 죄밖에 없는데 숙부는 내외가 다 동네 사람의 밀고로 연행이 됐고 다행히 즉결은 면하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이 되어 재판을 받게 됐다. 사촌이 하직 나이 어려 내가 옥바라지를 하게 됐는데 워낙 형무소가 터지게 부역자를 잡아들여 면회고 뭐고 없었다. 그 일대가 한마디로 난장판이었고 옷 한 벌을 차입하려도 그 근처 여관에서 자고 통금이 해제되자마자 당도해도 그날로 넣을 수 있을까 말까였다. 부역자는 가족까지도 숫제 개돼지 취급이었고 간수라도 한 사람 연줄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게 그때 가족들이 꿀 수 있는 최고의 꿈이었다. 죄수들을 재판소로 실어나를 때는 뚜껑도 없는 트럭을 이용했는데 그 대신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게 용수를 씌웠다. 어느 날이 즈이 식구 재판날인지 알 리 없는 가족들은 혹시 용수 쓴 모습이라도 볼 수 있을까 해서, 아니 그보다는 용수를 통해서라도 이쪽의 모습을 보이려고 허구한 날 영천 일대를 벌산을 했다. 나 역시 그러다가 같은 처지의 사모님을 만났다. 졸업하고 대학에 붙고 나서 선생님을 댁으로 찾아갔을 때 뵌 그 조촐하고도 기품 있던 사모님하고는 딴판이었다. 나는 더 딴판이 돼 있었는지 내가 먼저 알아보고 누구누구라고 누누이 설명을 해도 알아본 것 같지 않았다. 알아보려고 노력도 안 하고 건성으로 고개만 주억거리더니만 갑자기 내 손을 붙들고 외진 데로 가더니 부탁 좀 하자고 했다. 그리고 허리춤에서 꼬깃꼬깃하게 접은 편지지를 꺼내서 펼쳐 보였다. 진정서였다. 나도 이름을 알 만한 대가급의 문인들, 고등학교 때 교장선생님과 몇몇 선생님 성함이 진정서 말미에 적혀 있었다.
선생님은 난리통에도 숨어 있지 않고 학교에도 나가시고 문학가 동맹 사무실에도 나가셨다고 한다. 나가서 특별히 한 일은 없어도 암튼 그 세상이 그렇게 빨리 끝날 줄 모르고 어물쩡댔으니 학생들 볼 면목도 없고 해서 수복 후는 집에서 자숙하고 있었다고 했다. 자숙하고 있는 동안도 동료 교사들이 찾아와 학교에 나오기를 권고하기를 한두 번이 아니어서 큰 죄를 진 건 아니구나 안심하고 있을 무렵 연행되어 이 지경이 됐으니 누가 고발을 했음에 틀림이 없다고 사모님은 장담을 했다. 누가 말하기를 밀고로 애매하게 붙들린 사람한테는 그 사람의 부역 사실이 대단치 않고 또 6·25 전의 사상이 온건했다는 사실을 밝혀 관용을 요망하는 진정서를 첨부하면 재판 때 매우 유리할 거라고 했다. 진정인들이 유력하거나 유명 인사라면 그 효력은 더욱 확실해질 거라는 소리를 듣고 사모님이 작성한 명단이 그것이었다. 선생님이 그만큼 발이 넓었다고 생각되자 사모님은 비로소 힘과 희망이 생겼다. 그러나 선생님과 평소 교분이 두텁다고 사모님이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그분들은 하나같이 사모님을 문전박대했다. 간신히 만날 수 있었다고 해도 무슨 핑계로든지 도장을 안 찍으려 했다. 가장 흔한 핑계는 누가 먼저 찍으면 찍겠다는 거였다. 사모님은 아직까지도 그 먼저 찍어줄 사람을 못 만난 것이었다. 나에게 하고 싶다는 부탁은 내가 나서서 그 먼저 찍어줄 사람을 찾아냈으면 하는 거였다. 선생님을 위해 제자가 발 벗고 나서면 딴 유명인사는 몰라도 동료 선생님들 마음이야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해보지도 않고 나 역시 옥바라지하는 처지임을 빙자해서 못 하겠다고 거절을 했다.
“그 사람들 중에서 누가 밀고를 했을 거야.”
사모님이 느닷없이 봉두난발을 흔들면서 사납게 말했다. 도장을 안 찍어주는 사람들한테 품는 사모님의 앙심이 섬뜩했다. 나도 그 사람들 중의 하나가 된 게 무서워서 도망치듯 사모님과 헤어졌다. 그리고 다시는 그 근처에서 사모님을 만나지 못했다. 어쩌면 만나는 걸 내 쪽에서 피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숙부가 언제 재판을 받았는지도 모르고 있었는데 출감한 사람을 통해 숙부가 보낸 쪽지를 받아보게 되었다. 누런 편지 겉봉 찢어진 데다 연필로 쓴 편지는 간략하고 처절했다.
‘재판에서 사형을 받았다. 하늘도 무심하지. 변호사를 좀 대다우. 짐승처럼 죽기 싫다. 송사묵 선생도 사형받고 죽었다. 솜바지저고리는 잘 받았는데 솜이 너무 얇더라. 좀 두둑하게 두어서 넣어다오.’
숙부는 내 졸업식에 와서 송선생과 인사하고 사진까지 찍은 적이 있었다. 우리는 숙부의 부탁을 하나도 들어주지 못했다. 곧 혹한이 닥치면서 전세가 불리해지고 수감자도 더러 남쪽으로 이감을 시키기 시작했단 소문도 들렸지만 확인해볼 새도 없었다. 그후 숙부는 사형을 당했는지 병사를 했는지 가족은 아무런 통보도 못 받았지만 그 안에서도 밖에서도 영영 찾을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나 싶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 일은 천명에 맡길 수밖에 없을 만큼 밖에서 치른 우리 집안의 곤욕과 빈핍 또한 혹독했었다. 숙부가 그 안에서 짐승처럼 죽어갔다면 우리는 밖에서 짐승처럼 살아남았던 것이다.
이렇게 송사묵 선생님의 죽음은 확실하지만 그걸 입증해줄 제 삼자 역시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다 문득 또하나의 제삼자가 떠올랐다. 형무소의 죄수까지 다 가는 피난도 못 가고 텅 빈 서울에 우리 식구만 남아 있을 때였다. 그 공백상태 속에서도 시장은 몇 군데 서서 소규모의 물물교환이 행해지고 있었다. 필요한 게 있어서라기보다는 우리 말고도 사람이 살고 있다는 걸 확인해보고 싶어 시장에 갔다가 고등학교 동창인 혜진이를 만나게 됐다. 얼굴은 창백하고 손등은 동상에 걸려 꼴이 말이 아니었지만 표정이 더할 수 없이 해맑아 이상한 느낌을 주었다. 졸업 후 대학에 안 가고 집에서 살림을 돕던 중 6·25를 만나 동네 민청에 나가게 된 게 화근이 되어 감옥살이를 하고 나왔다고 했다. 나와보니 가족들은 이미 피난을 가고 빈집만 남아 있어서 따라 내려갈 기력도 없고 집 안에 식량은 충분히 남아 있길래 그냥 머무르고 있다고 했다.
“아직 식구도 못 만났지만 살아서 이렇게 하늘 보는 것만도 꿈만 같아. 그 안에서 얼마나 많이 죽는다구. 송사묵 선생님도 그안에서 돌아가셨어.”
혜진이의 눈이 그렁해졌다. 나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라 따져 묻진 않고 듣기만 했더랬다. 여자와 남자는 물론 따로 수용돼 있지만 워낙 감옥이 초만원 상태라 간수들이 이름 부르는 소리를 서로 들을 수가 있었다. 불과 반년 전까지도 선생님이었던 분의 이름을 듣는 느낌은 형언할 수 없이 착잡하더니 언제부턴가 못 듣게 되자 또 그렇게 허전할 수가 없었다. 그 안의 독특한 통신방법으로 알아보니 출감한 게 아니라 죽었다고 하더라는 얘기를 들은 생각이 나자 나는 즉시 몇몇 동창생들한테 연락을 취해 혜진이의 전화번호를 알아낼 수가 있었다. 내가 통성명을 하자 혜진이는 호들갑스럽게 반색올 했다.
“어머머…… 이게 얼마 만이니. 졸업하고 처음이지, 그치?”
“왜 일사후퇴 후에도 만났잖아?”
내가 그 말을 하자 혜진이의 음성이 갑자기 뜨악해졌다.
“응, 그때― 전화 왜 걸었어?”
“그때 너한테 송사묵 선생님 얘기 들은 걸 다시 확인해보려고. 전화로 이럴 게 아니라 우리 어디서 만나자. 오래간만에 회포도 풀 겸.”
혜진이가 뜨악해진 낌새를 타고 내가 수다스러워졌다.
“여봐, 이 여사.”
이번엔 뜨악한 대신 전혀 딴사람처럼 위엄을 꾸미며 말했다.
“이여사 나하고 억하심정 있어?”
이번엔 어미가 떨리는 게 느껴졌다. 나는 어쩔 줄을 몰랐다.
“왜 .그래? 혜진아, 이여산 또 뭐고.”
“나 우리 남편한테 거기 들어갔다는 거 속이고 결혼했어. 그이도 시집 식구도 아무도 모르고 나 여직껏 잘 살아왔어. 무슨 얘길 듣고 싶은지 모르지만 내가 입을 열 것 같아? 소설이나 국으로 써먹지 뭐 할 짓이 없어 남의 비밀을 캐냐, 캐길.”
그리고 전화를 딱 끊었다. 어처구니가 없어 멍해져 있는데 이번엔 그쪽에서 전화를 걸어왔다.
“아깐 정말 미안했어. 너무 놀라서 그만 제정신이 아니었어. 그때 일은 우리 친정 식구하고 너밖에 몰라. 네 말 한마디로 꽃밭에 불을 지를 수도 있어. 그럴 리야 없겠지만. 아무한테도 그 얘기 안 했지? 그래 고마워. 너만 믿어. 그리고 우린 앞으로도 서로 상종은 안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약점 잡힌 사람 만나는 게 별로인 기분 너두 알 거야. 암튼 너만 믿을게. 아깐 정말 미안했어.”
화를 낼 때보다 후환이 두려워 비굴하게 구는 게 나로서는 더 상대하기 고역스러웠지만 그녀가 원하는 대로 충분한 다짐과 맹세를 해서 안심을 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나를 사로잡은 복원의 꿈은 이미 반 넘어 허물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후 며칠 있다가 어떤 칵테일 파티에서 백민세옹을 만나자 불현듯 또 그 생각이 났다. 그 노인이라면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한때는 소설을 쓴 적도 있지만 60년대 초부터 관직에 발을 들여놓더니 문공 문교 계통의 꽤 높은 관직을 두루 거치고 지금은 은퇴해서 유유자적한 노후를 즐기고 있는 다복한 노인이었다. 그러나 나는 백옹의 그런 순탄한 경력보다는 사모님의 진정서에 백민세란 이름이 올라 있었다는 게 한결 흥미로웠다. 그때 그의 이름은 맨 첫째 줄에 올라 있었고 몇 번씩이나 문전박대한 사람을 사모님이 특별히 힘주어 원망할 때도 그의 이름이 대표로 오르내렸던 걸 나는 잊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걸 상기시켜 백옹을 난처하게 하거나 원망을 하려는 건
아니었다. 백옹이라면 송사묵 선생님이 북으로 갈 새 없이 체포 수감되었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 터였다. 옥중에서 죽음에 이르렀다는 것까지는 모르고 있더라도 그것만이라도 확실히 증언해주면 나로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었다. 그 파티는 모 일간지의 창간 몇십 주년 축하 파티여서 대성황이었다. 나는 가끔 그런 유의 초대장을 받긴 하지만 참석해보긴 처음이어서 좀 어리둥절했다. 시내에서 만나기로 한 동료 문인이 그 장소에서 만나자고 할 때부터도 뜨악했다.
“왜 그래, 공짜로 저녁 잘 얻어먹고 사람 구경 실컷 하고 나서 우린 어디 가서 따로 차나 마시고 노닥거리면 얼마나 경제적이야.”
“나 파티 체질 아닌 건 당신도 알잖아.”
“군중 속의 고독이 무서워서 그러지. 알았어 내가 옆에 붙어 있어 줄게.”
말은 그렇게 해놓고 저 혼자 어찌나 인파를 잘 누비고 다니면서 담소를 즐기는지 나는 곧 외톨이가 되었다. 외톨이가 됐을 때 제일 곤란한 건 눈길을 어디다 질정할지 몰라 두리번거리게 되는 건데 그러다 노신사들 사이에서 파안대소하고 있는 백민세옹을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로 곧장 걸어갔다. 그리고 소설 쓰는 아무개라고 자기 소개 먼저 하고 나서 뵙게 돼서 영광이라고 했다. 왜 그렇게 말이 잘 나오는지 몰랐다. 그의 초기작품에 대해서도 아는 척을 좀 했다. 왕년에 소설 한 편 못 써 본 사람 서러워서 어디 살겠느냐고 노신사들이 엄살을 부리면서 백옹을 부러워했다. 그리고 찡긋쨍긋 음흉한 미소로 서로 신호를 하더니 슬금슬금 자리를 피해줬다. 옆에서 참견하는 사람들이 없어지자 나는 서둘러 용건부터 말하려고 했다.
“송사묵이라는 소설가 아시죠?”
“아다마다, 내가 키운 작간걸. 참 아까운 사람이 납치당했지.”
또 납치였다. 맥이 빠졌다.
“납치라뇨. 그게 아니잖아요. 선생님은 아시면서.”
나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려는 미꾸라지를 움켜쥐는 것처럼 허둥대며 그러나 재빠르게 체념부터 하며 말했다.
“월북했단 소리도 더러들 한다는 건 나도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그건 모함이에요. 무슨 놈의 인심이 있지도 않은 사람까지 모함을 하려 드는지. 그 사람은 절대로 제 발로 북쪽에 갈 사람이 아녜요. 월북이건 납북이건 살아나 있으면 좋으련만. 미국 영주권 가진 내 친구 중에서 더러 북한 방문도 하나봅디다. 그럴 때마다 생사나 확인해보라고 부탁하게 되는 보고 싶고 궁금한 사람이 몇 있는데 송사묵도 그중의 하나지요. 부탁은 하느라고 하지만 아직 시원한 소식은 못 들어봤어요. 내 친구들이 부실해서가 아니라 그쪽 사회라는 게 이쪽 상식 가지고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이 돼 있나봐요. 그 착하디착한 천성의 소시민을 끌고 간 것만 봐도 종잡을 수 없는 놈들이죠. 참 송사묵하곤 어떤 사이 죠?”
그는 필요 이상 많은 말을 하고 나서 물었다. 나는 그 동안 그 우아하고 고상하게 늙은 노인이 어떤 얼굴로 그런 시침을 떼나 차마 직시하지 못하고 그가 손바닥에 올려놓고 다른 한 손으로 괜히 빙글빙글 돌리고 있는 칵테일 잔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그런 무의미한 손놀림에서나마 그의 갈등을 읽고 싶었다.
어떤 청년이 다가와 공손하게 안부를 묻는 걸 기화로 백옹은 곧 나의 존재를 잊어버렸다.
송부장한테 부탁받은 편지글은 아직도 첫 줄에 걸린 채였다. 북쪽에 계신…… 으로 할 것이냐 저승에 계신…… 으로 할 것이냐 사이에서 헤매고 있는 사이에 송부장이 아무리 늦어도 몇월 며칠까지는, 이라고 당부한 날을 훨씬 넘겼다. 그럭저럭 나에게 준 기간이 갑절이나 지났는데도 재촉 전화도 없었다. 하긴 날짜 맞춰 나와야 하는 잡지도 아니겠다, 그 동안에 계획이 변경됐을 수도 있고 아예 계획 자체를 파기해버렸을지도 모른다. 내가 몸달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매사에 그 첫 줄이 걸림돌이 되어서 제대로 손에 잡히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송부장으로부터 다시 연락을 받았을 때는 오히려 내 쪽에서 급하게 굴었다.
“아니 어떻게 된 거예요. 책 나온다는 날짜 지난 지가 언젠데…….”
“선생님 글이 안 들어갔는데 어떻게 책 이 나옵니까?”
“그럼 미리미리 독촉을 해야죠.”
“우리가 뭐 빚쟁이인가요. 급할 것도 없구요.”
책을 낼 의사가 정말 있는 건지 없는 건지조차 종잡을 수 없는 말투였다. 나는 그게 그렇게 화가 날 수가 없었다.
“그럼 이 전화도 원고 독촉이 아니겠네요.”
“네, 실은 형님이 선생님을 좀 뵙자고 해서.”
“나를 왜요?”
“불쑥 어려운 청탁만 해놓은 것 같아 모시고 식사라도 하시고 싶은가 봐요. 여직껏 도리가 아니었다고…….”
“결국흔 원고 독촉이네요, 그쵸?”
“아, 아닙니다.”
“괜찮아요, 원고 독촉이라도.”
“죄송합니다. 형님이 워낙 그래요. 장사꾼이라서요.”
“장사꾼이 장사꾼 식으로 하는 게 당연하잖아요.”
그렇게 돼서 강납의 어느 시끌시끌한 갈비집 에서 만난 송사묵 선생님의 장남은 털털하고 배가 나오기 시작한 전형적인 장사꾼이었다. 몇 개의 업소의 대표이사로 돼 있는 명함을 내놓으면서 말했다.
“이젠 살 만합니다만 한참 어려울 땐 밑천 안 드는 장사를 이것저것 궁리하다가 나도 소설이나 써볼까 한 적이 있었지요. 생각보단 어렵드구먼요. 그래 그런지 아버님 피를 받아서 그런지 지금도 젤 부럽고 존경스러운 게 작가 선생님이지요. 이렇게 모시게 돼서 영광입니다.”
그가 유창하게 너스레를 떨수록 나는 속아만 산 사람처럼 또 속아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단도직입 적으로 물었다.
“아버님에 대해서는 어느 만큼 알고 계신지요?”
“글쎄요.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제 나이 열다섯이었으니까…….”
“그럼 아버님이 돌아가신 걸 알고 있었단 얘기군요.”
“그러믄요, 그걸 어떻게 잊어버리겠어요.”
“막내동생 되시는 분은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던데…….”
“네에, 그거요. 납치당하신 것처럼 말하는 것 말이죠. 그건 우리 식구의 말버릇이죠. 사형이나 옥사보다 얼마나 듣기 좋아요.”
“말버릇이라고요?”
“네, 말버릇이요. 묵계라고 해도 좋구요. 그렇지만 그런 말버릇을 우리 식구가 먼저 창안한 건 아니에요. 언제부턴지 북쪽으로 간 사람들의 문학이 거론되기 시작하면서 아버님도 그 안에 포함되는 걸 보고 우리 식구는 다만 동조한 것뿐이죠.”
“그건 진실이 아닌데 가족은 마땅히 정정을 해야지 동조를 하다니 그게 말이 됩니까?”
“좋은 일에선 특별나고 싶을지 모르지만 나쁜 일일수록 다수의 편에 서는 게 그나마 편하거든요. 일종의 자구책이죠. 불행해진 것도 억울한데 홀로 특별하게 불행해지는 거라도 면해보자는.”
원고의 첫 줄을 북쪽에 계신……으로 할 것인가 저승에 계신……으로 할 것인가를 그와 의논하는 대신 나는 갈비를 아귀아귀 뜯었다.
누구나 빠져나갈 구멍 먼저 마련해놓고 있었다. 진실이 마치 함정이나 덫이라도 된다는 듯이. 남 나무라 무엇 하랴. 누구보다도 내가 그렇게 살아왔다는 증거로 나는 하필이면 나의 촉새 같은 입놀림을 생각해냈다. 나는 나의 촉새 같은 입을 그에게 들킬까봐 그렇게 열심히 갈비를 뜯고 있는지도 몰랐다.
송사장은 송사장대로 열심히 다들 성공한 그의 동생들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 바로 밑의 동생은 공고만 나왔는데도 지금은 큰 회사에서 공장장까지 올랐고, 두 누이동생도 겨우 여고만 졸업시켰건만 연애를 잘해서 교수한테도 시집을 가고 사업가한테도 시집을 가 떵떵거리고 산다고 했다. 내가 만나본 막내도 결혼을 잘해서 처가가 학자 집안이고 계수도 지금 박사과정중이라는 얘기도 했다. 요컨대 그는 송사묵 선생님의 오남매가 다 얼마나 잘 됐나를 내 편지글 속에 나열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그러니까 사장님이 글쟁이한테 청탁을 하고 있었다. 겨우 갈비와 소주를 먹이면서 말이다.
나는 점점 헤프게 헤실헤실 웃으면서 자작으로 연거푸 축배를 들었다. 복원되지 못한 것들을 위해서.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