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술과 담배를 가까이한 정조
정조하면 언 듯 연상되는게 개혁군주, 시, 그림, 무예에 탁월하고 효심이 지극하다 등등이다.
그런 그가 왜 술과 담배를 가까이 했을까 ?
아버지 세도세자의 뒤주에 죽음(임오화변, 1762, 윤 5월), 정적들(노론)로부터 늘 암살의 대상(즉위년에만 7번의 암살시도와 3번의 역모사건), 아들 문효세자의 죽음(1786년 5월)과 첫사랑 의빈성씨와의 이별(1786년 9월) 등등
정조의 스트레스 해결 즉 사랑하는 여인 의빈성씨, 자식, 아버지의 죽음 등을 바로 술과 답배로 달랬을까 ?
가. 불취무귀(不醉無歸)
“옛사람의 말에 술로 취하게 하고 그의 덕을 살펴본다고 하였으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취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는다(불취무귀).”의 뜻을 생각하고 각자 맘껏 마셔라.“
과거시험 합격 유생들 축하연/정조실록
유생들에게 말술을 먹이고 시를 짓게 하다. 술에 취해 쓰러지는 유생들을 보며 정조는 호탕한 웃을 짓다.
정조는 신하들이나 수원 화성을 축성 당시 기술자들과의 회식자리에서
늘 첫 마디로 ‘불취무귀(不醉無歸, 취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못한다.) 라는 말을 했다.
“예전에 상감(정조)께서 삼중소주(三重燒酒)를 옥필통(玉筆筒)에 가득히 부어서 하사하신 일이 있었다. ‘오늘 죽었구나’ 하고 할 수 없이 마셨는데 취하지 않았다. 또 한번은 술을 큰 사발로 하사받았는데 다학사들은 모두 인사불성이 됐다. 어떤 이는 남쪽으로 향해 절을 올리고, 또 어떤 이는 그 자리에서 누워버리고…. 그러나 난 시권(試券·과거답안지)을 다 읽고, 착오없이 등수도 정했다. 물러날 때에야 약간 취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너는 내가 술을 반 잔 이상 마시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다산 정약용이 둘째 아들 정학유에게 쓴 편지의 내용
그러니까 주량은 엄청나지만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면 한 잔 이상을 마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다산은 “소가 물마시듯 목구멍으로 들이부으면 안된다”면서 “참다운 술맛이란 입술을 적시는 데 있다”고 했다.
정조 “술에 취해 궁궐담장에 드러누운 진사에게 술의 멋을 안다며 쌀을 하사”
막걸리, 동동주 등이 아닌 40도가 넘는 술을 즐긴 것으로 추정.
나. 임오화변(1762년 윤 5월 13 ~ 23일)/창경궁 문정전 뜨락
나경언은 영조에게 “사도세자가 금주령을 어기고 도성의 기생집에 가서 매일같이 술을 마신다”고 거짓 진술. 나경언의 말만 믿고 흥분해 사도세자(장헌, 이선, 어머니 영빈 이씨, 부인 혜경궁 홍씨)를 금주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뒤주에 가둬 죽이다.
사도세자 曰
"제가 죄는 많지만 죽을 죄는 무엇입니까?“
"아버님, 아버님. 잘못했습니다. 앞으로는 글도 잘 읽고 말씀도 잘 들을 테니 제발 이러지 마소서!"/한중록
"그대마저 나가면 난 누구에게 의지한단 말인가?"/사도세자 스승 임덕제에게
사도세자 소주방에서 가져온 뒤주에 가두다.
8일째 죽다/5월 21일 창경궁 문정전 앞뜰
나경언 고변 10가지 : 은전군(恩全君)의 생모(경빈 박씨 등)를 죽인 일. 여승을 궁궐로 끌어들여 풍기를 문란시킨일, 평양에 미행한 일, 성 밖으로 자주 유람 나간 일, 시전(市廛) 상인들에게 돈을 빌리고 안 갚은 것, 북성(북한산성)에 멋대로 놀러 간 일 등
--------------------------------------------------------------------------
“네가 왕손의 어미를 때려죽이고 여승을 궁으로 불러 들였으며 서로(西路: 관서)에 행역하고 북성(北城)으로 나가 유람했는데, 이것이 어찌 세자로서 행할 일이냐? 사모를 쓴 자들은 모두 나를 속였으니 나경언이 없었더라면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왕손의 어미를 네가 처음에 매우 사랑하여 우물에 빠진 듯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하여 마침내 죽였느냐? 그 사람이 아주 강직하였으니 반드시 네 행실과 일을 간하다가 이로 말미암아서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또 장래에 여승의 아들을 반드시 왕손이라고 일컬어 데리고 들어와 문안할 것이다. 이렇게 하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겠는가?”/영조실록(英祖實錄) 38년 1762년 5월22일
----------------------------------------------------------------------------
- 원인 : 영조와 사도세자의 성격 갈등(선천적인 기질의 차이, 두 사람이 처했던 성장 배경), 신임의리(辛壬義理)를 둘러싼 노·소론의 대결 구도, 사도세자를 둘러싼 궁중 세력과 연계된 당파 간 갈등 등
정조 이산은 아버지 죽음 목격 후 충격으로 사당인 경모궁에 들어가 10일 동안 나오지 않았다 함.
다. 노론 벽파의 끊임없는 신변위협
ㄱ. 사도세자의 죽음을 두고 노론벽파와 시파로 붕당
노론 벽파(노론)는 사도세도 죽음을 당연시하고 처분 정당하다.
노론 시파(소론과 노론 일부 + 남인 대다수)는 사도세자 죽음을 동정
ㄴ. 노론 벽파의 정조 암살시도 : 즉위년(1776년)에만 즉위년에만 7번의 암살시도와 3번의 역모사건.
a. ‘옷을 벗지 못하고 자는 때가 또한 몇 달 인지 알 수 없었다“/정조실록 즉위년 6월 23 일 자 ⇒ 세손 시절부터 노론 벽파의 암살의 대상, 즉위년에만 즉위년에만 7번의 암살시도 와 3번의 역모사건.
b. 정조실록 원년 1777년 7월 28일 밤 11시 경희궁 존현각(정조 침전) 지붕통해 침입시도사건/호위군관 강용휘와 임장 전흥문 존현각 지붕으로 올라가 지붕을 뚫고 침전에 잠입 정조 살해 계획/위로는 대비 정순왕후부터 국왕 호위군관 강용휘, 임장(각방에서 공적일을 하던서리) 전흥문, 내시 안국래, 상궁 고수애, 궁녀 강월혜(강용휘의 딸), 조라치(궁중에서 청소하던 천한사람) 황가까지 가담한 사건
”갑자기 들리는 발자국 소리가 보장문 동북쪽에서 회랑 위를 따라 은은하게 울러왔고 어좌의 중류쯤에 와서는 기와 조각을 던지고 모래를 던지어 쟁그랑거리는 소리를 어떻게 형용할 수 없었다.“
* 실패 : 정조가 야심한 시각에 잠을 자지않고 독서를 하는 바람에 성공하지 못했다.
c. 정조실록 원년(정조1년) 1777년 8월 11일 밤 정조 2차 암살시도/창덕궁 경추문 서쪽 담장 넘으려는 괴한 발견(수포군(밤에 궁궐문을 지키는 군사) 17세 소년군사 김춘득 발견 도주 괴한 추격 전흥문 체포)
* 배후세력 : 홍술해와 홍삼범 부자가 호위군관 강용휘 전흥문 포섭 암살시도
* 책형(磔刑)에 처함( 죄인을 기둥에 묶고 창으로 찔러 죽이던 형벌. 십자가형)
d. 홍술해 부인 이효임 주술(무녀) 통해 정조 제거 시도
e. 홍삼범의 사촌 홍상길 정조 암살시도 : 궁비(궁중의 계집종) 이영단을 회유 밤중 정조침실 침입 살해시도 사건 등 정조 암살 배후가 모두 노론 벽파의 계획으로 밝혀짐 ⇨
홍상길 국청(죄인을 신문하기 위해 왕명으로 설치한 임시관청)에서 은전군(정조의 이복동생) 이찬 추대 음모 자백
* 3대 역모사건 : 자객(b.c) + 주술(d) + 은전군 이찬 추대시건(e)
라. 애지중지 하던 첫아들 문효세자(이양, 5세)의 죽음
* 1786년 음력 5월 11일 홍역으로 창경 궁 자경전 동쪽행각에서 죽음, 효창원(묘)에서 1944년 서삼릉으로 이장
* 정조 문효세자 위해 동궁 중희당 건립, 서연, 3세(22개월 된 원자) 세자 책봉, 5세 창경궁 자경전 행각에서 사망, 어머니 의빈 성씨(성덕임), 정조의 장자, 1782년 9월 7일 창덕궁 연화당(선정전(편전)옆 행각(의빈 성씨 처소,현재 선정전과 희정당 사이 건물) 出(정조 30세), 궁녀 성씨 승은 정 3품 소용
"비로소 아비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행스럽다."/정조실록 문효세자의 탄생을 기뻐하다.
"꿈인가, 참인가, 꿈이라 하여 반드시 꿈도 아닐 것이고 참이라 하여 반드시 참도 아닐 것이다."/정조, 어제문효세자효창묘신도비
* 정비 효의왕후 김씨
원빈 홍씨(홍국영 누이)/화빈 윤씨/의빈 성씨(문효세자)/수빈 박씨(순조)
마. 첫사랑 의빈성씨와의 이별
혜경궁 홍씨가 사도세자와 혼인하며 입궐, 혜경궁 홍씨 모시는 궁녀, 이름 성덕임.
사도세자 죽은 후 슬픔에 잠긴 11세의 정조 눈에 아름다운 소녀 의빈 성씨(10살)가 띄임. 그 이후 의빈으로부터 마음의 위로을 받으며 가까이 했고 정조 15살 때 의빈에게 승은임금과의 잠자리) 내림.
의빈은 울면서 ”효의왕후(정조의 정비 김씨)께서 아직 아기를 낳지 못하였으니 감히 받을 수 없아옵니다.“라고 하며 거절
정조 30살 때 다시 승은을 내려 후궁이 되었고 1782년 9월 7일 창덕궁 연화당(의빈 성씨 처소, 편전 선정전 옆 행각)에서 문효세자 낳음. 1786년 음력 5월 11일 홍역으로 창경 궁 자경전 동쪽행각에서 죽음,
* 의빈성씨묘비/뒷면 어제의빈묘지비문/1783년 정조 작성/한국중앙연구원
정조 이산은 의빈 성씨 사후 20일동안 정사를 돌보지 못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신하들이 정조에게 정사를 돌봐달라 간청했다.
* 정조의 어제비문
”의빈은 태어나면서부터 맑고 총명해서 아름답다. 길쌈도 잘하고 붓글씨도 잘 쓰고 학문을 익히면 다 이해하고 밝은 지혜를 가진 여인이다.“
”사랑한다. 참으로 속이 탄다. 네가 죽고 나서 나와 헤아졌다. 나는 비로소 너의 죽음 깨달았다.
* 정조 어제의빈 삼년내각제축문
“살아 있는 나와 죽은 네가 끝없이 오랜 세월동안 영원히 이별하니, 나는 못 견딜 정도로 근심과 걱정이 많다.”
- 의빈 성씨 : 1786년 9월 14일 미시 창덕궁 중희당에사 사망, 34세, 정조 10년
효창원(율목동 언덕 문효세자 옆)에서 1944년 서삼릉으로 이장
- 상의에서 1782년 문효세자 낳자 소용(정 3품) 그리고 1783년 빈(정 1품)이 됨
바. 애연가 정조
정조는 지독한 골초 중 골초
“담배는 명상(冥어두울명 想생각할상)의 벗, 연기(煙연기연 氣기운기)속에 명안(名案책상안)이 있다 ”
* 홍제전서 권 52 책문 5, 남령초(南靈신령령 草)/남령초 예찬 글
“왕은 말하노라.
여러 가지 식물중에 사용함에 이롭고 사람에게 유익한 것은 남령초만한게 없다.
책을 읽어 고질병 증세가 심해졌는데 백방으로 약을 구해 보았지만 남령초에서만 힘을 얻었다.
화기가 가슴에 막힘을 없애고 연기 진액이 폐장을 윤택하게 해 편히 잠을 잘 수 있었다.
정사의 잘잘못과 복잡한 심경을 분명하게 잡아내고, 요점을 찾아낸 것도 담배의 힘이다. 원고를 수정할 때도 답배의 힘이크다.
쓰임과 유익함이 차나 술보다 낫다. 백성들에게 베품어 혜택을 함께 하고 효과를 확산 천지가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에 조금이나마 보답하려 한다.“
* 과거시험 시제 ”남령초 책문“/1796년 11월 18일/담배의 유용성을 논하라.
”담배가 기호품이고 피우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면 마음이 흐트러져 기우제를 지낼 수 없다.“
”술만 금지하고 담배는 허락하라“ 명령
* 담배(담바고, 담파고) : TABACCO의 일본식 명칭
- 전래 : 1608 ~ 1616년 광해군 때 일본에서 들어왔고 1621년, 1622년 널리 퍼짐.
- 명칭
* 남초(南草) : 남초에서 전래
* 남령초(南靈草) : 신비한 약효가 있다.
* 연다(煙茶) : 차처럼 피로를 해소시켜 준다.
* 상사초(相思草) : 한번 맛보면 결코 잊을 수 없다.
* 심심초: 심심할 때 무료를 달래다.
- 원산지 : 15 ~16세기 아메리카
* 글/양은석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