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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유죄/ 권천학
무슨 일인가 있는 게 분명해
누군가
마그마 가슴 가까스로 누르며
살고 있을 저 담장 안에
골목 안 술렁거림에 오금이 저린 그가
살랑거리는 바람결에 그만
비밀스런 일을 저질러 놓고
바람 타는 담장과 녹슨 가시철망을
뛰어넘고 싶었던 거야
골목 안을 온통 물 들이는 소문에
가슴 속 피를 다 쏟아내어서라도
소리치고 싶었을 게야
무사히 지나칠 줄 알았던 봄이
기어이 일을 저지르고 만 거야
능소화 /권천학
진다
내장까지 붉어진 여름이
내려놓는다
땡볕에 달구어진 생애를
몽땅 던진다
익어 충만한 채로
사랑도 저러하리라
목숨도 저러하리라
툭
툭
툭
저러해야 아름다우리라
두통약 한 알이 욱신거리는 나를 평정한다
언제부턴가 나는
한 알의 약으로부터 지배당하고 있다
1cal 1kg 1mm ℇ ῼ 4 ♂ ■ 5.....
나날이 늘어나는 달콤한 계산
@#$%&^*^ ....
빛부신 세상에 발이 빠져
골치가 아프다
이건 순전히 음모다
배설과 수면시간까지 체크당하는 불쾌한 암호로부터
욱신거리는 목숨을 끌어내야 한다
재고 깎다가 결국은 제 살 발라내는
달콤한 음모로부터 벗어나
희미해져가는 기억 속의 길을 더듬어
숲으로 가는 길을 찾아야 한다
본디 나의 피는 푸르고 살은 눅눅하여
풀잎이거나 거기 깃들어 사는 벌레이거나
이끼 낀 바위이거나 벗하는 이슬이거나....
나의 탯줄은 숲으로 이어져 있고
흙 밟고가면 닿는 그 곳을 아직은 기억하기 때문에
겨울산 /권천학
묵언기도 중인 겨울산에서
나무들이 모두 발가벗은 채
깊은 명상에 잠겨있었다
여름내내 들끓어 댄 근육 위에
흰 눈을 얹어놓고
피를 식히는 침묵의 계절
잔 가지에 이는 바람소리랄지
발밑에서 바스라지는 시간의 숨소리랄지
한사코 길을 막는
겨울 산 그 적막 속에서
부활의 숲을 날아오르는 새는
잘라낸 생애들이 삭혀내는
갈색 어휘들을 쪼아먹는다
그림자를 남기지 않으려고
벗어버린 나무들이 부처가 되고
낮은 뿌리로 스미는 빗물이
다시 하늘로 올라
투명한 물길로 열리는 겨울산
나무들이 벗어놓은 옷가지들이
해탈의 연기로 피어올랐다
겨울 안개비 /권천학
새벽창 가득 예감처럼 내리는 안개비가
오래 잠궈두었던 비밀의 서랍속을 뒤지게한다
95년 4월 7일에 써보낸 첫편지
지금까지 뜯지못한 채 감금시켜두었던 죄목
떠나보내고도 오래
시간이 세월이 되어버린 이제사
녹슨 봉함을 뜯어낸다
삶을 부대끼게 하는 사연들이
가즈런한 글자마다 휘청휘청 박혀있고
그 싹 틔우느라
행간마다 안개비 자욱자욱 내리고 있었다
운명론자가 아니었든 그가
".......... 자아실현이라든가 사회공헌............ 언제던지 전업해버릴
수.............. 부모의 덕........... 보물섬을 발견...........최소한 복권
당첨............"이라고 얘기한 걸 보면
빳빳하게 서있던 그의 뼈대에
조금씩 습기가 스몄던 모양이다
바람 많은 세상에서
휘어지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며 버티던 모습보다
습기에 젖어들어 눅눅해지는 그 모습이
더욱 안스러워
행간을 넘쳐나는 안개비
삭아버렸을 그의 가슴에서
내 가슴에까지 건너오는 동안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물안개 걷어내느라
그렇게 여러 날 걸렸나보다
유배의 시간을 건너서도 여태도록
내게 도달하지못한 그때 그 안개비가
소리없이 내리는 눈발되어
초겨울 가슴에 물고랑을 내고 있다
그대는 내게 / 권천학
그대는 내게
풍덩 빠져서 헤어나지 못할
슬픔 하나
그대는 내게
너무나 소중하여
품안에서도 꺼질 것 같은
기쁨 하나
소리나지 않는 아픔
알큰한 향기에 목이 메이는
그대는 내게
기쁨 하나 슬픔 하나
꽃의 환상 / 권천학
꿈을 꾸었지
젖은 꽃잎 아래
젖은 꿈들이 모이고
푸른 잎새엔
푸른 약속을 새겼지
깊은 숨으로 길어올린 생수로
흙의 손자국 지우고
햇살에서 뽑아낸 색실을
물레에 걸었지
미세한 바람결에
흔들리는 꽃술
고운 눈빛 하나에도
별을 꿈꾸며
현의 떨림으로
절정에 이르는 몸짓
향기로운 술을 빚는 꽃잎 아래
침묵의 언어로 길들여진
기억의 건반 위에서
피어나는
환상의 실내악
그리운 섬 홍도 / 권천학
난 갈테야
몸살 앓아 끓는 피 데리고
가서
들썩이는 파도 앞에
수줍음 깔아 펼치는
붉은 돌로 살테야
난 갈테야
가슴 두근거리는 곳이면
어디든 갈테야
그리움으로 안 받치며
한 그루 섬동백 되어
짓붉게 살테야
기다림으로 피 달래며
두근두근 살테야
검푸른 가슴 내보이는 바다
그 바다 믿고 살테야
강우기(降雨期) / 권천학
누군가, 저벅거리며
수세기 동안 지켜오던
밤으로 오는 이 있어
서리서리 휘감아 내리는
우기의 주춧돌 밑
이무기의 울음 밴
청태 사이
눅눅한 꿈자리
같이 아파하는 이의
이부자리 속으로 파고드는
그 여름의 장마에
젖는 잠
빈 도시의 가슴에 전화를 건다 / 권천학
전화를 건다
빈 집, 빈 방, 도시의 빈 가슴에
여보세요, 여보세요..............
정좌한 어둠이 진저리를 친다
화들짝 놀라 깬 침묵이 수화기를 노려본다
거미의 파리한 손가락이 뻗어나와
벽과 벽 사이
공허의 모르쓰 부호를 타전해온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여보세.............
뼈마디를 일으켜 세운 어둠이
싸늘한 바람을 몰고온다
구석진 한 귀퉁이에 겨우 발붙이고 있는
체온을 딸깍 꺼버린다
가느다란 신경줄 하나
수화기 옆에 오똑 웅크리고 앉아 오로지
듣고있다, 침묵의 제 발자국 소리를
공허의 빈 들판에서 들려오는 우롱, 우롱, 우롱......
소용돌이 치는 죽음 같은 절망
절망 같은 죽음을 쓸고 오는
허무의 바람소리를
대리석처럼 반들거리는 적막의 물살에 부딪쳐
미끄러지는 벨소리
빈 집, 빈 방, 빈 도시의 가슴에서 헛되이
메아리진다
각(覺) / 권천학
-12월을 깨닫다
수레짐이 무거워 덜고 덜어가면서
끝내 다다른 길 끝 등마루 섣달
여벌옷조차 없이 가파르게 선
흰 소 한 마리
오르면 닿으리라
믿었던 하늘 또다시 저만큼 서 있고
숲도 구름도 그 아래 여여하다
바퀴 아래 깔린 시간들이
시퍼렇게 일어서는 모서리에
마지막 짐 내려놓고 보면 결국은
처음도 끝도 한 타래이므로
언제나 발 디딘 그 자리가 한 복판인 것을
고삐에 매인 마음조차 풀어버리고
훠어이
큰 숨 한 번 몰아 뿜어내고 보면
뿔 달린 짐승도 또한 여여하다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권천학
-몸이야기 54
내안의 수많은 방
여닫힘도 모르면서
삐그덕 삐그덕 들락거리고
미모사 같은 나의 선잠위에 다리를 펴고도
늘어지게 잠을 자는
나를 뽑아 감고 다니면서도
닫힌 문고리 안에 고이는
쓸쓸함같은 건 아랑곳하지 않아
쓸쓸함을 더해주는,
내 구덩이에 똥퍼부어가며 넝쿨 뻗는
두리뭉실 호박같은
헐거우면 헐거운대로
조이면 조이는대로
조석으로
내 게으름을 탓하며 챙겨주는
양말목같은 아내
나도 그런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의자가 있는 풍경/권천학
- 몸이야기 51
무슨 일로 왔었는 지
어쩌다가 갈길을 잃었는 지
돌아가지 못한 의자 하나 오도카니
일몰의 개펄 위에서 하염없다
누군가 두고 간 추억이 꼼지락 꼼지락
누군가 놓쳐버린 시간의 또아리 사락사락
낡은 몸을 붙들고 있는데
갓 돌아온 바람이 걸터앉아
비린 속살의 땀을 씻고 있다
입 다문 조개들 품어 기르는 뻘 밭 가슴에
붉은 홍역이 번져 흥건한 살앓이
바람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풍문처럼 혼을 놓아 몸 풀고 있다
자판기 /권천학
- 몸이야기 50
자판기에서 바다는 안나온다
자판기에서 별도 안나온다
자판기에서 피도 안나온다
준 만큼만 되돌려주는 산수(算數)의 기본
갑옷 속에서 녹슨 단순조작만
손끝에서만
설레임을 사라지게하는 괘씸한
망치로 부셔버리고 싶은 욕망만
굳어져버린 몸
아! 맘에 안들어!
.Kiss / 권천학
- 몸이야기 47
살과 살이 서로 파고든다
엉기고 부비며 깊어지고 싶어한다
헛것이라는 걸 안 모양이다
X-레이로 찍어보면
뼈와 뼈가 공중에 떠있다
입술이 지워지고
혀가 지워지고
살들이 지워지고
미필적고의 /권천학
=몸이야기 43
언제부턴가
가슴에 구멍이 뚫렸다는
남자를 만났다
바람이 몰아닥쳐
가을을 넘길 수 없다고 했다
놀랍게도 구멍 안엔
내가 지어놓은 까치집이 있다고 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
바람의 손이 저지른 일
이제 남은 건
짓기보다 어려운 허물기
누군가 해야할 그 일 때문에
생길지도 모를 또 하나의 구멍
내가 모르는 사이
신발 속에 조화로운 삶이 /권천학
- 몸이야기 35
걷고 또 걷다가
길 위에서 열반에 든 검정구두대신
새로 바꾼 갈색 구두
발뒤꿈치 터지고
볼가진 관절들이 왈그락 달그락
몸 바꾼 걸음이 불화를 겪는다
반질거리는 자존심의 깃 숙이고
서로 깎이며 견디는
불편의 시간을 얼마쯤 지나고 나서야
걸음이 조금씩 부드러워진다
서로 덜어내며 보태는 사이
자리 잡혀가는 신발 속
그 속에 조화로운 삶이 있었다
몸속의 소리/권천학
-몸이야기 31
별에 닿고싶어 뛰어오르다
허공에 머리를 부딪고 주저앉는다
빛은 빛대로
어둠은 어둠대로
제각각 전파를 쏘아 올리는 블랙홀
저마다의 발신음이 서로 엉켜
소용돌이치는 몸의 소리
안테나에 휘감겨 슬픔이 되고 만다
감전된 몸이 뜨겁게 토해내는 주파수가
난기류에 부딪쳐 파란 불꽃이 튄다
외롭다 그러나
외로움을 깨닫는 일은
더욱 외롭다
마음 나누기/권천학
-몸 이야기 23
마지막 밤을 바다에게 주고 싶어서
자시(子時)의 방파제
젖은 바람 속에 나를 세워둔다
사랑에 목숨걸고
무인도를 사들였던 勇이에게
처녀를 주고 싶었던 것처럼
그러나 끝내 행동하지 못한 그때처럼
오늘도
바다와 마음 나누기에 실패했다
가진 건 오직 몸뿐
그 몸이 죄라면서
줄기차게 패대기치는 바다를 보고
세상을 잠시 밀어둔 채
속내 깊은 이야기 나누고 싶어
내밀었던 마음
거두어버렸다
방심(放心)/권천학
-몸 이야기 18
나이를 믿었다
여자나이 쉰 넘으며 볼장 다 본 거란 농담 뒤엔
늘 이슬이 맺혔다
가정과 사회 그리고 여성으로부터
구속과 제한과 유혹으로부터
그 모든 노예문서의 유효기간으로부터
제외된다는 서글픔을 '자유'라고 바꿔 말하고
'벗어날 수 있는 여유'라는 어설픈 명분도 달았다
덤으로 '안정'까지 보상받은 이후
고삐 단단히 틀어잡고 살아온 나이 앞세워가며
마음을 놓고있는 사이
우연인 듯, 운명인 듯, 피뢰침에 채인 번개
우르릉! 파바박!
단단하다고 믿었던 집에 물이 스몄다
믿었던 나이가 반란을 일으켰다
자유가 흔들리고 여유가 사라지고 안정도 깨어졌다
나는 오늘, 갈기 흰 말잔등 위에서
뜨겁게 타오르고 있느니
나는 지금 또 하나의 섬을 낳으려고
치솟는 활화산의 불기둥 속에서 용해되고 있느니
유혹/ 권천학
-몸 이야기 17
나를 생포하고 있는 사내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게 없다 이름밖에는
막강한 힘으로 온통 에워싸고
왕성한 식욕으로 끓어 넘치는 그 사내는
수시로 덮치고 수시로 넘친다
빨갛게 눈뜨고 내려다보는
탑동 앞바다 등대아래서도
나를 물결 위에 눕힌다
그의 미친 살냄새에 절여져서
지칠 때까지 출렁이다가
솟구치는 대로 알 까고
생기는 대로 새끼 쳐서
그의 푸른 가슴에 놓아기를까
나를 미치게 하는 그 사내의 이름은
바다!
고백 /권천학
몸 이야기 16
손 흔들면 보이는 거리
소리쳐 부르면 들리는
거기쯤 있고 싶어서
쿵 쿵 쿵
급하게 달려오는 발자국소리 들리는
거기쯤 있고 싶어서
꽃다발을 들고 오는 모습 보이는 창가
거기쯤
있잖아요~하면 눈치채고
가던 걸음 되돌려 키스해주는
거기쯤 있고 싶어서
편지/권천학
- 몸이야기 15
비 개이자
산은 성큼 다가서고
하늘은 한 십리쯤 멀어졌다는
시월 · 섬
따스한 손길만이 악수가 된다고
봉투 가득 담아보낸 체온
내게 작은 불씨가 되고싶다는 그는
이미 내 안에 주렁주렁 귤빛등불로 켜지고
추위 탈 때마다 외투가 되어주겠다는 그의 언약이
나를 더 춥게 만들 겨울을 예비케 하는
아! 칼질의 사랑
그 사랑에
나의 또 한 생애를 바치기 위하여
키스로 봉해진 편지 위에
입술을 포갠
.질주/권천학
- 몸이야기 13
그는 힘이 세다
우아하게 골라 입고 골라 말하는
나의 품위를 무질러버리고
고급스런 취미를 허무하게 만들고
고상한 나의 몸가짐을 비웃으며
잠도 빼앗고
때로 꿈속까지 쳐들어온다.
그가 쳐들어오면
침공단한 나는 식민지로 누워
그에게 길을 내주고 만다
질주한다
악보없는 음악이 연주된다
아웃토반을 질주하는 속도에 밀려
줄이 끊기고 음악도 멎는다.
팽팽한 그의 바퀴아래
패랭이 꽃 무더기로 쓰러진다
자유하고 싶다/권천학
-몸이야기 11
그대를 생각하면 잠도 오지 않고 책도 읽을 수 없다
그대를 생각하면 밤도 없고 낯도 없고
그저 하얀 백색의 허공뿐
그대를 생각하면 생활도 없고 일상도 없고
그대를 생각하면 시도 없고 노래도 없고
오직 눈물뿐
그대를 생각하면 철학도 없고 도덕도 없고
그대를 생각하면 체면도 없고 지성도 없고
오직 유치한 욕망과 본능을 가진 짐승의 이름뿐
그대를 생각하면 미래도 없고 과거도 없고
그대를 생각하면 상식도 없고 자존심도 없다
오직 그대 그리운 몸뿐
오직 그대에게 꽁꽁 묶인 목숨 하나뿐!
아! 자유하고 싶다
바람부는 그 거리에 서고 싶다 / 권천학
- 몸이야기 8
한번만
단 한번만이라도
바람 부는 그 거리에 서고 싶다.
겨울이 절뚝이며 지나가고
모질게 살 트던 봄도 떠나고
무성하게 타오르던 여름도 흘러가버린
강물같은 그 거리
쌓이고 쌓인 사연들이
성숙한 모습으로 다시 돌아올때까지
쓸쓸하나 아름다운 기다림으로 서 있을
가을나무
저만큼
부화해버린 꿈 껍질들을 흩날리며
든든한 어깨품으로 아직도 오고 있을
그대에게 단 한번만이라도
눈물겨운 이름이고 싶다.
눈부신 이름이고 싶다.
꽃샘감기 /권천학
땅속줄기로부터 뽑아 올린 진액을
한 입 씩 품어 물고
숨을 참던 봄꽃들
다투어가며 꽃 봉지 트고 나오려는 순간
심한 재채기를 터트린다
얇은 봄옷 한 벌 걸친 냉이도
먼 산
흰 눈 위에 얹힌 추위를 걷어내며
기관지에서 해소기침을 뿜어낸다
정신을 멀게 하는 어지럼증
봄 멀미에 좋다는 탕약을 지어
아른아른 닳이고 있는 아지랑이
마음의 별밭 /권천학
-도라지 꽃밭에서
별이 뜬다
사람 사는 세상에선
기쁨도 별 하나
근심도 별 하나
이별의 아침
수심의 찻잔에 뜨는
별보라
기다림의 저녁나절
열어놓은 삽작에
하얗게
눈물로 뜨는 샛별
기쁨은 넘쳐 하늘로 가고
남은 그 자리
근심은 수런수런 나비가 되고
빈 그 자리
빛이 별 되고
별이 꽃 되고
마음이 별 되고
별이 별 되어 뜬다
개똥밭에 별이 뜬다
추억을 여며주는 꽃단추 / 권천학
-패랭이 꽃
어느 날 문득
소슬한 초가을 쯤
헌 옷가지들을 정리하며
낡은 시간들을 챙기다가
들추어낸 한 벌의 옷
패랭이 꽃무더기 흔들고 지나가는
실바람 고운 한 줄기
아직도 옷섶에서 나부끼고 있다
단추 두어 개 떨어져나간 자리에
머뭇거리는 안스러움
풀린 실밥에 덜컹 뒷덜미 채여
비에 젖고 싶을 때
무심코 오가던 낯익은 골목길에서
우연히 눈에 띄어
심장을 찌르는 단추
다시 한 번 입어보고 싶은
꽃무늬 잔잔한 실크 브라우스
혹은
잊고 있던
추억의 가장자리 여며주는
꽃단추
등나무꽃 넝쿨 아래서 /권천학
그토록 수많은 밤을
눈물로 지새웠어도
아직도 눈물로 지새워야 할
그토록 수많은 밤이 있어
나는 행복하다
그토록 수많은 등불 밝혀가며
힘겹게 먼길 굽돌아왔어도
아직도 등불 밝혀야 할
그토록 먼길 있어
나는 행복하다
.................... 중년
..............................權 千 鶴
........................ 번역 김 하 나
이름만 들어도
아름다운
병이 들고 싶어
풀섶
어디메쯤
가을 벌레 한 마리 기르면서
더듬이 끝으로 오는
새벽
찬란한
이슬로 맺혀
꽃의 심장을 무너뜨리는
햇볕에 찔려
아프게 죽으리니
이름만 들어도
향기로운
들꽃이고 싶어
떨려 오는 바람결에
말갛게 살다가
시샘 없는 빛깔로 남아
꽃잎이던 기억마저 버리고
밤마다 승천하여 별이 되리니
수로부인 1/권천학
누가 알랴
황홀을 꿈꾸는 내 순수의 기다림을
시린 눈웃음에 혼이 바셔
길 잃은 꽃무지들
눈 먼 꽃 바람 아래 풋정 풀어가며
하루살이 집을 짓고
두견이 몇 마리 날아와
헛웃음을 토해 쌓는 꽃그늘 속에
길 잘못 든 짐승들을 달래어 가며
진다홍 얼룩을 지우다보면
설핏 저무는 봄
그 섧은 빛깔 속에 감추어진 내 기다림을
누가 알랴
분홍빛 그리움으로 꽃국 끓여대는 봄 기슭
속 깊이 타오르는 봄을
누가 알랴
콩꽃/권천학
반음 내림
온음 올림을 위하여
작은 꽃들을 피움
튼실한 열매를 맺기 위하여
동글동글 여무는 꿈의 알갱이들
높은 음자리를 닮아가는 손 끝에서
이슬 진주 도르르....
오늘도 또 부서져 내리는 햇빛 가루 속에서
땀띠 걷어내는
녹색 음절
기다림의 시- 시게꽃 크로바 /권천학
애초에 당신이 약속을 꼭 지키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약속은 지키기 위한 것임을 당신은 아십니다
해마다 이 자리 키도 자라지 않은 채 자질쳐 있는 것은 그냥 그러고 싶어섭니다
나도 떠났다간 당신처럼 못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애초에, 소꿉놀이처럼 처음 시작 할 땐 사랑이란 말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코 헛된 몸짓이 아니었음을 당신은 아십니다
우리가 가진 건 합해야 겨우 한 몫이 될 적은 나이와 짝을 맞춰야 하나가 되는 그리움 뿐이었으니까요
해마다 이 자리 새로이 몸단장하고 수없이 널린 발자국들을 그대로 이고 있는 것은 그냥 그러고 싶어섭니다
밤 마다 벗어놓은 신발이 현관을 걸어나가는 꿈에 시달릴지도 모를 당신을 생각하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다시 빛나는 아침까지
쉴새없이 돌아가는 거대한 톱니바퀴 사이에 쇠붙이로 끼어 있을 당신
당신의 팔뚝 위 푸른 동맥을 파고들며 빛나고 있을 작은 톱니
서울역 시계탑 앞에서 부질없이 발길 묶여 휘청거리지나 않을지
애초에,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았지만 눈만 뜨면 당신 생각에 죄송할 따름입니다
춘향이의 기다림 /권천학
-춘향 1
그대 오시려나
젖은 내 눈물자국 위로
그리움 가득 품어 안고
휘어지는 요천수
푸른 물결을 건너
그대 오시려나
오색실 엮어 매어 놓은 그네
빈 바람에도 흔들리는
내 열 아홉의 뜨락으로
해질녁 땅거미 등을 타고
그대 오시려나
그리움은 끝도 없어
밤마다 키우는 외로움에 움이 돋고
달빛 머무는 들창 너머로
숙고사 치맛자락 쓸리는
그리움은 끝도 없어
걷어붙인 옷소매 다홍 끝동에
물색 고운 비단 수 원앙
옷고름 뜯겨진 자리에
은장도 칼날 번뜩이는 새벽을 지나
햇보리 이랑을 넘어
그대 오시려나
목 련 /권천학
그대 떠나던 날
눈이 내렸었지
돌아설 듯 돌아설 듯
사라지던 뒷모습.
눈물보다 더 서럽게
남긴 웃음이
하얗게 피어나는
빈자리.
그대 옷깃에
수를 놓았지
바늘에 찔린 손끝에
낭자한
속울음.
열어놓은 문으로
들어와
웃고 선
그대
우리 아들 경대야 / 권천학
-명지대 강경대 군의 죽음 앞에
아들아,
부모 된 사람과 부모 못된 두 가지 어른들이 사는 이 나라 땅에선
대학생 아들과 전경아들을 배웅해야하는 두 개의 아침마다,
아침이 되어도 어둠이 벗겨지지 않는 이 나라 땅의
빗장 걸린 대문 앞에서,
너희들을 대문 밖으로 내몰아야 하는 이 에미는,
부모 된 죄와 부모 못된 죄를 함께 아로새기며
늑골까지 스미는 아픔으로
새벽마다 쓰라린 장국을 끓여내야 하는 이 에미는,
이제 또 다시 떨리는 손으로 무너지는 억장 추스리며
아침마다 가족들이 비워낸 그릇들을 닦고 또 닦는다.
한 때는 역사의 깊은 어둠 속에서
절망의 밑창까지 내려가야 하는 수렁에 빠져
징병을 당할까봐 목숨이 바짝바짝 조이는 듯,
남편과 자식들을 총알받이로 내놓아야 했던
그 때의 막막함이 이제도 새롭다.
짐승처럼 끌려가야 하는 울분마저도 드러내지 못하고
모가지 뽑히는 삐비꽃 허연 비탈에서
숨소리마저 죽여가며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는
백치의 몰골로 짓밟히며 빼앗기며 살아야 했던 쓰라린 기억 속,
총칼에 심장이 짓이겨진 나라의 시신 앞에서
하늘 무너지는 통곡조차 부질없었던 그 때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요즘,
그래도 그 때 우리의 적은 밖에 있었는데........
아들아.
저녁이면 돌아올 너희들을 위해서
편안한 잠자리를 마련하고픈 이 에미는,
젊음을 깎아 우애와 우정을 갈라 세우는 방패를 만들고
혈기를 부셔뜨려 돌덩이를 만들어야 하는
너희들의 선량한 눈길을 맨정신으로 차마 볼 수 없어
이제 그만 돌아눕고 싶다.
화염병과 돌팔매질에 유리조각처럼 깨어져나가는 민주주의,
각목과 쇠파이프 사이에서 박살나는 너희들의
푸른 두 어깨와 핏발 선 눈동자들
조국은 지도(地圖) 속에 그려져 있는 게 아니라
아름다운 사람들의 눈 속에 살아있다는 말을 하고싶던 이 에미는,
민주주의는 구호로 만들어지는 게 것이 아니라
잔잔한 웃음으로 담아내는 식탁에 마주 앉아있고
노동을 마치고 돌아와 누르는
땀 배인 초인종소리에 실려있다고 말하고 싶던 이 에미는,
시시때때로 탈을 바꿔 써가며 오리발로 세상을 건너고
눈가림으로 죄 가림 하려는 네 에비들과 함께 사는 이 에미는,
고층 빌딩을 날림으로 지어놓고
그 책임을 막노동꾼들에게 돌리는 남정네와 살을 섞으며 사는 이 에미는,
너희들이 벗어 놓은 옷가지에 덮씌워진 누명과
뒤범벅이 된 최루가스에 비누칠을 해가며
슬픈 이 아침을 빨고 또 빨아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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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학]으로 등단
여성중앙에 단편 "모래성"당선, 부록으로 출간
드라마당선(KBS,SBS)
월간 어머니 편집장, 풀잎문학 주간 역임
관악문화신문 논설위원,컬럼니스트 역임
진단시동인 역임
한국문협, 한국시협, 국제펜클럽, 현대시인협회이사
도서출판 "학마을" 문화탐험 "하나플러스" 대표
계간문예 "다층" 편집동인
한국전자문학도서관 웹진 "블루노트"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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