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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원류와 그 지류 몇을 만나다
1. 성경
2. 한국의 순교 성인들과 순교자들
3.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
4.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과 고백록
5. 그리스도인 생활 공동체와 성 이냐시오의 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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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고정관념이나 발로 굳어 반복되는 것들 안의 나를 살피게 한다. 이렇게 나를 이끌어 나간다.)
마리아 성당에서 성경을 만났다.
1. 성경
(단지 그리움 때문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내가 자주 마리아 성당 길을 나섰다면 그것은 한 동안 마리아 성당을 통해서 내가 드나들었던 길목들, 그 연결점들, 아득히 내려오는 빛의 길목들에서 벗어나지 않고, 언제인가는 그 길을 따라 나서야 할 것이라는 예감에 스스로 끌리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성당에서 일을 시작한 지 여섯 달쯤 되었을 때였다. 그 해, 2005년, 유월 하순의 어느 날이었는데 우연히 눈에 뜨인 것이 성경 통독 계획표였다. 신약과 구약을 한 해 동안에 통독할 수 있도록 어느 수녀회에서 마련해 놓은 것이었다. 아직 여섯 달이 남아 있다는 생각에, 하루에 원래 계획량의 이틀치를 읽어나간다면 연말까지 통독이 가능한 일이었으므로, 7월 첫날부터 성경 읽기를 시작했다.
성당에 있는 사람이 성경을 읽기로 했다는 것은 새로울 것이 하나도 없는 군말이다. 그러나 성경을 읽기로 작심한 것은 나에게는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사건이었다. 성당에서 일어난 이 만남 안에 앞으로 자라날 여러 만남이, 이 안에 다른 만남의 싹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성경을 읽기 시작한 이후로 나날의 의미도 달리 부여되기 시작했을까? ‘묵주의 9일 기도’는 54 일마다 되풀이하는 일정임에도 매일 의미가 달랐고, 매일 미사에서도 3년을 주기로 성경의 주요 말씀을 관통하도록 되어 있어 나날의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다. 기도 속의 삶이나 매일 참례하는 미사에서처럼 성경을 통독하는 경우도 ‘말씀’을 생활 속에서 하루하루 섭렵하는 삶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점을 나는 어느 정도 의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믿음에 뿌리를 둔 통제력을 지니지 못한 것이 당시에 나의 상태였다.)
스스로 성경 읽기를 자처하고 나섰으니, 하루하루가 번져서는 안 되는 일로 바뀌었다. 하루라도 읽기를 건너뛰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하루라도 빠뜨리지 않는 것이 어려운 일이었다. 촉매 같은 나날이 서로 엮이며 앞뒤로 이어졌다.
(성경의 독서에 따르는 어려움은 실제로 다른 데에 있었다. 믿음이었다. 믿음은 그 스스로 깊이를 더해 간다. 이 어려움 안에 성경의 생명이 함축되어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하여간 시작한 성경 읽기였다. 읽기를 계속하는 동안, 다음과 같은 물음들이 설설 머리를 들고 일어났다.
∙ 성경을 통독한 연후에 달라지는 것이 있겠는가
∙ 그렇다면 무엇이 변할 것인가
∙ 관점과 심상에 어떤 변화가 올 것인가
성경을 읽고 있는 나를 보고 교우들은 종종 인사말을 늘어놓았다. 성경은 조금씩 읽으면서 깊이 연구하고 묵상하며 읽어야 한다고 조언하는 교우들도 있었다. 나는 그들의 조언을 고맙게 여기면서도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성경의 장과 절을 국부적으로 따지고 들면 부족한 내 생각이 투사되어서, 장님과 코끼리의 우화에서처럼, 성경의 참의미가 부분적으로 왜곡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첫 여섯 달이 지나고, 첫 번째 통독이 끝났다.
한 인간이 달라지는 것은 스스로가 원한다고 그렇게 쉬이 뒤따르는 일이 아니다.
다만 성경이 전보다 친근하게 느껴졌고, 나 자신이 만질만질하게 되어 있었다.
(성경을 전체로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야만, 비록 개인적인 의미에서이지만, 성경을 삶 전체와 연관 지어서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전체로서 느껴보자.
(이렇게 마음을 도스르면서도, 성경을 읽는 동안에는 달리 일반 도서를 대하지 않고 지내는 나 자신의 처지가 어느 날 의식되었다. 성경 읽기에 일반 독서의 성격도 곁들이기로 했다.)
성경을 문학 작품으로도 보고 그 문체를 생각하면서 읽자.
(성경과 병행하여 보니, 일반 독서는 독자 자신이 중심에 서야 하는 것이 드러났다. 이런 데서 일반 독서가 성경의 경우와 달랐다. 일반 독서에서 자기 본위적인 자세가 부단히 의식되었으므로 성경과 같이 하기에는 꺼림한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고, 두 성향이 서로 부딪쳤다. 이런 충돌이 성경의 문체를 생각해 보도록 이끌었다.)
성경의 문체에서 오는 것을 어떻게 말로 담아볼 수 있을까?
맑은 물 앞에 서면 얼굴이 비친다. 바람결이 스치면 일렁이는 수면에서 얼굴은 일그러진 모습이다.
물은 여전히 맑고 얼굴 모습을 일그러뜨리는 것은 바람결이다.
다른 모습들도 함께 물 앞에 서면 비친다.
내 것은 내 것으로, 다른 사람 것은 그 사람 것으로, 사물들은 각기 사물들의 영상으로 나타나고 사라진다.
물 스스로는 내 것에 더하지도 않고 빠뜨리지도 않는다.
본래의 맑음으로 그냥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맑음이 성경의 문체에서 나비친다.
(성경이 살아있는 말씀이라는 의미를 염두에 두고…. )
두 번째 여섯 달이 지나며, 두 번째 통독이 끝났다. 성경이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는 말에 수긍이 갔다. 성경을 자의적으로 받아들이는 잘못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성경 문헌의 배경 환경을 알아야 한다는 말에 공감이 갔다.
가끔 생각이나 생활에 연관해서, 무엇인가가 성경에 있었다는 기억이 뇌리에서 맴돌았다. 생활 속에서 그 장과 절이 궁금해졌을 만큼 성경이 숨을 쉬고 있는 것인가, 이런 것을 두고 성경 말씀이 살아있다고 하는 것일까 하는 혼자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그룹 공부 반에서 종종 내가 물었다: 성경은 살아 있는 하느님의 말씀이고, 그래서 성경 말씀은 살아 있다고 하는데 이것이 내 삶에서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성경 말씀이 살아 있다면, 그 말씀은 나에게도 살아있다는 뜻인데, 그 살아있음이 나에게는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가?
성경은 살아 있는 하느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라는 가르침은 기록이나 강론을 통해서도 익히 대하여 온 터였고, 성경의 말씀이 살아 있다는 의미는 성경의 말씀 내용이 나의 일상생활 가운데서 작용하고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었으므로, 나는 성경 말씀이 내 삶 안에서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 아래에 깔려 있는 논리는 이러했다.—성경의 말씀과 나의 생활은 신비롭게 결부되어 있다. 성경은 내 삶을 비추어 주는 거울처럼 여겨야 한다. 성경은 기준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세는 강제성을 띤 것이었으므로, 이대로 성경을 대하면 읽기가 거북하게 되었다. 그런데도 성경을 읽으면서 여전히 염두에 두었던 것은 성경 읽기 전후에 나에게 무슨 변화가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성경 읽기는 차츰 내 시각을 변화시켜 나갔던 듯하다. 세계의 역사를 성경에 어떻게 비춰서 보았을까 하는 호기심이 어느 때부터인가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나에 관한 한, 성경 그룹공부 반에서 성경과 해설서를 읽고 문제지에 답을 다는 공부 방식은 장단점이 있다는 생각이 없지 않았다.)
성경 그룹공부에서 안내서의 해설이 성경의 집필 배경과 장․절의 뜻을 당시의 사회․문화적 입장에서 풀이해 놓은 것은 지식의 측면에서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런 지식을 독자가 수용하도록 의도한 가르침은 틀에 잡힌 해설과 문제지가 될 수도 있다는 의구심이 내게서 떠나지 않았다. 문제지에 제시된 문제에 답을 다는 방식의 공부는 사람마다 나름대로 살아 있는 생활 안에서 누구에게나 살아 있을 성경의 말씀을 대하는 것과는 동이 뜰 수도 있는 일이었다.
살아 있는 하느님의 살아 있는 말씀-성경의 말씀-이 모든 사람에게 살아 있기 위해서는, 해설서와 봉사자의 경험은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이 끈을 놓아주지 않고 계속 따라다녔다.
(성경 속의 내용과 순교자들의 신앙의 삶은, 일상적인 삶의 관점에서 보면, 극단적인 내용의 극한적인 삶의 경우로 보일 수가 있었다. 이러한 점은 강론, 기록물, 그리고 신자나 비신자의 견해에서 종종 나타났으며 나에게 색다른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성경의 내용은 상징으로 이해해도 되는가? 아니면 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질문이었다.)
성경의 내용은 상징이 아니므로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강론도 있었고, 성경의 내용은 상징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강론도 들었다. 나는 성경의 내용을 상징으로 받아들인다는 견해에는 만족스럽지 않은 데가 있어서 끌리지 않았다. ‘사랑’이 무엇을 단지 상징만 하고 있는 말인가? 상징은 사람들 각자에게 나름으로 자의적인 의미의 폭을 허용한다. 성경의 말씀이 큰 폭의 해석을 가지게 되므로 각자의 취향—세계—‐에 맞춰서 왜곡될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무엇보다도 상징이라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순교자들의 신앙이 있었다. 목숨을 내걸고 지키려고 한 것이 상징에 불과한 것이란 말인가? 상징은 상대적인 의미로 흐르기 쉽고, 상대적인 의미로 해석되고 나면 절대자의 절대적인 의미를 상실한 성경이 어떻게 다양한 삶의 양태에서 일관된 의미를 견지시키며 불변의 기준으로 시공에 서 있을 수 있겠는가?
나로서는 상징적인 해석이 해석자의 편의에 따른 것으로 여겨졌고, 성경의 내용에 대해서는 절대성을 취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경의 내용을 따를 수 없는 자들이 그 내용을 편의상 상징적으로 풀이하여 현세와 영합하는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극단적인 경우라고 부르는 것에 있어서도, 그렇게 보는 시각이 육신의 한계에서 그렇게 보도록 틀이 지어졌다면, 육신을 벗어던진다는 차원에서 그것을 다시 보아야 한다는 편이 납득하기에 쉬웠다. 이런 관점은 순교자들의 삶에서 일관되게 볼 수 있는 것이었고, 뒤에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의 자서전을 공부하면서 이냐시오 성인이 가르치고 있는 중용의 의미에서 재차 확인하게 된 점이기도 하였다.
2. 한국의 순교 성인들과 순교자들
(성경을 읽는 행위가 당시에 가장 값진 도움을 준 것은 무엇보다도 순교 성인의 공부에서 드러났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성경 통독을 하는 동안 이와 병행하여 매 주 한국의 순교 성인을 공부하고 있었다. 먼저 한국의 순교 성인 103위의 삶을, 그 뒤에 이어서 일 년 남짓 윤지충을 비롯한 순교자 124인의 삶을 살펴보았다. 순교자들의 삶을 공부하면서 나는 일반 생활인이 성경 속에서 대면하되 현실적으로 따르기 어려운 내용을 삶을 통해서 실제로 보여준 사람이 바로 순교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세인의 눈에는 참으로 바보 같은 고집들로 순교를 열망하기에 이르기까지 믿음을 고수한 순교자들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성경 안에 갖추어져 있었다.
(육신이 극한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삶을 통해서 성경을 풀이해 주고 가르쳐 주는 사람은 순교자들이고, 순교자들의 그러한 삶의 자세를 이해할 수 있도록 눈을 열어 주는 것이 성경이라는 발견은 값진 발견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아래와 같은 점들이 점차로 눈에 띄었다.
∙ 성경은 우리 삶을 기록하여 놓은 살아 있는 실례이다. 삶의 모습을 성경 안에서 알아보는 만큼 지혜는 증가한다고 할 것이다.
∙ 그러므로 성경의 내용은 우리 삶을 비춰주고 있는 차원이 높은 거울과 같다. 성경에 비추어져서 보이지 않는 인간의 삶은 없다.
∙ 성지 순례, 순교지 방문 등의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을 보거나, 나에게 성지 순례를 권유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나는 생각하고 대답했다. 성경 안에는 하늘 같이 빛나는 성지가 많이 있다. 성경을 읽고 그 안으로 침잠하는 것이 성지 순례를 하는 것과 같다. 성경 안의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지상의 아름다움은 없다. 인간이 성취해 놓은 아름다운 작품은 모두 하느님의 세계를 본뜬 인공적인 실현일 뿐으로 성경 안에 존재하는 이미지에서 비롯한 것이다.
∙ 성경 속의 삶과 인간의 현실적인 삶은 서로 중첩되어 있다. 나는 현세에서 살고 있으나, 이 삶 자체는 성경 속의 삶에 내포되어 있다. 현세의 시공간적인 제약과 이를 초월한 성경 속의 삶 두 가지를 나는 동시에 향유하고 있는 것이다. 현자는 이 두 가지 현상을 식별하는 자로서 때에 맞추어 두 세계의 조건에 순응하는 자이다. 현자는 육신의 제약에서 영혼의 자유로 자연스레 옮겨가는 삶을 산다.
(한국의 103위 순교 성인 공부 반을 조직해서 성인의 일생을 간략히 더듬어 보던 때에 대했던 순교자의 삶의 자세와 순교 장면 몇이 선연히 마음에 맺혀 있다.)
• 성녀 박아기 안나는 한강 기슭의 한 작은 촌락 출신이었다. 안나는 기억력이 선천적으로 둔하였다. 교우 집안에서 태어난 안나였으나 교리문답과 기도문 배우기가 매우 힘들었다. 안나는 스스로를 위로하며 실망하지 않았다.
“나는 천주를 내가 원하는 대로 알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마음껏 사랑하기로 힘쓰겠다.”
안나는 1839년 기해박해 때 2월경에 남편과 맏아들과 함께 붙잡혔다. 남편과 장남은 곧 배교하여 풀려났지만, 안나는 다리뼈가 허옇게 들어나고 몸에 쇠눈 만큼씩이나 구멍이 나도록 혹독한 매질을 당했다. 배교한 남편과 아들이 함께 매일 찾아와서 병중의 노모와 어린 아이가 보채고 있는 집안의 참혹한 정경을 앞세우며 배교하라고 애걸하였다. 그때에 안나의 마음은 고문보다 더 아팠다.
그러나 안나는 견디어냈다.
“며칠 더 살아 보려고 영원한 죽음을 무릅쓰란 말이오?”
성녀 박아기 안나는 포장에게, 당당하게 자기의 신앙을 밝히며 순교하였다.
“저는 신앙을 보존하고 신앙을 위하여 죽기로 작정하였습니다.”
• 성녀 박희순 루치아는 타고난 미모에 뛰어난 재주로 인해서 일찍 궁중에 불려 들어가 왕후의 시녀가 되었다. 열다섯 살이 채 못 되었을 때에, 어린 순조 임금의 유혹을 비상한 지혜와 용기로 물리쳐서 그 이름이 세간에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서른 살쯤에 천주교를 알게 되어 입교하였는데, 천주교 신자로서 참된 봉행을 위하여 칭병하고 궁중을 벗어났다.
기해박해가 일어난 1839년, 4월 15일 포졸들이 집을 들이닥치자, 루치아는 천주의 뜻이라 여기고 태연히 체포되어 옥으로 끌려갔다. 포청과 형조에서 모두가 혹독한 고문에 배교하였으나, 박희순 루치아는 여러 번 견디어 내었다. 혹형과 고문에 다리가 부러지고 골수가 흐르는 만신창이의 몸이 되었으나, 루치아는 흘러나오는 골수를 머리칼로 닦으며,
“이제야 나의 주 예수와 성모 마리아의 괴로움이 어떠하였는지 조금 깨닫게 되었다”
라고 말하며 추호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오히려, 박희순 루치아 성녀는 모진 형벌 가운데서, 예수의 수난을 묵상하였다. 교우들에게 감동적인 권면의 편지를 써 보내는 등 열정적인 신앙으로 모든 유혹과 형벌과 고문을 참아 낸 후, 박희순 루치아 성녀는 그해 5월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 충청도 덕산에서 양반의 자제로 태어난 한이형 라우렌시오 성인은 성격이 강직하고, 헌신적이며, 열성이 지극하였다. 라우렌시오는 14세 때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운 뒤 비상한 열심을 보여주었다. 그는 결혼 후에 고향을 떠나 경기도 양지고을 은이 마을로 들어가 숨어 살았는데, 1846년 병오 박해 때 체포되었다.
포졸들은 라우렌시오를 묶고 닥치는 대로 때렸다. 그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대들보에 매어단 후 물매질을 하면서 배교하고 동교인들을 대라고 협박하였다. 라우렌시오가 이를 거절하자 포졸들은 그의 두 다리를 결박하고 그 사이에 깨어진 접시며 질그릇 조각을 끼우고 굵은 밧줄을 발목에 걸쳐서 앞뒤로 잡아당겨 살을 톱질하듯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잔학한 고문에도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았으므로 포졸들도 이에 감동하여 다른 신자들에게
“당신들이 정말 천주교 신자가 되려면 한이형과 같이 되어야 한다.”
라고 말하였다.
그 후 포졸들이 라우렌시오를 서울로 압송하였다. 잘 걷지를 못 하는 그를 말에 태워 주겠다고 하여도 라우렌시오는 이를 거절하였고, 십자가를 지고 갈바리아 산을 오르는 예수를 묵상하며, 상처투성이인 맨발로 백여 리가 넘는 산길을 서울까지 끌려갔다.
한이형 라우렌시오 성인은 포청에서도 심한 매와 형벌을 받았으나 이겨내고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3.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
다섯 번째 성경 통독을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나는 아직도 한국의 103위 순교 성인을 공부하는 중이었다. 어느 날 로스앤젤르스의 한 성당에서 협조공문을 보내왔다. ‘이냐시오의 영신수련 19번 피정’ 프로그램을 주보에 공지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양노엘 신부의 허락을 받고 주보에 공지했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마리아 성당에서도 희망자가 많이 나타났으므로, 봉사자가 마리아 성당까지 와서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 19번 피정’을 지도하겠다고 하였고, 그 덕분에 나도 피정에 참여할 수 있었다.
나는 ‘이냐시오 성인의 영신수련 19번 피정’에서, 프로그램의 교재를 대하자마자 그 내용에 아주 매료되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을 그렇게 함축해 놓은 자료를 나는 그때까지 본 적이 없었다. 구미에 딱 맞았던 것이다. 나는 자료의 일부를 복사하여 아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까지 하였다. 이냐시오 성인이 말하는 <원리와 기초>와 여기서 말하고 있는 ‘중용’의 의미가 특히 새로웠다. ‘두 개의 깃발’이나 ‘겸손의 세 단계’도 <원리와 기초>에서처럼 자기의 마음이 어느 위치에 있는가를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도록 분별력을 일깨워주는 것이었다.
‘이냐시오 성인의 영신수련 19번 피정’이나 한국의 103위 순교 성인 공부에서 공부를 하기 전과 한 뒤의 나의 변화 상태를 살펴보자는 생각은 처음에 성경 통독을 시작하던 때와 같았고, 이 두 상이한 공부의 바탕이 성경이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보면, 그 당시에 내가 매료되었던 것이 영신수련의 참된 의미를 추구하고 실현하는 데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나는 잘못된 영성 훈련에 대한 경고로 지적되고 있는바 ‘영적인 소비주의(탐욕)’에 가까웠다. 내가 그 교재의 훌륭함에 매료되었던 것이 이에 대한 하나의 방증이다. 나는 그때 하느님을 체험해보려는 주관적인 욕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현실의 갈등이나 두려움, 혹은 자신의 불완전에서 비켜나서 주관적인 안정감을 얻으려고 했었고, 관상의 침묵 속에서 자기만족적인 것을 추구하려고 했었다. 이런 것은 바리사이적인 지적 교만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었다.
성경 읽기는, 두 번의 통독 뒤에는, 매 분기마다 한 번씩 통독하여 연중 네 번 통독을 하도록 계획을 보완했고, 순교 성인 공부와 병행하던 때에는 성인의 공부에 도움이 될 장과 절을 통독 중에 유의해가며 기록해 두기도 했었다.
4.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과 고백록
(성경을 거듭해서 읽으면서 나에게 떠오른 생각들 가운데 하나는 성경의 내용 모두가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기록한 것이고 그 안에 등장하는 사건과 사람들은 오늘날 살고 있는 사람들과 세계와 하느님 사이에 지금도 진행 중인 관계의 예표라는 생각이었다. 이런 생각은 나로 하여금 우리가 살아온 역사의 모든 것이 근본적인 관점—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성경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는 생각을 해보게 하였다.)
하루는 문득 두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하나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神國論이었다. 오래 전부터 소장하고 있던 신국이 있었으나, 근래에 출간된 신국론—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성염 역주—을 구해서 읽어보기로 하였다.
역주자의 말을 인용하면, ‘인류사 최초의 역사 철학서이자 역사 신학서’로 알려져 있는 이 신국론은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인간사에 대한 그리스도교 관점을 집대성하고 이론화’하여 ‘구원의 역사라는 고고한 시선으로 인간 역사 전체를 바라보는 안목을 제시’하려고 한 것으로, 아우구스티누스 성인 당대의 이교인과 그리스도 교인들을 대상으로 집필한 것이라고 한다. ‘인류 역사 전체를 성인 자신의 철학․종교․문화․역사 지식을 총동원하여 단일한 역사 철학 내지 역사 신학으로 해석․정리하려고 한 것’인 만큼 거창한 구조 체계의 이 신국론을 내가 이해하려고 했다하기보다는 신앙의 관점에서 짧게나마 내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이 책을 통하여 생각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또 하나 떠오른 생각은, 누구나 태어난 이상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고 있다는 점에서, 자기 자신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살펴보며 삶을 기록해 나간다면 흥미로울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역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告白錄이 떠올랐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이 고백록은 이십대 후반에 한 번 읽어본 적이 있기는 하지만, 이번에는 좀 다른 목적으로 읽어보고 싶었다. 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인류의 위대한 사상가들 중 근원에서 사유하는 철학자 셋을 굳이 꼽는다면, 플라톤, 아우구스티누스, 칸트라고 했는데, 이런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아니라고 해도 그의 시선과 그 방식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최민순 신부의 번역으로 출간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읽어보기로 했다. 이런 운김에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의 이해’라는 서적—에티엔느 질송 저/김태규 역—도 읽어보게 된 것은 그 후의 일이다.
이와 같은 일련의 독서는 성경 통독이나 한국의 순교 성인의 공부 뒤에 우연처럼 찾아온 것이었지만 성경의 폭과 깊이를 새삼스레 엿보게 해 주었다. 성경의 지식이 없이는, 성경을 삶과 관련하여 보지 못하는 눈으로서는, 저자의 생각을 이해하기가 힘들 뿐만 아니라 그 참 맛을 제대로 보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5. 그리스도인 생활 공동체와 성 이냐시오의 자서전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는, 1540년에 몇몇 동지들과 더불어 평신도 공동체를 시작한다. 그 자신이 사제로 서품되기 전의 일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 생활 공동체-CLC(Christian Life Community)-의 기원이다. 그리스도인 생활 공동체는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을 통하여 이냐시오의 영성을 사는 삶의 공동체이다.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의 자서전은 이냐시오가 62세 되던 해인 1553년에 동료회원 루이스 곤잘레스 다 까마라에게 구술하여 기록하게 한 것인데, 역시 동료회원이었던 예로니모 나달의 간청에 못 이겨 승낙했던 기록이다. 이 자서전은 이냐시오가 세속을 떠나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로 회심한 1521의 사건 - 프랑스 상대의 전투와 사경을 헤맸던 부상 후의 회복-부터 시작한다. 이 자서전 안에서 영신수련의 집필 배경을 볼 수 있고, CLC 활동의 초기 동지들이 등장하고, 이냐시오가 성경에 뿌리를 두고 어떻게 그리스도를 닮고자 노력하였는가를 볼 수 있다.)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의 자서전은 많은 분량도 아니고 화려하지도 않다. 살이 없이, 힘줄과 뼈뿐이다. 그러나 이 자서전에서 읽게 되는 이냐시오 성인의 마음의 자세와 심신의 고행에서 숭고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특히 이냐시오가 오로지 자기의 주 하느님에게만 의존하기로 결심하고, 온전히 주 예수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자기를 확신하기 위해서,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모두 감추고 남에게 알리지 않는 데서 할 말을 잃었다. 이냐시오는 인간에게서 오는 어떠한 도움도 하느님에게만 의존하려는 자기의 믿음을 파괴하려는 유혹으로 치부하였다. 하느님에게만 마음을 두고 기도와 고행 가운데서 모든 어려움을 통하여 자신의 믿음을 스스로 확인하여 나가는 자세는 참으로 우러러 보였다.
CLC(그리스도인 생활공동체)의 근본정신, 영신 수련, 그리고 자서전 모두가 한 존재, 즉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를 드러내고 있었다. 성 이냐시오는 우리의 소명이 ‘일상적인 삶 속에서 하느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무엇에나 우리 자신을 개방하고 따를 수 있는 영성을 사는 것’이라고 했다. 하느님의 부름을 식별하고, 그에 대한 응답의 방식을 선택하여, 자기의 모든 존재로 복음 사명을 성취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 이냐시오 정신은 철저히 성경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세 가지 공부는 저마다 하나의 지류로서, 가닥처럼 모여들어 성경이라는 큰 본류를, 생명의 원류를 드리고 있었다.
(2011년 4월 22일. 수필집 [하늘·바다―빛의 둘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