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을 만나다
綠雲 김정옥
주인장 표정이 아침 햇살처럼 해맑다. 까무잡잡하게 그을린 피부에 깊게 파인 주름살마저 살갑다. 영락없이 마음씨 좋은 동네 아저씨다.
평생교육원에서 수업을 마치고 수강생 몇몇이 점심 먹으러 가는 중이다. 회원 한 분이 괜찮은 식당을 안다며 추천한 곳은 샛길 모퉁이에 있는 허름한 이층 양옥집이었다. 영업한다는 간판만 떼어 놓으면 영락없는 가정집이다.
기다리는 손님 꼬리가 한길까지 물었다. 앞서 식사를 한 사람이 이쑤시개를 물고 신발을 구겨 신으며 문턱을 넘는다. 밥 먹자마자 쫓겨 나왔다며 입이 댓 발이나 나왔다. 미리 예약하지 않으면 자리 날 때까지 기다리던가, 그냥 돌아서야 할 판이다. 우리는 엽렵한 회원 덕분에 바로 들어설 수 있었다.
현관에는 미처 신발장에 오르지 못한 신발들이 타일 바닥에 두서없이 깔렸다. 우리는 오보록한 신발 사이를 비집고 발을 들이밀었다. 거실 입구의 수족관에선 하얀 몸피에 빨간 꼬리를 매단 구피가 재빠르게 돌아다닌다. 그 옆으로 알록달록한 스티커를 서너 개 붙인 러닝 머신기가 머쓱하게 서 있었다. 한쪽 벽에는 주인장이 받은 유공 봉사원 표창장과 상패가 나란히 걸렸다. 정겨운 이웃집에 마실 온 듯 임의롭다.
거실과 큰방, 작은방 합쳐 손님 스무 명 남짓 받으면 더 이상 앉을 자리가 없는 비좁은 공간이다. 주인이 우리를 보고 어서 앉으라며 헤식게 웃는다. 이렇게 좁디좁은 식당에서 하는 장사가 얼마나 푸지게 남는다고 저렇게 실없이 웃을까.
식사 중, 먼저께 와 본 사람이 한마디 한다. 주인이 반찬 남기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고. 애써서 만든 반찬을 남기면 모조리 버려야 하니 아까워서 하는 말일 것이다. 주인은 손님이 남기는 건 마땅찮아도 드시다 모자라면 안 되겠다 싶은지 우리가 식사하는 동안 슬몃슬몃 들여다보며 반찬을 챙긴다.
주인장이 정성 어린 손맛으로 버무려 음식이 진하고 맛깔스럽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배고픔도 한몫했을 터이다. 수제비 넣고 걸쭉하게 끓인 새뱅이 찌개 한 냄비를 바닥이 보이도록 깨끗이 비웠다. 따끈하고 차진 흰쌀밥과 어울려 최고의 한 끼였다.
식사가 끝나자, 살짝 기름이 돈 누런 봉지 하나와 커다란 접시를 내민다. 빵빵하게 부푼 봉지에서 따끈따끈한 팝콘이 삐져나온다. 식사 후 얘기를 나누며 드시라는 그의 마음 씀씀이가 팝콘처럼 따뜻하다. 짭짤한 삶의 이야기가 팝콘 더듬는 손에 잡혀 접시 위에서 춤을 춘다. 이번에는 커피 주문을 받는다. 그다음이 너무 예상 밖이다. 커피를 안 마시는 사람에게 오가피 즙을 한 팩씩 돌리는 것이었다. 누군가 여든 넘으신 분들에게 드리는 특별 서비스라고 한다. 하지만 나이에 상관없이 손님 모두에게 드리는 모양이다. 몸에 좋은 귀한 오가피까지 서비스를 받았다.
“이렇게 퍼주면 뭐가 남아요?”
일행 중 한 사람이 음식값이 너무 싼 거 아니냐는 우리의 의견을 모아서 넌지시 한마디 건넸다. 그래도 이문利文이 있단다. 새뱅이를 손수 잡고, 버섯은 직접 따오니 남는 장사라는 것이다. 본인이 힘들게 몸을 부린 대가는 포함하지 않은 듯하였다. 그다음 말이 더 걸작이다. 새뱅이를 잡으며 즐겁고 버섯을 따면서 행복하단다. 그게 제일 남는 장사란다. 욕심 부리지 않고 베풀고 사니 행복이 남는다는 얘기인가.
2년 전에 음식값을 천 원 올리면서 손님에게 무척 미안해했단다. 물가가 오르니 재료값이 오를 테고, 그래서 밥값을 올려 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상행위商行爲인 것을. 마치 손님에게 못 할 짓을 한 것처럼 죄스럽다고 면구스러워하다니.
보살이 따로 없다. 시중보다 턱없이 싸게 받으면서 ‘그래도 남는 장사’란다. 그에게 음식값을 올리라고 손님이 억지로 권하는 밥집이다. 가진 것을 나누려는 후한 인심의 소유자인 그는 자신의 분복과 처지에 감사하는 사람이다. 그 해맑은 모습이 바로 보살의 미소가 아니던가.
‘아흔아홉 섬 가진 사람이 한 섬 가진 사람 것을 마저 빼앗으려 한다.’는 말이 있다. 하나라도 더 모으려고 아등바등하는 세상이다. 재산이 많을수록 욕심을 부리는 게 생존경쟁의 전략일지 모른다. 이런 판에 ‘이만하면 되었다.’는 자족의 본분이야말로 그가 취하는 삶의 철학이었다. 속정이 깊은 주인장에게서 경전 한 수를 새겼다.
머리 위로 한낮의 금빛 햇살이 부서져 내린다. 초여름 하늬바람이 한차례 지나가며 속삭인다.
“너도 보살이 되어 봐.”
첫댓글 생생한 묘사가 그 밥집을 더욱 가보고 싶게 만듭니다.
'새뱅이를 잡으며 즐겁고 버섯을 따면서 행복하다. 그게 제일 남는 장사.' 라는 말씀은 감동입니다. 삶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좋은 글 잘 감상했습니다.
변변찮은 글을 읽어주고 좋은 말씀으로 응원해주셔서 감사해요.
식당에 들어갈때부터 먹고 나올때까지 모습이 보이는거 같아요
어딘가 한번 가보고 싶네요
면구스럽다 이문이 있다 푸지게 남는다 임의롭다 엽렵한 등 우리 엄마한테서 듣던 이런 말들을 들으니 이웃집 할머니가 얘기하는 것처럼 푸근해지네요
이웃집 할머니 맞습니다. ㅎ
답글 감사합니다.
저하고 종교는 다르지만 보살 님을 저도 만나보러 가고 싶군요.
음식도 맛나고 인심도 맛나겠지만
김정옥 선생님 글 맛이 제일 이군요.
글 맛을 제일로 쳐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