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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건의 변절이 아닌 민주당의 변질
결국 1960년 닉슨이 케네디에 맞서 대통령에 출마했을 때 그를 지지했다. “나는 자유주의적인 민주당원들이 복지국가를 만든다면서 미묘한 형식의 사회주의를 어떻게 도입하는가를 알면 알게 될수록 나의 견해도 그만큼 변해갔다.” 레이건의 회고다. 그리고 덧붙였다. “나도 변했을 것이나 민주당이 변한 것만큼 변한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민주당의 변질이었다는 얘기다.
‘변절’에 대한 변명이 아니었다. ‘민주당원 레이건’의 이 같은 변화는 이후 미국 사회에서 진행될 정치지형의 변화를 알리는 하나의 예감이었다. 레이건 집권 후 1981년 미국 최초의 여성 유엔대사로 임명된 반공의 여전사로 유명했던 진 커크패트릭(Jean Kirkpatrick)도 그런 경우다. 그녀는 젊었을 때는 사회주의자였으며 이후로는 오랫동안 열렬한 민주당원이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네오콘으로 분류됐을 때 나는 어리둥절했었다. 나는 어떤 종류의 보수주의자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네오콘이 무엇인가? 나는 내 친구이자 당시 신보수주의운동의 대부로 널리 알려져 있던 어빙 크리스톨(Irving Kristol)에게 물어보았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네오콘이란 현실에 좌절된 자유주의자라고 대답했다.” 민주당에 대한 실망이 출발이었다는 것이다.
지식층이었던 네오콘뿐 아니라 ‘레이건 민주당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블루칼라 노동자, 적지 않은 노조들, 가톨릭 신자 등 전통적으로 민주당 지지층이었던 대중들이 1980년, 1984년 연거푸 레이건을 압도적으로 지지했다.
레이건에 대한 호감도 있었지만 결국 기존의 민주당에 대한 광범한 실망이 결정적이었다. 이들은 국가안보를 중시하고 동성애와 낙태에 반대했지만 민주당의 주류 리버럴들은 그 정서와 크게 어긋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레이건 혁명’을 맞은 그 순간까지도 그 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한국의 ‘민주’도 마치 당시 미국의 민주당처럼 변질에 변질을 거듭해 드디어는 종북의 숙주가 돼 있다. 그러나 한국의 ‘민주’에선 여전히 ‘레이건’도 보이지 않고 ‘그런 민주당원’도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는 어떨 것인가?
광범한 세력의 중심이 돼 가다
레이건은 1964년 대선에서도 공화당 골드워터 후보 지지에 나섰다. 이번엔 방송 찬조연사까지 맡았다. 그러나 골드워터는 미 대선사상 가장 기록적인 차로 패배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 참패에도 불구하고 장차를 향한 중대한 예비가 이뤄지고 있었다. 골드워터를 공화당 후보로 만들어내고 대선을 치러낸 ‘골드워터의 아이들’이 결집돼 있었다.
1960년 결성된 ‘자유를 위한 젊은 미국인들’(YAF)이 그들이었다. 장차 레이건 혁명의 한 주역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치인 레이건이 탄생했다. 골드워터는 참패했지만 찬조연사로 나섰던 레이건은 미국 정치사에 길이 남을 명연설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1965년 레이건은 공화당으로부터 다음해 있을 캘리포니아 주지사 출마를 권유받았다. 레이건은 “당신들 돌았소?”라고 말했다. 그럴 만도 했다. 배우조합 회장과 찬조연사 외에는 다른 어떤 정치경력도 없었다. 나이도 이미 54세였다. 40~50대가 대통령을 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50대 중반에 정치에 입문해서 어쩌자는 것인가? 만약 떨어지면? 그러나 레이건은 결국 출마를 결정했고 캘리포니아 58개 선거구 가운데 55개 선거구에서 승리를 거두며 100만 표라는 놀라운 차로 당선됐다. 그리고 바로 이때 레이건을 따라 40만명의 민주당원들이 탈당을 했다. ‘레이건 민주당원’의 시작이었다.
1967년 주지사로 취임한 레이건은 ‘배우 출신답지 않게’ 놀라운 기량을 보였다. 민주당을 지지해왔던 ‘진보적인’ 신문들마저 “캘리포니아를 파산으로부터 구했다”고 보도했다. 1968년 레이건은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 예비선거에 나서달라는 권유를 받았다. 유력한 들러리 요청의 측면이 강했다. 당선은 물론 닉슨이었다. 그런데 레이건은 결국 이를 시작으로 1976년, 1980년 연거푸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 도전하게 됐다.
한편 레이건이 정계에서 이런 과정을 밟아가는 동안 또 한쪽에선 미국 보수주의 운동의 주요 흐름이 성장하고 하나로 결집돼 가고 있었다. 뉴딜에 반대했던 리버테리안, 루스벨트에서부터 시작된 친소경향에 위기감을 느낀 반공주의자들, 서구전통가치의 훼손에 분노한 전통주의자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친소유화정책과 반문화운동의 확산에 반발하면서 형성된 네오콘도 마찬가지였다. 그 정치적 정점이 바로 레이건이었다.
레이건은 위대한 소통자(Great Communicator)라 불렸다. 그는 분명 그만한 자질이 있었다. ‘배우’에 대한 속된 오해와 달리 그는 자신의 연설원고를 직접 쓸 수 있는 사람이었다. ‘태플론’이라 불릴 만큼 흔들리지 않는 낙천적 기질과 친화력에 탁월한 언변도 설득력을 더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가장 강력한 힘은 그의 정치 노선 자체였다.
그의 대외정책 노선은 고립주의적 경향이 있었던 공화당의 전통적 노선과는 달랐다. 오히려 과거 민주당의 윌슨주의적 전통에 닿아 있었다. 그러면서 경제정책과 사회문화정책은 미국 전통의 자유주의적 가치와 기독교적 가치에 충실했다. 바로 이 덕분에 레이건은 각양의 보수세력에서부터 애국적인 민주당원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세력을 결집할 수 있었다. 이렇게 결집된 세력들은 레이건의 말을 귀담아 들을 준비가 돼 있었다.
1960년대가 리버럴의 ‘위대한 사회’가 파산하며 미국이 혼란으로 접어 들어간 시대였다면, 1970년대는 베트남전 실패와 함께 국제적인 면에서 미국의 위상이 급격히 실추돼간 시대였다. 경제는 약화되고 반전운동이 확산되면서 극심해진 미국 사회 스스로의 자기학대가 미국민 전체의 사기를 전례 없이 실추시켜갔다.
1969년 임기를 시작한 공화당의 닉슨도 이런 추세를 되돌리지 못했다. 그는 ‘닉슨 독트린’을 천명, 베트남에서 철수를 결정하고 미중수교와 미소 데탕트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키신저는 미소 양극체제가 아니라 다극체제를 통한 세력균형을 통해 국제적 안정을 꾀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키신저 자신의 국제정치철학 자체가 그렇기도 했지만 당시 미국으로선 어느 정도 불가피한 방어적 후퇴였다.
카터라는 재앙
닉슨이 워터게이트로 실각하면서 그나마의 안정도 악화로 치달았다. 포드 정부는 통제력을 상실했고, 1976년 대선에서도 민주당의 카터가 당선됐다. 카터는 하나의 재앙이었다. 미국은 물론 한국에도 그랬다. 카터는 도덕외교 인권외교를 내세웠다. 그런데 그 도덕과 인권의 화살은 최악의 인권유린체제였던 소련과 그 위성국들은 놔두고 엉뚱하게도 미국의 우방국들로만 향했다.
팔레비의 이란, 박정희의 한국이 그런 경우였다. 카터는 박정희를 무던히도 괴롭혔다. 최악의 수용소 체제인 북한은 놓아두고 한국에만 미군철수를 운운하며 위협했다. 카터의 이 어처구니없는 행태는 이란에서 대가를 치렀다.
1979년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린 호메이니의 이슬람혁명 세력은 11월 미 대사관을 점거하고 63명의 미국인을 인질로 잡았다. 카터의 ‘도덕 인권’의 기준에 따르자면 팔레비 왕조는 박정희 정권에 비해 몇 번이고 더 무너져도 마땅했다. 카터의 기준대로 된 결과, 미국민들이 대거 인질이 됐다. 가뜩이나 실추돼 있던 미국의 위신이 구렁텅이로 굴러 떨어졌다.
인질 사건 한 달 뒤인 1979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를 기해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아프가니스탄은 결국 나중에는 소련의 무덤이 됐다. 하지만 당시로는 어쨌든 브레즈네프가 그만큼 미국을 우습게 알았던 때문이었다. 이로써 데탕트는 죽었다. 아니 사실은 그 이전에도 데탕트는 살아 있었던 적이 없었다. 브레즈네프 자신이 늘 그렇게 말해왔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데탕트는 세계 적화를 위한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강조해왔다.
데탕트의 실효성을 믿지 않는 건 레이건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결론은 처음부터 간단했다. “소련에 대한 나의 생각은 간단하다. ‘우린 이기고 그들은 진다.’ ” 세계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해선 소련제국은 무너져야 하고 또 그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카터는 1980년 4월 이란 인질 구출작전을 명령했지만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이로써 1980년 미국 대선은 사실상 결정 났다. 대통령이 된 레이건은 30여 년 전 할리우드 시절 좌익과 맞설 때부터 늘 품어왔던 생각을 드디어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고, 그렇게 실현됐다.
레이건 집권 8년, 추락해가던 미국은 경제 국방 외교 등 모든 면에서 극적으로 힘을 회복하고, 한때 기세등등함을 자랑하던 소련과 그 진영은 급격히 허물어져 갔다. 레이건이 두 번째 임기를 마치고 퇴임한 10개월 뒤인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이것으로 사회주의 진영의 운명은 사실상 끝이었다. 1991년 소련의 붕괴는 예정의 확인일 뿐이었다.
에릭 홉스봄은 이것으로 “20세기는 끝났다”고 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아예 “역사의 종언”이라고 했다. 세계사적 사건이었다. “결국 필연적으로”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때 그곳에’ 레이건이 없었더라도 반드시 그랬을 것이라 말하긴 쉽지 않다. 역사의 섭리도 결국은 신념과 의지를 가진 구체적 인간을 통해 관철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드골은 “위업(偉業)은 위인(偉人)을 얻지 않고선 이뤄질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덧붙이자면 그만한 위인을 갖기 위해선 국민의 자질 또한 그럴 만해야 한다. 우리의 경우는 과연 어떠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