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4월 대선 직전에 터진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의 주인공 서승(오른쪽), 서준식 형제.
외면받은 재일동포 간첩사건 무죄 끌어내
공안기관 국외 불법행위 밝힐 단초도 제공
안기부, ‘변호사 고유 활동’ 죄 씌워 징계 요구
법조계 ‘제명’ 찬성…항고·헌법소원 기각
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52. 변호사에 대한 탄압 (하) 민감한 사건 도맡은 강골
전두환 정권 시절 변호사에 대한 대표적인 탄압사례로는 안기부가 태윤기 변호사를 제명한 사건을 들 수 있다. 태윤기는 일제 말 학병으로 징집되었다가 탈출해, 광복군 제2지대원이 되었다. 해방 후 군 법무관이 된 그는 1955년 육군대령으로 예편했다. 태윤기는 예편 직후부터 남들이 꺼리는 어려운 사건을 도맡아 변론했다. 이승만 정권 시절에는 이승만 대통령 저격미수 사건과 특무부대장 김창룡 암살사건, 진보당 사건, 5·16 군사반란 후에는 박창암·김동하 등 반혁명 사건, 원충연 등 반혁명 사건, 백범 암살범 안두희에 대한 살인미수 사건, 통혁당 사건, 유신 쿠데타 이후에는 강신옥·한승헌 변호사 사건, 10·26사건 등의 변론에 앞장섰다. 태윤기는 정치적 사건뿐 아니라 남들이 꺼리는 재일동포 간첩사건도 적극적으로 변호했다. 그는 1971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발생한 서승·서준식 형제 간첩단 사건을 비롯하여 다수의 간첩사건과 민청학련 사건 때 구속된 일본인 다치가와 등을 변호했다.
판결문과 공판조서 복사해 주었다고 연행
태윤기는 안기부가 적발한 재미동포 홍선길 간첩사건(1981)에서 대법원 무죄판결을 받아내 안기부와 악연을 맺었다. 안기부는 1981년 재일동포 사업가 손유형 등의 간첩사건을 적발했고, 손유형은 1심과 2심에서 사형판결을 받았는데, 태윤기는 또다시 대법원에서 파기환송 판결을 받아냈다. 태윤기는 안기부가 증거로 제출한 손유형 여권의 출입국 기록이 공소장이나 일본에 보관된 출입국 기록과 일치하지 않은 점을 물고 늘어졌는데, 이것이 주효한 것이다. 고등법원은 손유형에게 다시 사형을 선고했지만, 대법원이 손유형의 재상고를 받아들이자, 안기부는 이를 보고만 있지 않았다. 1983년 2월19일 오후 4시경 태윤기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안기부원들에 의해 시내 모처로 연행되었다. 안기부는 태윤기가 손유형 가족에게 1, 2, 3심과 파기환송심 판결문과 공판조서 등을 복사해 전해준 것을 문제 삼았다. 변호인이 판결문 등을 가족에게 전달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도 안기부가 태윤기를 연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1982년 12월 초순 태윤기는 손유형의 부인 부신화로부터 주한 일본대사관 일등서기관 이시즈키가 손유형의 여권 연장문제로 문의해왔다며, “여권의 압수경로와 처리상태를 알았으면 좋겠다”는 부탁을 받았다. 태윤기는 공판서류에 첨부된 수사기록에서 이를 메모하여 1983년 1월24일 사무실로 찾아온 이시즈키에게 전달했다. 그런데 수사기록에 여권 압수경로가 허위로 기재된 것이 문제였다.
안기부의 일본 내 불법활동이 쟁점화
수사기록에는 손유형이 일본의 부인에게 국제전화를 걸어 여권과 난수표 등 공작문건이 있는 자리를 알려주며 이를 주일한국대사관에 임의 제출하라고 했고, 안기부는 대사관이 외무부 정기 파우치 편으로 보내온 여권을 입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사정은 달랐다. 안기부는 한국에서 손유형과 같이 검거되었던 부신화에게 손유형의 옛 여권을 제출해야만 손유형의 간첩 혐의가 벗겨질 것이라고 꾀어 오사카로 돌려보냈다. 집에 온 부신화는 여권 등을 찾아 근처 다방에서 황아무개라는 안기부원에게 전달했고, 안기부는 이렇게 입수한 여권을 간첩활동의 증거로 활용한 것이다. 태윤기가 피고인의 가족에게 재판기록을 전해주는 과정에서 안기부원의 일본 내 활동이 알려지자, 일본의 야당 의원들이 들고 일어났다.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 이래 한국의 중정-안기부 요원들의 일본 내 불법활동은 일본에서 극도로 민감한 문제였다. 1983년 2월과 3월 일본 의회에서 사회당 야다베 오사무, 와다 시즈오 의원 등이 “한국 안기부가 일본 국내에서 증거수집을 한 것이 아니냐”며 따져 물었다. 야당 의원들의 주권침해 주장으로 외교적 논란이 일어나자, 안기부는 매우 곤란한 처지에 빠지게 되었다. 손유형은 변호인이 7일간이나 감금·조사 받는 분위기 속에서 1983년 3월22일 대법원에서 열린 재상고심에서 사형이 확정되었다. 국정원에는 이틀 후인 24일 작성된 <간첩 손유형 사건 관련 일본 사회당 변호사협회의 아 공관 수사활동 주장에 대한 진상조사결과 및 대책보고>가 남아 있다. 이 보고서는 태윤기가 그동안 “일본 거점 우회침투 간첩만 총 14건을 수임”했으며, “주한일본대사관 공안 담당직원이 교체 시마다 후임자에게 태윤기를 소개(사무인계)하고 있음에 비추어 일 공관의 협조자로 판단”된다고 단정했다.
공판기록 복사 때 준 수고비 문제 삼아
태윤기 변호사(사진)는 서씨 형제의 변호를 맡는 등 이승만 정권 시절부터 전두환 정권 시절까지 위험한 시국사건 변호를 맡았다. 독재정권은 그의 변호사 자격증을 박탈하는 탄압으로 보복했다.
변호사가 의뢰인 쪽에 공판기록 등을 제공한 것은 변호사의 고유업무이고, 변호인의 공판기록 열람 등사권은 형사소송법 35조에 명시된 변호사의 권리였다. 안기부는 이를 처벌할 근거를 찾을 수 없자, 변호인들이 방대한 공판기록을 복사해 갈 때, 고생한 법원 직원에게 수고비를 주는 것을 ‘법원의 구조적 부조리 및 폐습’이라고 몰고 갔다. “기록 열람 등사와 관련한 현 실태는 법원 직원이 상습적으로 금품을 수수해, 조정 수입인지 첨부 면제로 국고 손실, 감시 소홀, 열람 등사부 불기재로 기록 등사 남발”하는 폐단이 있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금품 제공 사례’로 1981년 10월 태윤기가 이 사건 공판기록을 등사하면서 4차례에 걸쳐 6만5000원을 제공한 것을 ‘일반화된 폐습’의 사례라고 비난했다. 안기부는 관련 기관에 조처 의견을 내놓았다. 법무부에는 “태윤기 변호사의 공판자료 유출 행위를 제22조 (비밀유지) 위반으로 징계 제명”하도록 했다. 주목할 것은 보고서에 “형사처벌 법규 없음”을 명시해, 안기부 스스로도 태윤기의 행위가 ‘위법’이 아님을 인정했다는 점이다. 주일공관에는 “최근 ‘아국 공관의 일본 내 수사활동’ 주장은 재일불순단체의 모략책동임을 주지”시키고 이에 “말려들어 한일간 정치문제화되지 않도록 주의 환기”하고 “구속간첩 후원회를 자처해, 내한하는 일본인에 대한 신원성분 내사”하라 했고, 법원에는 “간첩 등 공소사건 공판기록의 철저한 관리 방안책 필요성 촉구”와 덧붙여 “공판기록 열람 등사와 관련된 법원 직원 부조리 실태 통보”를 하도록 했다.
가장 강력한 징계, 제명
안기부는 태윤기의 제명을 위한 조처를 밟아나갔다. 1983년 5월26일자 <태윤기 변호사 제명 조치 조정결과 보고>에 따르면 안기부는 △ 83.3.31 대검(형사2부장 김두희 검사)에 태윤기 변호사 공판기록 해외유출 조사결과 통보, 법무부에 징계 제명 요청토록 조정, △ 83.4.1 법무부 법무실장(한영석 대검검사)에게 태윤기 변호사에 대한 비위사실 자료 제공, 징계 제명 요청, △ 83.3.31 법원행정처(처장 김용철)에 진상통보+관련법원직원 자체조사처리 대책 강구 협조(조정) 등의 조치를 했다. 검찰은 1983년 4월15일 태윤기를 소환하여 나흘간 조사했다. 조사결과는 변호사 수임료를 암달러상에게서 환전한 것이나 법원 직원에게 등사 수고료를 제공하고 일본 대사관 서기관에게 압수품 압수 경위서 내용을 전달한 것 등의 혐의는 “사안이 경미”하여 ‘입건’은 불가하나, 변호사법에 의한 징계는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법무부는 1983년 5월25일 법무차관 정해창을 위원장으로 하고 검찰 쪽 김양균·한영석, 법원 쪽 정기승·박우동, 변협 쪽 조규광·이세중을 위원으로 하는 징계위원회를 열고 태윤기에 대해 변호사 제명 결정을 내렸다. 법조계에서 나름 존경받는 분들이 징계위원에 포함되어 있었지만, 결과는 만장일치였다. 안기부는 바로 그 다음날인 5월26일 <태윤기 변호사 제명조치 조정결과 보고>를 작성해 안기부의 ‘조치 의견’대로 처리되었음을 보고했다. 그러나 문제가 여기에서 끝난 것은 아니었다. 태윤기는 제명조치에 대해 대법원에 즉시 항고했고, 일본도 가만있지 않았다. 1983년 6월 일자미상 <변호사 태윤기 제명 징계 관련 일본 외무성 우려 표명에 대한 대책보고>라는 문건에 의하면 일본 외무성은 “현재까지 재일 한국인 보안사범 문제는 태 변호사가 있음으로써 양국간 외교 문제로 발전되지 않은 면이 있었는데 앞으로 동인의 활동이 불가하다면 일측으로서는 정부간 문제로 삼지 않을 수 없다”고 통보했다고 한다. 일본의 예상 밖의 강력한 태도에 안기부는 급히 <태윤기 변호사 징계 제명 처분 관련 한일간 외교 문제 발생 우려 예방 대책 보고>를 작성했다. 안기부는 “태윤기의 행위는 형법상 뇌물공여죄, 외국환 관리법 위반죄 등 법조를 경합적용하면 최고 징역 15년까지 선고 가능”하나 “정상참작, 사회적 물의를 감안, 형사처벌을 면제”했음을 강조하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안기부와 검찰이 진작 형사처벌의 근거가 없다는 뜻을 밝힌 것에 비춰 터무니없는 변명이었다.
억울한 제명 외면한 법조계
즉시항고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태윤기는 1983년 7월10일 변호사법 제76조에 의거 대법원에 재항고했지만, 안기부는 끝까지 그를 괴롭혔다. 1984년 5월26일자 <공판기록 해외유출 사건 관련 제명 징계 처분자 태윤기 변호사 재상고 기각 처리 상황보고>에는 “1984년 5월25일 정태균 대법판사가 이유 없다고 기각 결정”했다며, 이는 “당부 조정”의 결과라고 명시했다. ‘조정’은 안기부의 요청에 따라 기각 결정이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태윤기는 6월항쟁 후인 1988년 3월22일 정해창, 박우동, 정기승 등 당시 징계위원 관련자, 최병국(당시 조사담당 검사), 김석휘(당시 검찰총장)를 허위공문서, 권리행사 방해죄 등으로 서울지검에 고소했다. 그러나 서울지검은 피고소인 조사도 않고 이들을 모두 불기소처분했다. 태윤기는 고검과 대검에 항고, 재항고를 거쳐 1988년 12월5일 “검사의 불기소처분으로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을 침해당했다”며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 심판을 청구했으나, 1990년 4월2일 헌재는 태윤기 변호사의 헌법소원에 대해 기각결정을 내렸다. 자료를 정리하며 내가 다 부끄러웠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