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좋아하냐고? 나는 말이야
하희경
커피를 좋아해. 뜨겁거나 차갑거나 상관없어. 다만 아무것도 섞지 않은 오직 까만색 커피만이야. 아침에 눈뜨면 제일 먼저 물을 끓이지. 물이 끓는 동안 컵과 커피를 준비해. 한가할 땐 원두커피를 꺼내고, 뭔가에 휘둘리는 날엔 인스턴트커피를 꺼내. 지금도 따듯한 커피 한 잔 옆에 두고 이 글을 쓰고 있어. 한 모금 두 모금 병아리처럼 입에 물다 보면 사르르 배가 아파올 때도 있어. 신경성 변비 환자인 나는 그런 순간이 반갑기도 해. 요즘처럼 햇볕이 기세등등한 날, 걷다보면 아이스커피 생각이 간절해지지. 아쉽게도 커피 금지 명단에 이름은 올렸지만 하루 두 잔까지는 스스로 허용하고 있어. 사는 게 그렇잖아. 몸에 좋은 것만 하고 살기에는 유혹하는 게 이렇게나 많은 세상인데 말이야.
과일을 좋아해. 전에는 포도 귀신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포도를 좋아했어. 그런데 언젠가부터 포도를 먹고 나면 이가 시려, 요즘은 좀 멀리하고 있어. 하지만 과일이라고 생긴 건 다 좋아하니까 문제없어. 수박, 참외, 딸기, 바나나, 파인애플, 귤, 오렌지, 망고 등 일일이 다 꼽지 못할 정도로 과일이 좋아. 밥 대신에 과일만 먹으라고 해도 몇날며칠 먹을 수 있어. 오죽하면 큰애 임신했을 때 입덧 핑계로 과일만 먹었을까 후후. 앗, 이건 남편한테 비밀인데 너만 알고 있어야 돼. 알았지? 참 망고는 노란 것보다 그린망고를 좋아해. 최근에 알게 된 건데, 필리핀 현지인들은 망고가 노랗게 익기 바로 직전에 그린망고로 먹지 뭐야. 그들은 향기로 구분하더군. 그린망고를 코에 대고 냄새 맡다가 한순간 향이 달라질 때 먹는 거지. 껍질 벗기고 먹기 좋게 잘라서 우리나라의 멸치젓 같은 소스나 소금에 찍어 먹어. 난 소스는 별로였지만 소금에 찍어먹은 맛은 기가 막히더군. 그때부터 그린망고 팬이 되고 말았어.
난 밥을 좋아해. 먹는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난 밥이 좋아. 조금은 슬픈 과거의 영향 때문인지 밥만 보면 정신 못 차려. 하얀 쌀밥에 계란프라이 하나, 간장 조금, 버터 한 조각 넣고 비비면 세상 부러울 게 없어. 잡곡이 들어간 밥은 또 그대로 별미지. 보리알갱이 하나 씹으면 추운 바람을 이겨낸 씩씩함이 내게 스며드는 것 같아 마음이 든든해. 수수는 아이들 어릴 때 해주던 수수팥떡이 생각나. 수수팥떡을 만드는 동안 건강하게 잘 자리기만 바라던 엄마 마음은, 아이들 커가는 동안에 살짝 변심했지만 말이야. 겉으로야 자식 위한다지만 속으로는 내 욕심이 더 많았거든. 그럭저럭 아이들이 어긋나지 않고 잘 자라줘서 천만다행이지 뭐야. 참 나는 흑미도 좋아해. 잡곡을 이것저것 섞어 밥을 지으면 밥알들이 따로 놀기도 하잖아. 그럴 때 흑미를 조금 넣어주면 겉돌던 알갱이들이 서로 안겨들지. 까맣게 윤기 흐르는 것도 보기 좋고 말이야. 때때로 꽁보리밥을 하기도 해. 그런 날은 나물 반찬을 두세 가지 장만하지. 콩나물 무치고 상추 겉절이도 해. 거기에 열무김치만 있으면 완전 임금님 밥상이지. 가장 좋아하는 밥은 찰밥이야. 뭔가 마음이 어수선할 때는 찰밥을 해. 잡곡은 생각나는 대로 조금 넣고 찹쌀을 잔뜩 넣어 밥을 짓지. 덕분에 이래저래 살은 찌지만 그래도 밥이 맛있어. 그러고 보니 전부 먹는 얘기네. 나 때문에 배고프겠다, 미안.
사진 찍는 걸 좋아해. 먹는 거에서 벗어나면서 난 언제부터인가 어디에서 무얼 하든지 눈이 바쁘게 움직여. 요즘은 도심에서도 다양한 꽃과 나무들을 볼 수 있어서 참 좋아. 꽃과 나무 덕분에 나비랑 벌도 보고 새도 만날 수 있으니까 말이야. 한 가지 아쉬운 건, 새는 여간해선 제대로 찍기 어렵다는 것이지, 그래도 좋아. 참새가 폴짝폴짝 뜀뛰기하는 걸 보면 너무 앙증맞아서, 만질 수만 있다면 꽉 안아주고 싶을 정도라니까. 천덕꾸러기 취급 받는 비둘기를 볼 때면 조금 슬퍼져. 언젠가 한 아파트에 붙여놓은 “해로운 비둘기에게 절대 먹이를 주지 마세요.” 경고문을 보면서 마음이 많이 아팠는데, 그때 생각도 나고 그래.
그렇게 거리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이 나를 홀리지. 참 우스운 얘기 하나 해줄까? 며칠 전 비 오는 날이었어. 수십 번은 지나갔을 거리에서 그날따라 가로수 란 이파리가가 눈에 띄지 뭐야. 분명 몇 번이나 본 나무인데 그날은 뭔가 이상한 거야. 마치 나무에 있는 옹이가 눈동자처럼 보이더군. 약간 슬픈 표정으로 나에게 말을 건네는 것처럼 말이야. 우두커니 나무 앞에 서서 바라보았어. 때마침 지나가던 할아버지가 나를 한 번 쳐다보고 나무 한 번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우뚱하시더니 한참을 같이 서 있는 거 있지. 생각해 봐, 거리에서 두 노인이 나란히 서서 나무를 보는 풍경이 얼마나 우스운지 말이야. 하지만 그 순간 우리 두 사람과 나무는 서로 통하는 것 같았어. 어쩌면 너도 봤을지 모르겠다. 길거리에서 엉거주춤 선 채 한 곳을 뚫어져라 보는 우리를 말이야.
그런데 말이야 실은 그무엇보다도 난 글자 놀이하는 걸 좋아해. 아니 좋아해 보다는 사랑한다는 말이 더 어울리겠다. 글자를 읽고 만지작거리고 때로는 숨바꼭질하는 순간들이 행복해. 책 읽다가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바로 검색을 해. 예전엔 사전을 뒤적여야 했는데, 요즘 핸드폰이 어찌나 영리한지 바로 알 수 있어. 참 다행이지? 안 그러면 점점 시력이 나빠져 가는 나 같은 사람은 엄청 고생할 텐데 말이야. 사실 난 말을 잘 못하는 사람이었어. 무언가 할 말이 있어도 마음속으로 이 말을 해도 되는지 궁리하느라고 말 할 시간을 놓치곤 했었어. 그게 습관이 되어서 어느 자리에서나 말없이 웃기만 했지. 그런데 본성은 그게 아니었나봐. 글 쓴다는 핑계로 말들이 끝없이 쏟아지는 걸 보면 말이야. 어쨌거나 요즘은 어린아이처럼 신나게 지내고 있어. 사랑스런 글자들과 줄다리기하면서 아침을 열고 밤을 맞이하고 있지. 너도 같이 글자놀이 해볼래? 정말 재미있다니까.
첫댓글 하희경수필을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