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양철지붕 위의 낭만
― 향학의 돌길 (단상) ―
모교 무안중학교는
해방 직후인 1947년에 설립되어
지금까지 1만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우리 모두의 자랑스러운 모교입니다.
해방 전후의 정치적 혼란과
6·25 동란,
학교 화재 등 숱한 시련 속에서도
척박한 농촌 환경을 딛고
서구식 교육으로 수많은 인재를 길러낸,
우리들의 성장의 젖줄이기도 합니다.
소나기가 쏟아지면
콜타르 냄새 배인
양철지붕을
마구 두드리던 빗소리 때문에
수업이 중단되고,
“와―!” 하고 터져 나오던
아이들의 함성….
그 낭만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1960년대의 추억으로
우리 가슴속에 남아 있습니다.
교실이 불타 사라지고,
흙바닥 위에 책걸상을 놓고
짚과 흙벽돌로 교실 벽을 쌓아
공부하던 시절,
찜통 같은 여름과
매서운 겨울 바람 속에서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그때, 그 시절의
우리들의 면학 열기가
자주 떠오릅니다.
부산의 명문 고등학교에
한 해 7~8명씩이나 진학하던
그 열정 역시
아직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양철지붕의 임시 토담 교실을 벗어난 것은
1962년, 3학년에 올라간 뒤였습니다.
그때 새로 부임하신 김임식 교장선생님께서
예산을 마련해 교사 신축을 시작하셨지만
형편은 늘 빠듯했습니다.
선생님들뿐 아니라
학생들까지 힘을 보탰습니다.
남학생들은 자갈을 모아
바지게로 나르고,
여학생들은 강가에서 모래를 퍼
보자기에 담아 나르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겨우 지은
두 칸짜리 교실에서
제대로 공부해 볼 새도 없이
우리는 1963년에 졸업을 했습니다.
학교는 판곡 집에서
십 리쯤 떨어져 있었지만
졸업할 때까지
버스는 한 번도 타보지 못했습니다.
버스는 어른들이
읍내에 볼일을 보거나
장에 농산물을 내다팔 때 타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학생들의 도시락 반찬은
너나없이 일 년 내내 김치가 주류였습니다.
저는 된장에 마늘, 고춧가루, 참기름을 섞은
어머니표 된장무침을
유난히 맛있게 먹곤 했습니다.
도시락 반찬이 달라지는 날은
소풍 가는 날뿐이었습니다.
그래 봐야
김치에서 멸치볶음으로 바뀌는 정도였지요.
집안 형편이 조금 나은 친구들은
김밥이나 달걀 프라이를 얹은 도시락을
가져오기도 했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었습니다.
60년대 보릿고개를 견뎌온 우리에게
반찬은 중요하지 않았고,
점심시간은 늘 즐거웠습니다.
한겨울이면
난로 위에 양은 도시락을
겹겹이 쌓아 올려
밥의 냉기를 가시고 먹었습니다.
어느 날은
쌓아 둔 도시락이 와르르 무너져
밥이 교실 바닥에 쏟아지고,
교실 가득 김치 냄새가
진동하기도 했습니다.
선생님도, 과목도 부족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국어(준교사 1, 전문교사 1),
영어(준교사 1, 전문교사 1),
수학(전문교사 1),
생물(전문교사 1),
체육(음악 선생님),
실업(전문교사 1).
그게 전부였습니다.
그럼에도
부산고, 경남고, 부산상고,
부산공고, 경남공고에 진학할 수 있었던
우리들의 노력을 떠올리면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대견합니다.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요~^^
오늘,
재경 무안중학교 총동창회 개최를 맞아
70~80년대
동창회를 결성하고
선후배 간의 우의를 다졌던
그 시절의 기억들이
아련히 되살아납니다.
씩씩하고 굳센 동문 여러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오늘도
밀양 무안중학교의 함성이
들려오는 듯합니다.
무중, AGAIN! AGAIN!!
2025년에 시작된
모교 신입생 100만 원 장학금 지원 사업도
알차게 이어지기를 바라며,
언젠가 모교가
선후배가 소통하는
참된 배움의 터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감사합니다.
野草 김용문
― 『고향에 한 그루 나무를 심고』 중
〈길에서 길을 묻다〉 ―
카페 게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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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 지붕위의 낭만
남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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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14 0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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