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태호의 미생 7 난국
100수
바둑판 361로에서 100수는 마라톤의 반환점에 해당한다. 네웨이핑은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도 기어이 흑 한 점을 차단했다. 은인자중하던 백이 공세로 전환하는 모습이다.네웨이핑은 멀리 A의 거대한 차단을 겨냥하며 상대에게 귓속말로 묻고 있다. 중앙 대마는 안녕하신가
101수
중앙 미대는 미생이지만 쉽사리 위험에 처하지는 않을 것이다. 조훈현도 그걸 잘 안다. 하지만 상대는 미생을 빌미로 집요하게 공포를 확대하고 있다. 이에 대한 반발인가. 101은 너무 강했다. 감정이 섞였다. 검정 캔버스 위에 떨어진 붉은 색 물감 한 방울처럼 강렬하지만 이질적이다.
102수
척확지굴의 형상이다. 자벌레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몸을 움츠리듯 네웨이핑은 숨 죽여 몸을 웅크린다. 상대의 오버페이스를 감지했을까. 그럴 것이다. 이렇게 순순히 몸을 웅크리는 것은 네웨이핑의 본능이며 몸에 밴 승부호흡이다. 그는 상대가 한 발 더 전진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103수
기호지세다. 어렴풋이 위험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꼈지만 103으로 가는 손길을 붙들 수는 없다. 돌에도 체면이 있다. 흑에 둔 이상 그 체면을 살려야 하며 체면을 살리는 길은 오로지 이렇게 뻗는 것뿐이다. 이걸 기세라 한다. 기세는 이성의 건너편에 존재하는 정체불명의 강적 중 하나다.
104수
104수는 손해수이기에 보류할 수도 있었다. 사실은 그게 현명했다. 하지만 네이웨핑도 조훈현의 감정에 반응하듯 결단을 내린다. 당장의 손해를 감수하며 불확실한 미래에 운명을 건다. 고수들은 냉정하다. 동시에 고수들은 뜨겁다. 그들은 차가움과 뜨거움 사이를 빠르게 오고 가는 능력자들이다.
105수
백으로 차단하면 흑은 자동적으로 105에 두어 살게 된다 둘은 한 쌍이며 바둑 용어로 맞보기다. 한데 현금 가치에서 백은 두세 집에 불과하고 105는 7집쯤 된다. 고수들은 때로 한 집에도 목숨을 거는 존재. 한데 백은 5집을 서슴없이 내던졌다. 네웨이핑은 배수진을 친 것이다.
106수
통렬하다. 일견 어정쩡한 수인데 조훈현은 비수에 찔린 듯 아프다. 전쟁이냐, 평화냐. 네웨이핑은 조용히 묻고 있다. 조훈현은 진퇴양난이다. 평화를 선택하면 계가가 위태롭고 전쟁을 선택하면 대마가 위험하다. 한 발 한 발 철탑처럼 쌓아 올린 우세가 일순에 흐릿해지고 있다. 계가: 바둑을 다 둔 뒤에 이기고 진 것을 가리기 위하여 집 수를 헤아리는 일.
107수
이를 악물고 밀었다. 위험하지만 이 자리를 상대에게 내줄 수는 없었다. 이곳을 밀어 진다면 그건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비정할 정도로 합리적인 바둑의 세계. 그러나 결정적인 선택은 왜 기세나 직관, 본능이나 운명 같은 비합리적인 것들의 몫일까.
108수
회심의 한 수다. 오전 내내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숨죽이고 있던 네웨이핑이 드디어 반격의 칼을 뽑아 들었다. 108은 A의 연결을 요구한다. 그러나 B로 차단당하면 흑은 양쪽의 미생마를 다 살릴 수 있을까. 조훈현의 머릿속엔 위기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진다.
109수
A로 이어야 마땅하다. 그게 돌의 기세고 제대로 된 스토리다. 그러나 A로 다가서던 손끝의 감각이 이으면 파멸이다라고 속삭인다. 조훈현은 어두운 동굴이 아가리를 벌리고 기다리는 느낌에 식은 땀을 흘린다. 자존심을 접고 타협책을 찾는다. 다행히 109의 임기응변을 발견하고 한숨 돌린다.
아이디어는 사소할수록 빛나며 정통을 건드렸을 때 가치 있다.
110수
단수는 절박하다. 쾌감이며 동시에 고통이다. 단수도 못 보고...라는 푸념에는 세상의 수많은 하수들의 비애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러나 조훈현은 110의 단수에서 오히려 태풍 뒤의 평화를 느낀다. 상대는 좋은 솜씨를 보였다. 흑의 피해는 적지 않을 것이다. 허나 사태는 이미 수습 국면에 접어들었다.
111수
요석이니까 살린다. 111로 빠져나오며 조훈현은 눈앞에 자욱했던 안개가 살며시 걷히는 걸 느낀다. 부자 몸조심의 한수(흑93)가 촉발했던 긴 시련이 끝나가고 있다. 불확실한 미래에 겁먹은 미숙한 강경책, 그로 인해 흘린 피.....그러나 이젠 다 지나간 일이다. 승부는 이제부터다.
112수
흑 두점이 끊겼다. 백의 위협에 강경하게 맞섰던 열혈의 두 수, 그들이 끝내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 사실은 흑이 자진해서 넘겨준 것이다.위기를 인정하고 이들은 내주는 타협안을 제시했고 백이 그걸 받은 것이다. 관전하던 네웨이핑의 부인 쿵상밍 8단의 얼굴이 밝아졌다. 백이 추격에 성공했다는 증거다.
113수
흑이 유리한 바둑이었다. 흑은 초반부터 빠른 걸음으로 백진을 흔들며 실리로 앞서 나갔다. 그러나 지금은 뭐가 뭔지 알 수가 없게 됐다. 짙은 혼돈이 판을 덮고 있다. 113은 선수다 그러나 조훈현의 관심은 다른 데 있다. 전체 형세는 어찌 됐을까. 흑은 8집의 큰 덤을 낼 수 있을까.
114수
흑 두 점이 확실하게 사망했다. 백 집이 늘어나고 있다. 온종일 납 인형처럼 굳어 있던 네웨이핑의 얼굴에도 화색이 돈다. 중국 정부는 네웨이핑에게 기성이란 칭호를 주었다. 세계 유일의 공식 기성이다. 최고 권력자 덩샤오핑이 그에게 준 선물이다. 하지만 너무 무거운 선물이었던가. 오전 내내 고전이었다. 그 선물이 오늘 승부에 부담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다.
115수
두 점은 내 줬지만 한 점을 잡았다. 흡족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최선의 타협이었고 임기응변이었다. 먼지 자욱했던 중앙 전투는 이렇게 끝났다. 조훈현은 눈을 들어 먼 곳을 본다. 대마는 완생인가. 아니다. 고투를 거듭했으나 아직도 미생이다. 상대가 A로 끊어온다면 그곳이 승부를 건 마지막 전쟁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