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그랬지 3 / 김유경
새마을 운동은 잘살기 위한 운동으로 〈새마을 노래와 함께 산업사회와 농경사회가 교각이 두드러짐이 보일때쯤 우리 대 선배님들은 동네 어귀에 4--H 클럽이란 이름을 내걸고 새마을 운동이나 각종 마을 행사에 주체가 되기도 했다.
농가에서는 농토를 많이가진 농가들이 부를 축적하고 농토가 많지 않은 농가는 겨우 식솔들 세 끼 끼니정도나 해결하며 아끼고 아껴서 남는 곡물을 팔아 자녀들 학비나 생필품을 구입 한다. 그러나 농지가 없는 농가들은 남의 집에 품팔이나 산에 나무를 해서 팔거나 바다에 나가 낙지도 잡고 굴도 깨다가 팔아서 생계를 유지 한다.
우리집도 농토가 많지는 않았지만 우리 외할머니 덕에 그렇게 궁핍한 삶은 면했단다. 게다가 구두쇠 작전을 돌입한 아버지 역할도 한몫을 했다. 그땐농가의 상황이 특수 농작물은 없었기 때문에 가을농사나 가둬들여야 곡물을 팔아돈을 쥐어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뉘집이나 자린고비를 해야했다.
특히 우리 아부지는 한번손에 쥐여진 돈은 잘 내놓지 않았다. 모든 가용돈은 아부지가 관리하기 때문에 우리형제는 용돈이 필요하면 능력도 없는 엄마만 졸라된다. 엄마도 돈이 궁색한 것은 매 한가지다. 자식들에게 마음약해진 엄마는 가을철 거둬들인 참깨나 잡곡을 아부지 몰래 뒷 사장에서 점방하는 미숙이네 엄마에게 조금씩 팔아 그돈을 우리에게 몇 원씩 나눠주고 나머지는 군에 간 오빠 용돈으로 부쳤다.
당시 미숙이네 엄마는 내또래 아이들은거의다 잡곡등을 가져와서 돈으로 바꾸거나 먹을거리를 사는데 나는 그런적이 없다고 했다며 엄마는 내게 칭찬을 해주었지만 나는사실 그런데는 별관심이 없었다.
추수철이 지나고 농한기가 되면 엄마도(고) 창심네 엄마따라 가끔바다에 나가 깨어온 굴을 주전자에 담아서 읍동에
하숙집이나 각 점포에 가서 팔아오면 그 돈이 없어 질때까지 우리는 엄마를 졸라댄다. 엄마는 "느그들은 내손에 한푼 이라도 있는꼴을 못보냐“? 하며 다털어낸 헤진 빈주머니를 뒤집혀서 보여준다.
지금의 나보다 훨씬 젊었던 엄마 빛깔고운 옷 한가지 흔한 영양크림 하나 손발이 갈라 졌어도 안티프라민 하나 사바르지 못하며 갈라진 손을 무명실로 꽁꽁 메고 당신은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살았던 내엄마도 나처럼 꿈틀거리는 열정은 있었을 것이다. 알싸하고 아픈 한 줄기 시린 바람이 내가슴 한복판을 스쳐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