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포도주가 되는 신비를 모두가 아는 것이 아니다.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요 2:9) 영문을 모르는 일을 명하셔도 말씀해 오시는 주님을 신뢰함으로 움직이는 자는 안다. 알게 하신다.
20여 년 전 네 명의 친구들과 홍콩을 방문했을 때다. 숙소가 있던 사틴역에 내리자마자 한 유별난 냄새가 바람 결에 풍겨왔다. "앗, 이게 뭐야?!"를 외치며 너 나할 것 없이 그 냄새의 진원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영문을 모르고 따라 달리던 한 친구가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냐? 어디 가느냐? 왜들 그러느냐?" 그 친구 빼놓고는 다 알았다. "미안하지만 왜 달려가는지 모르면 설명해 줘도 몰라."^^
그 냄새의 주인공이 과일의 황제라 일컬어지는 두리안이다.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가 꼭 맛 보였으면 하는 과일이다. 먹을 때마다 감격하고, 취하고, 몽롱하게 한다. 세상 무슨 과일이 이럴까? 과장한다고 말해도 어쩔 수 없다. 세상에 다시 없는 맛, 그야말로 천국의 맛이다. 자제가 안 된다.
이런 얘기를 못 믿을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안다. 맛을 보기 전에는 나도 그랬다. 하지만 사실이다. 미식가여서 그런 것도, 유별난 맛을 즐겨서도 아니다. 다만 맛을 알면 헤어나오지 못한다. 맛을 알수록 말한다. "이건 과일이 아니야. 과일이라면 반칙이야!"
두리안을 앞에 두면 어김없이 두 패로 나뉜다. 냄새가 역하다며 코를 막고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리는 사람과 주변에 누가 있는지 신경 쓰지 않고 묵묵히 그 세계로 곧장 들어가 버린 사람들. 희한한 풍경이 아닌가?
그 맛을 알기 전에는 설명과 설득이 무익하다. 오히려 반감만 일으킬 뿐이다. 그러나 티핑포인트처럼 맛이 알아지는 때가 온다.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 신비다. 대개는 세 차례 정도 간격을 두고 먹은 후다.
두 번의 고비가 있다. 첫번째는 그 맛을 알고 싶지 않게 만드는 역한 냄새다. 두번째는 권유에 의해 한 차례 입에 대어보지만 그야 말로 맹한 맛이다. 키워드는, 세 차례다. 마뜩치 않더라도 혀가 그 맛을 알기까지 세 차례는 시도해야 한다. 인내해야 한다.
술을 밤새도록 마시는 것은 부지런해서가 아니다. 도박이나 마약에 평생을 탐닉하는 것도 성실해서가 아니다. 맛 때문이다. 계속 맛보다 보면 의지로 멈추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중독을 질병으로 간주하는 이유다. 맛을 알면, 명령이어서 하거나 의무감에서 하는 일은 멈춘다. 의지로는 할 수 없는 일을 한다.
한 여자가 있다. "자기의 장사가 잘 되는 줄을 깨닫고 밤에 등불을 끄지 아니하며" 어느 순간에 '된다'는 깨달음이 온 것이다. 히브리어로 '타암'이다. '맛을 보다, 경험하다, 시식하다, 깨닫다'는 뜻이다. 마치 두리안의 경험처럼.
이 순간이 오기까지는 의무나 명령이 필요할 수 있지만, 깨달음이 온 후에는 다르다. 말려도 한다. 밤에도 등불을 끄지 않는다.
성경은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일어나는 일을 열매라고 한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혹자는 이 열매를 맺기 위해 우리가 힘써야 한다고 말한다.하지만 열매는 사람의 의지적인 노력이나 착함을 넘어선 일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일단 사랑을 맛 본 이들을 막을 것이 없다. 죽음도 못한다. 죽음도 어쩌지 못하는 맛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고,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안의 맛이 그렇다.
하나님은 자녀들이 다른 맛도 보길 원하신다. 오래 참음의 맛도, 자비와 양선의 맛도, 충성과 온유와 절제가 가진 독특한 맛도 알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설득해 오신다. 맛보기까지 포기하지 말라고, 나를 믿고 한 번 시도해보라고 권하신다. 일어나면 먼저 엎드리고, 스마트폰이 아니라 성경부터 펴라 하시는 이유다.
누군가는 고개를 돌리고 말지라도 맛을 본 사람은 멈추지 못한다. 하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붙잡는다. 누군가가 해마다 황금 같은 추석 명절에 의료 봉사를 떠나는 이유다. 보이신 일을 특별한 초청으로 아는 이유다.
종들이 움직이기 전에는 그냥 물이다. 명하신 일을 위해 움직이는 순간 그 물은 포도주가 된다. 되게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