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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5년 7월 23일 수요일
[(녹) 연중 제16주간 수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백] 성녀 비르지타 수도자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자손들이 불평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고기와 양식을 내려 주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귀 있는 사람은 들으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내가 하늘에서 너희에게 양식을 비처럼 내려 주리라.>
▥ 탈출기의 말씀입니다. 16,1-5.9-15
1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는 엘림을 떠나,
엘림과 시나이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렀다.
그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뒤, 둘째 달 보름이 되는 날이었다.
2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가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하였다.
3 이들에게 이스라엘 자손들이 말하였다.
“아, 우리가 고기 냄비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 그때,
이집트 땅에서 주님의 손에 죽었더라면!
그런데 당신들은 이 무리를 모조리 굶겨 죽이려고,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왔소?”
4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내가 하늘에서 너희에게 양식을 비처럼 내려 줄 터이니,
백성은 날마다 나가서 그날 먹을 만큼 모아들이게 하여라.
이렇게 하여 나는 이 백성이
나의 지시를 따르는지 따르지 않는지 시험해 보겠다.
5 엿샛날에는, 그날 거두어들인 것으로 음식을 장만해 보면,
날마다 모아들이던 것의 갑절이 될 것이다.”
9 모세가 아론에게 말하였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에게,
‘주님께서 너희의 불평을 들으셨으니,
그분 앞으로 가까이 오너라.’ 하고 말하십시오.”
10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에게 말하고 있을 때,
그들이 광야 쪽을 바라보니, 주님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났다.
11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이르셨다.
12 “나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불평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에게 이렇게 일러라.
‘너희가 저녁 어스름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양식을 배불리 먹을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내가 주 너희 하느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13 그날 저녁에 메추라기 떼가 날아와 진영을 덮었다.
그리고 아침에는 진영 둘레에 이슬이 내렸다.
14 이슬이 걷힌 뒤에 보니, 잘기가 땅에 내린 서리처럼
잔 알갱이들이 광야 위에 깔려 있는 것이었다.
15 이것을 보고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이게 무엇이냐?” 하고 서로 물었다.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주님께서 너희에게 먹으라고 주신 양식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열매는 백 배가 되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1-9
1 그날 예수님께서는 집에서 나와 호숫가에 앉으셨다.
2 그러자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물가에 그대로 서 있었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4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5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6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7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8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9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가르침의 여러 형태 가운데에서 비유를 선호하셨습니다.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약 3분의 1 정도입니다. 비유는 일상생활에서 흔히 경험하는 간결하고 생생한 이야기로 꾸며집니다. 씨 뿌리는 이야기, 물고기를 잡아서 고르는 어부 이야기, 포도원의 일꾼들 이야기, 진주 상인 이야기, 잃어버린 양 이야기, 누룩 이야기 등 갈릴래아의 민중들이 쉽게 만날 수 있는 소재를 활용하시어 하느님 나라라는 새로운 세상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 비유의 소재들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농부, 어부, 일용직 노동자, 상인, 목자, 심지어 당대 가르침에서 소외된 여자들도 당신 말씀의 대상으로 삼으셨습니다. 친밀한 소재이기에 청중들을 생생하게 끌어들였습니다. 배우지 못한 사람들도 소외감이나 열등감 없이 하느님과 그분 나라의 현실을 알아들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비유가 보여 주는 현실을 추구하며, 그것을 향하여 나아갈 결심을 하도록 이끄셨습니다. 본질적으로 비유는 듣는 사람의 반감을 극복하고자 사용되었던 문답식 형태였기에,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 율법 학자들, 사제들 같은 당신의 반대자들에게서도 공감을 끌어내고자 비유를 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방어하는 데 급급하시지 않고, 직선적이지 않게, 마음에 호소하는 방법으로 하느님의 존재 양식과 행동 양식을 알려 주시고 그들이 스스로 반성하고 판단하여(마태 18,12; 21,28 참조) 결론을 끌어낼 수 있게 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사려 깊게 사람을 이끄는 방법을 알고 계시면서 그 누구도 복음의 대상에서 제외하시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의 씨 뿌리는 이처럼 모든 마음에 복음의 씨를 뿌리십니다.(김태훈 리푸죠 신부)
완고함과 불신의 잡초는 모두 모아 불에 태워버립시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런 작물 저런 작물 많이 심어 보았지만, 심는 족족 실패를 많이 하다 보니, 너무나 한심해 보였던 이웃들이 하시는 말씀, “쌩고생 하지 마시고 그냥 마트 가셔서 사드세요!”
풍성한 결실을 거두는 성공적인 농사를 위해서는 몇 가지 갖추어야 할 필수조건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적절한 날씨입니다. 햇볕이 필요할 때 해가 쨍쨍 떠줘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적정한 강수량이 중요합니다.
지혜로운 농부들께서는 일기 예보에 촉각을 곤두세웁니다. 비 오기 직전 파종을 하던지, 모종을 심습니다. 따로 물을 주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편리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농부들은 봄비가 올 때 너무 기쁜 나머지 우산도 쓰지 않고 다니십니다. 봄에 비가 오면 비가 온다고 하지 않고 비님이 오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요소는 꾸준한 잡초와의 전쟁입니다. 잠깐 신경 안 쓰면 밭은 온통 잡초가 점령합니다. 그리고 다른 무엇에 앞서 중요한 것은 바로 ‘좋은 토양’, ‘좋은 땅’입니다. 아무런 영양가 없는 황무지에, 또는 자갈밭에 씨를 뿌리면 몇 년을 기다려도 싹이 올라오지 않을 것입니다.
부지런한 농부는 늦가을부터 넉넉히 다음 해 봄에 쓸 양질의 퇴비를 준비합니다. 이른 봄 그 퇴비를 밭 여기저기에 골고루 던지고 땅을 갈아엎습니다.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기름진 토양을 만들어야 수확도 많고 병충해에도 강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역시 신앙 안에서 풍성한 결실을 맺고 싶다면 각자에게 주어진 신앙의 밭을 최상의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신앙의 덕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고, 인간적 성숙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고, 균형 잡힌 신앙을 지니도록 할 것이며, 자신의 한계나 약점을 점진적으로 강점, 경쟁력으로 탈바꿈시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보다 앞서 훌륭한 삶을 살다 가신 성인들, 그들이라고 태어날 때부터 좋은 밭, 기름진 밭의 소유자가 아니었습니다. 황무지, 불모지, 모래사막 같은 땅의 소유자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꾸준하고 점진적인 노력, 불굴의 노력 끝에 세상 모든 것을 다 포용할 수 있는 탁월한 성품의 소유자가 된 것입니다.
온유와 애덕의 박사라고 불리는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님 역시 자신의 신앙 여정 안에 엄청난 점진적 성장이 있었습니다. 제2의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로 불릴 만큼 부드럽고 따스한 성품의 소유자 돈보스코는 어린 시절 정말이지 까칠하고 과격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마치 전쟁을 치르듯이 자신의 약점과 한계에 맞서 싸워나갔습니다. 많은 결실을 바란다면 방법은 단 한 가지 매일 마음의 밭을 가는 것입니다. 매일 솟아오르는 이기심을 뿌리 뽑아야 합니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교만한 마음을 갈아엎어야 합니다. 죽어도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멀리 내다 버려야 합니다. 완고함과 불신의 잡초는 모두 모아 불에 태워버려야 합니다.
그런 노력의 결과로 우리 각자에게는 양질의 밭이 선물로 주어질 것입니다. 아주 좋은 밭의 소유자가 된 우리는 강한가 하면 부드럽고, 당당한가 하면 겸손하며, 하느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의 소유자가 되어 최상의 토양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백배의 결실을 맺은 우리는 하느님께는 영광이 되고 이웃들에게는 기쁨이 되는 값진 선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사랑을 증가시키는 유일한 법.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세종대왕은 신하들에게 “백성을 위해 우리의 소리를 담는 새로운 글자를 만들라.”라고 명했습니다. 당시 사대부와 학자들에게 중화(中華)의 한자를 버리고 ‘언문(諺文)’을 만드는 것은 문명에 역행하는 어리석고 기이한 일이었습니다. 최만리 등 수많은 학자들이 격렬하게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성삼문, 신숙주 등 스승인 세종의 뜻을 믿고 따른 젊은 학자들의 순종과 헌신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순종은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인 ‘한글’을 창제하는 위업으로 이어져, 오늘날까지 모든 백성에게 지식과 문화의 혜택을 누리게 하고 있습니다. 세종대왕이 만든 백성의 이익을 위한 수많은 발명품이 그랬습니다. 세종대왕의 말씀을 자신들 안에서 열매 맺게 하는 이들에 의해 생겨난 것입니다. 그들은 세종대왕을 사랑하여 그의 말씀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 한 것뿐인데 이웃 사랑의 열매까지 맺게 된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사랑하면 그 사람의 말을 존중하고, 그 말이 결국 옳았음을 내 삶으로 증명해 보이고 싶어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그리고 사람이 되신 말씀이신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습니까?
오늘 복음의 씨 뿌리는 사람 비유에서 ‘좋은 땅’은 무엇일까요? 단순히 상태가 좋은 땅이 아닙니다. 씨앗을 심어준 주인을 사랑하기에, 어떻게든 열매를 맺어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의지’를 가진 땅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너의 후손이 저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창세 15,5) 하신 하느님의 말씀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말씀하신 분을 믿고 사랑했기에, 그 말씀을 붙들고 고향을 떠났고, 그의 사랑 가득한 순명이 결국 하느님의 말씀을 위대한 진리로 열매 맺게 했습니다.
저 역시 한 말씀을 붙들고 거의 30년 가까이 씨름하며 열매 맺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신학교 시절, 주님과 거래하려 했던 저에게 주님께서는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씨앗을 심어주셨습니다. 그분을 향한 사랑이 제 안에서 싹트자, ‘이 말씀이 내 삶에서 얼마나 위대한 진리인지를 증명하여 주님을 영광스럽게 해 드리리라’는 거룩한 의지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의지는 제 삶에서 구체적인 깨달음의 열매들을 맺게 했습니다.
첫째, 내 불행의 근원이 뱀과 같은 ‘자아’와 거기서 비롯된 삼구(교만, 육욕, 소유욕)임을 깨달았습니다.
둘째, 그런 자아 때문에 내가 하느님을 내 목적을 위한 ‘소’처럼 부리고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셋째,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어야 하듯, 내가 할 유일한 일은 예수님께 붙어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넷째, 주님이 모든 것을 주셨기에 나에게는 불가능이 없으며, 원수까지 사랑하고 위대한 신학자가 되겠다는 거룩한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다섯째, 사람을 변화시키려면 성체의 ‘은총’과 말씀의 ‘진리’가 함께 가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여섯째, 은총으로 얻는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과 진리로 얻는 ‘이웃에게 꽃을 심는 마음’으로 살아야 다른 이에게 열매를 맺어줄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 모든 열매는 그저 열린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기에 그분의 말씀을 헛되이 만들고 싶지 않다는 저의 작은 의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네가 가진 것의 십분의 일을 봉헌하여라.”(신명 14,22 참조) 혹은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4) 하신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이건 현실적으로 어려워’ 하며 길바닥에 버려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내가 사랑하는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니, 내 삶으로 기어코 이 말씀이 옳았음을 증명해 보이리라’는 의지로 그 말씀을 붙들고 씨름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하는지가 바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지 아닌지를 판가름하는 가장 명확한 증거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말씀을 살아내려는 의지적인 노력으로 표현됩니다. 오늘, 우리 마음 밭에 뿌려진 말씀을 사랑으로 받아, 반드시 열매 맺어 보이겠다는 결심으로 하느님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해 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부주임 신부님의 축일을 축하하면서 신부님과 저의 세례명을 성서적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신부님의 세례명은 ‘세례자 요한’, 저의 세례명은 ‘가브리엘’입니다. 흥미롭게도 이 두 이름은 성경에서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의 천사 가브리엘이 늙은 즈카리야에게 나타나, 아내 엘리사벳이 아이를 잉태할 것임을 예고합니다. 그 아이가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천사의 말씀이 없었다면 잉태도 없었고, 이름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부주임 신부님과 저의 관계는 성서적으로도, 사목적으로도 참 특별하고 감사한 인연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는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다고 하셨습니다. 도박에 쓰는 돈은 어쩌면 길가에 떨어진 씨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돌밭에 떨어진 씨는 싹은 트지만 해가 나면 말라버린다고 하셨습니다. 위험 부담이 큰 투기가 돌밭에 떨어진 씨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는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버렸다고 하셨습니다. 돈 때문에 친한 친구가 갈라지기도 하고, 돈 때문에 형제간이 다투기도 하는 경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차라리 돈이 없었으면 다툴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열매를 맺는데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가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사용되는 돈이 좋은 땅에 떨어진 씨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돈은 열매를 맺어서 하늘에 쌓는 보화가 될 것입니다.
신앙 안에서 생각합니다. 좋은 씨앗은 비록 땅이 거친 황무지라도 꽃을 피우는 것을 봅니다. 나쁜 씨앗은 좋은 땅에 떨어졌어도 싹이 트지 않는 것도 봅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도 거친 땅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며 기도하셨습니다.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는데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좋은 땅으로만 가서 선교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땅끝까지 복음의 씨앗을 뿌리라고 하셨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대부분은 거친 땅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습니다. 제자들에게도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전대에 돈을 지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겉옷도 가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지팡이만 가지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입을지, 무엇을 마실지 알려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무슨 말을 할지도 알려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은 좋은 땅을 찾습니다. 그런 곳을 블루오션(Blue Ocean)이라고 합니다. 좋은 땅에서 생산성을 높이고, 좋은 땅에서 많은 이익을 창출하는 것을 축복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척박한 땅이라도 그곳을 옥토로 만들어야 합니다. 시련과 박해와 죽음이 있을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결실을 보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모습을 예수님에게서 보았습니다. 성인들에게서 보았습니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좋은 땅이라면 감사하면서 좋은 열매를 맺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이 가시밭길이라면 그곳을 옥토로 만들도록 용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좋은 땅은 선택이지만 열매를 맺는 것은 우리의 사명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같은 씨앗인데도 어디에 떨어지느냐에 따라 운명이 달라집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는 새들의 먹이가 되고, 돌밭에 떨어진 씨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시들어버리며,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는 숨이 막혀 자라지 못합니다.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결실을 본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구유에서 태어나셨고, 광야에서 단식하셨으며, 머리 둘 곳 없이 사셨습니다. 복음은 ‘좋은 환경’에서만 피어나지 않습니다. 때로는 박해받는 땅, 눈물의 땅, 침묵의 땅에서 더욱 진하게 피어납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씨앗은 거친 땅이라도 꽃을 피운다. 그러나 나쁜 씨앗은 아무리 좋은 땅이어도 열매를 맺지 못한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어진 환경보다 중요한 것은 내 안의 씨앗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 희망, 사랑, 용기라는 씨앗이 내 안에 있을 때, 나는 가시밭도 옥토로 만들 수 있습니다. 시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느님께서 하늘의 문을 여시고, 만나를 비처럼 내리셨다.” 광야에서조차 하늘에서 내리는 양식이 있었습니다. 세상의 논리는 생산성과 이익을 따지지만, 하느님의 논리는 믿음과 충실함을 따집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지금 어디에 있든, 그곳을 좋은 땅으로 만들어라. 그것이 너희의 사명이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좋은 땅이라면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그 땅에서 열매 맺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내가 있는 곳이 가시덤불이요 돌밭이라면, 그것을 옥토로 만들 수 있는 신앙의 용기를 청해야 합니다. 좋은 땅은 선택이지만, 열매 맺는 삶은 우리의 책임이자 사명입니다. 우리가 뿌리는 사랑의 씨앗, 나눔의 씨앗, 용서의 씨앗이 언젠가 누군가의 삶에서 백 배의 열매로 맺히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성인
성녀 비르지타(Birgitta)
신분 : 과부, 설립자
활동지역 : 스웨덴(Sweden)
활동연도 : 1303-1373년
같은이름 : 브리지따, 브리지타, 브리짓다, 비르지따, 비르짓다, 비리시다
1303년 스웨덴 우플란드(Uppland)의 총독이며 부유한 지주인 비르거(Birger)와 그의 두 번째 부인인 인게보르크(Ingeborg) 사이에서 태어난 성녀 비르지타는 12살 되던 해 어머니가 사망하였는데, 그때부터 계시를 체험하였다고 한다. 그녀는 불과 14살의 어린 나이로 훗날 네레시아 지방의 총독이 된 18세의 귀족 울프 구드마르손(Ulf Gudmarsson)과 결혼하여 8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이들 중의 하나가 스웨덴의 성녀 카타리나(Catharina)이다.
1335년 그녀는 스웨덴의 왕 마뉴스 2세와 막 결혼한 왕비 나무르의 불랑쉬(Blanche)의 시녀가 되었다. 비르지타의 큰딸이 결혼에 실패하고 또 그녀의 막내아들 구드마르(Gudmar)가 1340년에 죽게 되자, 그녀는 노르웨이 트론디엠의 성 올리프 경당으로 순례여행을 떠났다. 돌아오는 길에 궁중을 떠나기로 결심한 그녀는 남편과 함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로 재차 순례의 길에 올랐다. 그러나 아라스에서 병을 얻었고, 이때 그녀는 성 디오니시우스(Dionysius)의 환시를 보았다.
1344년에 남편이 사망하자 그녀는 알바스트라의 시토회 수도원에서 극도로 엄격한 생활을 하면서 4년을 지냈다. 이때에도 그녀는 수많은 환시와 계시를 받았고, 고해신부는 그녀의 모든 환시가 올바르다고 보증해 주었다. 이러한 계시에 따라 그녀는 1346년에 바드스테나(Vadstena)에 '지극히 거룩한 구세주 수도회'를 세웠고, 마뉴스 왕도 여기에 거처하였다. 이것이 '삼위일체회'(비르지타회)의 시작이다. 바드스테나는 15세기 스웨덴의 지적인 중심지가 되었다.
그녀는 라트비아(Latvia)와 에스토니아(Estonia)의 이교도들에 대항하기 위해 십자군을 결성하려는 국왕 마뉴스의 지원을 거부하였다. 그녀는 당시 아비뇽(Avignon)에 유배 중이던 교황 클레멘스 6세(Clemens VI)에게 글을 보내어 자신의 환시 내용을 밝히기도 하였다. 그 주요 내용은 교황은 안전하게 로마(Roma)로 돌아올 것이며, 영국과 프랑스의 평화에 교황이 중재자가 되리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많은 시간을 로마에서 지내면서 매우 엄격한 생활과 빈민구제에 온 정열을 쏟았으며, 당시의 심각한 교회와 정치사이의 제 문제에 대하여 기탄없는 충고를 하였다. 그리하여 그녀 자신의 엄격한 생활과 성덕, 가난한 사람들과 순례자들에 대한 관심 및 교황의 로마 귀환에 대한 노력 등이 로마 전체를 들뜨게 만들었다. 그녀는 로마 주변의 수도원을 개혁하였고, 그녀의 예언과 고위직책에 대한 탄핵은 유명하였다. 그녀는 교황이 로마로 돌아오는 문제를 위하여 계속 노력하였으나, 우르바누스(Urbanus) 교황만이 잠시 귀향하였고 그의 후임자인 그레고리우스 11세(Gregorius XI)는 여전히 아비뇽에 있었다.
그녀의 구술로 적은 “계시”라는 책에는 주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미래의 사건들에 대한 내용으로 당대에 강한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특히 그녀의 시성과 콘스탄츠(Konstanz) 공의회에서 그러하였다. 어떤 신학자들은 그녀가 정통 교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고 역설한 반면, 또 다른 학자들은 그의 체험들은 모두가 진실하며 교리와도 부합된다고 갑론을박하였다. 그녀의 사후 트렌토(Trento) 공의회는 그녀의 “계시”를 세심히 검토하도록 하였는데, 결국 신자들이 읽어도 좋다는 판정을 내렸다. 그녀는 스웨덴의 수호성녀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성 리보리오 (Liborius)
활동년도 : +390년경
신분 : 주교
지역 : 르망(Le Mens)
같은 이름 : 리보리우스
성 리보리우스(또는 리보리오)는 프랑스 르망의 두 번째 또는 세 번째 주교였다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투르(Tours)의 성 마르티누스(Martinus, 11월 11일)가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고, 836년에 그의 유해가 독일 북서부 파더보른(Paderborn)으로 이장되어 그곳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교회미술에서 성 리보리우스는 한 마리의 공작과 함께 있는 주교 또는 책 위에 작은 돌을 얹어 옮기는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성 아폴리나리스(Apollinaris)
활동년도 : +79년?
신분 : 베드로의 제자, 순교자, 주교
지역 : 라벤나(Ravenna)
같은 이름 : 아뽈리나리스
성 아폴리나리스의 이름은 라벤나 도시 근교에 있는 산 아폴리나리스 인 클라세(San Apollinaris in Classe) 대성전의 묘비명 때문에 잘 알려져 있는데, 그에 따르면 그는 초대교회의 순교자 중 한 사람이었던 같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안티오키아(Antiochia)에서 태어난 사도 베드로(Petrus)의 제자로서 이탈리아 라벤나의 초대주교였고, 또 그 지방의 첫 번째 순교자로서 높은 공경을 받아왔다. 그러나 그에 대한 자료들이 남아 있지 않다. 심지어는 그의 순교 사실조차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성 요한 카시아노(John Cassian)
활동년도 : 360-433년
신분 : 은수자, 수도원장
지역 : 마르세유(Marseille)
같은 이름 : 가시아노, 가시아누스, 요안네스, 요한네스,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카시아노, 카시아누스, 카시안
성 요한 카시아누스(Joannes Cassianus, 또는 요한 카시아노)는 쉬시아의 어느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380년경에 친구인 게르마누스(Germanus)와 함께 팔레스티나(Palestina)로 갔다. 그들은 베들레헴에서 은수자가 된 후 이집트로 가서 아르케비우스(Archebius)의 지도를 받으며 한동안 은수생활을 하였다. 400년경 그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Joannes Chrysostomus)의 제자가 되어 그로부터 부제로 서품을 받았다. 그 후 그는 마르세유로 가서 일생을 지냈다. 그는 두 개의 수도원을 세웠는데 이 수도원은 프랑스 지방에 이집트 수덕생활의 정신과 영성을 전달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그는 자기 수도자를 교육시킬 목적으로 "수도생활 강의"와 "이집트 수도자에 관한 강의"라는 두 권의 책을 남겼는데, 이 책들이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그를 통하여 서방 교회에서 수도생활이 활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그는 네스토리우스(Nestorius) 이단을 반대하는 "주님의 강생"에 대한 글을 썼는데, 이것은 후일에 교황 대 레오 1세(Leo I the Great)가 된 분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마르세유에서 서거하였지만 어떤 분들은 그를 동방 교회의 성인으로 간주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