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7월 3일,
부천경찰서 성고문사건
1987년 6·10 항쟁은 전두환 5공 체제를 무너뜨린 시민운동이었다. 독재정권에 대한 시민들의 저항은
끝내 6·29선언을 이끌어냈으며, 이를 통해 대통령 직선제의 민주헌법이 마련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6·10 항쟁의 기폭제 역할은 이한열 사망 사건(6월 9일에 체류탄에 맞아 의식을 잃고 결국 7월 5일에 사망한
사건)이지만, 그 기저에는 1985년 9월 김근태 고문사건, 1987년 1월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과 이 두
사건의 중간시점인 1986년 6월에 일어난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이 있었다.
1985년 서울대학교 의류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이던 권인숙(權仁淑)은 당시 노동현장에 참여하였던 대학생
들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휴학을 하고 허명숙이라는 가명으로 학력을 낮춰 경기도 부천시에 있던 가스
배출기 제조업체에 위장취업을 하였다. 이듬해 6월 4일 권인숙은 주민등록증을 위조한 공문서변조
혐의로 부천경찰서로 연행된 뒤 지하 조사실에서 문귀동(文貴童) 경장으로부터 조사를 받았다. 6월 6일과
7일 이틀에 걸쳐 문귀동은 위장취업과 무관한 이른바 5·3인천사태의 관련자 행방을 캐물으면서 반말과
욕설은 물론 뒤로 수갑이 채워져 저항할 수 없는 상태의 여성을 자신의 성기로 추행하면서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고문을 자행했다.
수치심에 괴로워하던 피해자는 결국 다른 여성들이 추악한 공권력에 의해 희생당하는 것을 막고자
조영래, 홍성우, 이상수 변호사 등의 도움을 얻어 1986년 7월 3일에 문귀동을 강제추행 혐의로
인천지검에 고소하며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그러나 공안 당국에 의해 같은 날 권인숙은 공문서변조 및 동행사, 사문서변조 및 동행사, 절도, 문서파손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되었으며, 다음날 문귀동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자신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겠느냐며 명예훼손 혐의로 권인숙을 인천지검에 맞고소했다. 이에 7월 5일에 권인숙의 변호인단
9명은 문귀동과 옥봉환 부천경찰서장 등 관련 경찰관 6명을 독직, 폭행 및 가혹행위 혐의로 고발했고,
문귀동은 권인숙을 무고혐의로 맞고소했다. 그런 와중에 변호인의 입을 통해 이 성고문 사건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담당변호사 조영래씨와 피해자 권인숙씨.
공안 당국은 1986년 7월 17일에 수사 결과를 발표하며 권인숙을 “급진 좌파 사상에 물들고 성적도
불량한 가출자일 뿐”이라고 매도하였고, 언론은 “정부의 입장을 곤란하게 하기 위해서 성적
수치심까지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라고 여론을 호도하려 했다. 또한 수사 결과가 발표되던 날,
문화공보부는 부천서 성고문 사건을 어떻게 취재해야 하는지 각 언론기관에 보도 지침을 하달하기도
하여, 전두환 군사 독재 정권이 언론을 어떻게 통제하였는지 보여주었다.
보도 지침의 구체적 내용은 1986년 9월 6일에 시사 월간지 《월간 말》 특집호 〈보도지침―권력과
언론의 음모〉를 통해서 세상에 알려졌으며, 정부는 이를 폭로한 김태홍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사무국장,
신홍범 실행위원, 김주언 한국일보 기자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했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순간
수사결과 발표 및 언론의 호도는 많은 여성들과 민권단체들의 분노를 야기하였고, 변호인단은 “권양의
모든 주장은 단 한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다. 이 전대미문의 만행의 진상이 백일하에 공개되고 그 관련자
들이 남김없이 의법 처단되기 전까지는 이 나라의 모든 국민과 산천초목까지도 결코 잠잠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비장하게 선언했다.
한편 야당과 재야가 연대해 결성한 ‘고문 및 용공조작 공동대책위원회’는 토요일인 7월19일 오후
2시 명동성당에서 ‘고문·성고문·용공조작 범국민폭로대회’를 개최했다. 명동은 경찰과 집회 참가자들
사이의 격렬한 몸싸움과 자욱한 최루탄 연기에 휩싸였다.
‘고문·성고문·용공조작 범국민폭로대회’를 원천봉쇄한 전두환 정부
명동성당에서 ‘고문·성고문·용공조작 범국민폭로대회’에 참가한 시민들
명동에서 부천 성고문 관련 시위를 하다 전경들에게 강제로 끌려가는 시민의 모습
문귀동의 성기를 잘라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 시민. 문귀동은 자신이 독실한
기독교인이라고 항변했다.
이후 검찰은 문귀동에 대하여 불기소 결정을 내렸고, 이에 8월25일 대한변협은 문귀동에 대한 검찰의
불기소 결정에 대해 변호사 166명으로 재정신청 대리인단을 구성하고 법원에 재정신청을 낸다. 이 재정
신청을 심리한 서울고법은 10월31일 ‘이유없다’며 기각했다. 기각 결정문은 스스로 모순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고발장의 범죄내용 대부분을 인정했지만, ‘문귀동이 손으로 그녀의 음부를 만지고 자신의 성기를
꺼내 그녀의 음부에 대어 수회 비비는 등 추행하였다’라는 권인숙의 진술은 목격한 증인이 없으므로 인정할
수 없고, 따라서 문귀동에 대한 검찰의 기소유예는 정당하다는 것이었다.
조영래 등은 재정신청 사건과는 별개로 9월1일 권인숙의 변호를 위해 199명의 변호인단을 구성하고
법정에서 진실을 가릴 준비에 임한다. 1986년 11월21일 인천지법 법정에서 변호사 조영래는 떨리는
목소리로 변론 요지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르기를 삼가지 않으면 안되게 된 이 사람, 온 국민이 그 이름은 모르는 채 성만으로
알고 있는 이름 없는 유명 인사, 이 처녀는 누구인가? 그녀는 무엇을 하였는가? 그 때문에 어떤 일을
당하였으며 지금까지 당하고 있는가? 국가가, 사회가, 우리들이 그녀에게 무엇을 하였으며 지금도 하고
있는가.”
이른바 권인숙 사건의 변호인단 199명을 대표해 며칠간 밤을 새워 쓴 글이었다. 흰 한복 수의를 입은
피고인석의 권인숙도, 변호인석의 변호인들도, 방청석의 민가협 어머니들도 모두 함께 울었다. 그날
검찰은 그녀에게 징역 3년을 구형했다.
조영래 변호사 (1947-1990), 1965년 서울대학교 전체수석으로 법과대학에 입학 하였으며, 재학 중
김근태, 손학규와 함께 한일회담 반대, 3선 개헌 반대 등 학생운동을 이끌어 나갔다. 1971년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사법연수원 시절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으로 구속되어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수감생활 중에 꽁치 세 마리 훔치는 사소한 잘못으로 징역을 받은
사람들을 보면서, 조영래는 사회의 부당함을 깨닫는다. 평생을 인권변호사로 활동한 그는 1990년
12월 12일 44세의 나이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12월1일 인천지법은 권인숙에게 징역 1년6개월을 선고한다. 이날 선고가 끝나자 부천경찰서 성고문공동
대책위는 “싸움은 이제부터다. 성을 도구화한 자들은 운동권이 아니라 군사독재와 그 하수인임이
드러났다”며 방청객과 함께 어용 재판부를 향해 격렬하게 항의했다.
1987년 2월 항소심 법정에서 분노는 폭발했다. 민가협 회원 이중주(민정당사 점거 사건로 구속된
서울대생 이기정의 어머니)는 재판장이 권인숙의 진술을 도중에 막는 것을 보고 격분, “성고문 범죄자를
비호하고 피해자를 재판하는 게 사법부냐”고 고성으로 항의했다. 법원 정리에게 끌려나가던 중 그녀는
교도관의 모자를 벗겨 재판부를 향해 던지며 외쳤다. “이 더러운 군사독재의 시녀들아.” 이틀 후
그녀는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됐다. 신성한 법정을 모독한 죄였다.
그러다가 1987년 6월 민주항쟁이 일어났고, 권인숙은 그 직후인 7월 8일에 가석방되었으며, 1988년 2월
9일 대법원에서 재정신청을 받아들였다.
“이 재판은 거꾸로 된 재판입니다. 여기에 묶여서 재판 받아야 할 이는 이 연약하고 순결 무구한 처녀가
아니라 인간의 탈을 쓰고 차마 저지를 수 없는 만행을 저지른, 법질서와 인권과 인륜도덕을 그
근본에까지 남김없이 유린하고 우리로 하여금 인간성에 대한 마지막 신뢰까지 지닐 수 없게 만든 극악
극흉한 문귀동 그 사람입니다. 권양은 우리에게 ‘진실에의 비밀은 용기뿐’이라는 교훈을 온몸으로
가르쳐 주었습니다.”(변론 요지서)
이후 재수사를 통해 문귀동은 1989년 6월, 사건 발생 3년 만에 징역 5년의 중형을 선고 받았다.
법의 심판을 받는 문귀동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을 폭로했던 권인숙은 1994년에 뒤늦게 대학을 졸업하고 서른 살의 나이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유학간 지 6년 만인 2000년 미 클라크대에서 ‘한국의 군사화된 여성
의식과 문화’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런 뒤 사우스플로리다 주립대에서 재직하다 2003년
귀국길에 올라 명지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교수가 되어 돌아온 권인숙